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리수 두는 공정위 - 공정위 무차별 공세에 재계 부글부글
무리수 두는 공정위 - 공정위 무차별 공세에 재계 부글부글
‘공정위, 규제기관 중 청렴도 1위.’ 지난주 공정거래위원회는 출입기자들에게 이런 메일을 돌렸다. 공공기관을 대상으로 매년 청렴도를 측정하고 있는 국민권익위원회 조사에서 공정위가 1등을 했다는 내용이었다. ‘청렴도 1등’은 분명 박수 받을 일이다. 하지만 곱씹어볼 만한 게 있다. 공정위는 국민권익위 조사에서 국세청·관세청·금융감독원과 함께 금융·경제 감독기관으로 분류됐다. 공정위가 검찰·경찰 같은 수사·단속기관과 같은 대접을 받은 것이다.
물가감시위원회로 전락?물론 공정위는 독과점과 담합을 감시하고 소비자 보호 업무를 하는 기관이니 국민권익위가 ‘수사·조사 및 규제기관’으로 분류한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공정위가 마치 사정(司正)기관인 것처럼 인식되는 것은 문제라고 지적했다. 공정위가 장관급으로 격상된 이후 초대 공정거래위원장을 지낸 김인호 전 경제수석은 “공정위는 사정기관이 아니다”며 “내가 현직에 있을 때도 사정기관 회의에 공정위를 불렀는데 이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지금도 정권이 공정위를 사정기관처럼 대하는 징후가 있다. 사정업무를 맡고 있는 청와대 민정수석실에 공정위 직원이 파견 나가 있기 때문이다.
올 초 김동수 공정거래위원장이 취임한 이후 공정위 색깔이 달라졌다. 김 위원장은 취임사부터 남달랐다. 경쟁당국인 공정위 수장이 물가를 강조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공정위가 물가안정 문제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 것은 나무만을 보고 숲은 보지 않는 근시안적 논리”라고 못 박았다. 공정위 안팎에서 좀 뜻밖이라는 반응이 나왔다. 경쟁 주창자인 공정위의 본래 임무와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는 한발 더 나갔다. 취임 직후 과장급 간부 전원을 소집해 군기 잡기에 나섰다. 그는 “공정위가 물가기관이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는 직원은 색출해 인사조치하겠다”고 선포했다.
그 이후 공정위는 ‘물가감시위원회’를 자임했다. 물론 그럴 만한 사정은 있었다. 물가를 잡기 위해 금리나 환율 같은 거시정책을 쓰기엔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다. 거시정책 수단은 효과가 확실한 만큼 비용도 만만치 않다. 성장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거시정책 수단이 마땅치 않으니 그나마 개별 상품의 시장가격을 들여다보는 미시정책 수단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공정위가 전격 물가전선에 투입됐다.
‘물가 잡는 공정위’에 대한 비판이 터져 나왔다. 물론 공정위가 카르텔을 막고 시장지배적 사업자의 횡포를 감시하면 물가안정에도 기여할 수 있다. 하지만 본말이 전도됐다는 지적이 나왔다. 물가안정은 경쟁당국이 제 역할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정책의 결과물일 뿐이기 때문이다. 로펌에서 일하는 전직 공정위 고위관료는 “정책 목표와 수단이 바뀌었다”고 꼬집었다. 최정표(전 공정위 위원)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가격을 규제하는 것은 자원배분과 소득분배를 왜곡시키는 것”이라며 “시장경제의 성과를 최대화해야 할 공정위가 이런 일에 나선다는 것은 자기모순이고 자기배반”이라고 비판했다. 공정위는 이런 비판에 동의하지 않았다. 공정위는 “과거 1970~80년대 물가 단속과 같은 가격의 직접 통제나 관리가 아니라 가격 담합 등과 같은 불법 인상을 방지하고 경쟁촉진을 통해 가격안정에 기여하려는 것”이라고 해명했다.
공정위의 물가 감시망에 포착되는 바람에 곤욕을 치른 기업이 속출했다. 올 6월 ‘프리미엄’을 표방하며 값을 기존 상품의 두 배 이상으로 매긴 ‘신라면 블랙’이 공정위 제재를 받았다. 부당한 가격 인상이나 담합 때문이 아니었다. 공정위는 “신라면 블랙의 표시·광고가 허위·과장됐다”고 했다. 가격인상을 제재할 직접적 수단이 없으니 우회적인 제재 방법을 택했다는 비판이 나왔다. 범죄 수사를 위해 본질과 관계없는 다른 죄목으로 피의자를 구속하는 검찰의 별건구속(別件拘束)과 다를 바 없었다. 결국 신라면 블랙은 출시 넉 달 만에 짧은 생을 마감했다. 신라면 블랙의 좌절은 업체의 마케팅 실패라는 시각과 함께 공정위 제재가 큰 영향을 미쳤다는 시각이 엇갈렸다.
공정위의 물가 전선은 ‘동반성장’과 ‘상생’ 전선으로 확대됐다. 공정위는 대형 유통업체를 정조준했다. 백화점·대형마트·홈쇼핑이 중소 입점·납품업체에서 받는 수수료를 낮추라고 공공연하게 요구했다. 구체적인 수수료 인하 수치를 둘러싸고 아직까지 업계와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업계에서는 “영업기반을 흔드는 조치”라며 반발했다. 익명을 원한 로펌의 경쟁법 전문가는 “대형유통업체가 시장지배적 사업자의 지위를 남용해 납품업체를 힘들게 하는 게 있으면 법에 따라 제재하면 될 일인데, 시장에서 결정되는 일종의 가격인 수수료에 경쟁당국이 직접 개입하는 건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공정위가 무리하게 시장에 개입하니까 업계가 반발하는 것”이라며 “공정위와 업계가 혼탁한 진흙탕 싸움을 이어가는 것처럼 비치면서 경쟁당국의 신뢰도 떨어지고 있다”고 아쉬워했다.
경쟁 촉진에 소홀하다는 비판 나와김동수 위원장은 취임사에서 지난 30년간의 공정위를 ‘차가운 파수꾼’으로 표현했다. ‘시장경제 파수꾼’은 전임 정호열 위원장이 즐겨 사용하던 표현이다. 공정위가 시장경제의 심판 역할을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김 위원장은 과거의 공정위를 ‘차갑다’라는 형용사로 묘사했다. 그 대신 이제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소비자와 생산자 등 모든 경제주체가 상호 공존하며 상생하도록 정책적으로 뒷받침하는 ‘따뜻한 균형추’가 되겠다고 했다. ‘따뜻한 균형추’는 그가 직접 만든 말이다. 청와대가 중시하는 대·중소기업 동반성장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그러나 ‘따뜻함’을 너무 추구하다 공정위 정책이 경쟁정책의 본령인 경쟁 촉진보다 약자 보호로 쏠릴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조성봉 한국경제연구원 박사는 “공정위는 현장에서 행정지도를 하는 기관도 아니며 그렇다고 즉결심판이나 즉결처분을 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것도 아니다”며 “준사법기관으로서 1심의 역할을 하고 있는 공정위가 으름장을 놓으며 물가를 잡겠다는 것은 딱한 모습”이라고 지적했다.
공정위는 행정과 심판, 소비자 보호, 상생협력 등의 여러 기능을 아우르고 있다. 외국 경쟁당국과는 다른 독특한 구조다. 공정위는 경쟁당국의 본업은 아니지만 동반성장을 비롯한 ‘약자 보호’를 무시할 수 없다고 하소연한다. 공정위 고위관계자는 “대기업에 비해 약자인 중소기업을 배려해야 하는 한국 특유의 정책수요를 공정위가 외면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최근 수수료를 둘러싼 유통업계와의 샅바싸움은 ‘시장경제 지킴이’인 경쟁당국의 위상을 외려 떨어뜨리고 있다. 공정위도 이젠 ‘출구전략’이 필요해 보인다. 이쯤 해서 공정위는 초심(初心)으로 돌아가야 한다. 30년 전 공정위의 태동 직전에 관료 선배들은 이런 대화를 했다.
“공정거래법, 그거 어떻게 해야 되는 거야?”(김재익)
“경제를 정부의 간섭 없이 ‘보이지 않는 손’에 맡기고 독점의 힘을 배제하자는 거죠. 그래야 물가도 잡힙니다.”(전윤철)
1980년 여름. 전윤철 당시 공정거래정책관실 총괄과장이 김재익 국보위 경제과학위원장의 호출을 받고 자택으로 불려가 나눈 얘기다. 경제 실세 김재익의 ‘자율·안정·개방’ 모토와 신군부의 강력한 힘을 추진력으로 삼아 1981년 공정위가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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