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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lector] 고서 수집으로 민족의 자존심을 살리다

[Collector] 고서 수집으로 민족의 자존심을 살리다

여승구 화봉문고 대표

8월 2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인사동 화봉(華峰)갤러리에서 ‘대동여지도 150주년 기념전-고산자 김정호 선생의 눈물’ 개막식이 열렸다. 이날 전시를 개최한 여승구(75) 화봉문고 대표(화봉책박물관 관장)는 이렇게 말했다.

“컬렉터라면 꼭 손에 넣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광개토대왕비 원(原)탁본, 훈민정음 해례본, 대동여지도 목판본, 삼국사기, 삼국유사, 제왕운기 이런 것들이겠지요. 저는 삼국유사, 삼국사기, 제왕운기, 대동여지도를 수집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들을 정말로 사랑합니다.”

그때 전시장 바닥엔 대형 대동여지도 목판채색본이 전시됐다. 현재 남아 있는 대동여지도 목판본은 국내외 통틀어 20여 본. 여 대표의 소장본은 국내에 남아 있는 유일한 군현별 채색지도다. 대동여지도는 살아 꿈틀거리는 듯했고 그 웅혼함과 장대함에 사람들은 매료됐다.

여 대표가 고서, 고지도 컬렉터의 길로 접어든 것은 어쩌면 우연이었다. 1955년 서울대 상대에 낙방한 그는 서울 광화문 인근에서 사촌형이 운영하던 고서점 광명서림에 들어갔다. 시인이 되고 싶었던 꿈이 그를 서점으로 이끈 것이다. 출판 유통을 배우고 고서적을 조금씩 알아갔다. 중앙대에 들어갔지만 서적 무역업을 하기로 맘먹고 학교를 중퇴한 뒤 1963년 ‘팬아메리칸 서비스’를 설립했다.



고서점에서 고서적에 눈떠사업은 번창했다. 1982년 도서박람회 서울북페어를 개최했다. 국내 최초 국제 북페어였다. 그때 유명 학원의 한 국어강사가 그를 찾아왔다. 귀중한 근현대 시집과 소설 초판본 200여 권을 북페어에서 팔아 달라는 것이었다. 얼마 후 우연히 언론사 문화부장들과 식사 자리가 생겼다. 문화부장들은 여 대표의 얘기를 전해 듣곤 “이 기회에 고서를 수집해 박물관 하나 만드시죠”라고 했다.

책 박물관! 이 단어가 여 대표를 사로잡았다. 곧이어 ‘직지심경(直指心經)’이 머리에 떠올랐다.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간행한 금속활자본. 독일의 구텐베르크 성경보다 시대가 앞서는 현존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 그 도도한 역사를 생각하니 가슴이 뛰었다.

“한국의 브랜드로 세계에 당당하게 내놓을 수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직지심경, 금속활자 인쇄문화입니다. 그렇게 이어져온 것이 고서지요. 그러니 고서가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고서를 수집해야 한다는 게 명쾌하게 다가왔습니다.”

여 대표는 을유문화사 안충근 편집주필을 따라다니며 고서를 수집했다. 그렇게 30년. 그의 장서는 13만여 권에 이른다. 고활자본, 목판 귀중본, 불경 및 판화본, 문학서적, 교과서, 성서, 신문잡지, 포스터 및 영화 자료, 일본·중국 고서, 고지도 등 서책과 지도를 망라한다. ‘승정원일기’ 초록, 1454년 펴낸 국내 초간 유일본 ‘명심보감’, 대마도가 우리 땅으로 표기된 ‘천하총도’, 금속활자로 인쇄한 ‘동래선생 교정북사상절’(1403), 한국 최초의 백과사전 ‘고사촬요’(1568), ‘천로역정’ 한글판(1895) 등 희귀본이 즐비하다.

‘춘향전’은 이색적인 그의 컬렉션이다. 1892년 프랑스 파리에서 김옥균 암살범인 홍종우가 프랑스어로 번역 출간한 ‘춘향전’을 비롯해 판본만 300여 점이고 포스터, 음반 등 관련 자료까지 치면 600여 점에 이른다. ‘옥중화’ ‘옥중가인’ ‘춘몽록’ ‘춘향가’ ‘성춘향전’ ‘열녀춘향수절가’, 코믹하게 각색한 1950년대 ‘나이론 춘향전’, 춘향의 재판 과정을 법률적으로 바라본 ‘법률춘향전’ 등등 춘향전 하나만 갖고도 특별전을 열 수 있는 정도다. 여 대표는 홍종우가 파리에서 번역한 프랑스어판 춘향전을 구하려고 센 강변의 고서점을 뒤지기도 했다. 그곳에서 책을 찾아내지는 못했지만 최근 인터넷을 통해 이 책을 두 권 수집했다.

여 대표가 춘향전에 깊은 관심을 갖는 이유는 무얼까.

“스토리가 재미있고 극적이라는 점이죠. ‘심청전’엔 효라는 동양적인 주제만 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춘향전은 달라요. 남녀의 사랑이 있고 불의에 대한 저항이 있지요. 흥행요소를 두루 갖췄다는 말인데, 그래서 한류의 주류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누군가 제 자료를 이런 데 활용한다면 좋을 텐데요.”

여 대표는 요즘도 경매에서 춘향전을 구입한다.

“경매에 춘향전이 나오기만 하면 그냥 제 것입니다. 제가 춘향전을 좋아한다는 소문이 나자 다들 춘향전이 나오면 ‘그건 여승구 것’이려니 하는 거지요.”

‘천로역정’도 많이 수집했다. 1983년 일본 오사카를 여행하던 중 지하상가의 한 고서점에 들렀다. “한국 고서가 없느냐”고 했더니 깨끗한 천로역정 초판본 두 권을 내놓았다. 그게 천로역정과의 인연이었다.

수집가의 궁극적인 꿈은 박물관이다. 그는 2004년 서울 신문로 한적한 곳에 화봉책박물관을 열었다. 책을 통해 우리 책의 역사뿐만 아니라 전통문화의 자부심을 보여주겠다는 꿈, 그래서 더 많은 사람이 고서를 사랑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꿈을 이룬 것이다. 그러나 박물관 운영은 쉽지 않았다. 돈은 끝없이 들어가는데 수익은 거의 없다.

그런 어려움 때문에 2009년 신문로 사옥을 처분하고 인사동과 성북동으로 박물관과 사무실을 옮겼다. 인사동 화봉갤러리에서 책박물관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여건은 만만치 않다.

“어려웠습니다. 중소기업으로서 박물관을 만들어 운영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고생하다 회사 망치고 이제는 책만 남은 것이지요.”



책박물관 운영하다 재산 날려껄껄 웃는 여 대표의 얼굴엔 아쉬움이 가득했다. 그래도 우리나라에 변변한 책박물관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국가가 책박물관을 만든다면 자신의 컬렉션을 기증할 의사가 있다고 했다. 여 대표는 귀중본 고서의 경우 청색 하드커버로 덧씌워 보존한다. 흰 종이에 직접 제목을 써 넣어 책등에 붙여 놓았다. 그 흔한 인쇄활자체가 아니라 여 대표의 친필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조심스레 또박또박 써 내려간 한 글자 한 글자에서 노 수집가의 열정과 고집을 읽을 수 있었다.

2013년은 그가 출판무역업을 시작한 지 50년이 되는 해. 컬렉션 가운데 최고 작품을 엄선해 책을 내고 전시도 열 계획이다. 그리고 중국, 일본에 나가 전시를 개최할 생각도 갖고 있다. ‘대동여지도 150주년 기념전’ 개막식에서 그는 현대미술 작가에 의뢰해 제작한 ‘김정호의 눈물’이라는 작품을 전시했다. 김정호를 추모하는 불교제의도 열었다. 그날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고산자 김정호 선생이 혼신의 힘을 바쳐 대동여지도를 제작한 지 150년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상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국가기밀을 누설했다는 죄명으로 핍박을 받고 흔적 없이 세상에서 사라지셨습니다…. 지금 김정호 선생이 다시 태어나 이 땅의 현실을 본다면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그가 생각하는 고서, 고지도 컬렉션은 이런 것이다. 우리 민족의 자존심을 수집하고 지켜내는 것. 그런 컬렉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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