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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의 고집과 유연한 사고

장인의 고집과 유연한 사고

불황이 깊어지면서 일반 브랜드는 말할 것도 없고 경기와 무관하게 고공행진할 것처럼 보였던 럭셔리 브랜드까지 휘청대고 있다.

1976년 설립돼 한 벌에 1만 유로가 넘는 고급 의류와 액세서리 등을 생산하던 독일의 세계적 명품 패션 그룹인 에스까다도 자금난에 몰려 지난 8월 독일 뮌헨 지방법원에 파산신청서를 내고 말았다.

샤넬도 심각한 매출 부진으로 경영 압박을 받으면서 2008년 말 200명을 해고했고, 프라다는 실적 회복을 위한 미봉책으로 2008년 성탄 시즌에 이례적으로 예고에도 없던 할인 행사를 하는 등 허둥지둥하는 모습을 보였다.

무수한 브랜드가 고전하는 중에도 과거와 변함없는 아성을 유지하는 브랜드들이 있다. 특히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면서 깊은 불황에도 의연하게 성장세를 유지하는 브랜드는 과연 무슨 힘으로 저력을 발휘하는 것일까?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품질에 대한 남다른 신념이다.

언뜻 보기에 집착이다 싶을 정도로 유별나 보이기까지 한다. 에르메스는 2010년까지 글로벌 지배력을 최강으로 정비하겠다는 계획 아래 매장 확장에 전력하는 등 불황 중에도 확장 정책을 쓰고 있다. 특히 럭셔리 소비의 중심이 미국·유럽에서 일본·중국 등 아시아로 이동하는 추세를 포착하고 아시아 진출에 적극적이다.

2008년 총 2억1000만 달러를 투입해 12개 매장을 신규 개설하고 13개 매장은 리노베이션했다. 이런 판단이 적중해 2008년 매출 23억5000만 달러 중 아시아 매출이 9억8000만 달러로 전체의 40% 이상을 차지했다. 에르메스가 이처럼 자신감 있게 투자를 지속하며 승승장구하는 원동력은 바로 희귀 가죽과 실크를 중심으로 한 우수한 소재와 아직도 수작업을 고집하는 디자인 전통에 있다.

에르메스 CEO 패트릭 토마스는 “눈높이가 높고 예민한 소비자가 늘고 있고, 그럴수록 에르메스의 차이를 이해하는 소비층이 두터워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만약 우리가 다른 브랜드들처럼 에르메스를 상징하는 ‘H’자를 크게 새긴 핸드백을 더 싸게 파는 데 집중한다면 5년 내 에르메스는 사라지고 말 것”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실제로 에르메스의 대표 디자인 가방들의 경우 최고 품질 가죽만을 사용해 오랫동안 무두질한 후 100% 수작업으로 소량 생산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한정된 수량 중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웨이팅 고객이 항시 대기 중이다. 제조 지역 선정에서도 남다른 세심함이 돋보인다. 일반적으로 수많은 브랜드가 원가 절감을 위해 중국이나 인도 등에서 해외 생산을 한다.

그러나 에르메스의 해외 생산은 원가 절감과는 다른 차원에서 진행된다. 예를 들어 시계의 경우 스위스에서, 가죽 구두의 경우 영국에서, 반면 중국에서는 그 어떤 것도 만들지 않는다고 한다. 해당 분야에서 세계 최고 품질을 자랑하는 지역을 생산지로 선택함으로써 고품질에 대한 긴장감을 한시도 늦추지 않겠다는 의미다.

매일 수천 개의 제품이 쏟아져 나와 경쟁하는 최근의 상황을 보면서 많은 기업이 더 이상의 틈새 시장은 없다고 한탄한다. 반면 장수 브랜드들은 이들과는 달리 끊임없이 글로벌 니치를 발굴해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고 있다. 그만큼 시장을 선제적으로 연구하고 면밀하게 관찰하기 때문이다.

스포티한 럭셔리 시계로 유명한 태그호이어는 휴대전화 브랜드로 재탄생했다. 2009년 3월 말 세계 보석 시계 박람회인 바젤월드에서 최신 럭셔리 휴대전화 ‘메르디스트’를 공개한 것. 평균가 5400달러, 다이아몬드 장식 모델의 경우 8500달러다. 우리 돈으로 1000만원을 호가하는 휴대전화다.

여간해서 흠집이 생기지 않는 스테인리스 스틸과 사파이어 크리스털 등을 소재로 했고, 뒷면에는 송아지 가죽과 악어 가죽을 대는 등 일반적으로 휴대전화에 사용하지 않는 소재를 도입했다. 기존 ‘기능+디자인’ 중심의 휴대전화 시장에 럭셔리까지 더해 막강한 잠재 니치를 개척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사실 그동안 일반 휴대전화에 만족하지 못했던 할리우드 부자들의 경우 주얼리 디자이너가 제작한 다이아몬드 재킷 등을 입힌 맞춤형 폰을 사용하는 등 럭셔리 폰에 대한 잠재 수요가 이미 확인됐다.

그 때문에 이 같은 행보는 매우 의미 있는 전략이다. 품질과 명성을 발판으로 기존 시장에서 안정적인 매출을 유지하는 데 만족할 수도 있겠으나 공격적인 시장 개척을 통해 생존을 넘어 도약을 추진하는 것이 장수 브랜드들의 공통점이다.


일관성 깨지 않고 변신 추구소비자로부터 오랫동안 변함없는 사랑을 받아온 브랜드들은 일관성 유지를 제1 원칙으로 삼는다. 새로운 소비 트렌드를 간파하고 디자인을 혁신하되, 남다른 소재와 디자인으로 일관된 브랜드 철학을 유지해야 한다. 100년 이상의 역사를 누려온 브랜드들은 건전한 위기감을 발판으로 최고 품질과 글로벌 니치 개척, 일관된 브랜드 철학을 통해 끊임없이 도전함으로써 경쟁사가 넘볼 수 없는 위상을 구축하고 있다.

‘두려워할 줄 아는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말처럼 과거의 성공과 브랜드에 대한 자만은 자칫 장수가 아닌 ‘단명’ 브랜드를 만들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현재 아무리 주목 받는 기업이라 할지라도 우량고객에 대한 고정관념, 유효했던 방식에 대한 맹종과 연장사고 등 성공자의 덫에 사로잡힌다면 그 브랜드 역사는 결코 지속될 수 없다. 소비자에게 사랑 받고 선택 받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과 동시에 소비자를 사랑하려는 노력만이 100년 브랜드를 만드는 최고의 전략임을 다시금 되새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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