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제약업 도약의 마지막 기회
한국 제약업 도약의 마지막 기회
세계 제약시장은 오리지널 의약품의 ‘특허 만료’가 몰리는 시점에 큰 변동을 겪는다. 1980년대가 그랬다. 당시 이스라엘의 작은 제약사인 테바는 합성의약품의 특허 만료와 함께 복제의약품(카피약 또는 제네릭이라고 함) 시장이 열리자 글로벌 시장을 겨냥한 수출 전략으로 현재 세계 20위권 제약사로 성장했다. 이 회사는 복제약으로 덩치를 키웠지만 이후 단순한 복제약 제조회사에 안주하지 않고 신약 개발에 적극 나섰다.
기회는 다시 왔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요즘 제약·바이오 업계는 시장의 물줄기가 바뀌는 중이다. 시장 상황부터 보자. 지난해 세계 제약시장은 대형 M&A(인수합병)가 단연 화제였다. 다국적 제약회사 로슈는 항암제인 허셉틴과 리툭산, 대장암 치료제 아비스틴을 개발한 바이오 기업 제넨텍을 인수했다. 인수가격은 468억 달러였다. 화이자는 대형 제약회사인 와이어스를 680억 달러에 사들였다.
굴지의 회사들은 왜 전열 재정비에 나선 것일까?
최근 제약업계는 기존 블록버스터급 합성의약품의 효능을 능가할 만한 신약을 개발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을 인정하는 분위기다. 실제로 화이자는 개발 중이던 심혈관질환 및 비만 관련 합성 신약의 효능이 기존 약물보다 탁월한 효과를 발휘할 수 없다고 판단해 신약 개발을 중단했다.
바이오시밀러는 후발주자에 유리이게 다가 아니다. 또 하나 중요한 이슈가 있다. 블록버스터급 의약품의 특허 만료다. 현재 의약품 판매 1위 제품은 2008년 135억 달러의 매출을 기록한 화이자의 고지혈증 치료제 리피토다. 하지만 리피토는 2011년 특허가 만료된다. 미국 대형 제약사인 일라이 릴리 역시 자사 매출의 20% 이상을 차지하는 정신분열증 치료제인 자이프렉사 특허가 2011년 만료된다. 미국 언론은 일라이 릴리가 M&A를 추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런 상황을 앞둔 제약업체들이 M&A를 통해 안정적인 매출을 가능케 하는 신약을 확보하는 것이다.
제약회사는 특허를 통해 자사가 개발한 신약의 독점적 지위를 보장 받는다. 신약 하나가 시장에 출시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약 5000~1만 개의 후보 물질 가운데 단 한 개의 물질만이 신약으로 최종 승인을 받는다. 보통 약 1조원 이상의 개발비와 10~15년이라는 긴 기간이 소요된다. 특허는 신약 개발이 갖고 있는 고(高)위험 요인을 상쇄해 주는 일종의 방어막 역할을 한다. 이런 특허가 만료된다는 것은 가치의 하락을 의미하기 때문에 제약회사의 이익 감소와 직접 연결된다.
백혈병 치료제로 유명한 글리벡의 경우 국내에서 한 달 약값이 수백만원에 이를 정도의 고가지만 특허가 만료되는 2013년이 되면 복제약 출시가 가능해 약값은 기존의 최대 60%까지 떨어질 수 있다.
일반적으로 오리지널 의약품의 특허가 만료돼 시장에 10개 정도의 복제약이 시판되면 약값은 기존 대비 20% 수준으로 하락한다(단, 우리나라의 경우 국내 제약회사 대부분이 복제의약품 제조회사로서 국내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국내 복제의약품 가격은 미국이나 유럽 등 선진시장보다 높게 책정된다).
특허가 만료되면서 그동안 누렸던 독점적 위치를 잃고 급격히 매출액이 감소하는 일명 ‘페이턴트 클리프(patent cliff)’는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는 기존의 대형 제약회사에는 큰 위기지만 우리나라와 같은 후발주자에는 새로운 기회다.
주목되는 것은 이러한 특허 만료가 합성의약품뿐만 아니라 바이오의약품에서도 가시화된다는 점이다. 1980년대 합성의약품 시장에서 일어났던 상황이 현재 바이오의약품 시장에서 재현되는 것이다. 바이오의약품의 복제약이라 할 수 있는 바이오시밀러가 주목 받는 배경이다.
관련 업계에 따르면 2008년에만 64억 달러어치가 팔린 암젠의 바이오의약품 ‘엔브렐’은 곧 특허가 만료된다. 또한 3년 내에 블록버스터급 바이오의약품 20여 종의 특허가 만료된다. 업계에서는 바오이시밀러 시장 규모가 2020년에 450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한다.
합성의약품의 복제약은 화학 구조만 알면 오리지널 제품과 동일하게 복제할 수 있기 때문에 비교적 생산하기 쉽다. 약의 활성성분이 원제품과 같아 승인을 위한 별도의 임상시험을 요구 받지도 않는다.
하지만 바이오시밀러의 경우 오리지널 의약품과 효과가 같아도 제조 과정상 100% 동일하게 복제할 수 없기 때문에 ‘시밀러(similar)’로 명명된다. 또한 원제품과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안전성과 효능 면에서 생물학적 동등성 입증을 위한 대규모 임상시험 등의 절차가 불가피하다. 그렇기 때문에 바이오시밀러 생산을 위해서는 합성의약품 복제약에 비해 공장 건립 등 많은 자본이 투입되고 고도의 기술력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바이오시밀러 개발이 우리와 같은 후발주자에 전략적으로 선택되는 이유가 있다.
이미 시장에 출시돼 안전성과 유효성이 검증된 바이오의약품의 복제약이 신약 개발에 비해 연구개발 비용이 현저히 낮고 개발기간을 단축할 수 있어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합성의약품이든 바이오의약품이든 신약 개발에 따른 위험성은 높다. 국내 제약사가 KFDA(식품의약품안전청)에서 허가를 받은 신약은 2010년 현재 14개 제품에 불과하다. 미국 FDA에 승인 받은 제품은 LG생명과학의 팩티브가 유일하다. 또한 미국 FDA의 승인 허가 기준이 해마다 엄격해지면서 FDA로부터 승인 받는 신약 수가 매년 감소하고 있는 점은 국내 제약사가 신약 개발을 통해 글로벌 시장으로 진출할 수 있는 여건이 더 어려워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이유로 국내 제약·바이오 기업에 바이오시밀러는 글로벌 경쟁력을 확충하기 위한 대안이자 디딤돌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제조업을 기반으로 성장한 국내 대기업의 바이오시밀러 시장 진출은 고무적이다. 이미 굴지의 대기업이 차세대 성장산업으로 바이오 산업을 꼽고, 그 첫 주자로 바이오시밀러를 선택했다. 이는 신약 개발에 비해 실패할 위험이 상대적으로 낮고 생산설비 구축과 글로벌 마케팅 측면에서 자본 집약적인 제조업 특성을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국내에서는 기존 제약업계는 물론 삼성전자, 한화케미칼과 같은 대기업과 이수앱지스 등의 바이오벤처 기업, 그리고 위탁제조기관으로 바이오의약품의 생산 노하우를 보유한 셀트리온 등이 관련 시장에 진출했거나 준비 중이다.
국내 바이오의약품 신약 2개 불과
시장은 아직 척박하다. KFDA에서 승인 받은 14개의 국내 신약 중 바이오의약품은 단 2개에 불과하다. 현재 많은 제약회사가 중동이나 동남아시아 등에 수출하는 주요 바이오의약품은 빈혈치료제인 적혈구조혈자극호르몬과 인체성장호르몬 등 국내 특허가 만료되었거나 특허가 없는 바이오의약품의 복제품인 경우가 많다. 이들을 바이오시밀러라고 하지 않는 이유는 임상시험 절차(오리지널 의약품과의 대조 비교실험)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미국이나 유럽 등 선진시장으로의 진입이 거의 불가능하다.
국내 바이오시밀러 제조사가 개발하려는 제품은 대부분 항체치료제에 집중돼 있다. 항체치료제의 경우 기존 국내 제약사가 생산한 경험이 있는 적혈구조혈자극호르몬이나 인체성장호르몬에 비해 분자량이 크고 복잡해 제조상의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항체치료제는 연평균 14%의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으며, 2014년께 전체 바이오의약품 분야에서 약 40%의 점유율을 보일 것으로 전망된다. 항체치료제는 주로 암이나 류머티스 관절염 같은 만성질환 치료제로 꾸준히 수요가 늘 것으로 보인다.
현재 세계 바이오의약품 매출액 기준 상위 10위 이내 제품 중 6개 제품이 2019년이 되면 특허가 만료된다.
지난 3월 미국 의회를 통과한 의료보험개혁안은 바이오시밀러가 미국에서 승인 받을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국내 바이오 산업계에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켰다. 유럽연합은 지난 2005년 세계 최초로 바이오시밀러 승인을 위한 가이드라인을 마련한 후 현재 13개의 바이오시밀러 제품이 시장에 출시됐다. 하지만 미국은 대형 제약회사의 반발로 그동안 바이오시밀러 승인을 위한 허가 방안조차 마련하지 못했다.
이번 개혁안은 미국 바이오시밀러 시장의 물꼬를 텄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1984년 합성의약품의 복제약에 대한 허가관리를 규정한 법이 제정된 후, 미국 시장에서 복제의약품 제조사들의 시장점유율이 1984년 19%에서 2008년 72%로 급증한 사실을 감안할 때 이번 개혁안 통과가 바이오시밀러 시장의 확대로 이어질 것은 자명하다.
바이오시밀러 개발을 통해 궁극적으로 우리나라의 제약·바이오 산업계가 이루려는 목표는 바이오신약 개발이다. 다시 말해 바이오시밀러는 그 자체로 국한된 산업이 아니라 글로벌 시장 진출을 통해 자본을 축적하고 바이오신약 개발로 발전할 수 있는 디딤돌 역할을 하는 중간단계의 산업이라 할 수 있다. 바이오신약에 비해 단기간 내에 글로벌 산업화할 수 있는 바이오시밀러는 한국 제약·바이오 산업계에 있어서는 분명 사반세기 만에 찾아온 절호의 기회다.
신민정 한국바이오협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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