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lector] 고독했기에 꼭두 만나 꼭두처럼 살다
[Collector] 고독했기에 꼭두 만나 꼭두처럼 살다
꼭두는 참 독특하다. 익살스럽기도 하고 해학적이기도 하고, 원색의 강렬함 속에 무언가 슬픔이 서려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꼭두는 상여에 장식하는 다양한 모양의 나뭇조각을 말한다. 꼭두는 상여 둘레에 배치돼 죽은 자의 영혼을 지켜주고 위로하면서 저승까지 안내해주는 존재였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상여를 거의 사용하지 않게 되면서 꼭두도 함께 사라져갔다.
서울 대학로 동숭아트센터에 가면 2010년 개관한 꼭두박물관이 있다. 김옥랑(59·동숭아트센터 대표) 꼭두박물관장이 1970년대부터 전국 각지를 돌면서 수집해온 2만여 점의 꼭두를 소장하고 있다. 꼭두박물관에서 꼭두를 볼 때마다 궁금한 점이 하나 있었다. 그는 어떻게 꼭두에 빠져 40년 동안 2만여 점을 모았을까. 대체 꼭두에 어떤 매력이 있는 것일까.
“1970년대 초 청계천 5가에 골동품 파는 가게들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볼품 없는 자루에 싸여 구석에 버려지다시피 놓여 있는 꼭두 하나를 발견했어요. 녹의홍상을 입은 여인 꼭두였는데 순간 나 자신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시절 김 관장은 고독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존재의 상실, 이런 감정 때문에 막연한 공황 상태에 빠졌습니다. 고독했지요. 친구 만나기도 그렇고. 혼자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다 꼭두를 만났는데 무관심 속에 버려진 것이 마치 내 모습 같았어요. 꼭두를 구하고 싶은 절실한 마음이 들었지요. 그래서 수집을 시작했습니다.”
꼭두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김 관장. 그 시절 그는 수석을 수집하고 있었다. 그러다 꼭두를 만났다. 최순우 국립중앙박물관장과 고고학자들을 만나고 박물관을 알게 됐다. 권옥연 등 화가들도 알게 됐다. 명작을 감상하고 꼭두를 수집하면서 외로움을 달랬다.
부친 세상 떠난 후 꼭두 만나어찌 보면 꼭두는 다소 섬뜩한 느낌이 들 수도 있다. 적나라한 원색인 데다 상여에 장식하는 것이니 죽음의 묘한 분위기까지 서려 있다. 그런데도 순식간에 빠져들다니.
“어려서 어머니를 따라 절에 많이 다니고 굿도 많이 봤습니다. 꼭두의 원색이 낯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더 금방 가까워질 수 있었죠. 그 시절 꼭두를 사면 책에 올려놓고 거기 촛불을 비춰 바라보곤 했지요. 매번 그 모습이 달리 보였습니다.”
그는 1970~80년대 부지런히 꼭두를 수집했다. 충청도, 전라도를 특히 많이 돌아다녔다.
“아무도 꼭두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루로 꼭두를 사 모았지요. 내가 치워준다고 할 정도로 물건을 사 모았습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보통 5만원 안팎이었다고 한다. 물론 좋은 것은 50만원까지도 했다,
“고미술 가게에 들어갈 때는 꼭두 얘기는 꺼내지도 않습니다. 무관심한 척하는 거지요. 가게 문 열고 나가려 할 때 무심히 툭 가리키지요. 고미술 가게 주인이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할 때 이거 얼마냐 하고 물어보면 값을 세게 부르지 못합니다.”
처음부터 눈독을 들이면 그건 머리싸움에서 지는 것이다. 상대가 이를 눈치 채고 값을 비싸게 부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좋은 것, 확 놀라게 하는 것은 미리 찜해놓을 수밖에 없다. 누군가가 먼저 가져가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엔 아무리 비싸도 꼭 사야 한다.
그는 1984년 극단 ‘낭랑’을 창단해 꼭두극을 무대에 올렸고 1989년 동숭아트센터를 설립했다. 꼭두 수집은 계속했다. 그가 꼭두 컬렉터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98년 『한국의 나무꼭두』를 출간한 이후였다. 그때부터는 꼭두 소장자들이 값을 세게 불렀다.
“이때부터는 기싸움이었습니다. 제가 꼭두 수집하러 다니는 사람이라는 것이 알려진 2000년부터는 꼭두 값을 수백만원 이상 부르더군요. 3000만원짜리도 샀지요. 비싸지만 꼭 있어야 할 것이기에 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컬렉션을 하다 보면 좀 더 온전한 컬렉션을 만들고 싶은 법. 그래서 더 좋은 것이 나오면 기어이 손에 넣고 마는 것이 컬렉터의 공통된 욕망이다. 김 관장은 “늘 빚더미에 산다”고 했다. 2005년 수억원대 상여와 꼭두를 샀다. 값을 치러야 하는데 돈이 없었다.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인데 그는 상여와 꼭두 주인에게 “저 집(어머니 집) 맡기면 안 돼요?”라고 말한 적도 있다.
빚 지고 살았다고 하면 오해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남편이 승상배(2009년 작고) 동화홀딩스 회장이었기 때문이다. “사업가 남편이 돈 많아서 부인이 유물 수집한다”는 식의 말이 싫었다. 김 관장은 “실제로 남편이 목돈을 주지 않아 여유가 없었다”며 “1990년대 초엔 꼭두 구입하느라 결혼 반지를 팔기도 했다”고 전했다.
내년에 베이징에서 꼭두 전시그가 수집한 꼭두는 대부분 18세기부터 일제강점기 사이에 만들었던 것이다. 인물 조각과 용·봉황 조각이 주종을 이룬다. 인물 꼭두를 보면 그 역할에 맞게 꼭두의 모습도 다양하다. 죽은 자를 편안하게 안내하는 시종, 죽은 자를 지켜주는 무사, 죽은 자의 슬픈 영혼을 위로하는 악공(樂工)과 재주꾼…. 표정과 자세, 색감이 모두 달라 보는 이를 흥미롭게 한다.
인물 꼭두의 크기는 대부분 20∼30㎝. 용 꼭두는 역동적이고, 봉황 꼭두는 화려한 모습으로 꼭두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전해준다. 상여의 네 귀퉁이에 배치하는 봉황 꼭두는 특히 초월과 비상을 상징한다. 이 같은 꼭두들의 도움으로 죽은 자의 영혼이 무사히 저승에 이르게 된다는 옛사람의 믿음이 담긴 독특한 문화유산이다.
그의 컬렉션은 국립민속박물관, 국립청주박물관, 호암미술관(지금의 삼성미술관 리움), 부산박물관의 특별전에 출품되기도 했다. 2007년 7월부터 지난해까지 뉴욕, 로스앤젤레스 등 미국 6개 도시 순회전을 열었고 2010년 광주비엔날레에 초청되기도 했다.
“외국인도 꼭두를 참 좋아합니다. 한국 고유의 미학, 원초적 감성을 담고 있기 때문이지요. 내년엔 한·중 수교 20년을 맞아 중국 베이징수도박물관에서 전시를 합니다. 우리 꼭두의 모습을 당당히 보여주려고 합니다.”
꼭두는 보면 볼수록 재미있다. 낯설고 험한 길을 안내하고, 이승을 떠나 저승까지 무사히 당도할 수 있도록 가는 길을 호위하며, 그 과정에서 망자를 시중 들고 이별의 슬픔을 위로해주는 꼭두. 그는 “꼭두는 이렇게 저승과 이승을 이어주는 존재, 현실과 꿈 사이를 오가는 존재였다”며 “꼭두의 슬픔과 해학에서 인생의 우여곡절을 보았다”고 말했다.
김 관장의 꼭두 수집 40년 여정은 만만치 않았다. 시련도 많았고 세간의 오해와 질투도 많았다. 하지만 그는 꼭두를 만나 꼭두와 함께 현실과 꿈 사이를 오가고 있다. 김 관장은 그야말로 꼭두 같은 사람이다. “고독했기에 꼭두를 만났고, 꼭두가 없었으면 나는 죽었을 것”이라는 그의 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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