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용성 교수가 만난 예술경영 CEO② - 유상옥 코리아나화장품 회장
서용성 교수가 만난 예술경영 CEO② - 유상옥 코리아나화장품 회장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에서 도산공원으로 가는 길에 ‘스페이스C’가 있다. 한쪽 면 전체가 큼지막한 통유리로 돼 시원함을 주는 곳. 안으로 들어가면 다채로운 볼거리가 전시돼 있다. 건물 지하 1·2층은 코리아나미술관, 지상 5·6층은 코리아나화장박물관이다. 지상 1층은 갤러리 카페로, 꼭대기인 8층은 꽃과 나무가 있는 하늘정원 ‘C가든’으로 꾸며졌다. 2년 전 이곳에서 유상옥 회장의 장녀인 유승희 코리아나미술관 부관장을 만났다. 그때 유 부관장과의 인연으로 유 회장을 문화예술CEO 수업 강사로 모셨다. 10월 12일 다시 찾은 코리아나미술관에서는 ‘Show Me Your Hair’라는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머리카락에 담긴 문화적 의미를 알아본다는 조금 독특한 목적의 전시장은 머리카락과 관련한 회화, 영상, 오브제로 채워져 있었다. 코리아나화장품 회장과 코리아나미술관 관장을 겸하고 있는 유상옥 회장은 이런 전시회를 1년에 4~5회 연다. 소비자들과 문화적 감성을 나누겠다는 마음에서다.
5층 화장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겨 유 회장을 만났다. 이곳에는 옛 화장용구와 장신구가 전시돼 과거 여성들이 어떻게 멋을 내고 생활했는지 한눈에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전시품은 유 회장이 모은 것이다. 짙은색 양복에 줄무늬 와이셔츠를 입은 그가 나타났다. 단정한 복장에 빨간 넥타이가 눈에 띄었다. 유 회장은 화장(化粧)을 ‘가장 깔끔하게 하는 것, 스타일에 맞게 꾸미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화려하게 꾸미고 얼굴에 바르고 칠하는 게 화장이 아니라는 얘기다.
1993년 『나는 60에도 화장을 한다』는 수필을 낸 그는 ‘화장하는 CEO’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두터운 분 자국은 찾아볼 수 없다. 유 회장은 “가끔 비비크림이나 파운데이션을 바르기도 하지만 오늘은 스킨, 로션까지만 했다”고 말했다. 그래도 클렌징은 매일 꼼꼼히 한단다. 그는 “화장품을 꾸준히 연구하고 화장문화에 관심을 갖는 것이 곧 화장을 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유 회장은 2008년 장남인 유학수(51) 코리아나화장품 사장에게 경영을 맡기고 일선에서 떠났다. 요즘은 스페이스C에서 문화예술과 미(美)를 전파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40년 동안 미술·민속품 6000점 모아
서용성 수집가로 유명하시지요. 요즘도 무언가 모으시나요?
유상옥 지인의 소개를 받아 좋은 예술품이 있다고 하면 가봅니다. 예전처럼 활발하게는 못해요. 40년 전에는 주말은 물론이고 시간 날 때마다 인사동, 황학동으로 발품을 팔고 다녔어요. 6개월 동안 인사동 화방에 다니니 유명한 작가 그림을 알아볼 수 있게 됐어요. 그러면서 취미가 됐지. 그때야 둘러보는 사람이 많이 없으니 꼭 사지 않아도 됐지만 하나 샀으면 싶어 5000원 주고 그림을 산 게 수집 인생의 시작이에요.
서용성 주로 어떤 것들을 모으셨어요?
유상옥 처음에는 고미술품이 많았어요. 값어치가 나가는 국보와 보물도 꽤 모았죠. 그런데 월급쟁이다 보니 비용이 만만치 않았어요. 그래서 동아제약 다닐 때는 약과 관련한 민속품을 많이 모았고, 화장품 회사로 옮기고부터는 비녀·거울 같은 화장용품과 여성 생활용품을 사들였어요. 수첩, 메모지, 일기장 같은 일지도 모았습니다. 지금 보면 제가 걸어온 길을 알 수 있어요.
유 회장의 수집품 중에는 국보 284호인 초조본대반야바라밀다경, 보물 977호인 묘법연화경, 보물 1412호인 감지금니대방광불화엄경 같은 역사적 유물도 여럿 있다. 스페이스C에는 유명 서예가인 최익현, 김윤식 등의 작품이 다수 보관돼 있다. 그의 수집품은 역사를 보여주는 유물부터 소소한 민속품까지 다양하다.
유 회장은 수집품을 혼자 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여러 사람과 나눴다. 2006년에는 한·프랑스 수교 120주년을 맞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한국의 전통문화 전시회’에 참여했고, 2009년에는 조선 백자청화유병, 분접시 등 소장품 200점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서용성 왜 그렇게 열심히 모으셨어요? 그때는 문화예술이라는 말조차 낯설지 않았나요?
유상옥 그랬죠. 문화경영이라는 말은 아예 없었고요. 지금 생각하면 그때 수집을 시작한 게 문화경영의 시발점이 된 것 같아요. 수집품들을 보다 보면 문화 흐름을 알 수 있거든요. 동아제약에서 기획관리실장으로 일할 때 누가 그러더군요. 제가 이성적인 면은 발달했는데 감성이 아쉽다고요. 담당 업무가 기획이니 주로 경영관리나 회계를 했거든요. 상학과를 졸업하고 회계사 자격증을 따 이치를 따지는 건 잘하는데 감성이 부족했던 거죠. 이성, 감성을 조화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림을 보러 다니기 시작한 게 지금까지 왔네요. 문화 마케팅은 세계적인 경영 트렌드입니다. 문화적 소양은 글로벌 경쟁력의 바탕이라고 할 수 있지요.
수집품 보면 걸어온 길 알 수 있어그는 요즘도 직원들에게 풍부한 감성과 논리적 이성으로 다양한 사고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직원들은 평소 유 회장이 강조하는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배우고 수시로 그것을 익힌다)’라는 말에 따라 자기계발에 열심이다. 코리아나화장품은 매달 외부 강사를 초청해 강연을 하고 회사 내부적으로 학점이수제를 시행해 동기를 부여한다. 협력사들과 함께 포럼을 진행하기도 한다.
서용성 이성과 감성을 조화롭게 하려는 노력 덕분인지 코리아나화장품은 문화를 받드는 기업으로 알려졌습니다.
유상옥 외국의 유명 화장품 회사들은 일찍부터 문화사업으로 사회에 공헌하고 기업 이미지를 높여 왔어요. 코리아나도 소비자에게 문화적 감성을 전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스페이스C를 개관했어요. 이곳뿐 아니라 서초동 본사에 가면 1층 로비, 2층 접견실, 각 층 복도에 미술품이 전시돼 있습니다. 방문하는 사람들이 오가며 보라는 거지요. 천안 연구소와 공장에도 조각, 미술품을 전시했어요. 공장 옆에는 식물원을 만들어 시민들에게 개방했습니다.
유학수 사장 역시 아버지의 문화예술 사랑을 이어받아 제품에 예술을 접목하는 콜래보레이션(협업)을 시도하고 있다. 자개 같은 전통 소재나 꽃, 명화 등을 화장품 용기 디자인에 적용하는 식이다.
서용성 그림에 관심을 보인 것은 동아제약에서였지만 화장품 사업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문화예술 활동을 시작하셨지요. 화장품 업계의 신화로 불리기도 하는데 지금 이 자리에 오게 된 과정이 궁금합니다. 원래 은행원이 되고 싶으셨다고요?
유상옥 1950년대는 국민 대부분이 농민이라 모두 바지, 저고리를 입고 다녔어요. 와이셔츠 입는 사람들이 은행원, 면서기 딱 그런 사람들인 거예요. 또 외삼촌이 서울에서 은행원을 했는데 좋아 보였어요. 제가 충남 청양에서 태어나 서울 덕수공립상업중학교(현 덕수상업고등학교)에 입학했는데 한국전쟁이 나서 청양에 내려가 공부를 하다 다시 서울에 와서 덕수상고를 졸업했어요.
서용성 학교 들어가기도 어려웠을 때인데 공부를 잘하셨나 봐요.
유상옥 청양에 내려가서 공부할 때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전교 1등을 해서 조례시간에 교장 선생님이 이름도 부르고 그랬죠. 결국 은행 입사시험에선 낙방했지만요. 허허. 운명처럼 동아제약 공채 1기로 들어가 회사 일을 내 일처럼 정말 열심히 했어요.
30년 친정 동아제약 나와 코리아나 설립유 회장은 1959년 동아제약에 입사해 구매과장, 관리과장, 기획관리실장을 거쳐 68년 임원으로 초고속 승진했다. 영업상무로 좋은 성과를 낸 유 회장은 1977년 동아제약 계열사인 라미화장품 대표이사로 자리를 옮겼다. 40대 중반에 계열사 CEO가 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당시 라미화장품은 인수 2년 동안 적자를 내는 천덕꾸러기였다. 유 회장은 우선 직원들의 사기를 북돋우고 영업망 정비, 품질 개선, 신제품 개발, 대대적 광고 마케팅 등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4년 만에 흑자로 전환시켰다. 하지만 노사분규에 휘말려 결국 30년 동안 몸바친 회사를 그만둬야 했다.
서용성 동아제약에서 나와 코리아나화장품을 설립할 때 이미 50대 중반이셨지요. 그동안 열심히 일했으니 쉬고 싶었을 텐데요.
유상옥 30년 동안 월급쟁이로 살았으니 내 회사를 차려보고 싶었어요. 창업을 하겠다니까 주변에서 퇴직금 받은 것으로 그냥 살지 사업은 무슨 사업이냐고 반대하더군요. 종근당, 보령제약 같은 곳에서는 자기 회사에 와서 일하라고 하기도 했고…. 몇몇은 한번 도전해 보라고 격려해 줬는데 당시 미도파 사장 출신으로 알약 캡슐 공장을 하던 조인상 사장님이 ‘유상옥씨라면 지금 해도 된다’며 용기를 줬습니다. 동아제약과 라미화장품에서 일했으니 제약 사업을 할까, 화장품 사업을 할까 고민하다 그래도 직전에 한 것이 낫겠다 싶어 코리아나화장품을 세웠죠.
서용성 이름은 왜 코리아나라고 하셨어요?
유상옥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이라는 뜻인데 이미 한국화장품이 있잖아요. 고민하다 영어식으로 지어봤어요. 지금 생각해도 잘 지은 것 같아요. 하하.
이렇게 1988년 설립된 코리아나화장품은 창업 5년 만에 1400억원 가까운 매출을 올리며 업계 3위로 떠올랐다.
서용성 어떻게 그렇게 빨리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었을까요?
유상옥 90년대 들어 방문판매가 줄고 종합화장품 코너가 생기면서 외상거래가 많아졌어요. 바뀐 유통시장을 어떻게 공략할까 고민하다 대리점 중심의 방문판매 대신 판매원이 고객을 직접 만나 뷰티 컨설팅을 해주고 화장품을 판매하는 직접판매 방식을 도입했습니다. 대리점 운영비를 줄이고 ‘뷰티 플래너’들에게 더 많은 인센티브를 지급해 판매량을 늘렸어요. 현금거래와 정찰제를 지키면서 조직을 전국적으로 늘려간 것이 초기 매출 성장에 큰 역할을 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회사는 1997년 외환위기와 2003년 카드대란을 겪으면서 주춤했다. 2000년대 초반 매출이 4000억원대까지 올랐지만 2010년 매출은 1052억원이다. 2011년 상반기 매출은 506억원을 기록해 지난해보다 약간 상승했다. 유 회장은 한류 붐을 타고 중국 톈진 법인을 비롯해 미국, 일본, 유럽 등에서 해외 판매량을 늘릴 계획이라고 밝혔다.
서용성 올해 경영지표를 ‘일어서기’로 정하셨는데 어떤 의미입니까.
유상옥 2010년의 경영지표는 ‘자리 다지기’였습니다. 지난해 다진 내실을 더 튼튼히 하며 성장하겠다는 뜻입니다.
모아둔 경영수첩 후배들에게 도움 됐으면…
서용성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기업가 정신을 강조하며 고(故) 이병철 삼성 창업주와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을 존경하는 기업인으로 꼽으셨습니다. 선배로서 후배 경영인들에게 한 말씀 하신다면요.
유상옥 내가 남들에게 그럴 만한 사람인가요. 경영할 때 항상 감성과 이성을 조화시켜 인격을 다듬어야 한다는 생각은 했어요. 좋은 기업이라고 생각했는데 도덕적으로 추한 꼴을 보이는 기업들이 있잖아요. 그런 사람은 되지 말아야 한다는 거지. 또 예전에는 한 우물을 파라는 말을 많이 했는데 요즘은 시대가 바뀌어서 그 말이 맞는지 자신이 없어요. 하지만 길게 보면 한 우물을 파는 것이 자신을 완성하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기록을 남겨두라는 말도 하고 싶습니다. 경영수첩을 보관해 두면 정도경영을 할 수밖에 없어요. 속일 수가 없으니까. 훗날 후배들에게 물려줄 수도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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