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방성·인센티브가 로마제국 키웠다
개방성·인센티브가 로마제국 키웠다
로마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대제국이었다. 하지만 2500년 전, 그것도 먼 유럽의 제국인 로마 역사를 왜 지금 우리가 공부해야 할까? 경영컨설턴트이면서 로마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김경준 딜로이트컨설팅 부사장은 “대한민국은 고려와 조선이라는 찬란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지금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결정하고, 각종 제도의 근간이 되는 헌법과 각종 법률은 조선시대 ‘경국대전’의 유산이 아니라 ‘로마법’의 유산”이라고 설명했다.
로마는 BC 753년에 이탈리아 반도 중부에서 떠돌이들이 모여든 조그만 촌락으로 출발했다. 이후 세력을 확장한 로마는 BC 3세기에는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고 지중해로 진출한다.
강력한 해상세력 카르타고와 벌인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해 지중해의 패권을 확보하고, BC 1세기에는 카이사르가 갈리아(지금의 프랑스와 서부 독일지역)를 정복하게 되면서 서방세계 전역을 지배하는 제국을 건설하게 된다.
지도층 ‘힘의 윤리’로 리더십 확보현대의 기업에 비유한다면 변방의 조그만 벤처기업이 핵심경쟁력을 확보해 사업을 확장하고 적극적으로 M&A에 나서 글로벌 거대기업으로 발전하는 과정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수많은 어려움을 로마는 특유의 방식으로 극복하고 성장했다.
로마의 성공비결은 ‘개방성, 리더십, 시스템, 인센티브’의 4단어로 압축된다. 개방성이야말로 로마를 다른 민족과 구분 짓는 탁월한 관점이었다. 남을 우리로 받아들이는 개방성의 사고방식에 힘입어 로마는 그 자신이 아예 세계가 되어 버렸다.
‘피를 나눈 자가 아니라 뜻을 같이하는 자’를 동포로 생각하고, 패배자도 로마로 편입하는 개방성은 로마를 폐쇄적인 승리자의 집단이 아니라 열려 있는 리더십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했다. 또한 개방성의 철학을 탁월한 리더십, 체계적인 시스템, 합리적인 인센티브 구조가 뒷받침해 로마는 번영할 수 있었다.
리더십의 핵심은 힘의 윤리였다. 로마사회는 실력에 기초한 힘의 논리가 지배했지만, 지도층은 철저한 윤리의식이 있었기에 리더십을 확보할 수 있었다. 공화정 초기 현직 집정관이 국법을 위반한 자신의 두 아들을 사형시키면서 법치주의의 전통이 확립되었고, 초기 지도층을 형성한 사람들은 전쟁이 나면 가장 먼저 무기를 들고 나가 최전방에서 싸우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공동체를 위해 자신들의 목숨과 재산을 바치는 희생정신으로 모범을 보였고, 이런 전통은 사회 각 분야로 전파되면서 로마를 강하게 유지시키는 핵심적 가치가 됐다. 로마가 패권과 함께 장기간의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제국 내 다양한 민족이 상호이익을 바탕으로 공존하는 시스템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모여 집단을 이루는 가장 큰 인센티브는 생존 가능성을 높이는 상호이익 구조다. 이는 문명도와 상관없이 적용되는 보편적 원칙이다. 민족·국가·기업 등 모든 형태의 조직체는 구성원의 상호이익이 전제돼 있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이익을 보고 다른 쪽은 손해만 보는 집단은 내부분열과 갈등으로 불안정해진다.
라틴 단일민족의 촌락으로 출범한 로마는 정복사업으로 권역이 확장되면서 다민족·다문화·다언어·다종교 국가로 변모했다. 하지만 전쟁에 패해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온 민족들이 로마를 순순히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로마는 승자였지만 패자와도 공존할 수 있도록 상호이익 구조를 만들었다.
민족 각각의 특성을 인정한 자치를 허용한 데다, 로마가도를 건설해 경제를 발전시키고, 법률을 통한 공정한 질서를 수립해 권역 내 거주민들에게 실질적인 이익을 준 것이 제국의 장기적 안정과 번영이라는 열매를 맺었다. 지방자치·가도·법률을 주축으로 형성된 상호이익 구조는 로마인의 개방적 세계관과 보편적 생활방식이 있었기에 창안될 수 있었다.
로마인은 승자라고 해서 자신들의 사고방식을 강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패자들의 철학이나 종교도 받아들이는 유연한 태도를 가졌다. 로마는 그리스와 이집트의 신이 로마에 들어와 신도가 생겨나도 통치의 근간을 훼손하지 않는 한 용인했고, 심지어 게르만 출신 무당과 점쟁이가 로마에 가게를 열어 인기를 끄는 경우조차 있었다.
로마는 정복지역을 일괄적으로 직할통치하지 않고 지역 특성에 맞게 유연하게 대처하면서 중앙집권과 지방분권의 균형을 유지했다. 로마는 속주민들에게 안전보장 명목의 속주세 10%를 부과하는 것 외에는 로마시민과 차별을 두지 않았고 로마의 문화를 강요하지도 않았다.
속주민들은 고유의 언어·풍습·종교를 지키면서 선거든 세습이든 그들의 방식대로 지도자를 선출해 전통을 이어나갔다. 로마의 지배권만 인정하면 나머지는 간섭하지 않는 정책을 견지한 것이다. 지방자치제도가 정치적 안정이라면 로마가도 건설은 경제 활성화라는 이익을 가져왔다.
본래 군사 목적으로 건설되기 시작한 로마가도는 로마의 패권 확대에 따라 제국 전역으로 확장됐다. 로마가도는 돌로 포장된 간선도로만 375개에 총 길이 8만㎞에 달했다. 전천후 포장도로인 가도는 시간이 흐르면서 제국 각지를 연결하고 사람과 물자의 이동을 촉진시켜 경제를 활성화하는 핵심인프라가 됐다.
일체의 통행료 없이 무료로 개방돼 군인은 물론 상인과 농민도 자유롭게 통행할 수 있었다. 물류의 발달은 제국의 경제 통합과 거주민 삶의 질 향상으로 이어졌다.
피정복 민족에게도 이익이 되는 제국 건설로마인은 가도뿐만 아니라 항구·상하수도·공중목욕탕·원형경기장 등을 포함한 넓은 범위의 사회간접자본을 제국 전역에 걸쳐 건설했다. 자체적으로 이러한 사회간접자본을 건설할 자금과 기술이 없었던 민족들에게 로마는 새로운 경제적 가능성을 열어줬다.
로마가 20만 명 수준의 군단병력만으로 서유럽 전역과 북아프리카, 시리아에 이르는 넓은 권역을 복속시키며 제국의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기저에는 통치비용을 최소화해 낮은 세율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복은 하드파워로 충분하지만 패권 유지는 소프트파워까지 있어야 한다.
로마는 교통·상하수도·방위·치안·사법·행정 등의 공공서비스 분야에서 질 높은 서비스를 제공하면서도 낮은 세율을 유지하고, 속주민일지라도 실력만 있으면 출신지역과 인종에 상관없이 제국의 지도층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했다. 또한 광대한 권역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법률체계를 수립해 제도 전반의 안정성을 높였다.
로마는 군사력으로 정복사업을 펼쳐 국토를 늘렸지만 국토의 유지를 군사력에만 의존하지 않고, 기존의 질서를 인정하면서 로마의 앞선 문명·제도·사회간접자본을 확산시켰다. 로마는 지배권을 확립하고 지방은 안전과 질서를 보장받는 구조가 로마제국 평화와 번영, 즉 팍스로마나의 근간이었다.
로마제국의 확장은 군사력으로 이루어졌지만, 제국 300년간의 안정과 번영은 다양한 민족과 문화를 아우르는 상호이익 구조를 형성했기에 가능했다. 로마의 성공비결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땅에서 인간들이 만들어 간 것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원칙은 교조적 도그마가 아니라 현실에서 살아 숨쉬면서 유연하게 적용되고 혁신되는 과정을 거쳤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로마의 정신에 철저하면서도 시대의 변화를 담아 로마를 재탄생시켜 중흥으로 이끌었다. 카이사르가 활동할 당시인 BC 1세기의 로마는 명실상부한 세계제국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성장한 로마의 통치체제는 영토가 이탈리아 반도에 불과했던 시절의 체제였다. 하드웨어는 세계제국이었지만, 이를 유지하는 소프트웨어는 지역국가에 불과했고, 벤처기업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지만 정작 제도는 업그레이드되지 못한 상태였다.
카이사르·아우구스투스의 리더십
그는 국가기관의 기능을 재조정하고, 수백 년 동안 논란이 되어왔던 농지법을 통과시켰으며, 해방노예에게도 공직 진출의 길을 열어주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로마의 개념을 이탈리아 반도를 넘어 확장시킨 것이다.
자신에게 패배한 갈리아 지방의 유력 부족장들에게 원로원 의석을 주었고, 로마의 핵심가치였던 개방성에 근거한 상호공동이익의 범위를 지중해 세계 전체로 넓혔다. 카이사르는 로마의 전통적 가치를 유지하면서 새로운 상황에 맞게 이를 개혁해 로마를 재도약으로 이끌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지방을 평정한 탁월한 장군이면서, 동시에 라틴어 문장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갈리아 전쟁기를 기술한 문필가이고, 로마 혁신의 그랜드 비전을 제시한 정치가였다. 고유명사인 그의 이름 ‘카이사르’가 이후 황제를 뜻하는 보통명사가 된 점에서 그의 위대함을 느낄 수 있다.
프랑스의 샤를르, 영국의 찰스, 독일의 카이저, 러시아의 차르가 모두 카이사르의 이름에서 기원했다. 카이사르의 암살(BC 44년)로 옥타비아누스(후일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19세의 어린 나이에 카이사르의 후계자가 되었다. 무형의 정통성은 물려받았지만, 유형의 군사력은 카이사르의 부하였던 안토니우스 수중에 있었다.
새파란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 동맹을 제압하고 로마의 권력을 차지한다. 그는 ‘위대한 설계자’ 카이사르의 로마개혁 그랜드 비전을 현실로 만들었던 ‘위대한 건축가’였다. 60년의 제위기간 동안 군대 개혁, 세제개편, 화폐제도 개혁, 내각 설치 등을 착실하게 진행해 로마제국 중흥의 토대를 닦았다.
아우구스투스는 거의 모든 면에서 카이사르와 대조를 이루었다. 그의 성향을 나타내는 유명한 말이 ‘신중한 서두름’(deliberate haste)이다. 취임 초기 오바마 대통령이 ‘언제 각료를 발표할 것이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해 더욱 유명해졌다.
그는 재임기간 내내 원로원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신중하게, 천천히, 눈치채지 못하게, 분명하고 일관되게’ 개혁을 추진해 로마제국의 면모를 일신했다. 카이사르는 절대권력을 가진 종신독재관 지위를 요구하면서 원로원 반대파에게 암살되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오랫동안 천천히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절대권력자의 자리에 올랐다.
로마의 흥망성쇠는 로마 정신의 확장-쇠퇴와 맥을 같이했다. 로마는 후기에 들어서면서 로마를 성공하게 했던 강점을 상실하며 쇠퇴해 갔다. 개방성은 정책이 아니라 철학의 수준으로 물러섰고, 군사력의 약화는 야만족의 득세와 맞물렸다. 넓고 얕게 거뒀던 합리적인 세금제도까지 붕괴하면서 로마의 몰락은 가속화했다.
비록 로마제국의 하드웨어는 476년에 무너졌지만, 로마를 작동시켰던 소프트웨어인 법-제도-문화는 서구문명의 근간을 이루면서 21세기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21세기 글로벌 일류국가, 일류기업을 지향하는 우리나라 사회와 기업의 미래 좌표를 설정함에 있어 로마의 성공비결과 리더십은 2000년의 시공간을 초월해 살아있는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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