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고 끝에 악수, 골프도 같더군요
장고 끝에 악수, 골프도 같더군요
김운용 처음 바둑은 어떻게 시작하셨습니까?
조훈현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버지에 따르면 네 살 때라고 합니다. 아버지가 동네에서 바둑을 두는데 네 살짜리 꼬마였던 제가 옆에서 훈수를 뒀다는 거예요. 당시 바둑을 제대로 배우지도 않았는데 ‘여기 둬라, 저기 둬라’고 하니까 기가 막혔겠죠. 처음엔 목포에 있는 기원을 다녔어요. 어른들이 신기해서 과자나 사탕으로 어르고 달래며 바둑을 가르쳐줬죠. 재주가 있었는지 주위에서 서울로 보내라고 해서 온 가족이 서울로 이사했죠.
김운용 열 살 때는 일본으로 바둑 유학을 떠나셨습니다.
조훈현 당시엔 일본이 바둑 선진국이었어요. 아버지도 일본 생활을 해서 현지 사정을 잘 알고 계셨죠. 저보고 의향을 물어봤는데 사실 비행기 타고 싶어서 간다고 했어요. 열 살짜리가 뭘 알겠습니까. 스튜어디스 언니들이 예쁘고 기내식이 맛있다는 이야기를 풍문으로 들었던 것 같아요. 배 타고 간다고 했으면 안 간다고 했을 거예요(웃음).
김운용 일본 바둑의 거목 세고에 명인을 스승으로 만났습니다.
조훈현 당시 한국인이 일본에 바둑을 배우러 가면 대부분 기타니 미노루(木谷實) 선생 문하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저의 일본 행을 알아봐주던 분이 바둑은 잘 몰라도 일본 물정에 밝으셨어요. 일본인들에게 물어보니 기타니 선생보다 세고에 겐사쿠(瀨越憲作) 선생이 더 유명하다고 들었던 거예요. 그런데 세고에 선생님은 70대 고령이라 더 이상 제자를 안 받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저하고 바둑을 두더니 평생 데리고 살겠다고 하셨지요. 70대 노인이 외국인 꼬마를 문하생으로 받겠다고 하니 주위에서 말리는 사람들도 많았어요. 그때 선생님이 이런 말을 하셨어요. ‘사랑과 예술(바둑)엔 국경이 없다.’
김운용 다른 제자들도 있었나요?
조훈현 중국의 바둑 천재 우칭위안(吳淸源)과 일본 관서 기원의 하시모토를 제자로 길러내셨어요. 특히 우칭위안을 제자로 받을 때는 그 사람의 가족 15명을 모두 일본으로 부르는 조건이었어요. 아무리 바둑계의 명인이라도 모르는 사람 15명을 먹여 살릴 순 없잖아요. 그런데 세고에 선생님이 일본 재계에 후원자가 많았어요. 선생님이 재계의 한 오너를 찾아가 재능 있는 중국인 바둑 천재가 있는데 도와달라고 했다더군요. 그 오너는 군말 없이 돈을 내겠다고 했습니다.
김운용 세고에 선생께선 어떤 것을 가르쳤습니까?
조훈현 선생님의 정신 세계는 일반인과 차원이 달랐어요. 도인에 가까우셨어요. 저에게도 프로가 되기 전에 인간이 되라고 하셨죠. 인품, 인성, 인격을 이야기하는데 어린 제가 뭘 알겠습니까. 사실은 지금도 잘 모르겠어요(웃음).
바둑을 계속 두면서 ‘인간됨’을 강조한 선생님의 가르침을 어렴풋이 알 정도입니다. 스승의 역할이 무엇인지도 확실히 보여주셨어요. 선생님께선 ‘가르치는 것은 스승이 아니다. 제자가 가는 길을 터주는 것이 스승이다’라고 하셨어요. 한국에 와서 이창호를 내 제자로 받아들였을 때도 선생님의 가르침을 꼭 실천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김운용 고령이셔서 대국을 많이 나누진 못했다고 들었습니다.
조훈현 바둑 자체는 사실 후지사와 슈코 선생님께 배웠습니다. 일본에선 제자를 한 명씩만 두기 때문에 제가 후지사와 선생님의 정식 제자가 될 순 없었지만 저를 많이 아끼셨어요. 수많은 대국을 통해 다양한 바둑 기법을 배울 수 있었죠. 후지사와 선생도 기인이셨는데 주색잡기에 통달하신 분이셨어요. 경륜·경마·경정으로 몇 억원씩 잃을 때도 있었고, 본처 외에도 생활비를 주는 여자가 3명이 더 있었습니다. 술도 위스키를 박스째 마셨죠. 한번은 일본에서 저를 보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오셨어요. 김포공항에 내리셨는데, 기내에서 먹다 남은 양주 한 병만 달랑 들고 있었죠. 당시 세관원에 따르면 아무 짐 없이 한국에 온 외국인은 후지사와 선생님이 처음이라고 하더군요. 한국에 와선 3일 동안 저와 바둑만 두고 가셨어요. 관광을 시켜드리려 했더니 ‘난 관광을 하러 온 게 아니라 너와 바둑을 두러 온 것이다’라고만 하셨죠.
김운용 조 국수님은 술을 안 드시지 않습니까.
조훈현 전 체질적으로 술을 아예 못 마십니다. 사람들이 술잔을 주고받을 때 전 사이다를 받는데, 그때도 취해요. 상대방이 준 빈 잔에 술이 약간 남아 있기 때문이에요. 대신 담배는 엄청 많이 피웠죠. 하루에 장미 4~5갑씩 없앴습니다. 90년대 중반에 완전히 끊었어요. (이날 함께한 조 국수의 아내 정미화씨가 거들었다. “한번은 와인을 마시는데 실수로 남편 잠옷에 와인을 쏟은 적이 있어요. 그랬더니 취한다는 거예요. 담배는 정말 많이 피웠어요. 집에서 기원에 가는 차 안에서 3~4개비씩 피울 정도였어요.”)
김운용 한국에 돌아온 후에 세고에 선생께서 자살하셨습니다. 충격이 엄청났을 것 같습니다.
조훈현 충격이 너무 크면 멍해진다고 하지요. 어떻게 받아들여야 될지 몰랐습니다. 자책감도 컸어요. 유서를 두 개 남기셨는데 하나는 가족들에게 ‘노구가 짐이 되기 싫어 떠난다’고 하셨어요. 나머진 지인들에게 남기셨는데 ‘한국의 조훈현을 일본으로 데리고 와라’고 썼어요. 당시 선생님의 벗이었던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인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자살하자 고독감을 못 이겼다고 하시더라고요. 하지만 제가 있었다면 극단의 선택은 하지 않았을 겁니다. 당시 스승님의 자살은 일본에서도 큰 화제였습니다. 목을 매서 자살한 게 아니라 자신의 양손에 끈을 쥐고 스스로 목을 졸랐습니다. 당시 의학계에선 83세 노인이 자신의 목을 조를 기력도 없을뿐더러 정신적으로도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유서나 시간의 정황으로 볼 때 자살이 맞다고 결론이 나왔습니다.
산 잘 탄다고 ‘제비’ 별명 얻어
김운용 군입대 때문에 한국에 오셨는데 다른 방법은 없었나요?
조훈현 제가 일본인으로 귀화했다면 안 올 수도 있었어요. 실제 한국으로 올 때 주위에서 만류했지요. 일본에선 스승이 죽으면 제자가 스승의 후원자를 모두 이어받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세고에 선생님을 지원하던 일본인 재계 오너들이 전부 저에게 왔겠지요. 하지만 그럴 순 없었어요.
김운용 ‘제비’라는 별명은 어떻게 붙었나요?
조훈현 젊어서 산을 많이 탔습니다. 한번은 같이 간 선배가 제비처럼 날쌔다고 해서 제비라고 불렀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그 별명을 듣더니 바둑 기풍으로 착각을 하는 거예요. 제 바둑 기풍이 날랬기 때문이죠. 그런데 바둑 기풍은 세월이 갈수록 바뀌는 것 같습니다. 골프도 매년 똑같은 샷이 나오는 건 아니잖아요. 바둑도 비슷합니다. 나이가 드니 10시간씩 앉아 있기가 너무 힘든 거예요. 특히 이창호는 반 집 승부를 하는데 제가 빨리 끝내고 싶으니 어느새 전투 바둑으로 바뀌고 공격적으로 변했어요. 그런데 그렇게 하니 주위에서 좋아해요. 싸움도 곧잘 하고요(웃음). 그래서 전신(戰神)이라는 별명이 붙었죠.
김운용 오늘 드라이버 치는 걸 보니까 전신 같던데요(웃음). 보기플레이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거침이 없으세요. 어프로치만 다듬으면 좋을 것 같았습니다.
조훈현 전 원래 바둑도 마무리가 문제였어요(웃음). 그런데 오늘은 제가 익숙지 않은 양잔디다 보니 주저하게 되고 자신이 없어졌던 것 같아요. 바둑도 비슷합니다. 장고 끝에 악수라는 말이 있죠. 첫 수가 가장 정확하기 때문입니다. 바둑에서 프로기사가 장고하는 것은 첫 수 외에 딴생각을 하는 게 아니고, 그 수에 대한 사후 과정을 점검하는 것이죠.
김운용 복기가 필요한 것도 골프와 비슷한 것 아닐까요. 프로골퍼들은 골프 친 것에 대해 바둑기사처럼 복기를 합니다.
조훈현 맞아요. 몇 십 년 전에 뒀던 기보도 훤하게 기억납니다. 근데 전 한국 캐디들이 더 대단한 것 같아요. 4명 모두 어떻게 쳤는지 복기할 뿐만 아니라 거리까지 재는 걸 보면 엄청나죠.
김운용 골프는 어떻게 배우셨습니까?
조훈현 (아내를 가리키며) 이분 때문이죠. 전 운전면허도 없어요. 기원에 갈 때도 아내가 운전해요. 이틀에 한 번꼴로 바둑을 두는데 배울 시간이 있었겠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타이틀을 전부 내놓으면서 시간이 나더라고요.
내 인생엔 오르막만 남아
김운용 전관왕도 몇 번씩 하던 분이 갑자기 타이틀이 하나도 없으면 그 허전함이 엄청날 것 같습니다.
조훈현 처음엔 힘들었지요. 타이틀을 하나씩 내놓을 때마다 불안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전부 다 내놓으니까 ‘이제 더 이상의 내리막은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홀가분해졌습니다. 이제 내 인생은 오르막만 있다고 생각하게 된 거지요. 마음을 비웠더니 오히려 잘되더라고요. 골프도 마음을 비워야지요.
김운용 골프의 어떤 점이 매력적입니까?
조훈현 제가 오기가 좀 있습니다. 지금까진 베스트 스코어가 83개지만 항상 들쭉날쭉해요. 안정되게 칠 때까지 노력할 겁니다. 골프와 바둑은 모두 자기와의 싸움이잖아요. 라이벌 이야기를 많이 하지만 사실 바둑은 자신의 실력을 100%만 발휘할 수 있다면 누구도 두렵지 않습니다. 골프 프로들도 자신의 실력만 충분히 발휘한다면 타이거 우즈도 무섭지 않을 거예요.
김운용 앞으로는 어떤 일을 하고 싶으세요?
조훈현 바둑계의 얼굴이 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바둑은 골프와 달리 남녀노소가 같이 할 수 있고, 비용도 안 들어요. 저만 해도 매일 한 번씩 인터넷 바둑 사이트에 들어갑니다. 직접 두지 않을 때도 많지만 다른 사람들의 기보를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어요. 그리고 바둑기사 중엔 치매가 없습니다. 전 세계 70여 개국에서 바둑을 둘 정도지만 한국에선 인기가 예전만 못한 것 같습니다. 바둑이 대중화되도록 힘을 보태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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