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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反)유행 시대 시간을 초월한 명품이라야!

반(反)유행 시대 시간을 초월한 명품이라야!

2월 9일. 파티를 하기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밤이었다. 뉴욕시의 수은주가 사상 최저 수준으로 뚝 떨어졌다. 경제는 꽁꽁 얼어붙었다. 하지만 맨해튼의 예술센터 파크 애비뉴 아모리에서 프랑스산 샴페인을 홀짝이며 와규 비프 샌드위치를 즐기는 손님들은 전혀 딴 세상 사람들 같았다.

173년 전통의 프랑스 가방 메이커이자 패션 하우스인 에르메스가 주최하는 파티였다. 명목은 다음날 에르메스가 메디슨 애비뉴의 타운하우스에 여는 278㎡의 남성복 매장의 개장 기념이었다. 에르메스의 미국 내 24번째, 세계 250번째 매장이지만 남성복 전용으로는 세계 최초다.

파티의 그런 표면적 명분과 달리 에르메스에는 축하할 만한 더 큰 이유가 있었다. 이 회사는 글로벌 금융위기를 이겨냈을 뿐 아니라 나아가 번창하기까지 한 소수 명품 브랜드 중 하나다. 지난해 대다수 패션 하우스는 부진을 면치 못했다. 베인&컴퍼니에 따르면 전체 명품시장 매출은 이번 불황 중 사상 처음으로 감소했다.

2009년 미국 내 매출은 10%, 세계적으론 8%가 줄었다. 그러나 에르메스는 1분기 11% 신장(그리고 미주 대륙에서 무려 20%)을 포함해 매출이 8.5%나 늘어났다. 비결이 뭐냐고? 비용을 절감하고 유행을 따르거나 대중시장을 겨냥하는 대신 에르메스는 자신들의 장기에 집중하는 전략을 택했다.

평생 변치 않는 흠잡을 데 없는 품질을 가진, 비싸지만 시간을 초월한 고전적인 제품의 제조다. 트렌드의 종말이라고 불러도 좋다. 에르메스를 비롯한 몇몇 일품 브랜드의 경험에서 보듯이 금융위기로 명품시장이 죽지는 않았다. 다만 소비자들이 더 차별적이 됐을 뿐이다.

“과시적인 소비, 눈에 확 띄는 로고, 화려한 색상을 멀리 하면서” 대신 신뢰할 만한 전통 명가 쪽으로 기울었다고 HSBC의 기업분석가 어완 램버그가 말했다. LVMH(대표 브랜드 루이뷔통의 지난해 매출은 두 자릿수 증가율을 기록했다)의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 말마따나 “위기가 찾아오면서 반짝이 장식 패션이 퇴조했다.”

대신 샌포드 C 번스타인의 루카 솔카가 말하는 이른바 ‘품질로의 도피’가 시작됐다. 일부 발빠른 기업은 기본으로 돌아가서 그 추세에 편승했다. 크리스티앙 라크루와처럼 유행에 민감한 브랜드가 파산할 때도 전통 브랜드들은 각자의 장기에 더욱 집중하는 전략으로 충성 고객을 붙잡았다.

에르메스는 클래식 가방과 스카프, 루이뷔통은 구식 가방, 버버리는 1차대전 컨셉트에 기초한 레인코트 등이다. 호텔 업계의 상황도 비슷하다. 리츠-칼튼 같은 신뢰받는 전통 호텔이 외풍에도 흔들림 없는 모습을 보여주고 래플스나 샹그릴라 같은 아시아 호텔들은 새로운 지역에서 전통적인 디자인과 분위기를 주도면밀하게 재현하는 전략으로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자동차 산업에서는 90년 역사를 자랑하는 벤틀리가 최근 시간상으로는 과거를 지향하면서도 기능적으로는 앞서 달려가는 초고성능 신모델을 선보였다. 항공산업도 그런 기류에 편승했다. 최고급 항공사들이 새로 선보인 퍼스트 클래스 기내 특실은 빅토리아 시대 열차와 항공여행의 화려했던 황금기를 연상케 한다.

이런 회사들은 모두 불황기에는 사람들(특히 부유층)이 소비를 중단하지 않는 대신 훨씬 더 보수적이 된다는 사실을 간파한 듯하다. 호황기엔 1년에 고가 핸드백을 5개씩 구입했던 여성이 지금은 한두 개로 만족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 한두 개는 품질과 영속성으로 알려진 브랜드 제품일 가능성이 크다.

“사람들은 희망을 찾고자 한다”고 램버그는 말했다. 그래서 루이뷔통 가방 같은 제품으로 눈길을 돌린다. “그냥 좋은 가방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귀중한, 거의 예술품에 가까운 제품”이기 때문이라고 솔카는 말했다. 토드의 디에고 델라 회장의 표현을 빌리자면 “투자 등급”의 제품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계절적 패션을 따르지 않는 중견 대기업이 유리하다. 뉴욕의 시장조사 업체 럭셔리 인스티튜트의 밀턴 페드라자에 따르면 이런 시기에는 “유행을 따르는 품목이 일부 있더라도 브랜드 전체가 지나치게 튀는 스타일을 추구하지 않는 기업이 성공한다. 베르사체 같은 브랜드는 잘 팔리지 않는다.”

이런 점을 인식한 장수 브랜드들은 자신들의 전통 핵심가치를 강조하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루이뷔통은 고루한 스타일의 가방으로 잘 알려진 156년 전통의 회사다(시계 같은 최신 제품들이 부진을 면치 못하는 동안에도 이런 가방들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이 회사는 최근 열렸던 뉴욕 패션주간 중 ‘장인의 기술’이라는 행사를 개최했다.

최신유행을 추구하는 젊은 디자이너들에게 장인정신과 전통기술의 숙련 같은 구식 가치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려는 취지였다. 말 굴레와 안장 공장으로 시작한 에르메스도 최신유행 제품보다 가죽제품과 지극히 고전적인 넥타이와 스카프를 강조했다. 새로 개장한 남성용품점에 진홍색 가죽 스니커즈와 8500달러짜리 야구 글러브를 들여놓았지만 이들의 주력상품은 분명 아니다.

에르메스 미국 사업부의 최고경영자 밥 차베스에 따르면 최근 향수 같은 유행상품의 판매는 감소한 반면 핵심제품의 매출 비중이 크게 높아졌다. 파리의 미술총괄 책임자 피에르 알렉시스 뒤마(43)는 에르메스의 핵심 컨셉트는 간단하다고 강조했다. “품질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달성하는가?”

차베스는 또한 서비스를 통해 차별화를 꾀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에르메스는 최신유행을 좇지 않는다”고 그는 말했다. “우리는 패션 하우스가 아니라 전통기능이 주축인 회사다. 우리는 품질이 오래 유지되고 쓸모가 아주 많은 제품의 생산을 업으로 삼는다.” 그러다 많은 장기 고객이 신제품을 구입하기보다 20년된 가방을 수선하려고 에르메스 매장을 방문하는 일이 더 많아지더라도 말이다.

그 말의 의미를 직접 경험하면서 깨달았다. 기사를 작성하는 지금 내 가슴 주머니에는 겉 표면이 오돌도톨한 에르메스제 소형 황갈색 가죽 다이어리가 들어 있다. 이 다이어리는 차베스와 뒤마가 강조하는 가치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프랑스인 여자친구에게서 처음 선물 받았을 때는 터무니없는 사치품으로 여겨졌다.

가격을 보고 놀라 자빠질 뻔했다. 하지만 5년 가까이 마구 굴린 뒤에도 닳은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품질 합격). 한편 그 다이어리를 휴대한 채 에르메스 매장을 두 번 찾아갔다. 한 번은 뉴욕에서, 한 번은 파리에서 포부르 생토노레 거리의 본점 매장이었다. 직원들이 나를 왕족처럼 모시는 데 몸 둘 바를 몰랐다. 사실상 가장 싸구려 다이어리를 알아보러 찾아갔는데도 말이다(서비스 합격).

에르메스는 그런 특색을 지키려 다각도로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우선, 선진국에서 명품이 잘 나가는데도 매장 확대에는 상당히 신중을 기한다. 중국은 최근 미국을 제치고 유럽에 이어 세계 2위 명품시장으로 올라섰다. 지난해 에르메스의 중국 매출은 29% 증가했다. 그럼에도 “아무 곳에나 에르메스 매장을 내지는 않는다”고 차베스는 말했다.

둘째, 수시로 파리의 본점에서 전 직원을 대상으로 교육을 실시해 서비스 수준을 높게 유지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제품을 프랑스(그리고 이탈리아와 스위스)에서 생산해 품질을 보장한다. 요즘 같은 글로벌 공급망 시대에는 보기 드문 일이다. 에르메스는 또한 대다수 다른 명품 브랜드와 달리 외부에 라이선스를 주지 않고 모든 제품을 직접 생산하는 체제를 고집한다.

그 때문에 분명 손해도 봤다. 일례로 수익성 높은 선글라스 시장에 뛰어들지 않았다. 일정 품질기준 이상의 제품을 생산할 방법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차베스는 그만한 희생은 감수해도 좋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얼마나 더 그럴까? 서구 경제에 마침내 봄볕이 들기 시작하면서 산업 분석가들과 명품업체 경영자들은 지금의 반(反)유행 추세가 얼마나 이어질지, 그리고 반짝이 장식이 언제 되살아날지 촉각을 곤두세운다. 번쩍거리는 브랜드들은 계속 부진에 허덕인다. 지난해 불가리의 매출은 14% 감소했다.

그리고 최근의 소비심리 조사를 보면 불황은 한 세대의 구매습관에 수십년 동안 영향을 미치는 경향을 보인다. 하지만 앞으로 유행과 사치가 다시 성행하리라 기대할 만한 이유가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인간의 타고난 본능이다. 뉴욕대에서 명품 마케팅을 연구하는 스콧 갤러웨이 교수는 사람들의 지갑이 다시 두둑해지기 시작하면 바로 과시적 소비가 재개되리라 예상한다.

“남자들에게 이 세상 곳곳에 자신의 DNA를 퍼뜨리려는 욕구가 있는 한 포르셰는 팔리게 마련이다”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여자들이 가능한 한 구애를 많이 받으려 애쓰는 한 계속 마놀로 블라닉 구두를 구입한다.”

맨해튼은 섹스 어필의 힘으로도 과거의 화려함을 되찾지 못할지 모르지만 아마 베이징은 가능할 듯하다. 소매업체들은 이미 중국·인도·브라질 같은 신흥시장에서 큰 호황을 누린다. 이들 신흥국가는 모두 불황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으며 중산층과 신흥부자가 폭발적인 증가세를 보인다.

이들이 글로벌 명품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지금은 20%선에 불과하지만 곧 급증한다고 베인& 컴퍼니는 내다봤다. 향후 5년간 이런 나라들에서 고소득층의 명품소비가 20~35% 증가한다는 분석이다.

이 조사가 에르메스를 비롯한 명품 브랜드에 던지는 메시지는 뭘까? 한마디로 미국에선 8500달러짜리 야구 미트가 많이 팔리지 않겠지만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의 축구공 판매는 완전히 다른 얘기일지 모른다는 점이다.

With ANDREW BAST and MOLLY O’TOO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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