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현-미경 남매, 통 큰 영화사랑 결실
이재현-미경 남매, 통 큰 영화사랑 결실
해수욕장 해운대보다 더 많은 피서객을 모은 영화 ‘해운대’의 투자와 배급을 맞은 CJ그룹은 모처럼 성공한 투자로 잔치 분위기다. CJ그룹뿐 아니라 지난해부터 한국영화의 침체기를 겪고 있는 영화업계에서도 이번 해운대의 ‘대박’에 함박웃음을 짓고 있다.
사상 최대인 1300만 명을 기록한 영화 ‘괴물’ 이후 3년 만에 1000만 명 관객 동원을 달성했기 때문이다. 이런 실적은 해운대의 투자와 배급을 맡은 CJ엔터테인먼트라는 회사가 있기에 가능했다. 한국영화 위기론이 나돌던 지난해, 제작비 100억원이 넘는 대작을 선뜻 떠맡겠다는 회사가 쉽게 나올 리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미국 촬영과 컴퓨터그래픽 작업 등으로 당초 125억원으로 예상됐던 비용이 환율 상승으로 137억원까지 치솟았다. 하지만 ‘해운대’를 기획할 당시 한국영화계는 최악이었다. 개봉하면 팡팡 깨지는 상황에서 누구도 이 작품에 선뜻 투자하려는 이가 없었다. 이 작품의 투자에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이미경 부회장이다.
CJ그룹의 엔터테인먼트 부문을 관장하는 이미경 부회장은 엔터테인먼트의 산업화에 확고한 소신이 있다. 그룹 관계자는 “이 부회장이 엔터테인먼트 비즈니스에 큰 관심과 애정이 있기 때문에 적자가 나더라도 CJ에서 이 사업을 유지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한때 비슷한 사업을 했던 오리온 그룹이 수익성이 나빠지면서 영화관 체인인 메가박스를 비롯해 쇼박스 등을 매각 축소한 것을 보면 이 부회장의 역할을 알 수 있다.
결정권자 의지로 리스크 감수 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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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회장은 요즘도 밤늦게까지 사무실에서 영화와 관련된 시나리오를 읽거나 사업 관련 서류를 챙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부회장을 잘 아는 경제계 인사는 “좀처럼 외부사람과 어울리지 않고 밤늦게까지 워커홀릭처럼 일하는 스타일”이라며 “덕분(?)에 비서들이 고생 좀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알려줬다.
이처럼 이 부회장이 엔터테인먼트 비즈니스를 총괄하도록 장을 열어 준 것은 바로 이재현 회장이다. 그룹 회장인 그에게 지난 15년간 1조4000억원 투자에 2000억원 누적적자를 기록하고 있는 엔터테인먼트 사업이 곱게만 보일 리 없다. 하지만 이 회장도 1995년 드림웍스에 대주주로 참여할 정도로 문화산업에 남다른 관심과 비전이 있어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생리를 잘 이해하고 있다는 평이다.
제조업처럼 일정한 투자단계를 지나면 안정적인 비즈니스가 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리스크를 감수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알고 있다는 얘기다. 적자를 계속 내는 사업을 15년간 유지한다는 것은 결정권자의 의지가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CJ그룹은 우리나라 대기업 중 가장 먼저, 가장 오래 그리고 가장 다양하게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하고 있다.
CJ그룹 이재현 회장은 1993년 독립경영을 선언하고 1994년 12월까지 삼성과의 경영권 분리를 마무리한 뒤 드림웍스에 3억 달러(당시 환율로 약 2300억원)를 투자하면서 영상산업 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했다. 1994년 자산 총계가 1조원에 불과했던 CJ제일제당으로서는 2300억원에 달하는 당시 투자금은 작은 돈이 아니었다.
드림웍스는 스티븐 스필버그, 제프리 카젠버그, 데이비드 게펜이 설립한 회사로 CJ는 대주주의 권한뿐 아니라 드림웍스가 제작하는 영화, 비디오, 음반 등 각종 영상소프트와 TV프로그램의 아시아지역(일본 제외) 판권을 갖게 되었다. 드림웍스 투자 참여는 식품 중심 회사였던 제일제당을 기반으로 CJ그룹이 엔터테인먼트 회사로 변화 성장할 수 있는 전환점이 되었다.
회사 존폐의 위기 딛고 신념으로 승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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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회장은 “1995년 드림웍스에 투자하기로 하고 미국 관계자를 만나러 가는 비행기에서 이재현 회장이 멀티플렉스, 영화 제작사, 배급사, 케이블TV도 만들겠다고 말했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애초 이 회장이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시작할 때부터 지금의 사업 포트폴리오를 구상했다는 얘기다. 하지만 엔터테인먼트 사업은 생각만큼 즐겁지 않았다. 특히 대규모 투자 직후 외환위기가 찾아오면서 엔터테인먼트 산업 진출을 공언했던 기업들이 하나 둘씩 발을 뺐다.
당시 CJ와 같이 영상산업에 진출했던 삼성, 현대, LG 등 그룹들은 1997년 IMF 외환위기와 맞물리면서 서서히 철수했지만, CJ는 적자를 무릅쓰고 영화산업에 투자를 지속했다.
CJ는 1997년 메이저급 영화제작사였던 ‘명필름’ ‘우노필름’ ‘신씨네’ ‘강제규필름’ 등과 영화제작 투자비를 제공하고 배급권을 우선적으로 가지는 투자제휴를 체결했다. 이러한 제작투자는 2000년 명필름에서 제작한 ‘공동경비구역 JSA’의 대성공으로 이어졌다.
문화콘텐트산업에선 원천 콘텐트 창작이 핵심
‘JSA’는 당시 한국영화 사상 최대 흥행기록인 583만 명을 동원했다. CJ엔터테인먼트는 ‘공동경비구역 JSA’를 시작으로 2002년 ‘집으로’, 2003년 ‘살인의 추억’, 2004년 ‘말죽거리 잔혹사’, 2005년 ‘친절한 금자씨’, 2006년 ‘타짜’, 2007년 ‘화려한 휴가’, 2008년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 등 한국영화를 투자 배급해 한국 최고의 영화 투자 배급사로 성장하면서 비교적 순항했다.
CJ가 제작투자와 함께 전국 동시개봉이 가능한 배급시스템 확보와 멀티플렉스인 CGV 등 새로운 영화관람 인프라를 구축하자 수많은 우수 인력이 영화산업으로 몰려들었다. CJ가 시작한 구조혁신으로 영화산업 단계에 진입하며 이른바 한국영화의 르네상스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제2의 르네상스를 맞았던 한국영화계는 과도한 투자로 인한 거품이 가라앉으면서 위기를 맞게 되었다. 1000만 관객의 블록버스터 영화가 성공하자 통신 대기업이 영화산업에 뛰어들었다. 한국영화 제작편수가 연간 120편으로 급증하면서 투자환경이 극도로 악화되었다.
통신 대기업이 철수하고 거품이 꺼지면서 지난해부터 영화제작편수가 1년에 40~50편으로 급감했다. 2001년 편당 투자수익률이 41%에 달했던 한국영화산업은 지난해 -40%로 급반전했다. 2001년 100억원을 투자하면 평균 41억원의 이익이 났지만 지난해에는 40억원을 손해 봤다는 얘기다.
영화계의 부침으로 최근 3년여 동안 매년 수백억원의 적자를 내면서 CJ엔터테인먼트가 존폐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 CJ는 더 이상 증자가 어려운 CJ엔터테인먼트를 합병해 가면서 한국영화에 대한 투자를 지속했다.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투자를 포기하지 않은 것이 ‘해운대’ 같은 히트작을 만드는 원동력이 됐다.
영화뿐만 아니다. CJ그룹은 또 다른 엔터테인먼트 사업인 케이블TV에서도 지속적인 투자를 하고 있다. “‘국내 문화콘텐트산업의 현실은 산업화가 미진하고 내수시장 위주의 영세성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전 부문에서 적극적인 지원을 해야 한다’는 것이 이 회장의 생각”이라고 그룹 측은 전했다.
특히 문화콘텐트산업 밸류체인의 핵심인 원천 콘텐트 창작이 꼭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CJ엔터테인먼트, 엠넷미디어, tvN이 손해를 보면서도 자체 콘텐트 생산을 중단하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재현-미경 남매의 이런 남다른 관심은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단순히 오너의 취미나 국내시장에서의 승부로 보고 있지 않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 부회장은 몇 년 전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아시아를 한국 엔터테인먼트의 식민지로 만들고 싶다”고 했을 정도다. 마침 영화 ‘해운대’가 인기몰이를 하고 있던 8월 둘째 주에 해외에서 눈에 띄는 뉴스가 들려왔다. 중국 제작사와 공동 제작한 영화 ‘소피의 연애 매뉴얼’이 중국 박스오피스에서 1위를 차지했다는 소식이다.
또 24개국에 수출된 영화 ‘해운대’도 8월 하순 중국, 미국을 시작으로 동남아시아에서 차례로 개봉된다. 배우 개개인의 인기에 의존했던 기존의 한류 열풍과 달리 투자를 통한 영화 상품으로 글로벌 진출이 이뤄진다면 경제적 효과는 훨씬 크다. 할리우드 영화나 일본의 애니메이션을 보면 단박에 알 수 있다. 이재현, 이미경 남매는 이미 15년 전 비행기에서 그 점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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