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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짜 피아니스트 서방 바느질로 감싼 각시

괴짜 피아니스트 서방 바느질로 감싼 각시

▎서울 성북동에 있는 한복집 ‘효재’를 감싸고 있는 담쟁이가 탐스럽다.

▎서울 성북동에 있는 한복집 ‘효재’를 감싸고 있는 담쟁이가 탐스럽다.

지난 8월 28일 충남 금산군에 있는 보광사 오르는 길이 꽉 막혔다. 이날 저녁 보광사에서 열린 피아니스트 임동창(54)의 산사음악회에 가려는 사람들의 행렬이었다. 차 한 대만 지나다닐 수 있는 좁은 길. 늦게 도착한 이들은 40분쯤 걸리는 오르막을 걸어서 올라야 했다. 운 좋게 절에 식용유를 배달하는 차를 얻어 타고 절 근처까지 갔다. 보광사에 들어서자 마당을 가득 채운 관객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빗소리가 지나간 공간을 음악이 채웠다. 임동창이 ‘동창아 동창아 뭐하니?’란 창작곡을 연주했다. 대금 연주, 판소리에 맞춰 피아노 반주를 할 때는 건반뿐 아니라 피아노 현을 퉁기기까지 했다. 보광사는 한동안 임동창이 작곡을 했던 곳이다. 이 자리에 오지 못해 가장 아쉬워한 사람은 아내인 한복 디자이너 이효재(52)다. 꼭 참석하려고 했지만 결국 시간을 내지 못했다.

임동창은 “오늘 통화할 때 각시가 ‘잘하라고’ 응원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이 함께 보낸 시간은 많지 않다. 남편은 남원,아내는 서울에서 산다. 자연주의 살림꾼으로 알려진 이효재는 2006년 <효재처럼> 이란 책을 내면서 세간에 소개됐다. 어릴 때부터 예쁜 것 만들기를 좋아했던 그녀는 어머니의 한복집을 물려받았다. 세상이 변해도 예전 방식대로 방울토마토를 길러 따 먹고, 음식을 해 먹었다. KBS ‘인간극장’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 그녀의 생활이 소개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현재 서울 성북동 길상사 맞은편에서 한복집 ‘효재’를 운영하면서 보자기 아트, 집필 활동을 한다.

그녀에게 기업들도 큰 관심을 가졌다. 폭스바겐, 화장품 업체 크리니크에서 각각 자동차와 화장품을 그녀의 보자기로 싸는 퍼포먼스를 했다. CJ오쇼핑에서는 2009년 5월부터 이효재의 ‘효재 침구’를 팔았는데, 첫 방송에서 40분 만에 준비 수량 800세트가 매진됐다. 전국 각지를 떠돌던 임동창은 지금은 전북 남원에 자리를 잡았다. 여기서 아이들을 가르친다. 음악 교육이 중심이지만 방황하는 아이들에게 즐겁게 걸을 수 있는 길을 안내하기도 한다. 그는 15세 때 우연히 접한 교사의 피아노 연주 소리에 끌려 피아니스트의 삶을 시작했다. 공연, 방송 활동을 하던 그는 10년 전 EBS 기획 시리즈 ‘임동창이 말하는 우리 음악’ 마지막 강연에서

“열심히 공부해 결과를 보여주겠다”고 말하고는 홀연히 대중 앞에서 사라졌다. 올해는 이 부부에게 뜻깊은 해다. 임동창이 마침

▎8월 28일 충남 보광사에서 임동창과 함께하는 산사음악회가 열렸다.

▎8월 28일 충남 보광사에서 임동창과 함께하는 산사음악회가 열렸다.

내 수제천, 전통가곡 41곡, 상영산, 영산회상, 여민락, 대취타,산조 등 우리 음악을 2000여 쪽에 이르는 피아노 곡으로 편곡했

다. 우선 그중 절반 정도의 악보를 출간했다.

지난 7월 6일 그는 ‘효재’에서 이 음악을 담은 창작곡집 ‘임동창의 풍류, 허튼가락’ 제작 발표회를 열었다. 이날만은 아내도 참석했다. 허튼가락의 ‘허튼’은 ‘흩뜨린’ 혹은 ‘흐트러진’이라는 뜻이다. 허튼가락은 임동창이 고1 때부터 ‘어떻게 해야 오롯한 내 음악을 만들 수 있을까’라는 화두를 고민하다 찾은 결실이다. 그는 초보자도 허튼가락을 쉽게 연주하고 음악을 즐길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발표회장에서 피아노 전공자와 초보자를 갑자기 불러 허튼 가락 악보를 보고 연주하게 했다. 악보의 어느 부분에서 시작해야 할지를 파악하기 어렵다며 고민하던 두 사람은 곧 건반을 두드렸다. 임동창은 참석자들에게 “연주에 큰 차이가 없죠?”라고 물었다.

그는 이날 아내 이야기를 꺼냈다. 이효재는 지난 10년 동안 작업에 몰두하는 남편을 정성껏 도왔다. 임동창은 신라 시대에 창작돼 궁중 연례와 무용 반주 음악으로 쓰인 수제천을 2시간 짜리 피아노 곡으로 만들어 보자는 생각에서 작업을 시작했다. 기간은 1년으로 잡았다. 악보를 내주기로 약속한 출판사에 곡이 완성될 때 까지 1년간 한 달에 500만원씩 빌려 달라고 요청했다. 그런데 4

개월이 지났을 때 도저히 1년으로는 될 것 같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때가 2000년. 고민 끝에 이효재를 찾아가 “돈 있어?”라고

물었다. 그녀에게 2000만원을 받아 출판사에서 받은 것을 갚은 후 작업을 계속했다. 발표회장 한쪽에 앉아 있던 이효재의 얼굴에 여러 감정이 교차해 지나갔다. 이날 그녀는 손님들에게 연잎밥과 쪄낸 수육에 잘 익은 총각김치를 곁들인 저녁상을 내놓았다. 그녀는 “‘10년이 가네요’라고 했더니 지인이 ‘형수, 일찍 끝난 거 아니에요? 안 끝났으면 또 어떻게 할 거냐’고 말해 웃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더라고요. 그분은 그 말 한마디로 밥값 하고 갔어요.”
▎‘효재’ 마당에는 다양한 산나물이 자란다.

▎‘효재’ 마당에는 다양한 산나물이 자란다.

이효재는 2000년 친한 언니 소개로 임동창을 만났다. 임동창은 이효재를 처음 봤을 때 원시림을 떠올렸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순수한 숲처럼 영적인 느낌이 강했어요. 처음 만났을 때는 영혼만 있었죠. 저를 만나 육신이 생긴 거죠(웃음).” 이효재에게 임동창의 첫인상은 좋지 않았다. 예쁜 것을 좋아하는 그녀에게 빡빡이 머리에, 맨발, 남루한 옷차림의 그는 매력적이지 않았다. 그녀는 그를 다시는 안 보기로 했다.

그런데 중매를 선 지인은 그녀에게 두 달만 만나 보라고 권했다. 그녀는 좋아하는 언니가 제일 존경하는 분이라는 그를 좀 더 지켜봤다. 결국 그녀는 임동창을 좋아하게 됐다. 이효재는 돈 앞에서 당당한 그의 모습이 좋다고 했다. 그녀는 400만원 정도의 빚이 있는데도, 공연 출연료 600만원을 뒤풀이할 때 손님들을 푸짐하게 먹이는 데 보태 쓰라고 말하는 그의 배포에 끌렸다. 이효재는 또 공식 연주를 마치고 관객이 다 나갈 때까지 연주를 계속하는 모습을 보고 따뜻한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고 했다. 임동창은 대학 때부터 거친 괴짜로 통했다. 한번은 피아노 공연에 필요한 마이크를 가져다 달라고 했는데, 제작진의 반응이 없자 거칠게 욕을 했다. 방송 녹화 때 진행자에게 박수를 치는 주부 방청객에게 ‘진행자보다 아이를 키우는 여러분이 더 훌륭하니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해 연출가를 당황하게 한 적도 있다. 어디에서든 뭔가 잘못됐다고 여기면 큰 소리를 냈다. “그랬던 저의 따뜻한 속살을 각시가 봤어요. 이런 여자는 다시 없다고 여겼죠.”

두 사람의 지난 10년 또한 평범하지 않았다. 처음 6년 반 동안 남편은 별다른 수입 없이 작곡만 했다. 아내가 생활비를 벌었다. 2007년 충남 서천에서 중학교 음악 선생님으로 잠시 일하게 되면서 남편은 아내에게 신용카드를 돌려줬다. 임동창은 “그때 마음이 무척 좋았다”면서 “한번 신용카드를 주니까 다시 받기는 어렵더라”며 웃었다. 7월 22일 ‘효재’에서 다시 만난 그는 “여기 오면 가슴이 짠해 잘 오지 않는다”고 했다. 이효재는 남편이 무척 어려운 일을 하고 있다며,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한다. “제 일은 눈에 보이는 헝겊을 오려 붙이면 되는 것이지만 작곡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조립하는 일이거든요.” 살림을 즐기고, 요리 잘하는 아내를 만난 임동창은 주변 남성의 부러움을 샀다. 얼마 전 지리산에서 만난 한 등산객은 그에게 아내를 잘 얻어 좋겠다고 했다. 7월 22일 이효재는 묵은 김치를 넣고 비빈 국수를 간식으로 내왔다. 쫄깃쫄깃하고 새콤달콤했다. 임동창은 말 없이 그릇을 싹싹 비우고 국수 한 그릇을 더 먹었다. 아내는 남편이 국수를 먹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언뜻 보면 아내만 남편에게 헌신하는 것 같다. 하지만 실상을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이효재는 진심으로 요리, 마당 가꾸기 등의 집안일을 즐긴다. 남편은 아내가 좋아서 하는 대로 그냥 둔다. 그는 행사를 열때 아내의 일정을 먼저 확인한다. 제작 발표회도 아내가 일본으로 팬 미팅을 가는 시기를 피해 날짜를 잡았다. 취미 생활 하나 공유하는 게 없는 이 부부가 함께 관심을 갖는 주제가 있다. 교육이다. 임동창이 길을 못 찾은 아이들을 가르친다고 할 때 이효재는 “사람은 안 바뀐다”고 솔직히 얘기했다. 남편은 그래도 아이들에게 공을 들였다. 그리고 변화가 나타났다. 어른이 들어와도 방바닥에 누워 인사조차 않던 아이들이 이제는 공손하게 예의를 갖춘다. 임동창이 가르치던 학생 중 한 명은 얼마 전 마음을 고쳐 먹고 외국어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이효재는 이 학생을 ‘싱그러운 아이’라고 불렀다. 그녀는 아이들이 바뀌는 모습을 보면서 이제는 “사람이 바뀌더라”고 말한다. 부부는 각자 다른 분야에서 한국 문화를 알릴 계획이다. 이효재는 10월에 일본 팬들을 대상으로 ‘효재’에서 열 ‘김치 축제’를 준비한다. 그녀는 배우 배용준이 출간한 책 <한국의 아름다움을 찾아 떠난 여행> 을 통해 일본에 알려졌다. 이효재가 배용준에게 집에서 김치 담그는 법, 한국 가정식, 한복 등을 가르친 게 책에 고스란히 담겼다. 그녀는 배용준과 함께 도쿄돔을 찾아 4만 5000명 앞에서 보자기 아트쇼를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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