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lector] 세한도 되찾아온 추사 매니어
[Collector] 세한도 되찾아온 추사 매니어
유배객 추사 김정희(1786∼1856)는 1840년 9월 말 제주 화북진에 도착했다. 거기서 서귀포 대정까지 80리를 더 들어갔다. 추사는 그곳의 초가 한 칸을 빌렸다.
이듬해 절친한 벗 김유근이, 그 다음해엔 부인 예안 이씨가 세상을 떠났다. 세상의 인심은 멀어졌고 외로움이 뼛속 깊이 파고들었다. 그런데 중국을 드나들며 책을 구해 보내주는 제자가 있었다. 역관 우선(藕船) 이상적. 1844년 추사는 제자 이상적의 변함없는 마음을 기리고 싶었다. 그래서 붓을 들었다. ‘세한도(歲寒圖)’였다. ‘차가운 시절의 그림’이라는 뜻이다. 간결한 갈필(渴筆), 강인한 묵선. 그림 오른쪽 소나무 두 그루 중 왼쪽 나무는 곧고 청청하다. 이 나무가 추사의 집을 버텨준다. 추사의 집을 받쳐주는 나무라니, 그건 분명 제자 이상적일 것이다. 추사는 세한도 옆에 이렇게 적었다.
공자는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했다.…태사공은 ‘권세와 이득을 바라고 만난 사람은 그것이 다하면 교제 또한 성글어진다’고 했다…그대는 어찌하여 겨울에도 시들지 않고 소나무·잣나무처럼 변함이 없는가? 태사공의 말이 틀린 것인가
오른쪽 아래 구석엔 추사의 애틋함이 숨겨진 네 글자의 붉은 도장이 찍혀 있다. ‘長毋相忘’(장무상망). ‘오랫동안 서로 잊지 말자’는 뜻이다. 스승을 존경하는 제자와 그 제자를 사랑하는 스승의 뜨거운 마음이 그림에 절절하다. 세한도를 전해 받은 이상적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는 이 그림을 가슴에 품고 중국 연경(지금의 베이징)에 갔다. 추사의 지인들에게 그림을 보여주고 장악진·조진조 등 16명의 글을 받아 그림 옆에 이어 붙였다.
스승과 제자와 애틋한 마음 이상적이 세상을 떠난 뒤 세한도는 그의 제자였던 김병선에게 넘어갔고 이어 그의 아들인 김준학이 물려받았다. 그 후 휘문고등학교를 설립한 민영휘의 집안으로 들어갔다. 민영휘의 아들 민규식이 1930년대 이 작품을 일본인 추사 연구가 후지쓰카 지카시에게 팔았다(후지쓰카가 베이징의 골동가게에서 세한도를 발견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추사를 흠모했던 후지쓰카는 1943년 10월 이 그림을 갖고 일본으로 귀국했다.
서예가 소전 손재형(1903~1981)이 이 사실을 알게 됐다. 1944년 여름 41세의 손재형은 거금을 들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부산에서 배를 타고 시모노세키에 도착한 뒤 도쿄로 향했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일 때였다. 도쿄는 밤낮없이 계속되는 연합군의 공습으로 불안하고 혼란스럽기 짝이 없었다. 손재형은 물어 물어 도쿄 우에노에 있는 후지쓰카의 집을 찾아내곤 근처 여관에 짐을 풀었다. 병석에 누워 있던 후지쓰카의 집을 매일같이 찾아가 병문안을 했다. 며칠 뒤 후지쓰카가 그 이유를 물었다. 손재형은 비장하게 말을 꺼냈다.
“세한도를 제게 넘겨주실 수 없겠습니까?”
“뭐라고요? 말도 되지 않는 소리. 세한도만큼은 내 품을 떠날 수 없소.”
손재형은 굽히지 않았다. 가고 또 갔다. 석 달이 넘었다. 후지쓰카의 마음이 드디어 움직였다. 그는 아들 후지쓰카 아키나오를 불러놓고 이렇게 말했다. “지금 줄 수는 없지만 내가 죽으면 세한도를 손군에게 돌려주거라.”
손재형은 흥분했다. 그러나 아들이 돌려주리라고 장담할 수 없는 법. 이왕 주실 거라면 지금 줄 수 없느냐고 간청했다. 후지쓰카는 거절했다. 손재형은 다시 후지쓰카의 집을 찾았다. 그러기를 또 열흘이 흘렀다. 후지쓰카는 결국 두 손을 들었다. “내가 졌소. 세한도를 그렇게도 사랑하니, 가져 가시오. 세한도가 이제 진정한 주인을 만난 것 같구려. 돈은 받지 않겠소.” 세한도는 그렇게 극적으로 조국 땅에 돌아왔다. 그때 세한도가 돌아오지 않았다면 한 줌 재로 변했을지도 모른다. 후지쓰카의 집이 폭격을 당했기 때문이다.
집 한 채 값에 추사 그림 사기도서예가로 더 익숙한 이름 손재형. 그는 일제강점기부터 고서화 컬렉터로 이름을 날렸다. 전남 진도 부잣집 아들인 손재형은 1931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특선으로 입상할 정도로 그림과 서예에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예산 수덕사 일주문의 현판인 ‘德崇山 修德寺’(덕숭산 수덕사)를 쓴 인물이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추사를 숭모했다. 그래서 그의 방을 ‘尊秋史室 秋潭齋’(존추사실 추담재)라고 이름 붙였을 정도다. 그러다 보니 추사 김정희의 서화뿐만 아니라 전각과 유품까지 열성적으로 수집했다. 특히나 힘겹고 어수선하던 시절, 옛 그림 명품들이 불쏘시개나 벽 도배지로 사용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손재형은 양정보고 시절인 1920년대 경성미술구락부 경매에서 추사의 ‘竹爐之室(죽로지실)’을 당시 서울의 좋은 집 한 채 값에 육박하는 1000원에 사들이기도 했다. 손재형의 소장품에 대해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지만 그의 컬렉션은 당대 최고 수준이었다. 겸재 정선의 명품 ‘금강전도(金剛全圖)’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도 그의 소장품이었다. 당대의 또 다른 컬렉터 오봉빈은 손재형을 이렇게 평가했다. “청년 서도 대가요, 그 위에 감식안이 충분한 이다. 그 방면에는 감식안과 취미가 많고 또 자금력이 충분하다. 그가 모은 서화 골동은 모두가 일품이요, 진품이다.”
세한도를 되찾아온 손재형은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오세창과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 이시영, 독립운동가이자 국학자인 정인보에게 그림을 보여주고 감격의 찬문을 받았다. 그러고 나서 세한도 두루마리 뒤에 이어 붙였다. 손재형은 정인보의 찬문을 마지막으로 맨 뒤에 90㎝ 정도 공백을 남겨놓았다. 훗날 누군가로부터 이 그림에 대한 멋진 찬문을 받겠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그 꿈은 이뤄지지 않았다. 1950년대 말부터 국회의원에 출마하면서 선거자금을 위해 세한도를 저당 잡혔다가 끝내 다른 수집가에게 작품이 넘어갔기 때문이다. 그의 컬렉션은 여기저기 흩어졌다. 죽로지실, 금강전도, 인왕제색도 등은 훗날 이병철 삼성 회장의 손으로 들어갔다.
세한도를 그린 사람은 김정희이고 동기를 부여한 사람은 이상적이지만, 이들만으로는 세한도가 완성될 수 없었다. 손재형, 그가 있었기에 명품 세한도가 전해질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컬렉터의 힘이다. 세한도는 현재 국보 180호로 지정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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