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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루소’ 기타잇기를 아시나요?

‘동양의 루소’ 기타잇기를 아시나요?





조우석오해하지 말 일이다. 18세기 중반 일본 땅에 갔던 조선통신사 일행은 선진 지식을 한 수 아래 나라에 전수해준다는 자부심을 느끼지 못했다. 되레 저들 일본의 고학(古學)에 충격 받았다. 당시 일본은 성리학을 비판하면서 역동적인 유학의 새 경지를 전개하던 참이었다. 그 시절 유학자 오규 쇼라이와 이토 진사이 등은 조선 사대부가 숭배해왔던 유학 경전을 비판적으로 재해석했고, 이를 통해 근세 휴머니즘 유학의 토대를 전개했다. 전부터 나는 그런 풍토가 못내 부러웠다.

에도시대 일본의 역동성을 상징하는 오규 쇼라이에 느꼈던 부러움 내지 찬탄은 비슷한 시기인 조선 중·후기를 상징하는 노론의 영수 송시열 때문에 더욱 커진다. 조선 전기 조광조와 함께 중·후기의 사대부 송시열은 성리학 유일사상이라는 틀로 조선사회를 꽁꽁 묶어 놓았다. 사약을 받으면서도 “학문은 마땅히 주자를 주로 하고, 사업은 효종이 추진하고자 했던 뜻(北伐)을 주로 하라”는 유지를 남겼던 묻지마 소신파가 송시열 아니던가. 2000년대 한국사회에도 남아있는 유교 근본주의 망령의 출발이었다.

중국의 관학(官學)에 불과했던 성리학이라는 관(棺)을 머리에 이고 살아야 했던 조선 사대부들에게는 일본의 고학을 탄생시킨 담대함이 부족했는데, 오규 쇼라이에게는 그게 있었다. 얘기는 지금부터다. 나는 요즘 또 다른 오규 쇼라이를 19세기 말, 20세기 초 일본 사상사에서 확인했다. 기타 잇키(北一輝, 1883~1937)다. 1200쪽이 넘으니 정말 무시무시하게 두꺼운 전기·평전인 마쓰모토 겐이치의 ‘기타 잇키’(교양인 펴냄)의 주인공 이름이다. 기타 잇키는 스스로를 ‘동양의 루소’라고 칭했다. 20세기 벽두의 일이다.

당시 나이 스물넷에 자비출판으로 펴내야 했던 야심적인 첫 책 ‘국체론과 순정사회주의’를 광고하려고 신문에 직접 썼던 카피다. 사실 그를 좀 알던 동시대 일본인들은 그의 무시무시한 에너지에 놀라 마왕(魔王)이라고 칭했다. 변두리의 작은 섬, 니가타 앞바다의 사도(佐渡)에서 태어나 19세기 말 자유민권 시대의 공기를 들이마신 10대 성장기를 생각하면, 놀라운 입신 과정이 아닐 수 없다. 그런 무한질주는 메이지유신 전후 일본사회의 역동성 때문에 가능했으리라. 구한말 조선사회와는 딴판이었다.

과연 기타는 사회주의·아나키즘·민주주의에서 국가주의·천황주의·자유주의·개인주의 등 온갖 사상의 용광로에서 자신의 이념을 정련한 조숙한 청년이었다. 스스로를 ‘동양의 루소’라 칭했던 이유도 그런 까닭인데, 그는 단순한 책상물림이 아니었다. 자신의 사상을 실현하려고 공화주의 혁명을 꿈꾸며 신해혁명의 중국 땅에 뛰어든 열혈 혁명가였으며, 천황이라는 가짜 신화를 폐기하고 천황을 혁명의 수단으로 이용하려 했던 가공할 상상력마저 가졌다.

기타 잇키는 1936년에 일어났던 2·26 쿠데타의 정신적 지도자였다. 2·26은 1483명의 일본 청년 장교와 병사들이 부패한 재벌과 군 상층부를 제거하고 개혁을 이룬다는 목표 아래 천황 친정체제를 내걸고 일어섰던 사회적 지진이었다. 일본 근·현대사의 분기점이었던 2.26 쿠데타는 주요 거점을 점령하면서 성공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천황의 진압 명령에 따라 ‘4일 천하’로 마무리된 이 쿠데타의 배후인물로 기타 잇키가 지목됐다.

배후인물이란 지목은 한편으론 맞고 한편으론 틀린다. 청년 장교들은 그가 쓴 ‘일본개조법안대강’의 영향을 받고 그 책을 바이블 삼았다. 그러나 청년장교들은 기타 잇키의 혁명 구상을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다. 편차는 컸다. 기타는 천황을 혁명의 수단으로 이용하려 했지만, 청년 장교들은 천황을 ‘받들어’ 모시는 혁명을 계획했다. 그 결과 천황의 재가를 기다리다가 실패했다. 그럼에도 기타 잇키는 사형을 당했다. 드라마의 스토리는 일단 거기까지다.

벌써 앞뒤가 잘 맞지 않는다는 걸 눈치 챈 분이 있으리라. ‘사회계약론’의 루소를 자처했다면 엄연히 민권론자일텐데, 왜 전에도 그렇고 지금껏 천황파로 오해돼 왔을까? 책에 그 대목이 충분히 설명되지는 않았으나, 어쨌든 간에 이 책의 저자 마쓰모토 겐이치는 ‘기타 잇키’를 저술했다는 이유로 우파로 지목 받았다고 한다. 상대적으로 정교한 일본 사회라지만 허술한 구석도 있음을 보여준다. 그 때문에 신간 ‘기타 잇키’는 그동안 극우 파시스트, 불우한 혁명가로 낙인 찍혀온 기타 잇키의 혁명가적 진면목을 복원해 낸 저술이다.

결정적으로 이 책은 ‘좌익=혁명가’ ‘우익=내셔널리스트’라는 오랜 등식을 깨준다. 그 대목이 흥미진진하다. 이 기회에 재확인하지만 19세기, 20세기 동북아와 동아시아에서 그런 등식은 통하지 않는다. 기타 잇키만 해도 국가사회주의자라고 해야 옳다. 국가사회주의라고 하면 제3제국의 히틀러를 연상할 사람이 적지 않겠지만, 나는 싱가포르의 리콴유부터 떠오른다. 알려진 대로 그가 쿠데타를 일으켰을 당시 영국·미국의 정보기관들은 기겁했다. 좌파 경력의 리콴유가 총대를 맸다면, 그건 사회주의 혁명이라고 짐작했다.

하지만 리콴유는 좌파 이전에 유교 좌파라고 해야 할 대동사상(大同思想)을 가졌으며, 이것이 마르크시즘·내셔널리즘과 결합해 오늘의 싱가포르 발전을 낳았다. 싱가포르의 발전은 도시국가의 사례라서 일반화하기 힘들다면 20세기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한국사회의 발전도 훌륭한 사례연구 감이다. 박정희의 쿠데타 당시 미국 정보기관에서는 좌파 쿠데타가 터졌다고 판단하고 전전긍긍했다. 그 점이 리콴유와 같다. 국가 부흥을 창출해낸 점도 닮았다. 어쨌거나 내 눈에 박정희야말로 우익 혁명가의 전형이다.



박정희는 좌우 사상의 이념편차를 모두 수용했던 인물이었다. 그에게 좌우이념의 스펙트럼은 생각보다 넓었다. 사람들은 그걸 이렇게 비유한다. 뱀도 소도 물을 마시지만, 나오는 게 독일 수도, 젖일 수도 있듯이 박정희에게 젊은 시절 좌파 이념은 젖이 됐다고……. 맞다. 하지만 그 이전에 유교 좌파인 대동사상이 박정희의 핏줄에 흘렀으며, 그게 근대의 좌우 이념을 소화하는 밑천이 됐다. 오랫동안 그런 생각을 해왔으나 똑 떨어진 증거가 부족했다.

그러나 이윽고 드러난 기타 잇키의 존재야말로 우익 혁명가가 동북아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함을 보여준다. ‘기타 잇키’는 그 자체로 훌륭한 읽을거리이지만, 동시에 나에게는 오랜 가설을 입증해주는 자료다. 누구는 물을 것이다. 박정희와 2·26 사건의 직접적인 연결고리가 있느냐고? 있다. 그는 5·16 직전 “2·26 사건 때 일본의 우국 군인들처럼 우리도 일어나야 할 것 아닌가?”라고 여러 자리에서 기염을 토했다.

이 책의 옮긴이들은 그걸 새삼 지적했고, 나 역시 공감한다. 결정적으로 박정희는 대구사범 고학년 당시 2.26사건의 추이를 비상한 시선으로 지켜보았다. 당시 동급생들 거의 전체가 그러했다. 박정희는 유독 강했다. 훗날 만주군관학교 입학도 2.26 당시 받았던 영향, 기타 잇키라는 인물을 암묵적으로 사숙했기 때문이라고 보인다. ‘기타 잇키’ 옮긴이의 지적처럼 5·16의 모델이 2·26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흥미롭지 않은가? 한국현대사의 미스터리 하나를 이웃 일본의 근·현대사에서 풀 수 있다는 것이?

[필자는 문화평론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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