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cons feminism] 황혼의 ‘미니스커트 혁명’
[icons feminism] 황혼의 ‘미니스커트 혁명’
NANCY HASS 기자글로리아 스타이넘(77)은 미국의 대표적인 여권운동가다. 하지만 30세가 안 된 미국 여성 중에 그녀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설령 안다고 해도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처럼 역사 책 속에 나오는 존경스러운 인물 정도로밖엔 인식하지 못한다. 그들에게 여권운동은 자신들이 태어나기전에 이미 이긴 전쟁이다. ‘미니스커트 혁명’으로 불리는 이 운동은 1970년대 그들의 할머니와 어머니들을 집안일과 성차별에서 해방시켰고, 그들 세대가 지금처럼 완전한 자유를 누리는 데 밑거름이 됐다.
하지만 스타이넘은 여전히 그 전선에서 싸우고 있다. 그녀는 이 싸움이 아직 절반도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뉴욕 어퍼 이스트 사이드의 복층 아파트 거실에서 그녀를 만났다(그녀는 이곳에서 35년도 넘게 살아 왔다). 그녀의 e-메일 받은편지함에는 중동과 아프리카, 인도와 워싱턴 DC 등지에서 강연 요청이 쇄도한다. 리얼리티 TV 스타나 늘씬한 모델들에게 정신을 빼앗긴 언론은 지난 15년 동안 스타이넘에게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다. 하지만 반세기 가까이 여권운동의 상징이 돼 온 그녀는 지금도 여전히 할 일이 많다고 말한다.
“우리는 다양한 분야에서 큰 진전을 이뤘다”고 그녀는 말했다. “적어도 일부 미국 여성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다.” 그녀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사용해 온 녹색 벨벳 소파 위에 앉아 자수 베개에 등을 기댄 채 미지근한 커피를 홀짝거렸다. 베개에는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는 게 최상의 보복’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스타이넘은 이렇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안데르스 브레이빅(지난 7월 말 77명을 학살한 노르웨이인) 사건을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의 범행 동기는 여성혐오증과 남성우월주의였다. 그는 여권주의자인 어머니와 계모가 자신을 ‘여성화’했기 때문에 그들을 증오했다고 말했다. 여권주의자들이 남성을 남성답지 못하게 만든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언론에 좀처럼 보도되진 않지만 그런 생각을 지닌 사람이 많다면 우리가 과연 이 일을 제대로 해 왔는지 회의가 든다.”
스타이넘은 도미니크 스트로스칸 전 IMF 총재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다. 그는 자신이 묵던 뉴욕의 한 호텔 방에서 객실 여종업원을 성추행한 혐의로 기소됐다. 여종업원의 일관성 없는 진술과 미심쩍은 배경 탓에 기소가 기각될 가능성이 있지만, 스타이넘은 그 여성이 스트로스칸을 고소해 이 일을 세상에 널리 알린 사실 자체가 하나의 승리라고 생각한다. 스타이넘은 스트로스칸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다른 여성들을 거론하며 “누가 봐도 그가 습관적으로 이런 일을 저질러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이제 그런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났고, 그는 불명예스럽게 IMF 총재 자리에서 물러났다. 앞으로 일이 어떻게 되든 우리에겐 분명한 승리다.”
미셸 바크먼과 세라 페일린 등 여성 정치인들은 여권주의자는 아니지만 여권운동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위치에 오르지 못했다. 스타이넘은 ERA(남녀평등 수정헌법 조항)에 반대한 보수파 여성 지도자 필리스 슐래플리가 그랬듯 자신과 생각이 다른 여성들도 있게 마련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와 생각은 다르지만 생김새가 같은 여성들이 정계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걸 보면 여권운동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된다”고 그녀는 말했다.
스타이넘이 이렇게 오랜 세월 여권운동의 중심에 서 있을 수 있었던 건 논리정연한 이론과 일관성 있는 ‘메시지’, 끊임없는 집중력 덕분이다. 이 분야에서 그녀의 라이벌이었던 베티 프리던은 1963년 ‘여성의 신비’라는 책으로 여권운동의 시동을 걸었지만, 지나치게 이론을 앞세웠고 2006년 85세로 사망하기 훨씬 전 활동을 접었다. 또 호주의 마르크스주의자 저메인 그리어는 여성학계 외부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요즘은 스타이넘도 전성기 때처럼 활동이 두드러지진 않지만 여전히 해마다 세계 각지의 수십 개 대학과 세미나장을 돌며 강연한다.
스타이넘의 트레이드마크가 되다시피한 조종사 안경은 최근 테 없는 안경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평등은 세계 공동의 문제’라는 그녀의 신념은 변함없을 뿐 아니라 최근 들어 특히 주목 받는다. 이런 신념은 그녀와 프리던 사이에 갈등의 요인이 되기도 했다(프리던은 주로 미국 중산층의 결혼한 여성들이 받는 억압에 관심을 쏟았다). 스타이넘이 1979년 처음 들고 나왔던 인신매매와 여성 할례 등의 문제는 과거엔 미국 주류 사회에서 별로 관심을 끌지 못했다. 하지만 9·11 테러 이후 많은 미국인이 ‘외국의 억압 상황을 무시하는 일은 어리석은 처사’라며 그녀의 신념에 동조하게 됐다.
지난 8월 15일 HBO 방송에서 스타이넘의 일생을 다룬 다큐멘터리 ‘글로리아(Gloria: In Her Own Words)’의 방영이 시작됐다. 젊은 세대에게 그녀의 존재를 알릴 좋은 기회가 될 듯하다. 이 다큐멘터리는 오하이오주의 황폐한 도시 이스트 톨레도에서 정신병을 앓는 어머니를 돌보던 십대 시절을 시작으로 그녀의 일생을 조명한다. 1960년대 뉴욕에서 잡지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던 시절의 이야기도 나온다. 1963년 스타이넘은 플레이보이 클럽의 ‘버니 걸(토끼 복장을 한 웨이트리스)’로 위장 취업해 그들의 생활을 파헤치는 기사를 썼다. 그녀는 자신이 1968년 낙태권을 지지하는 한 집회에서 여권주의자로 ‘개종’했다고 설명한다. 또 1971년 골판지 상자들이 쌓여 있는 한 칸짜리 사무실에서 잡지 ‘미즈(Ms)’를 창간한 이야기도 들려준다. 그녀는 탭댄스도 출 줄 안다. 열 살 때 담배 연기 자욱한 동네 극장에서 배운 솜씨다.
이 다큐멘터리에선 물론 좀 더 껄끄러운 문제들도 다룬다. JFK의 보좌관 테드 소렌슨과 영화감독 마이크 니콜스, 언론 재벌 모트 주커먼 등 영향력 있는 남성들과의 연인 관계(일각에서는 이런 관계가 ‘서민적’인 스타이넘의 이미지를 실추시켰다고 비난한다). 자녀를 낳지 않겠다는 결심. 1990년대 ‘정치적 올바름(차별적인 언어 사용과 행동을 피하는 원칙)’에 대한 반발. 그녀에게 음식에 대한 병적인 공포를 불러일으킨 아버지의 비만 등.
그런가 하면 스타이넘의 개인적인 장점들도 부각된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부드러운 이미지를 유지하면서도 끈기있는 태도. 학술적인 용어로 허세 부리기를 거부하는 자세. 마라톤 주자처럼 꾸준하고 안정된 마음가짐. 어려운 문제를 쉽게 풀어 대중을 이해시키는 능력. 검푸른 눈으로 상대를 응시하며 편안하게 대하는 태도 등. 1970~80년대 그녀는 반대파들과도 쉽사리 융화한다는 이유로 극단적인 여권주의자들의 비난을 사기도 했다. 하지만 채찍과 당근을 적절하게 사용하는 그녀의 방식은 여권주의의 메시지를 거부감 없이 전달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스타이넘은 문화의 복잡성을 무시한다는 비난을 받아 왔다. 1960년대에 형성된 그녀의 견해는 오늘날까지도 거의 변함없다. 일각에서는 “현대 세계가 그녀의 생각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며 그 견해를 비난한다. 1968년 개발도상국 여성들의 얼굴을 가리는 베일은 가부장제의 여성 억압으로 받아들여져 여권주의자들의 표적이 됐다. 하지만 요즘 유럽과 젊은 아랍 여성들은 두건이나 히잡 착용은 여성 개개인이 선택할 문제라고 주장한다. 성매매는 확실한 사회악으로 받아들여져 거기서 경제적 이득을 얻는 사람들을 제외하곤 지지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또 사우디 여성들이 자동차를 운전했다는 이유로 체포된 사실에 많은 사람이 분노한다. 하지만 여성 할례는 좀 더 복잡한 문제다. 실제로 할례를 당한 여성 일부를 포함해 일각에서는 할례에 반대하는 행위가 문화적 제국주의라고 비난한다. 하지만 스타이넘은 비록 여성들이 이런 풍습에 적응돼 그것을 억압으로 인식하지 못한다 해도 이 모두가 여전히 여성에 대한 억압이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자신에게 해가 되는 일을 참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이 다큐멘터리에선 스타이넘의 모순된 성격은 파헤치지 않았다. 그녀는 누구를 만나든 금세 친구로 만드는 재주는 있지만 언론에 노출된 지 5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수수께끼 같은 인물로 남아 있다. 그녀의 따뜻하고 침착한 시선에 진심이 담겨 있다는 사실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녀에게선 여권운동을 50년 가까이 이끌어 오면서 습득한 훈련된 매력과 노련한 정치인에게서 엿보이는 계산된 자연스러움이 묻어난다. 스타이넘은 크게 낙심할 만한 실망스러운 사건도 교훈을 얻는 계기로 삼았다(그녀가 지금까지 펴낸 4권의 책 중에 1992년 발표한 ‘내부로부터의 혁명’은 회고록과 자기계발서를 혼합한 듯한 성격을 띤다). 이런 경향은 그녀를 살과 피를 가진 사람이 아닌 초인적 인간으로 보이게 만든다. 그녀는 자신이 ‘희망 중독’이라고 말한다. 낙천적인 성격과 재치있는 슬로건을 좋아하는 면모가 그대로 드러나는 말이다.
스타이넘은 나이가 들어서도 뜻밖의 행동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녀는 66세가 되던 2000년 첫 결혼을 했다. 스타이넘은 자신이 데이비드 베일(당시 59세, 남아공의 사회운동가로 배우 크리스천 베일의 아버지다)과 결혼한 주된 이유는 베일의 미국 시민권 취득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자의적인 독신생활로 명성이 높았던 스타이넘이 그 명성과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렸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그동안 법이 바뀌었고 결혼생활 자체도 달라졌다는 사실을 염두에 둬야 한다”고 그녀는 말했다. “난 결혼 자체를 반대한 적은 없다. 여권운동을 시작하기 전엔 반드시 결혼해야 하는 줄 알았다. 사실 오랫동안 난 언젠가 결혼을 하리라고 생각했다. 다만 결혼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선뜻 들지 않아 나중으로 미뤄뒀을 뿐이다. 그러다 여자가 결혼하면 자신의 성(姓)을 잃게 되고, 성을 다시 찾으려면 법원에 가야만 하는 법이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법이 바뀌었다.”
스타이넘이 베일과 결혼한 지 3년도 채 안 된 2003년 베일은 뇌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한 남자와 오랜 시간 함께 살아본 적이 없었던 데다 정신병에 걸린 어머니를 돌보던 어린 시절 기억 탓에 누군가를 돌보는 일에 두려움을 느꼈지만 끝까지 베일을 간호했다. “사실 내게 아주 좋은 경험이었다”고 그녀는 말했다. 언제나 그렇듯 다른 사람들에겐 고통스러웠을 일에서 의미를 찾고 듣는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하는 그녀다운 말이다. “인생을 새롭게 할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성인이 다른 성인을 돌보는 일은 어린아이가 어른을 돌보는 일보다 훨씬 더 힘들었다.” 그녀에게 자녀가 있었다면 어린 시절의 상처가 치유됐을까? 그녀의 말을 들어보자. “그랬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난 늘 너무 어리고 준비가 안 됐었다. 60대가 되고 나서야 어른이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그녀는 싱글이며 그 생활에 만족한다. “외롭지 않다. 사실 난 고독을 동경한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캐시미어 양말처럼 포근하고 편안하게 들린다. 하지만 그녀도 나이드는 데 고통이 따른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50대 시절엔 감정의 기복이 심했다. “처음엔 나이가 들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젊은 시절처럼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 결과 심신은 극도로 지치고 우울증까지 생겼다. 스타이넘은 그 시절 몇 년 동안 언론계 거물인 억만장자 주커먼과 연인 사이로 지냈다. 그녀는 살면서 자신이 한 일 중 후회스럽게 생각하는 일이 몇 안 되는 데 이 일이 그중 하나다. 스타이넘은 옛 연인들과 아직도 사이좋게 지내지만 주커먼은 예외다. “내가 왜 그에게 끌렸을까? 너무 지쳐서였던 듯하다. 그는 춤을 잘 추고 아주 재미있었다. 서로 의견이 일치하는 부분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야 깨달았다.”
그녀의 70대 시절은 “놀라울 정도로 자유로웠다. “나이가 드니 외모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처음엔 아름다운 외모가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도움이 됐지만(그녀는 ‘여권주의자는 남성혐오증에 걸린 못생긴 여자’라는 미국인들의 고정관념을 깼다), 때때로 부담이 될 때도 있었다고 했다. 말로 토머스, 제인 폰다 등 그녀와 가까운 친구 중 다수가 성형수술을 받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고, 그녀 자신도 그런 사실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녀는 다른 여성들의 행동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일엔 언제나 조심스럽다. “난 카메라 앞에 서는 일이 직업이 아니어서 (성형수술을 받지 않아도 되니) 행운”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늙어가는 외모에 대한 거부감보다 성형수술을 할 경우 혹시 잘못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훨씬 더 컸다고 덧붙였다. “(성형수술이 잘못되면) 어울리지 않는 가발을 쓴 것과 마찬가지다. 그 사람이 말을 할 때 사람들의 신경이 온통 어색한 가발에 쏠려 무슨 말을 하는지 들리지 않는다. 내게 그런 일이 일어나면 큰일이다.”
스타이넘은 요즘 다섯 번째 책을 마무리하는 중이다. 세계 곳곳을 다니며 사람들을 만나고 강연을 하며 살아 온 삶을 돌아보는 책이다[책의 잠정적인 제목은 ‘마음에 이르는 길(Road to the Heart)’이다]. 책을 15년 전부터 계획해 왔지만 이제야 마무리하게 된 이유를 묻자 그녀는 “강연을 하느라 돌아다니다 보니 그렇게 됐다”고 말했다. 신문 논평과 자신이 반대하고 지지하는 일에 관한 글을 쓰느라 바빴던 탓도 있다. 그녀는 유서에 자신의 아파트를 “뉴욕에 왔을 때 머무를 곳이 필요한 (남녀) 여권주의자들에게 남긴다”고 썼다. 지금 그녀는 아프리카 유물 사이에 놓인 컴퓨터 앞에 웅크리고 앉아 있다. 올해는 클래런스 토머스 대법관 지명자의 인준청문회에서 애니타 힐이 그의 성희롱 사실을 증언한 지 20년이 되는 해다. 스타이넘은 요즘 그 기념행사를 준비 중이다. 그 행사가 끝나면 곧 잠비아 방문길에 오른다.
“아직도 내 나이를 인정하지 못하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게 문제”라고 그녀는 말했다. “내 말은 지금도 세계 어디선가 터무니없고 부당한 일이 계속 일어나고 있으며, 난 그 일에 관해 글을 쓰고 내 생각을 말하고 싶다는 뜻이다. 상황이 점점 나아지고 있긴 하지만 생각보다 그 속도가 훨씬 느리다. 할 일은 무궁무진하다. 적어도 내겐 그렇다.”
번역 정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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