“너무 많은 것을 하려 하면 또 실패한다”
“너무 많은 것을 하려 하면 또 실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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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만간 국세청 사람들은 ‘참 아픈 책’ 한 권을 만나게 된다. 개방직 공무원으로 국세청에서 5년간 과장으로 일했던 한 조세전문 변호사가 외부인 입장에서 바라본 국세청의 내부 모습을 담은 책을 출간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가제는 『국세청에서의 5년』이다. “국세청이 진정 납세자를 위하는 조직으로 탈바꿈하는 데 도움이 되기 위해”라는 것이 그가 밝힌 저술 목적이다. 서문을 보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알 수 있다. 일부를 옮긴다.
‘국세청장이 매번 바뀔 때마다 국세청을 개혁한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몇 가지 의문이 든다. 왜 국세청장은 자기가 20~30년 몸담은 조직을 개혁하려고 할까?
개혁하려면 진작 하지 왜 청장이 되어서만 할까? 국세청장이 개혁하자고 하면 조직이 맘먹은 대로 개혁이 되는 걸까? 과연 청장의 의도대로 조직의 모세혈관까지 개혁 마인드가 전파될 수 있을까?
매번 그것이 안 됐기 때문에 개혁한다고 하는 것은 아닐까? 청장은 잠깐 스쳐가는 존재고, 직원들은 오래 있을 사람인데 과연 직원들 모두가 진정으로 따라줄까? 시간만 버티면 되는 것 아닌가?
짧은 재임 기간 안에 과연 묵은 때를 벗길 수 있을까? 묵은 때가 사람인지 조직인지 구별도 모호하다. 개혁한다고 하며 본청만 호들갑을 떨었던 것이 아닌지? 쇼로 끝난 게 아닌지? …’. 이것이 바로 국세청 개혁의 난맥상이다. 국세청발 사건이 터질 때마다, 어김없이 등장한 단어가 개혁이었다.
역대 많은 국세청장이 국세청의 개혁을 외쳤다. 문제가 있음을 자인해 왔던 것이다. 무엇이 변해야 했다는 것일까? 아이로니컬하게도 두 전직 국세청장의 취임사에 대략 답이 나와 있다. 따뜻한 세정을 내세웠던 전군표 전 청장. 그는 2006년 7월 취임 당시 이런 얘기를 했다.
“기계적이고 냉혹한 세법 집행으로 세금을 걷기만 하고, 부조리로부터는 자유롭지 못하며, 정치적 중립마저 의심받던 과거의 권력기관에서 과감히 탈피해 국가의 주인인 국민과 납세자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이뤄냈나? 이 물음에 동의할 국민은 많지 않을 것 같다. 투명성과 청렴성을 강조했던 그는 알선수재와 수뢰 혐의로 구속됐다.
“9급이나 8급에서 출발하더라도 최고 위치까지 오를 수 있는 길을 반드시 열어 가겠다”고 했지만, 현재 본청과 지방국세청 국장급 이상 31명 중 9급 공채 출신은 3명뿐이다.
“스쳐 지나가는 바람일 뿐”
“조직 내 개방적 의사소통을 중시해 일선 직원의 목소리가 청장에게까지 진솔하게 전달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취임 일성은 이제 와서 비웃음거리가 됐다. 최근 한상률 전 국세청장을 비난하는 글을 내부 인터넷 게시판에 올렸던 지방세무서 조사관은 파면됐다. 취임사에서 안데스 산맥에 사는 독수리를 언급하며 환골탈태와 높은 수준의 윤리의식을 강조했던 한상률 전 청장은 그림 로비 의혹으로 불명예 퇴진했다.
1998년 이후 4명의 청장이 구속되고 2명은 불명예 퇴진했다. 이것이 국세청 최고위직의 윤리의식 수준이다. 국세청은 그동안 과연 스스로 개혁할 의지가 있는지를 의심케 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대표적인 것이 ‘국세행정 실명제’다. 2004년 이용섭 청장(현 민주당 의원)은 과세행위 전반에 국세행정 실명제를 도입해 모든 과세행위에 담당자의 실명을 기록하고 누적 관리하겠다고 선언했다.
부실과세의 원인과 책임을 따져 인센티브 또는 페널티를 부여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제도는 슬그머니 사라졌다. 전직 국세청 간부는 “폐지된 국세행정 실명제는 국세청의 아킬레스건”이라며 “국세청 내부에서 누구도 이 제도가 부활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지역세력과의 유착을 막기 위해 지방청장·세무서장 자리에 그 고장 사람을 피하겠다며 2007년 도입한 ‘향피(鄕避)제도’는 유명무실해졌다. 지난해 말 임명된 김광 광주지방국세청장, 김덕중 대전지방국세청장은 각각 전남 영암과 대전 출신이다. 이뿐만 아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 국세청은 개혁과제를 발굴하겠다며 외부전문가를 모아 국세개혁행정위원회를 만든 후 지난해 4월 첫 회의가 있었다.
그림 로비 의혹으로 불명예 퇴진한 한상률 전 청장(왼쪽)과 알선수재 및 수뢰혐의로 구속된 전군표 전 청장. |
그게 전부였다. 본지 취재 결과 이후 단 한 차례의 회의나 모임도 없었다. “국세개혁행정위원회가 어떻게 운영되고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국세청 공보계 담당자의 답은 이랬다. “무슨 위원회요?”. 이 위원회를 담당하는 창의혁신담당관실 관계자는 “지난해 초에 한시적으로 운영했다”고 했다.
그는 “당시 발굴한 개혁 과제를 추진하고 있다”고 했지만, 그 과제가 무엇이고 어떻게 추진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정리된 것이 없다”고 답했다. 그럼에도 국세청은 지난해 9월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에 업무보고를 하면서 ‘국세개혁행정위원회 운영’을 주요 과제로 밝혔다. 이 위원회에 위촉된 한 인사는 “전시행정에 들러리 선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외부 컨설팅 기관이 작성한 ‘국세행정 선진화를 위한 국세청의 기능 및 조직 진단’ 보고서도 가볍게 무시됐다. 연구 용역의 결과는 이랬다. 업무 효율화와 자동화를 통해 2500명가량 감축 가능. 107개인 세무서 중 생산성 떨어지고 유사 지역에 위치한 세무서 통폐합. 지방청 폐지 및 세무조사 권한 본청 흡수. 세무조사청 신설.
그 어떤 것도 진지하게 검토되는 것은 없다. 그동안 숱하게 제안됐던 외부 감사위원회 신설, 국세청만 담당하는 외부 감독기관 설립 역시 지지부진한 논의만 있었을 뿐이다. 정치권도 말로만 국세청 개혁을 외쳐왔다. 2007년 7월 엄호성 의원이 발의한 소위 ‘국세청법안’.
국세청이 정치권력에서 독립해야 한다는 취지로 국세청장 임기 2년, 국세공무원을 특정직 공무원으로 규정, 국세공무원인사위원회 설치 등의 내용을 담은 이 법안은 잠깐 떠들썩하다가 자동 폐기됐다. 같은 해 11월 현 청와대 국정기획수석인 박재완 당시 한나라당 의원이 발의한 ‘세무조사법’도 회기 만료로 폐기됐다.
세무조사권 남용을 막고, 세무조사 대상자 선정 기준을 명확히 한다는 내용을 담은 이 법안은 법적 근거도 없이 훈령과 세금징수라는 명분에 의존해 함부로 국민 재산을 열람하는 관행을 뿌리 뽑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이 법안은 국세청이 2006년 말 이명박 당시 한나라당 대선 후보의 재산 검증을 벌이면서 친인척과 해외 재산보유 여부를 확인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 계기가 돼 발의된 것이었다.
진부해진 개혁과제
사실 국세청에 바라는 개혁 과제는 너무나 많고 아주 오래된 숙제다. 먼저 정치권력과의 유착관계를 끊어야 한다. 청장의 임기가 보장되도록 지난해 폐기된 국세청법안을 누군가 재발의해야 한다. 그래야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국세청장의 운명이 갈리는 일을 막을 수 있다.
고질적인 권력형 비리와 부패와 상납의 역사도 청산 대상이다. 전군표 전 청장은 인사 청탁과 함께 뇌물을 수수해 국세청 개청 이래 처음으로 현직 청장이 구속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됐다. 내부 감찰반은 보스의 비리는 잡아내지 못하거나 눈을 감아왔다. 이 때문에 외부 감독위원회를 통한 감시 기능 강화는 더 미룰 수 없는 개혁 과제다.
폐쇄적인 내부 승진 구조는 또 어떤가? 국세청은 승진이 어렵고 고위직 인사 적체가 심한 것으로 유명하다. 9급 공무원이 5급을 다는 데 평균 30년이 걸린다. 2만여 명의 국세공무원 중 과장 이상 고위 간부는 1.8%다. 치열한 승진 경쟁이 벌어지고, 소위 ‘라인’이 생기고, 상사에게 뇌물을 주고 인사 청탁을 하는 일이 벌어지는 배경이다.
한 지방국세청 과장은 “줄서기와 상대편 흠집 내기는 국세청의 고질적인 병”이라고까지 말했다. 국세청에 집중돼 있는 세무조사 권한에도 문제가 많다. 세무조사를 하는 이유와 절차에 대한 법규는 없다. 훈령이 전부다. 이를 토대로 ‘법리’와 ‘세법’이 아닌 자의적 판단과 정치적 압력으로 세무조사가 이뤄져 왔다는 비판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이렇다 보니 세무조사는 독이 든 칼이 됐고, 칼을 피하기 위해 박연차 사건처럼 세무조사 무마 청탁이 일어나는 것이다. 기업들이 국세청 고위 간부가 옷을 벗으면 곧바로 사외이사나 감사로 모셔 가는 이유는 설명이 필요 없다. 어떤가? 진부하지 않은가?
사실 국세청 개혁 과제는 진부하다.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진부하고, 진부하다는 이유로 진지한 논의가 부족했다. 청장이 바뀔 때마다 일순간 불고 사라지는 보여주기 위한 개혁은 오히려 국세청 직원들에게 개혁에 대한 반감만 키웠다. 몇 해 전 청장이 바뀔 때 소위 ‘개혁TF팀’에 참여했던 한 국세청 직원은 “개혁 방안을 올리면 신임 청장들은 더 센 것 가져와라, 이것 가지고는 안 된다.
언론에서 주목할 만한 것을 올리라”고 했다고 토로했다. 이런 개혁방안이 오래갈 리 없다. 몇 가지 예가 있다. 한 전직 청장은 조사국 직원의 비리를 막는다는 명분을 내세워 제3의 조직을 만들었다. 조사국 직원은 이 조직을 통해 납세자를 조사했고, 납세자 역시 이 조직에 해명을 해야 했다.
양쪽 모두 불편했다. 언론에 대대적으로 발표했지만, 시행착오만 겪다가 현재는 유명무실한 상태다. 내부 직원끼리 서로 연락하며 비리를 저지르는 것을 막는다는 취지에서 직원 명부를 없앤 청장도 있다. 업무만 불편해졌다. 내부 직원 연락처를 몰라 수차례 전화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당시 TF팀에 참가했던 직원은 “이런 제도적 개혁 방안에 대해 TF팀은 반대했다. 본연의 기능을 잘할 수 있도록 해야지 외부에 잘 보이도록 하는 게 무슨 필요가 있느냐”고 말했다. 안정남 전 청장이 국세행정 조직개편을 한다며 1개 지방청과 35개 세무서를 통폐합했던 것도 조급한 개혁의 문제를 잘 드러낸다.
당시 안 청장은 본청 조직을 기능별 조직으로 전면 개편하고, 126개였던 세무서를 99개로 줄였다. 결과 4급 보직이 30여 개, 5급 보직이 130여 개 사라졌다. 급조된 조직개편은 보직 없는 서기관만 늘린 것이다. 세무서는 다시 107개로 늘었다.
국세청의 ‘개혁 반감’
이번에는 바뀔까? 반응은 엇갈린다. 이명박 대통령의 최측근이자 외부인사가 청장에 앉았지만,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 같다는 견해가 많다. 개혁은 청장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조직과 사람이 따라줘야 한다. 역대 청장들이 개혁을 얘기할 때 빼놓지 않는 말은 “국세공무원 여러분이 적극적이고 자발적으로 동참해 달라”였다.
하지만 벌써 국세청 내부에서 반감이 포착된다. 한 국세청 관계자는 “국세청에도 전통이 있고 역사가 있다”며 “이것을 단시일에 바꾸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잘 모르는 사람이 와서 쓸데없다며 이것저것 없애버리면 득보다 실이 많다. 국세행정은 고도의 전문 영역이기 때문”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다른 직원은 “임기가 보장된다면 기대해 보겠지만 국세청장은 잘해야 2년이다. 1년 동안 조직 흔들고 시끌벅적하게 만들어 놓고 떠나면 남은 것은 허망함뿐일 것”이라고 전했다. 외부 인사에 대한 경계심이 읽히는 대목이지만, 그것이 국세청 내부의 대체적인 분위기다.
전직 국세청 과장은 이런 말을 했다.
“국세청 사람들은 돈을 상대한다. 대단히 똑똑하다. 내부 사람만 이해할 수 있는 문화가 있다. 외부에서 온 청장이 조직을 장악한다고 마음먹는 순간 실패할 것이다. 국세청 사람들에게 이런 태풍은 늘 있어 왔다. 이번에도 지나가는 바람으로 여길 것이다. 여기저기서 개혁을 외치는데, 솔직히 말해 국세청 사람들의 콧방귀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특히 학자 출신인 내정자가 국세청의 구도를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너무 많은 것을 하려 하면 실패한다. 몇 가지만 제대로 바꾸어도 성공이다. 성과를 당대에서 내려 하면 안 될 것이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시간이다.”
국세청이 또 한 번 산을 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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