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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출 1000억$ 돌파 때 국민소득 1만$ 넘어서

수출 1000억$ 돌파 때 국민소득 1만$ 넘어서

1000이란 숫자가 한국 경제에 던지는 메시지는 의미심장하다. 수출 1000억 달러를 돌파한 1995년 1인당 국민소득이 1만 달러를 넘어섰고, 이듬해 기고만장해 선진국 클럽 OECD에 가입했다. 그런데 OECD 가입 1년 만에 외환위기를 맞았으니….

1995년 11월 29일 수출 1000억 달러 달성 기념 리셉션에서 당시 이홍구 총리가 축사를 하고 있다.

1977년 12월 22일 서울 장충체육관. 그토록 고대하던 대망의 수출 100억 달러 달성 기념행사가 열렸다. 1980년에나 달성될 것으로 예상했는데 3년 일찍 이뤘다. 박정희 대통령은 감기가 심하게 들어 주치의가 말렸는데도 행사장에 나와 감격스러운 치사를 했다.

광복 이듬해인 1946년 수출액이 9만5000달러, 수출품이란 것도 김·한천 등 해조류와 농산물이 대부분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기적이 따로 없었다. 수출 드라이브 정책은 1962년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시작되면서부터 가동됐다. 원조 의존 경제체제에서 자립 경제체제로 전환하기 위해 공업화와 수출증대에 국가의 운명을 걸었다.

1964년 11월 30일 당시로선 대단한 1억 달러 고지에 올랐다. 이날을 기념하기 위해 수출의 날을 제정하고 ‘수출의 노래’도 만들었다. 100억 달러 조기 달성으로 한국 경제호의 수출 달리기는 더욱 빨라져 4년 뒤인 1981년 200억 달러, 서울올림픽 이듬해인 1989년 선진국으로 가는 중간 목표 500억 달러 고지를 넘어섰다.

그로부터 6년 뒤인 1995년 11월 드디어 수출 1000억 달러 고지를 돌파했다. 수출액이 100억, 500억, 1000억 달러를 돌파한 그해 1인당 국민소득이 각각 1000, 5000, 1만 달러를 돌파했다. ‘억 달러’를 단위로 한 수출총액에 10을 곱하면 ‘달러’를 단위로 한 1인당 국민소득이 되었다.

이는 한국 경제 성장의 견인차는 역시 수출이란 점을 입증한다. 6·25전쟁 이후 최대 국난이었던 외환위기는 수출에도 영향을 미쳐 1998년 수출액이 사상 처음 감소했다가 이듬해부터 기력을 회복했다. 이어 2004년 2000억 달러, 2006년 3000억 달러, 2008년 4000억 달러를 각각 넘어서는 등 2년 주기로 1000억 달러씩 기록을 경신하고 있다.


한국과 필리핀의 엇갈린 운명…리더십 중요

전체 수출액 1억 달러, 100억 달러 돌파에 목이 메었던 게 불과 30여 년 전인데, 지금은 휴대전화 수출 100억 달러 돌파(2003년), 전자제품 수출 1000억 달러 돌파(2005년), 농식품 수출 100억 달러 달성(2012년 목표) 등 특정 업종이나 품목 수출이 기록을 갈아치우면서 산업 판도를 바꾸고 있다.

수출 100억 달러 달성 기념행사가 열린 장충체육관이 문을 연 것은 1963년 2월 1일. 사계절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국내 첫 실내 체육관인 이곳이 46년 전 필리핀의 기술로 건립됐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장충체육관은 가운데 기둥이 없는 돔 구조물인 데다 목욕실과 냉·난방 시설을 갖춘 게 뉴스가 됐다.

당시로선 최첨단인 이 건물을 짓는 데 국내 기술로 감당하기 어려워 부분 설계와 감리는 필리핀 엔지니어의 도움을 받았다. 지금이야 삼성건설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160층, 높이 800m의 버즈 두바이 빌딩 공사를 하고 있을 정도로 우리 건설 기술력이 뛰어나지만, 1960년대만 해도 필리핀이 ‘아시아의 선진국’이었다.

1960년 필리핀의 1인당 국민소득은 254달러. 79달러였던 한국의 세 배가 넘었다. 대만(153달러)이나 태국(97달러)보다 잘살았다. 1966년 문을 연 ADB(아시아개발은행) 본부가 필리핀 수도 마닐라에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1960년대 이후 한국과 필리핀은 비슷한 정치 행로를 걸었다.

한국에선 1961년 박정희 소장이 5·16 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뒤 1972년 유신을 거쳐 18년 동안 집권했다. 마르코스는 1965년 처음 대통령에 당선된 뒤 1972년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21년 동안 필리핀을 지배했다. 하지만 두 나라 경제의 운명은 극적으로 엇갈렸다. 한국은 경제개발5개년계획과 새마을운동이 성과를 거두며 아시아 최빈국의 굴레를 벗어났다.


빠른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압축 성장을 한 결과 1인당 국민소득도 빠른 속도로 높아졌다. 외환위기가 몰아치면서 1998년 7000달러대로 곤두박질쳤던 1인당 국민소득은 환란을 빠르게 극복하며 회복돼 2007년 드디어 2만 달러를 넘어섰다.

꾸준히 증가하던 국민소득은 지난해 글로벌 경기침체 여파로 저성장 속 원화가치가 급락하면서 2만 달러 아래로 떨어졌다. 한국과는 대조적으로 필리핀은 농업국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소수의 명문 집안이 국부의 대부분을 소유해 빈부격차가 갈수록 심해졌다. 그 결과 1970년 1인당 국민소득은 10년 전보다 오히려 적은 192달러로 오그라들었다.

한국이 1만 달러를 넘어선 1995년에야 필리핀은 1000달러에 도달했고, 그 뒤에도 계속 제자리걸음으로 2007년 1626달러에 그쳤다. 27년 전 한국의 세 배였던 국민소득이 이제는 한국의 13분의 1도 안 되는 수준으로 추락했다. 오늘날 필리핀은 ‘가정부 수출국’이 되었고, 그들 중 상당수가 한국에서 번 돈을 고국에 송금한다.

올해 수교 60주년을 맞은 한국과 필리핀의 엇갈린 운명은 정치 시스템과 리더십, 사회구조와 경제정책이 한 나라의 발전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한국이 ‘한강의 기적’을 일구며 도약하는 사이 필리핀은 ‘아시아의 환자’(sick man of Asia)로 전락했다.

과거 박정희 대통령이 마르코스 대통령에게 돈을 꾸러 갔다가 거절당한 적이 있었는데, 지금은 많은 필리핀 근로자와 여성이 한국 중소 제조업체에서 부족한 인력을 메우거나 혼기를 놓친 노총각의 배우자로 농촌을 지키고 있다. 광복 당시 우리나라 자동차는 7326대. 서울도 변두리에선 어쩌다 한 대씩 볼 수 있을 정도였다. 경제성장과 더불어 자동차 등록대수도 불어났다.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시작된 1962년 2만9000대였던 것이 1969년 10만 대를 넘어섰다. 한국에서 본격적인 자동차 시대가 열린 것은 1976년 1월 국산차 ‘포니’가 생산되면서다. 미국 포드와 합작으로 코티나를 만들던 현대차는 1972년 미국 닉슨 대통령의 핑퐁 외교로 중국 시장이 열리자 중국을 택한 포드로부터 결별 통보를 받은 뒤 와신상담 끝에 포니를 개발했다.


부침 큰 자동차산업, 세 번째 기로

세계에서 16번째, 아시아에선 일본에 이어 두 번째 고유 모델 승용차를 개발한 것이다. 생산 개시 6개월 만인 1976년 7월 에콰도르에 6대의 포니를 수출해 해외시장을 뚫는 개가를 이뤘다. 1970년대에 자리를 잡아가던 한국 자동차산업은 1980년에 위기를 맞았다. 신군부는 2차 오일쇼크가 터지자 외국과 경쟁해 이기기 어렵다며 자동차산업을 정리하려 들었다.

경제계가 반발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1981년 ‘자동차공업합리화 조치’로 승용차는 현대와 새한(대우자동차), 소형 트럭과 미니버스는 기아가 전담하게 되었다. 아시안게임과 서울올림픽을 전후해 한국 자동차산업은 르네상스를 맞았다. 봉고로 살아난 기아는 1986년 프라이드로 기세를 올렸다.

현대는 그해 엑셀을 미국에 수출해 미국 10대 상품에 올랐다. 대우는 1991년 국내 첫 경차 티코를 선보였다. 이 무렵 마이카 붐이 일면서 자동차 등록대수도 기하급수로 증가했다. 1969년 10만 대에서 1985년 100만 대를 돌파하는 데 장장 16년이 걸렸는데, 1992년 500만 대 돌파에 이어 1994년 8월 말 600만 대에서 1995년 8월 700만 대가 되는 데 걸린 기간은 열한 달에 불과했다.

급기야 자동차 등록대수는 1997년 대망의 1000만 대를 넘어섰다. 하지만 등록대수가 1000만 대를 돌파한 그해 외환위기가 닥쳐 자동차산업에 치명타를 날렸다. 대우차는 미국 GM으로, 삼성차는 프랑스 로노로, 쌍용차는 중국 상하이기차로 넘어갔다. 기아차는 현대차에 인수돼 순수한 의미의 국내 자동차 메이커는 현대·기아차 한 곳만 남게 되었다.

1970년만 해도 3만 대에 못 미쳤던 자동차 생산은 1980년대 후반부터 가속 페달을 밟았다. 1988년 100만, 1993년 200만 대를 돌파했다. 외환위기 직후 200만 대 아래로 내려갔다가 2000년대 들어 회복해 2007년 400만 대 생산 고지에 오르면서 한국은 세계 5위 자동차 생산 대국에 올랐다.


숫자 ‘1000’이 드리운 명암


한국 자동차산업은 1980년대 초 오일쇼크, 1997년 외환위기에 이어 2009년 글로벌 경기침체 속 세계 자동차 산업 재편으로 세 번째 선택의 기로에 섰다.

세계를 호령하던 미국의 자존심 GM이 파산보호를 신청하는 등 포드, 크라이슬러 등 미국의 자동차 ‘빅3’가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는 가운데 어느새 세계 5위 자동차 메이커 반열에 오른 현대·기아차의 선택이 주목 받고 있다.

경제지표를 설명하는 숫자가 높다고 다 좋고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1000이란 숫자도 마찬가지다. 수출액과 국민소득, 선박과 조강 생산량, 자동차 등록대수 등은 꾸준히 증가해야 경제도 견실하게 성장한다.

반면 환율과 주가지수의 급변동과 부동산 가격 급등, 서울과 수도권 인구 집중 등은 숫자 1000을 오르내리며 우리 경제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기도 했다. 원-달러 환율은 우리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는 주요 변수 중 하나다.

1995년 달러당 원화가치가 770원대로 높아진 저환율 효과에 따라 1인당 국민소득이 1만 달러를 넘어섰고, 이듬해 김영삼 대통령이 공약한 선진국 클럽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가입을 이뤄냈다. 하지만 무리한 원화가치 상승의 여파로 경상수지가 악화되면서 OECD 가입 1년 만에 외환위기를 맞았다.

88서울올림픽이 열린 그해 서울 강남 아파트 값이 사상 처음 3.3㎡(평)당 1000만원을 돌파했다. 당시 노태우 정부는 서둘러 집값을 안정시키기 위해 주택 200만 호 건설과 분당·일산 등 수도권 신도시 건설 정책을 발표했다. 하지만 그 효과는 오래가지 못했으며, 갖가지 부동산시장 안정대책에도 지속적으로 상승한 부동산 가격은 한국 경제의 ‘고비용-저효율’ 구조를 고착화시켰다.

아파트 값은 이제 서울 강남의 경우 3.3㎡당 3000만원을 호가하고, 서울시내 전체 평균 거래가격도 3.3㎡당 1000만원을 넘어선 상태다.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빠른 공업화와 도시화는 농촌 인구를 급격히 감소시켰다.

1974년까지만 해도 1400만 명이었던 농가인구는 1981년 1000만 명으로 줄었고, 1995년 다시 500만 명으로 반 토막 난 데 이어 지금은 근근이 300만 명대를 유지하는 모습이다. 농촌 인구는 급격히 줄어들 뿐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의 고령화와 함께 농촌사회의 활력을 떨어뜨렸다.

1988년 1000만 명을 돌파한 이후 조금 줄어든 해도 있지만 20년 넘게 1000만 명대인 서울 인구, 2005년 1000만 명을 돌파하며 서울 인구를 추월한 경기도 인구는 인천과 함께 수도권 집중을 가속화시켰다. 그 결과 환경오염과 교통난 등 갖가지 사회문제와 함께 국가 자원의 배분을 왜곡함으로써 국토의 균형 발전을 가로막고 지역갈등과 빈부격차를 심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경제 상황을 보여주는 각종 지표는 변하는 게 당연하다. 그 숫자들은 한국 경제를 꾸려가는 우리(기업과 정부, 가계)의 족적이고, 또 앞으로 우리가 계속 만들어가야 한다. 1000이냐, 100이냐 지나간 숫자에 지나치게 민감할 필요는 없다. 과거의 지표가 보여주는 의미를 새김과 동시에 거기서 교훈을 얻어 밝고 긍정적인 의미의 새로운 1000을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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