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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대재난… 그 후

일본 대재난… 그 후

일본에 사는 외국인들이 가장 먼저 배우는 일본어 표현 중 하나가 ‘간바테 구다사이’다. 일본인들이 헤어질 때 하는 인사말로 빈번히 쓰이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쓰임새는 미국인이나 영국인들이 ‘잘 가세요’ ‘안녕!’의 의미로 사용하는 ‘테이크 케어(take care)’나 ‘해브 어 굿 원(have a good one)’과 유사하지만 의미는 사뭇 다르다. ‘간바테 구다사이’의 뜻을 글자 그대로 옮기자면 ‘잘 참아내세요’다.

일본인들은 참을성이 많기로 정평이 나 있다. 거의 종교에 가까운 그들의 극기심은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과 국토 파괴로 가장 큰 시험대에 올랐다. 최근 3·11 대지진과 쓰나미로 초래된 대규모의 갑작스러운 인명피해는 성숙한 현대 산업사회로서는 익숙하지 않은 사건이다. 지진 피해 지역에 있는 후쿠시마(福島) 다이이치 원전의 노심용융과 대기오염 위험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이번 재해의 경제적·정치적·심리적 영향을 판단할 때 성급한 결론은 금물이다. 하지만 일본과 다른 국가의 유사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 문제를 보는 사고의 틀을 제시하고 앞으로 수 주, 수 개월, 혹은 수 년 동안 무엇이 가장 중요한 문제로 떠오를지 단서를 제공하는 일은 가능하다.

다른 자연재해에서 배울 만한 첫째이자 가장 근본적인 교훈은 ‘경제적 영향은 맨 나중에 걱정해도 될 문제’라는 점이다. 경제적 영향을 국내총생산(GDP)으로만 측정한다면 자연재해는 사무실과 공장 파괴와 교통망 붕괴로 단기적인 손실을 초래한다. 하지만 수 개월 후에는 사실상 경기부양책과 같은 효과를 내게 된다. 2005년 미국 뉴올리언스 일대를 휩쓴 허리케인 카트리나와 6500명의 목숨을 앗아간 1995년 일본 고베(神戶) 지진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재건비용 지출이 신속히 이뤄지면서 일자리 창출과 소득상승, 경제활동 증가로 이어진다. 일부 비용은 보험으로 충당되고, 나머지는 정부지출과 민간 투자로 충당된다.

하지만 앞의 두 경우와 이번 재해 사이엔 분명한 차이점이 한 가지 있다. 원전 파괴로 인한 핵물질 오염 위험이 종결되거나 통제 가능한 수준으로 조정되기 전엔 피해 규모조차 가늠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원자력 발전소는 상업보험 가입이 불가능해 재해가 발생하면 정부와 회사 차원에서 책임져야 한다. 따라서 위기상황 발생 시 국가의 비용 부담이 더 커진다. 자연재해의 영향에 관한 이런 진실은 GDP가 경제적 영향의 측정 수단으로서 한계가 있음을 상기시켜준다. GDP는 생산과 경제활동의 동향을 말해주지만 사회복지와 국민의 행복 수준을 측정하지는 못한다.

지난 20년 동안 일본 경제는 침체의 늪에 빠져 있었고 정부는 부채에 허덕였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재건비용을 댄단 말인가? 많은 외국인이 이런 의문을 품게 된다. 물론 일본은 1990년대 중반 이후 경제 실적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1970~80년대의 인상적인 고속성장과 비교했을 때의 이야기다. 일본은 2009년 세계 경제위기의 타격을 받았지만 지난해엔 GDP가 3.9% 성장했다. 2000년 이후의 장기 경제상황은 좋지 않지만 (저출산과 이민 감소로) 인구가 소폭 감소한 사실을 감안할 때 1인당 소득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수준보다 높은 편이었다.

일본의 진짜 약점은 부채와 디플레이션이다. 현재 일본의 공공부채는 GDP의 200%에 달한다. 거기서 정부 부처 간의 부채를 제외한다 해도 GDP의 120%로 미국(GDP의 약 80%)보다 훨씬 높다. 하지만 이 부분도 거의 전부 국내 부채인 점을 감안할 때 국가적 위기를 맞은 지금 일본 정부가 추가로 돈을 빌리는 데 큰 어려움은 없으리라 본다. 게다가 일본 국민이 개인적인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국가의 부담을 나누려는 의지가 충만한 때이니만큼 정부가 특별 재건세를 신설해도 문제가 없을 듯하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신경 써야 할 부분은 현재의 디플레이션과 언제 닥칠지 모를 인플레이션이다. 1997년 이후 일본의 물가는 거의 매년 하락을 거듭했으며 이는 임금과 소비 감소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번 재해로 상황이 뒤바뀔 위험이 있다. 지진과 쓰나미의 여파로 물자부족 현상이 예상된다. 실제로 일부 생산시설이 파괴됐으며 재건이 시작되면 재건비용이 투입된다. 세계 에너지와 식품 가격이 상승하는 요즘 같은 시기에 이런 일이 일어나면 일본의 디플레이션은 인플레이션으로 둔갑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이런 경제적인 영향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정치적·심리적 영향이다. 이 재해는 경제적 비극이 아닌 인간적인 비극이기 때문이다. 정치적·심리적 영향 또한 섣불리 예단해선 안 된다. 일본이 뛰어난 회복력을 지닌 사회란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일본인들은 참을성이 많으며 언제나 놀라운 단결심을 보여준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 이후, 특히 지난 5년 동안 일본 정치는 혼란에 빠져 기능장애를 일으켰다. 또 1990년대 이후 정치인과 정부, 대기업에 대한 국민의 환멸과 불신이 증폭돼 왔다.

2009년 8월 총선에선 중도좌파 성향의 민주당이 1955년 이후 처음으로 집권 자민당을 누르고 역사적인 정권교체를 이뤄냈다. 하지만 그 후 민주당은 내분과 비효율적 정부 운영으로 큰 실망을 안겨줬다. 또 집권 8개월 만에 총리가 사임해 현재의 간 나오토(菅直人) 총리를 두 번째 총리로 맞이했다. 대지진 직전엔 젊고 유능한 외무상 마에하라 세이지 (前原誠司)가 불법 정치자금 추문으로 사임했다. 게다가 야당인 자민당은 예산안의 국회 통과를 가로막으며 여당에 조기총선의 실시를 강요하려 들었다. 하지만 자민당은 대지진의 인간적 비극 앞에 그런 정치적 책략이 얼마나 사소하고 시시한 문제인지를 깨닫게 됐을 듯하다. 자민당은 국가적 단합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보이고 싶을 테고, 정부는 적어도 향후 몇 년간 ‘국가 재건의 관리’라는 확실한 의제를 갖게 됐다.

하지만 국민이 정부를 어떻게 볼지는 미지수다. 일본 국민은 국가적 단결에 강한 의지를 보여줄 것이다. 지금까지 간 총리와 정부는 이 위기를 정직하게 잘 헤쳐 나왔다고 인정받았다. 하지만 핵위험의 측면에선 문제가 복잡해진다. 지난 20년간 핵 관련 사고 및 안전 문제와 관련해 정부의 은폐와 국민의 불신이 있었다. 이제 그 불신은 한층 더 증폭될 가능성이 있다. 현 민주당 정부는 그 불신과 부실한 안전관리에 대한 비난의 화살을 후쿠시마 원전을 운영하는 민간기업 도쿄전력과 역대 자민당 정부 쪽으로 돌리고자 한다.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특히 정부는 노후화된 다른 원자로들의 처리 문제를 놓고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한다. 일본 전력의 30% 가까이가 원자력 발전소에서 생산된다. 따라서 만약 이 발전소들이 안전상의 이유로 폐쇄될 경우 전력부족 현상이 심각해지고 소비자 가격이 오르게 된다. 하지만 폐쇄하지 않을 경우엔 핵에너지에 반대하는 국민의 반발에 부딪칠 위험이 있다.

일본 국민이 어떤 식으로 반응할지는 확실치 않다. 일본인들은 극기심과 희생정신이 뛰어나다. 하지만 빠른 재건을 위해 개인생활을 기꺼이 희생할지는 미지수다. 따라서 일본인들이 1950년대에 그랬듯이 기업가 정신을 북돋우고 세계와의 연결을 다지는 방향으로 이 위기에 대응할지, 아니면 더 편협하고 내향적으로 변할지가 관건이다.

이 재난의 규모는 거대하고 충격적이지만 1945년의 재난엔 비할 바가 못 된다. 그때에 비하면 이번 재난은 제한적이며 재건에 필요한 기간도 수십 년이 아니라 5년 정도로 예상된다. 하지만 재난이 일어난 시점이 문제다. 인구 노령화 현상을 겪는 일본은 이미 중국의 부상으로 위협을 느껴 오던 참이다. 게다가 최근엔 세계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기보다는 서서히 세계와의 연결고리를 끊으려는 듯한 분위기마저 느껴졌다.

이런 참사는 일본인들을 한층 더 내향적으로 만들어 국내 문제에만 몰두하도록 할 가능성이 있다. 이해할 만한 상황이지만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란다. 세계가 더 바람직한 곳이 되려면 일본이 국제사회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한다.

[필자는 영국 시사·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의 편집장을 지냈으며 저서로는 ‘경쟁자들(Rivals: How the Power Struggle Between China, India, and Japan Will Shape Our Next Decade)’이 있다.

번역 정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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