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창 CJ제일제당 대표 인터뷰] Kim Possible의 새 도전
[김홍창 CJ제일제당 대표 인터뷰] Kim Possible의 새 도전
경남 남해에서 1954년 태어난 한 아이. 승부근성이 남달랐다. 바둑에 푹 빠진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유독 지는 걸 싫어했다. 행여 형에게 지면 울고불고 난리를 쳤다. 패배 이유를 분석하느라 잠을 설친 날도 부지기수. 이쯤 되면 바둑에 몰입한 거다. 그 결과는? 짜릿한 승리로 돌아왔다. 바둑알을 쥔 지 꼭 한 달 만에 형을 꺾었다.
아이는 멈추지 않았다. 더 큰 산을 정복하고 싶다며 ‘남해도 바둑도사’로 불리던 아버지에게 도전장을 던졌다. 처음엔 연전연패했지만 6개월 뒤 아버지마저 이겼다. “한판 더 두자”는 아버지에게 아이는 회심의 한마디를 던졌다. “제가 백(白)을 쥐면 두겠습니다.” 지고는 못 사는 이 아이는 지금 대기업 CEO다. 삼성그룹과 CJ그룹의 모태인 CJ제일제당 김홍창 대표다.
“바둑에서 승부근성 쌓다”김 대표의 별명은 Mr. Kim Possible이다. 김 대표의 성에 possible(가능한)을 합친 것이다. 임무가 무엇이든 김홍창이 나서면 상황 종료라는 의미다. 김 대표는 “바둑이든 경영이든 질 이유가 없지 않은가”라고 말했다. 질 것 같으면 편법을 동원하면 그만이라는 이야기? 아니다. 승부사의 세계에도 나름 ‘급’이 있다. 그는 자타공인 페어 플레이어다.
김 대표가 CJ오쇼핑 CFO(최고재무관리자)였던 2003년 1월의 일이다. 주가가 반 토막 나자 주주의 원성이 끊이지 않았다. 대뜸 그가 나섰다. “인위적인 주가관리는 하지 않겠습니다. 정확한 기업 내용을 알려주는 게 최선의 주가관리입니다.” 주가가 급락해도 원인을 감추거나 책임을 회피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 정면승부였다. 주주의 아우성은 그날로 끝났다. 주주 사이에서 ‘고객을 진심으로 생각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덕이었다.
그때만이 아니다. 리먼 사태가 터지기 직전인 2008년 7월, 코스피 지수의 하락세가 계속됐다. 얼마 전까지 ‘투자하라’고 떠들던 증시 전문가는 입을 닫았다. “미안하다”는 말은 고사하고 원인을 제대로 알려주는 자도 없었다. 당시 CJ투자증권 CEO였던 김 대표는 달랐다. 고객에게 손수 e-메일을 돌려 사과의 뜻을 전했다. “…어려운 상황에서 (주가 하락에 대해) 말씀드리는 건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이런 때일수록 냉철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마음을 나눠야 합니다….”
이 사람, 업계의 속설을 무너뜨린다. 좋을 때 과장하고, 나쁠 때 모른 척하는 게 주식시장 사람들의 습성 아니던가. 김 대표는 “상황이 어려울수록 감추지 말고 정면 돌파해야 이길 수 있다”고 말했다. 적이 나를 꿰뚫고 있으면 아무래도 불리할 텐데, 이긴다니…. 대단한 자신감이다. 자신감 없는 사람은 이런 승부를 하지 못한다. 편법을 쓰거나 돌아가는 전략을 쓸 게다. “(경쟁이 정상적이든 그렇지 않든) 상대를 이기지 못한다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그는 말했다.
겉만 번드르르한 호언장담이 아니다. 경영전선에 본격 뛰어든 1997년 이후 그는 지지 않았다. 죽음의 늪에 빠진 회사를 기적처럼 살렸고, 업계 꼴찌 기업을 1~2등을 다투게 했다. 남에게 손가락질 받을 ‘무슨 짓’을 한 것도 아니다. 자신을 감추고 은근슬쩍 시장을 탐하지도 않았다. 누가 보든 말든 온 힘을 쏟았고, 그러면 이길 수 있다고 믿었다. 김 대표를 배짱 두둑한 승부사라고 부르는 까닭이다.
제일투신의 생환 … 홍창불패의 시작‘홍창불패’가 시작된 건 제일투자신탁의 CFO였던 1997년이다. 부산·경남이 텃밭인 제일투신은 CJ투자증권(현 하이투자증권)의 전신으로 CJ그룹이 1997년 인수했다. 지금은 종합증권사의 면모를 갖췄지만 당시만 해도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작은 지역투신사였다. 게다가 외환위기 폭풍까지 맞았으니 오죽했겠나. 기둥뿌리가 제법 튼튼했던 종금사마저 줄줄이 폐업하는 상황. 제일투신에 고객의 환매요구가 잇따른 건 어쩌면 당연했다. 그는 “그때처럼 상황이 긴박했던 적은 없었다”고 말했다. “파산 직전까지 몰렸어요. 생사를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였죠.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이대로 죽을 수 없다는. 그야말로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였죠.”
그는 전략을 세웠다. ‘제일투신의 대주주 CJ그룹이 고객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인천공장에서 CJ의 상징 설탕 20t을 직접 공수해 고객에게 나눠줬다. 고객 신뢰를 얻기 위해 자금을 툴툴 털어 탤런트 김혜자씨를 모델로 기용했다. 결과는 대성공. 김 대표의 독한 승부수에 적지 않은 고객이 마음을 돌렸고, 환매사태는 진정됐다.
하지만 승부사의 눈엔 무언가 부족했다. 위기를 기회로 바꿔야 했다. 그때 생각한 전략이 ‘제일투신 서울상륙작전’ 이른바 S프로젝트였다. “금융의 80%가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 몰려 있었죠. 부산·경남에 안주했다간 언제 불똥을 맞을지 모르는 상황이 계속됐어요. 그래서 수도권 공략을 서둘렀죠.”
제일투신은 곧바로 수도권에 지점을 냈다. 1년 새 300개 지점을 열었다. 인력은 600여 명을 새로 뽑았다. 다른 기업이 구조조정에 급급할 때 제일투신은 거꾸로 간 거다. 김 대표는 “1998년엔 삼성그룹도 인력을 채용하지 않았다”며 “국내 기업 중 그때 사람을 뽑은 곳은 제일투신뿐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예상대로 S프로젝트는 제일투신의 가치를 올려놨다. 2001년 제일투신에 외국계 자본 1500억원이 투자됐는데, S프로젝트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같은 때 경영난을 겪었던 한국투자증권·대한투자증권에 수조원에 이르는 공적자금이 투입된 점에 비춰보면 눈부신 성과다.
‘김 대표가 이끈 CJ투자증권(2004년 제일투신→CJ투자증권으로 사명 교체)의 부활은 더 극적이다. 2004년 여름, CJ투자증권은 껍데기 회사로 전락했다. 빚이 문제였다. CJ그룹과 푸르덴셜이 2001년 투자한 후순위전환사채와 미지급 이자가 2310억원에 달했다. 빨리 털지 않으면 이자비용이 눈덩이처럼 불어날 판국. 이번에도 김 대표가 구원투수로 투입됐다. CJ투자증권 CEO에 오른 그는 또다시 승부수를 던졌다. “클린 컴퍼니를 만들겠다. 미지급 이자 등을 출자전환해 달라.”
사람들은 비웃었다. 세상 물정 모른다는 비아냥이 쏟아질 때도 있었다. 하지만 비웃음이 감탄으로 바뀌는 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해 10월, 김 대표는 2310억원을 출자전환하는 데 성공했고, 빚더미에 앉아있던 CJ투자증권은 부채 없는 우량회사로 거듭났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CJ투자증권의 DNA를 완전히 바꾸기 위해 체질개선을 서둘렀다. CJ투자증권의 전신은 앞서 말했듯 제일투신. 그래서 펀드운용·판매에만 능했던 게 사실이다. 증권업무 관련 실적은 제로에 가까웠다.
결단은 신중하게, 추진은 빠르게단점을 한눈에 파악한 김 대표는 IPO(기업공개) 등 주식채권 인수·매매업무를 강화했고, 이를 통해 높은 수익창출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가 CJ투자증권을 떠나기 직전인 2007년 말, 이 회사의 실적은 눈에 띄게 늘었다. 2007년에만 5개 기업의 코스닥 상장을 도왔다. 당시 기준으로 업계 9위다. 매출은 2004년 944억원에서 2007년 2461억원으로 2.6배가 됐고, 영업이익은 흑자전환에 성공했다.
김 대표의 성공사례는 더 있다. 업계 8위였던 제일선물(2000)을 맡은 지 22개월 만에 2위로 끌어올렸고, CJ오쇼핑 CFO(2003) 시절엔 무형상품 ‘보험’을 판매해 영업이익률을 전년비 2배로 만들었다. 그가 CJ 최고의 승부사로 통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혹자는 극단적 승부수가 우연하게 통했을 뿐이라고 비꼴지 모르겠다. 그렇지 않다. ‘통큰’ 승부수의 이면엔 치밀한 전략이 깔려 있었다. 제일투신을 살린 S프로젝트의 예를 다시 보자. 그는 S프로젝트의 아이디어를 구상할 때 서울에 들렀다. 동서증권·고려증권·동화은행 등 수많은 금융회사가 폐업했으니 빈 지점이 남아돌 거라는 계산에서였다.
금융회사가 신규진입할 때 가장 필요한 건 ‘목 좋은’ 지점이다. 고객이 편리하게 이용할 만한 위치를 선점하는 게 관건이라는 얘기다. 김 대표는 이를 간파했고, 지금이 적기라는 걸 확인했다. “생각보다 알짜배기 점포가 많이 나왔더라고요. 숫자와 위치를 치밀하게 계산했죠. S프로젝트를 두고 누군간 무모한 도전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장고에 장고를 거듭한 결과였어요.” 김 대표의 말이다.
CEO의 힘이 성공을 보장하는 건 아니다. 21세 기업은 분업과 협력으로 돌아간다. CEO 혼자 경영하는 시대는 갔다. 아니, 그럴 수도 없다. CEO가 업계를 분석하고 전략을 만들기 위해 발품을 파는 건 기본일지 모른다. 김 대표는 “경영은 더 잘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실행하는 것이지 마냥 흘러가게 놔두는 게 아니다”고 말했다. CEO에 진짜 필요한 건 통찰력이다. 시장을 읽는 힘 말이다. 이게 없으면 불가능한 걸 고집하는 돈키호테와 다를 바 없다. 글로벌 필름업체 코닥이 단숨에 몰락한 것도 디지털 카메라의 위력, 이를테면 시장의 빠른 변화를 과소평가했기 때문이다.
그럼 김 대표의 승부수가 번번이 통하는 까닭은 뭘까. 답은 간단하다. 그는 공감경영을 펼친다. “CEO의 뜻을 직원이 공감하지 못하면 독선이자 독단”이라는 것이다. 공감경영의 방법은 대화다. 직원과 툭 터놓고 얘기하는 건 김 대표에게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결단에 대해 묻고, 결론을 내린다. 직원이 갸우뚱하면 자신의 전략을 폐기할 때도 많다. 2006년부턴 e-메일 경영을 한다. 월~금요일까지 매일 보낸다. 무심코 발송하는 e-메일은 단 한 통도 없다. 좋은 글귀를 보내거나 경영전략 또는 목표를 쓴다. 때론 칭찬을 때론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는다. 김 대표의 e-메일은 쌍방향이다. 직원은 CEO에게 소원을 말하고, 고쳐야 할 점을 조언하기도 한다.
이재현 회장과 e-메일 소통직원의 만족도는 생각보다 높다. CJ제일제당 이열근 부장은 “CEO의 열정에 동화되지 않은 직원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다른 직원의 얘기도 비슷하다. “회사 여직원이 대표 메일을 받고, 남편에게 전달하려다 실수를 했나 봐요. ‘오빠! I love you’라는 제목의 메일이 김 대표에게 잘못 간 거죠. 어찌나 걱정하든지. 그런데 김 대표의 답이 더 재미있었어요. ‘아! 졸지에 여동생이 생겼네요’라고 보냈더라고요. CEO의 진심이 읽혔죠.” 김 대표가 직원의 답장을 허투루 넘길 수 없는 이유다. “e-메일은 주로 밤 11~12시에 보내요. 저로선 하루일과의 정리죠. 메일을 보내면 새벽 2시에 답신을 보내는 직원이 있고, 멀리 떨어진 현장에서 답이 오기도 해요. 책임감을 느끼죠.”
대화상대는 직원뿐만이 아니다. 이재현 CJ그룹 회장에게 새벽 2시에 메일을 보낸 적도 있다. 협력업체 직원, 대리점 사장, 노동조합 관계자와도 대화를 즐긴다. 택배업체인 CJ GLS CEO(2010) 시절엔 전국 택배 대리점 사장을 8번에 걸쳐 모두 만났다. CJ투자증권 대표 땐 노동조합 관계자와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눴다. (CJ투자증권엔 노조가 있었다. 1997년 인수한 제일투신의 노조다.) 얼마나 정이 들었든지 CJ투자증권이 현대중공업(하이투자증권)에 인수된 지 1년이 흘렀을 때 노조 관계자가 김 대표를 직접 초청해 조촐한 기념식을 열었을 정도다.
김 대표는 “노조원이든 비노조원이든 모두 가족이니까, 똑같이 대했다”며 겸손하게 웃었다. CJ투자증권 정재열 전 노조위원장은 “김 대표만큼 직원과 많은 대화를 나누는 CEO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냉정한 승부사로 통하는 그는 사실 정이 많은 CEO다. “(나는) 동적이기보단 정적인 사람”이라며 “경영에서 빈번하게 나타나는 실수를 줄이기 위해 많은 사람의 의견을 구하려 한다”고 말했다. 부드러운 카리스마. 그의 또 다른 별명이자 스스로 제일 좋아하는 닉네임이다.
그런 그가 CJ의 중심에 섰다. 지난해 11월 CJ의 모태 CJ제일제당 CEO에 임명됐다. 김 대표는 “감개무량하다”고 했다. 그만큼 의미가 남다르다. 이 회사는 김 대표가 신입사원으로 취직한 곳이다. 16년 동안 청춘을 바친 친정이다. 더구나 그와 함께 입사했던 동기 중 남은 자는 그뿐이다. 그는 “자긍심만큼 책임감도 크다”고 말했다. 하지만 ‘승부사 김홍창’에겐 낯설지 모른다.
혹여 실적이 하락해도 CEO의 역할이 크지 않을 수 있다. CJ제일제당은 원료를 수입해 가공하는 식품업체다. 국제곡물가격이 올라 환율이 상승하면 실적이 나빠질 수밖에 없다. 이는 외부변수다. CEO의 힘으로 막지 못한다. 게다가 이 회사는 이를 방어하는 시스템을 이미 갖췄다. 사업 다각화를 통해서다. CJ제일제당은 소재식품·가공식품·제약·사료·바이오 등 다양한 사업을 영위한다. 소재·가공식품의 매출비중이 46%로 가장 높고 제약·사료·바이오는 20%, 기타사업은 34%다. 어느 한쪽이 무너져도 다른 사업에서 메울 만한 구조다.
식품사업 ‘세계화’ 관건하지만 CJ제일제당의 목표를 보면 김 대표가 왜 중용됐는지 쉽게 알 수 있다. 2013년은 CJ제일제당의 창업 60주년이다. 무언가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목표도 원대하게 세웠다. 총매출 10조원에 해외 매출 비중 50%다. 지난해 해외 비중은 35%였다. 매출은 그렇다 치더라도 해외 비중을 3년 안에 15% 올려야 한다는 얘기인데, 만만치 않다. 그렇다고 위축되거나 겁먹을 김 대표가 아니다. 여전히 자신감이 넘친다. 그는 “시장은 무궁무진하기 때문에 불가능이란 없다”고 말했다. 자신감의 원천은 CJ제일제당의 해외진출 속도가 빨라진다는 거다. 바이오 사업의 매출은 100% 세계 시장에서 나온다. 1997년 세계에서 두 번째로 양산에 성공한 핵산(고분자 유기물질) 사업의 시장점유율은 글로벌 1위다. 라이신(가축사료 첨가제)의 시장점유율은 세계 3위고, 최대 시장으로 떠오른 유럽에선 1위를 지키고 있다. 사료 사업의 글로벌 매출 비중 역시 50%에 달한다. 중국·동남아 등이 주요 공급처다.
소재·가공식품 사업의 세계화도 착착 진행된다. 다시다는 지난해 글로벌 매출 370억원을 올렸고, 일본·미국에 수출하는 고기 양념장은 매출 100억원을 돌파했다. 밀가루·해찬들·고추장·만두도 세계 시장에 명함을 내민다. 하지만 소재·가공식품의 해외 진출이 한국인 교포 시장을 중심으로 이뤄지는 건 한계다. 김 대표가 ‘소재·가공식품의 세계화’를 성공 키포인트로 삼고 있는 이유다. 그는 지난 10일 글로벌 부문 직원과 가진 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식품의 세계화는 글로벌 전략을 담당하는 직원의 몫만이 아닙니다. 국내의 모든 부서가 전폭 지원할 겁니다. 필요하다면 M&A(인수합병) 또는 조인트 벤처도 적극 추진할 방침입니다.” CJ제일제당의 역량과 자금을 식품사업 세계화에 쏟아붓겠다는 얘기다.
김 대표는 “전략은 이미 세웠고, 제대로 추진하는 일만 남았다”고 했다. “90%만 잘 추진해도 목표를 능히 달성할 수 있다”는 말도 했다. 자신 있느냐고 물었다. 이번이 가장 힘들지 모르겠다고 또 물었다. 현답(賢答)이 날카롭게 돌아왔다. “신지애 선수의 키가 얼마인지 알아요? 155㎝예요. 도대체 무얼 먹기에 그렇게 골프를 잘 치나 궁금하지 않겠어요. 일본 도쿄 골프장에 가면 김치는 기본이고, 돌솥비빔밥도 팔아요. CJ푸드빌에서 운영하는 비빔밥 전문점 ‘비비고’의 미국 LA·중국 베이징의 실적도 괜찮죠. 멕시코에서 우리 햇반이 300만 달러 이상 팔렸어요. 질 이유가 아무것도 없어요.”
약속했던 2시간이 훌쩍 지났다. 김 대표는 피곤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끝까지 대충 대답하는 법이 없었다. 승부사의 진면목이 읽혔다. 이재현 회장은 사석에서 김 대표를 ‘검증된 CEO’라고 말한다. 그런 그에게 CJ제일제당의 창업 60주년 목표를 맡겼다. Mr. Kim Possible의 글로벌 식품시장 새판짜기가 시작됐다. 승부사가 칼을 잡았다.
이윤찬 기자 chan487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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