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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에서 녹음한 소리라야 제맛 나죠'

'한옥에서 녹음한 소리라야 제맛 나죠'

▎김영일 대표는 서울 성북동에 있는 악당이반의 감청실에서 전국을 돌며 채집한 우리의 소리를 듣고 또 듣는다.

▎김영일 대표는 서울 성북동에 있는 악당이반의 감청실에서 전국을 돌며 채집한 우리의 소리를 듣고 또 듣는다.

“국악이 뭔지 아십니까?”

“네?”

“국악이 뭐라고 생각하냐고요.”

“국악은….” 너무 당연한 얘길 왜 물을까 의아해 하며 말끝을 흐리자 그가 말문을 가로챘다.

“국악은… 이 땅의 국민이 모르는 음악이 국악입니다.” 국악 음반사 악당이반(주)의 김영일(49) 대표와의 인터뷰는 이렇게 시작됐다. “우린 뽕짝도 알고 힙합도 알지만 장단이 뭔지, 중머리가 뭔지는 잘 모르잖아요.”

모르는 게 아니라 아예 관심이 없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말하는 김 대표조차도 한땐 라디오에서 국악이 흘러나오면 채널을 돌리거나 아예 꺼버렸다고 한다. “국악은 잔칫집 음악이거나 어르신들이 흥얼거리는 콧노래 정도로만 알았어요.”

1996년, 김 대표가 사진작가로 한창 잘나가던 때다. 한 잡지사의 의뢰로 각 장르의 젊은 음악가를 촬영했다. 그날 그를 “미치게” 만든 한 여성을 만난다. 그녀는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스튜디오에 나타났다. 판소리 전문의 국악인 최수정씨였다. 말문이 트이면 세상에 그런 달변가도 없지만 일할 때는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김 대표가 그녀에게 말했다. “난 사진 박을 테니 편하게 노래해 보세요.”

“아서라 세상사 허망(虛妄)허다…(중략) 젊어 청춘에 먹고 노지, 늙어지면은 못노라니라, 거드렁 거리고 놀아보자.”

그녀가 카메라는 아랑곳하지 않고 ‘편시춘’이라는 단가를 구성지게 뽑아냈다. 본격적으로 판소리를 하기 전에 목을 틔우는 노래다. 그 소리가 그의 머리를 쨍하고 울렸다. 그때부터 촬영은 뒷전이고 질문 공세가 이어졌다. “국악이 뭡니까?” “국악인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녀와 얘기를 두어 시간 나눈 뒤에야 김 대표는 그녀의 모습을, 아니 그녀의 소리를 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만남은 김 대표의 인생을 바꾸어버렸다.

“이렇게 좋은 걸 여태 모르고 살았나”하는 자책감부터 앞섰다. 김 대표는 만사를 제쳐두고 국악 하는 사람들을 찾아 나섰다. 지리산에서 득음하려고 ‘피 터지게’ 목을 틔우는 수련생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는 국악의 힘을 실감했다. “북은 소리를 휘어잡으려 하고, 소리는 그 북을 타고 넘으려는” 순간을 지켜보면서 “나 혼자서 이 소리를 즐겨선 안 되겠다”고 결심했다. 소리하는 사람들의 인생 이야기도 기막히게 재미났다.

국악인 배일동씨는 원양어선 기관사로 일하다 판소리를 향한 간절함을 접지 못하고 출가하는 구도자의 심정으로 판소리에 입문했다고 한다. 내리 7년을 전남 순천의 선암사와 지리산 계곡에서 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는 선암사 운수암에서 30분 정도 올라간 곳에 천막을 치고 하루 서너 시간 잠을 자며 넋 나간 사람처럼 소리에 몰두했다”고 김 대표가 말했다.

국악인의 삶의 역정을 건네 들으면서 김 대표는 신들린 듯 국악에 빠져들었다. TV나 라디오 국악 프로그램도 듣고 레코드점에 가서 음반을 닥치는 대로 사 모아 열심히 듣고 또 들었다[김 대표는 라디오 국악방송(수도권 FM 99.1MHz)이 전국으로 송출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김 대표가 생각한 만큼 국악 음반이 그리 많지 않았다. 짐작은 쉬 갔다. 어느 누가 경제성이 없는 음반을 제작하겠는가?

김 대표는 기록하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대학(중앙대)에서 사진을 공부했다. 눈에 보이는 피사체를 마음에 간직해도 좋지만 다른 사람과 공유하게끔 어떤 형태로든 남기는 일도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소리’를 만났다. 게다가 우리의 음악이어서 “더더욱 기록하고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전통음악은 사랑방처럼 아담한 공간에서 그리 많지 않은 관객과 교감해야 제 맛이 난다.사진은 경상도 함양에 있는 아름지기 함양한옥 안채 마루에서 거문고를 연주하는 김준영씨(왼쪽).

▎전통음악은 사랑방처럼 아담한 공간에서 그리 많지 않은 관객과 교감해야 제 맛이 난다.사진은 경상도 함양에 있는 아름지기 함양한옥 안채 마루에서 거문고를 연주하는 김준영씨(왼쪽).

음향·녹음 관련 지식이 전무했던 그로서는 새로운 도전이었다. 우선 녹음 공부를 해야 했다. 김 대표는 1997년부터 2000년 초반까지 틈틈이 북미와 유럽을 돌아다니며 마스터링 작업기술을 배웠다. 할아버지는 물론 전직 군인이었던 아버지도 당대론 엄청난 오디오광이었단다(일제시대 서울에서 평양으로 오토바이를 타고 새로 나온 음반을 사러 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일본에서 클래식 음반이 출시되면 서울보다는 평양에 세 배쯤 더 많이 배포됐다. 선교사들 덕분에 평양에 서양 문물이 더 빨리 전해졌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귀 너머로 들은 음악이 부지기수다. 그는 지금도 세계적인 첼리스트들의 이름을 줄줄이 꿰면서 연주만 듣고도 연주자가 누구인지 알아차릴 정도다. ‘듣는’ 능력도 ‘보는’ 능력만큼이나 남다르다는 얘기다.

1999년 국내에 세 대밖에 없다는 녹음기와 지상파 방송국에서조차 애지중지하며 ‘아껴 쓰는’ 진공관 마이크를 구입했다(현재는 모두 14대가 있다). 마이크 하나가 웬만한 중형차 값과 맞먹는다. 이 마이크들은 음색이 따뜻해 우리의 소리와 잘 어울린다. 김 대표는 국악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이 투자한 돈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값지다고 여기기 때문에 고가의 장비 구입에 망설이지 않았다. 세계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는 음질을 담고 싶기 때문이다.

10년 가까이 채집한 국악 마스터 테이프를 들고 김 대표는 국내 유명 음반사 문을 두드렸다. 돈 벌어줄 음악을 찾는 음반사 사장들이 김 대표의 국악을 달가워할 리 없다. 어떤 이는 “그리 세상 물정을 모르느냐”며 핀잔까지 줬다(그때 그가 찾았던 유명 음반사들은 지금 대부분 문을 닫았다). 김 대표는 음반제작사를 찾다가 허송세월하겠다 싶어 아예 회사를 설립하기로 결심했다. 2005년 그렇게 악당이반(주)이 설립됐다. 국내에서는 유일한 국악전문 기획·음반·영상 법인 제작사다. 400 여 개의 국악 음원 마스터를 보유했으며 20 여명의 개인 연주자와 세 개 단체가 이 회사에 소속돼 음악작업을 한다. 그동안 300여 차례의 녹음 작업을 거쳐 판소리·산조·정악·창작음반을 포함한 50여 종의 국악음반을 내놓았다. 녹음 기사, 연주·판소리 기획자 등 함께 악당을 이끌어 가는 5명 직원은 모두 국악 전공자다. 김 대표는 “내가 국악을 잘 모르면 직원들이라도 잘 알아야 한다”며 신뢰감을 드러냈다.

▎서울 성북구 정릉동에 위치한 한규설 가옥에서 민요를 부르는 강효주씨.

▎서울 성북구 정릉동에 위치한 한규설 가옥에서 민요를 부르는 강효주씨.

김 대표는 국악에 전념하기로 맘을 굳혔지만 가족의 동의를 구해야 했다. 나 좋자고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한 집안의 아들로서 책임감을 저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느 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제가 국악을 하겠습니다”라고 여쭈었다. 5분여 묵묵부답이던 아버지께서 갑자기 “자네 그거 하소”라고 승낙하셨다고 한다. 음악듣기에 묻혀 살던 부친인지라 음악에 빠진 아들의 심정을 헤아리신 걸까? 그의 아내도 “식구들 굶기지나 말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등학생 자녀를 둔 가장이지만 그에겐 아직 집 한 칸도 없다. 평수가 좁아도 좋으니 집을 사자는 아내의 애원을 뿌리치면서 그는 국악 음반 제작에 모든 것을 투자했다.

그는 악당이반을 설립하기 전에는 11명의 사진가를 모아 영상기획·제작 전문 대행사인 그루비주얼(주)을 운영했다. 이 회사가 악당이반의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한다(현재 김 대표는 이 회사의 대표직에서 물러나 이사로 재직한다). 11명의 사진작가들은 각자 스튜디오나 회사를 운영하지만 대형 프로젝트가 생기면 그루비주얼로 헤쳐모인다. 거기서 생긴 매출의 10%를 국악에 투자한다.

15년째 김 대표와 인연을 이어가는 그루비주얼의 이종근 대표는 “김 대표가 국악 사업을 시작한다고 했을 때 반대는 별로 없었다”고 말했다. “그동안 사진만 생각했는데 국악이라는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게 돼서 기뻤어요. 국악 지키기는 누군가 꼭 해야 할 일인데다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서 작은 힘이라도 보태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대표는 “코드가 너무 잘 맞았다”고 말했다. “사라져 가는 것을 담아서 기록하는 일이 너무 재미있어요. 지금 당장은 인정 못 받더라도 후세에 물려줄 역사 기록이고 문화 콘텐트는 미래의 가장 큰 자산이라고 봐요.” 그는 김 대표와 비슷한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유유상종이라고 했나 보다.

하지만 김 대표는 “그루비주얼의 일과 악당이반 일은 구분한다”고 말했다. 국악 음반의 표지 사진을 찍으면 아무리 함께 일하는 동료여도 꼭 그 대가를 지불한다. “나를 지지해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마구 일을 떠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그가 말했다.

소리를 하거나 악기를 연주할 국악인을 정하기 전에 김 대표는 늘 전국을 돌면서 녹음 장소부터 물색한다. 녹음 장소를 정하고 나서 비로소 판소리가 좋을지, 산조가 좋을지, 가야금 연주가 좋을지 궁합이 맞는 국악인을 찾아 나선다. 그렇게 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김 대표가 최고의 녹음실이라고 주장하는 곳은 바로 ‘한옥’이기 때문이다.

김 대표도 처음엔 일반 녹음실을 썼다. 하지만 그 결과는 너무 실망스러웠다. “녹음실의 기사가 연주자의 기량을 키우기보다는 마치 통조림을 만들 듯 적절하게 음악을 인위적으로 섞고 조절하는 듯했다”고 그가 말했다. 그러니 족보 없는 음악이 나오기 일쑤였다. 김 대표는 “전통음악은 원형을 건드리면 본질이 없어진다”고 말했다. 사진으로 치면 원판 사진에 다른 사진을 따 붙이거나 포토샵으로 매만지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얘기다. “우리의 소리는 서양의 오페라처럼 위정자를 위한 음악이 아닌 민간풍류로 발전했기 때문에 공연장보다는 한옥이 훨씬 낫습니다. 한옥이 가옥으로서의 기능도 훌륭하지만 녹음실과 공연장으로도 손색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됐지요.”

한옥이라고 모두가 똑같지는 않다. “같은 모양의 한옥은 하나도 없듯 모든 한옥은 제 소리를 지녔어요. 집이 가지는 고유한 소리와 국악이 만났을 때 비로소 제맛을 냅니다. 그리고 서울에서만 전문적인 녹음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국악은 본디 도시 중심적인 음악도 아니잖아요.”

한옥이 천혜의 녹음실이라지만 개방형 주택이어서 주변 환경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너무 춥거나 더워도 안 되고 벌레가 너무 많이 울거나 축사가 가까워도 좋지 않다. 특히 도시의 소음과는 상극이다. 그렇다고 김 대표는 일반 녹음실처럼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 한옥을 고집하진 않는다. 한옥과 우리 음악에 어울리는 자연 음향 효과야말로 가장 중요한 음악적 요소이기 때문이다. 가야금 연주 중간 중간에 들릴 듯 말 듯한 아침의 새소리와 저녁의 벌레 소리는 한옥 연주를 듣는 이들에게 뜻밖의 선물인 ‘자연의 추임새’를 선사한다. 전통음악은 사랑방처럼 아담한 공간에서 그리 많지 않은 관객과 교감하며 부르고 들어야 순리라고 생각한다.

김 대표는 고향의 소리를 지키는 일을 업으로 삼고 묵묵히 살아가는 지방의 국악인들을 유별나게 사랑하는 듯하다. “김 사장을 만나서 처음으로 한옥에서 가야금 연주를 해보았어요.” 남편이자 고수인 윤호세씨와 함께 가야금을 연주하는 추정현(34·김 대표는 그녀를 광주댁으로 불렀다) 씨는 “녹음한 소리가 의외로 선명하고 깨끗해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전라도 사투리로 착 앵기는 느낌이 들었다”고 그녀가 덧붙였다. 김 대표가 우리 소리를 담아내는 데 한옥을 고집하는 이유를 계속 설명했다. 송강 정철의 ‘성산별곡’이 노래한 600년 담양 소쇄원의 제월당은 대숲소리가 그 집의 목소리를 낸다. 우리의 악기 소재는 모두 자연에서 왔기 때문에 국악인의 소리, 한옥의 소리, 자연의 소리가 삼위일체가 돼야 제대로 된 ‘우리 소리’가 나온다는 얘기다. “가야금은 오동나무 공명반에 줄은 명주실, 거문고는 오동나무와 밤나무를 붙여서 만들었잖아요. 자연에서 나온 소리를 자연의 품에서 연주해야 제맛이 우러납니다. 녹음할 시기가 어느 계절과 맞을지도 신중히 결정해야 하고요.”

▎김영일 대표는 지난 10월 은덕문화원에서 세계에서 모인 음악인들에게 정가악회의 여창가곡을 선사했다. 그들은 공연이 끝나자 “원더풀”이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김영일 대표는 지난 10월 은덕문화원에서 세계에서 모인 음악인들에게 정가악회의 여창가곡을 선사했다. 그들은 공연이 끝나자 “원더풀”이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그의 녹음실로 선택한 한옥은 한둘이 아니다. 강진의 백련사와 장흥의 향교(가야금), 광주의 이장우 가옥(가야금, 판소리, 아쟁), 해남의 녹우당(거문고), 서울 북촌의 은덕문화원·무무헌(고법), 경주 양동마을의 관가정(여창가곡) 등등. 그가 2007년부터 매년 개최해 온 ‘가락家樂’의 연주회 장소도 한옥에서 열고 있다. 올해는 서울 북촌에서 ‘북치고 장구치고’ 고법 연주회를, 양동마을에서 여창가곡 연주회를 열었다. 그가 꼭 연주회를 열고 싶어하는 곳도 있다. “경복궁 경회루에서 남창 가곡을, 창덕궁에서는 왕들의 음악 ‘천년만세’를 녹음해 세계로 나가고 싶다”고 그가 말했다. 너무 간절한 바람이어서일까? 그가 말없이 허공을 쳐다보더니 이렇게 되물었다. “우리 국악이 해외에서 먼저 인정받으면 우리 국민도 관심이 커지지 않을까요?”

악당이반에 올해는 음반 해외수출의 원년이기도 하다. 그래미어워드 심사위원 출신인 조슈아 칙이라는 미국인 음반 유통자와 계약을 맺고 악당이반의 음반을 내년 상반기에 미국에서 판매한다. 현재 미국에서 판매되는 한 국악인의 음반은 미국에서 자체 제작했다. 우리 국악음반의 수출은 악당이반이 처음이다. 김 대표는 전통을 고수하는 우리 음악 말고 젊은이들에게 가까이 가고자 퓨전 국악 음반도 제작한다. 전통도 현대를 거스를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젊은 국악인의 국악을 세계에 알리려면 더 많은 변화가 필요하다.

칙은 악당이반과 계약을 맺기 전 악당이반의 음반을 듣고 “신전통주의(Neo-Traditional) 음악으로 한국의 전통음악을 잘 모르는 외국인에게 ‘친밀함’을 느끼게 하고 더욱 관심을 갖도록 만들어졌다”는 e-메일을 김 대표에게 보내왔다. 특히 2000년 창단된 국악 실내악단 정가악회(情歌樂會)의 ‘정념(情念)’은 “가장 흥미로운 음반이며 현대적이지만 한국 음악의 ‘혼’을 담았다”고 평가했다. 작고한 김천흥씨의 양금과 박성연씨의 가야금 이중주 ‘사은난망’도 “월드 뮤직에서 의미가 있는 음반이며 양금은 매우 희귀한 악기”라고 말했다 한다.

새로운 출발을 앞둔 김 대표가 원대한 꿈을 털어놓았다. “산조, 정악 등이 유네스코 문화유산이 되거나 그래미어워드에서 상을 받게 된다면 우리 음악의 대중화가 더 빨라지리라 생각합니다.” 그래미어워드는 전 미국 레코드 예술과학아카데미가 1년간 우수한 레코드와 앨범을 선정해 수여하는 우수 레코드상으로 음반업계 최고 권위의 상이다. 악당이반은 미국 그래미어워드의 회원사 절차를 밟고 있다. 회원사로 등록하면 그래미어워드에 출품도 가능해지리라 기대한다.

김 대표는 매년 국제음악전시회 MIDEM (Marché International du Disque et de l’Edition Musicale)에도 참가해 왔다. MIDEM은 1967년 프랑스 칸에서 시작된 세계 최대 규모의 음악박람회로 손꼽힌다. 세계의 음반 제작자들이 모이는 MIDEM만큼 국악을 알리기에 좋은 곳도 없다. 국악 음반이 다른 국가에 팔려 라디오나 드라마 배경 음악으로 쓰인다면 더할 나위 없다. 악당이반은 2007년 일반 CD로 제작된 국악 음반 열 장을 들고 국악을 수출하겠다며 처음 참가했다(김 대표를 제외하곤 다른 한국 참가자는 모두 수입업체들이었다). 첫 음반을 제작하고 교보문고와 국립국악원의 국악춘추사 등으로 직접 팔러 다니던 때처럼 말이다.

최고 품질의 음반을 들고 온 참가자들은 성냥팔이 소년 같은 김 대표를 향해 “반칙”이라며 야유를 보냈다. 다른 참가자들과 녹음방식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때 국악을 제대로 된 그릇에 담아서 알려야 한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다”고 그가 말했다. 아무리 자연 속에서 녹음한다 해도 저장 기술수준이 떨어지면 가치도 줄어들게 마련이다. 김 대표는 “CD의 시대는 끝났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는 “CD에 음원을 저장한다면 유물을 휴대전화에 저장된 카메라로 찍어서 후손에게 물려주는 꼴”이라고 했다.

김 대표는 그래서 2009년 국내 최초로 SACD(Super Audio Compact Disc: 고음질의 디지털 오디오 디스크)를 선보였다. 1999년 소니와 필립스가 개발한 고음질의 디지털 오디오 디스크로 PCM(Pulse Code Modulation: 아날로그 신호를 디지털 신호로 변조해 전송하는 방식)을 뛰어넘는 기술이다. 이동신의 단소산조(북한 전 금강산 가극단 단원), 지성자의 가야금 산조, 서영호의 아쟁 산조, 추정현의 가야금 산조, 김준영의 거문고 산조 등이 이 새로운 SACD에 담겼다(제작은 일본의 소니사에서 했다). 오디오 매니어인 변호사 최용성(47)씨는 “SACD는 자연스럽고 친근감이 가는 아날로그 소리를 재생한다”고 말했다. “3차원 공간감은 물론 공기의 흐름까지 느낄 수 있어요. 국악은 졸리다는 인식을 불식시킬 만큼 연주회의 현장감을 생생하게 들려주는 특별한 선물이었습니다.”

SACD는 최 변호사의 말처럼 구매자에겐 ‘특별한 선물’이다. 하지만 악당이반에는 팔아도 수익이 남지 않는 장사다. 그러나 사람들의 반응은 전에 없이 뜨겁다. “사람들의 호기심 구매로 SACD 판매량이 늘었기 때문”이라고 김 대표는 설명했다. 회사 창립 이래 발매 1주일 만에 5장 SACD가 각각 30장이 나갔다며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전에는 1년에 열 장에서 스무 장 정도 산조 CD가 팔렸던 데 비하면 큰 성과이기 때문이다.

김 대표는 지금까지 CD를 45장, SACD를 5장 냈다. 이 음반 하나 제작에 보통 2500만원이 든다. 음반마다 1000장쯤 찍었다. 그러나 음반 한 장을 2만5000원에 팔면 회사로 돌아오는 돈은 1만7000원쯤이다. 그러니 많이 팔아도 손해다. 악당이반에 지금까지 40억원 이상을 투자했지만 돈을 벌기는커녕 손해만 봤다.

지난 10월 14일 오후 서울아트마켓에 초청된 세계 음악인을 불러 베푼 비공식 국악 공연이 창덕궁 옆 은덕문화원 대각전에서 열렸다. 김 대표가 마련한 자리다. 햇살 좋은 가을날 열어젖힌 방문 틀이 각각의 가을 풍경을 담고 자연 그 모습 그대로 무대를 만들었다. 여덟 명의 연주자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앉은 여창가객 김윤서씨가 관객을 기다렸다. 정가악회 단원들이다. 가지런히 놓인 방석에 외국인들이 양반다리를 하고 앉는다. 우리 악기 반주에 맞춰 김씨가 여창가곡을 부르자 중간중간 터져 나오는 ‘좋다, 좋지, 얼씨구’ 추임새에 새들도 질세라 한 수 거든다. 풍경소리도 들린다. 저린 다리를 길게 뻗은 외국인들이 우리 음악에 장단을 맞추기 시작했다.

이어진 추정현의 가야금 산조에 열기가 더욱 뜨거워졌다.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르게 가야금을 타는 손가락에도 놀라지만 농현(弄絃: 가야금 등 현악기의 왼손 주법으로 줄을 흔들어서 떠는 소리)에는 탄성이 쏟아져 나온다. 연주회가 끝나자 이번엔 외국인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추임새를 언제 넣어야 하는지, 플라멩코를 출 때 흥겨워 절로 나오는 ‘올레’와 같은 의미인지, 시김새가 뭔지 등등. 미국에서 allaboutjazz.com이라는 사이트를 운영하는 이안 패터슨은 소감을 묻자 의외의 답을 했다. “한국의 음악도 다른 나라 음악과 뭔가 공통점이 있다. 아프리카 음악이나 플라멩코와도 닮았다. 하지만 판소리는 힘이 있고 악기 연주자의 기교가 독특하게 느껴진다.” 그의 낯설지 않은 반응을 보면 외국인도 어쩌면 우리 소리와 쉽게 친해질지도 모른다. 음악은 그래서 만국공통어라고 했던가? 김 대표가 희망을 버리지 않는 이유다.

지난여름부터 김 대표를 수차례 만났다. 그를 만날 때마다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지 않고서는 이루지 못한다)이라는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무엇을 하고자 하는 열정이 끓어 넘칠 때 우리는 그렇게 말한다. 하지만 누군가 미치지 않고서는 우리의 전통 예술을 되살리고 발전시키기가 어려운 우리의 현실이 씁쓸했다.■



[악당이반의 SACD를 선물합니다]김 대표는 인터뷰 끝에 독자들에게 우리나라 최초의 SACD인 김현채씨의 최옥삼류 가야금산조 음반 100장을 ‘뉴스위크 한국판’ 독자에게 선물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읽은 뒤 우리의 소리를 직접 들어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감동을 받는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고 그가 말했습니다. SACD를 원하시는 정기 구독자는 이름과 주소, 연락처 그리고 고유 독자번호를 newsweek@joongang.co.kr로 보내주시면 댁으로 우송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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