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경제의 두 얼굴] 무너진 강성대국 꿈에 빈부 격차만 심해져
[북한 경제의 두 얼굴] 무너진 강성대국 꿈에 빈부 격차만 심해져
1월 1일 발표된 북한의 노동신문 등 3개 기관지 신년 공동사설에는 경제문제와 관련해 극명하게 대조를 보이는 표현들이 등장했다. 신년사를 대체해 실린 이 사설은 첫 대목에서 2011년을 평가하면서 “인민생활 대진군에서 커다란 성과가 이룩됐고 21세기 경제강국의 강력한 토대가 튼튼히 마련됐다”고 주장했다. 또 “위대한 장군님의 불면불휴의 노고에 의해 우리 경제가 지식경제형 강국건설의 길에 들어서게 됐다”며 이를 사망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업적으로 찬양 선전했다.
지식경제형 경제강국에서 먹는 문제 고민A4용지 12장에 이르는 긴 분량의 사설은 중반부에 가면서 분위기가 확 달라진다. 사설은 “현 시기 인민들의 먹는 문제, 식량 문제를 푸는 것은 강성국가 건설의 초미의 문제”라며 “오늘 당(노동당을 의미) 조직들의 전투력과 일꾼(간부를 지칭)들의 혁명성은 식량문제를 해결하는데서 검증된다”고 강조했다. 김일성 출생 100주년이 되는 2012년을 ‘강성대국의 대문을 열어젖히는 해’라고 공언하고 ‘지식경제형 경제강국’까지 운운하던 북한이 먹는 문제의 해결 앞에서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북한 경제의 양면적인 모습은 대북 정보기관의 분석관들과 북한 전문가들이 상당기간 주목해온 대상이다. 2006년 10월 북한의 핵 실험 감행으로 본격화 한 대북 제재 국면에서 한·미 정보당국은 경제압박이 북한체제에 미치는 파장과 효과를 검증하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결과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정보 관계자는 “대북제재의 국면 속에서도 북한이 김정일 가계우상화나 정치선전 시설은 물론 공장·기업소의 생산라인과 설비를 대대적으로 리모델링하는 움직임을 보였다”며 “도대체 북
한이 어디에서 저런 돈이 나는 것이냐 하는 걸 추적하는 데 많은 공을 들여야 했다”고 말했다.
실제 김정일 위원장이 생전에 후계자이자 셋째 아들인 김정은을 데리고 현장 후계수업을 하는 사진을 분석해보면 궁금증이 생기는 대목이 있다.
새로 짓거나 개선공사를 한 산업시설에 상당한 재원이 투입돼야 가능한 컴퓨터 생산설비와 최신형의 장비가 도입된 장면이 적지 않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평양 등 도시 지역의 극장이나 회관 등 대규모 집회 장소도 마찬가지다. 한 대북정보 관계자는 “북한 TV 등이 김정일이 참석한 행사 장소 등을 밝히지 않아도 과거 공개된 주요 시설 내부 영상이나 탈북자 증언으로 어디인지 파악할 수 있었는데 요즘은 워낙 대대적인 개건공사를 벌이기 때문에 알아내기 쉽지 않다”고 귀띔했다.
대북 감시망을 가동하고 있는 한국과 미국의 정보 당국은 북한이 국제사회의 제재 시스템을 뚫고 비밀리에 무기 수출과 위조담배·마약 판매 등의 불법적인 활동으로 달러를 벌어들이고 있다는 의혹을 제기한다. 이를 통해 얻은 외화 수익을 김정일 체제선전에 필요한 공공시설의 유지·보수와 일부 특권층이 사용할 생산품의 설비라인에 투입하고 있다는 얘기다.
이런 모습과 대조적으로 북한 주민들의 민생경제는 만신창이가 된지 오래다. 김정일도 김일성이 제시했던 ‘이밥에 고깃국, 비단옷에 기와집’이란 구호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 점을 한탄했다는 게 노동신문의 보도로 확인되고 있다. 북한은 국제구호 단체에 영양실조가 걸린 어린이들의 적나라하게 공개함으로써 대북지원 확보에 안간힘을 쏟고 있다. 또 한국의 민간단체 등에게도 식량지원을 유도하고 있다.
국제사회 제재 시스템 뚫고 비밀거래?지난해 여름 수해 때는 복구사업을 빌미로 우리 정부와 대한적십자사 측에 쌀과 시멘트·중장비 등을 “통 크게 지원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통일부 당국자는 “대북 수해복구 지원 프로그램을 진행하다 보면 북한이 긴급 복구사업 등을 남측에 떠넘기고 그 대신 해당 비용을 체제선전물 정비나 다른 생산라인에 투입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며 “특히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기에는 북한 측의 회계장부가 아예 남측의 지원 항목을 염두에 두고 작성되는 것이란 얘기까지 있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정부 안팎에서 주민 1인당 소득이 1000달러 수준을 넘나드는 것으로 추계되는 북한에 식량지원이나 구호사업을 할 필요가 있느냐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정부 당국과 전문가들은 북한의 새 통치자로 등극한 김정은이 풀어야 할 가장 중요한 경제숙제 중 하나가 바로 이 같은 불균형 문제라고 진단한다. 주민들 사이에 ‘나라는 강성해진다고 하는데 인민들은 먹고 살 길이 없다’는 생각이 퍼질 경우 후계체제의 조기 안착에 빨간불이 켜질 수 있다는 것이다. TV 등에서 비쳐지는 화려한 체제선전물이나 일부 공장·기업소와 일반 주민들의 체감경기가 대조를 이루면 문제가 될 것이란 얘기다.
통일부에서 북한 경제분석관으로 근무한 홍성국 남북사회통합연구원 부원장은 “김일성이 사망한 1994년 7월 이후 ‘고난의 행군’으로 불리는 심각한 경제난을 겪는 과정에서 북한 주민들 사이에 ‘균빈(均貧)의식’이 깨어진 게 북한 경제에 큰 변화를 불러왔다”고 말했다. 과거 ‘우리 모두 못살지만 제국주의에 대항해 투쟁하고 있다’는 식의 공동체 의식이 지배하고 있었지만 1990년대 후반 200만~300만명의 대량 아사사태까지 겪으며 바뀌었다는 것이다. 생존을 위한 실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빈부격차가 생겨났고 이로 인해 ‘균빈’이 급격히 와해됐다는 얘기다.
김정은이 비밀리에 후계자로 막 지명된 직후 북한 당국은 이런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경제부문의 충격조치를 내놓았다. 바로 전격적인 화폐개혁의 실시다.
2008년 여름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그해 11월 공개석상에 다시 복귀한 김정일은 김정은을 후계자로 내정하고 은밀하게 후계권력 구축작업에 들어갔다. 그리고는 후계자의 업적으로 훗날 부각될 수 있는 조치에 착수했다. 2009년 11월 말 전격 단행된 화폐개혁은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강화’란 목표 아래 국영 배급망의 복원과 종합시장 폐쇄, 달러와 중국 위안화 사용 금지 등의 조치를 포함하고 있다.
무엇보다 속칭 ‘돈주’라고 불리는 북한의 신흥 부유층 상공인을 겨냥했다. 이들이 장마당 경제를 통해 축적해 놓은 장롱 속 달러와 위안화를 회수하는 데 주안점을 둔 조치였다. 일주일간의 짧은 기간에 100대 1의 비율로 신구 화폐를 교환하고 북한돈 10만원이란 교환 상한선까지 뒀다. 또 2010년 1월부터는 외화 사용을 금지시키고 환수하는 조치를 내놓았다. 그렇지만 2년이 지난 현재는 대부분의 조치들이 약효를 발휘하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어 계획경제를 재가동할 여건이 마련되지 못하고 있다. 완전한 실패였다.
‘균빈의식’ 깨진 게 체제관리의 걸림돌 시장을 통해 부를 축적한 계층을 억제하려던 정책은 초기에 일부 성과를 거두는 듯했지만 물가상승으로 일반 주민들은 더 빈곤한 상태에 빠졌다. 외화 사용 금지조치도 한 달 만에 풀려버렸고 외화 보유층은 별다른 피해를 보지 않았다.
오히려 달러와 위안화 등 외화를 선호하는 분위기가 강해졌다. 단기적으로 재정이 확충되는 효과도 있었지만 생산과 상품 공급이 뒷받침 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한계를 드러낼 수 밖에 없었다. 한국은행이 추계한 북한 경제의 지표가 2009년 마이너스 0.9%, 2010년 마이너스 0.5%를 기록한 것에서도 난관에 봉착한 북한 경제의 실태를 읽을 수 있다. 무엇보다 강성대국 진입이란 분위기를 만들어 줘야할 화폐개혁이 부담요소로 작용해 김정은 후계체제 구축에도 역효과를 냈다는 분석이 나왔다.
이른바 ‘양풍(洋風)’으로 불리는 서구 문물의 급속한 확산 분위기도 김정은 체제가 넘어야 할 산이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평양 시내에 고급 레스토랑과 서양식 카페가 등장하면서 피자와 파스타, 와인 등 서구 음식이 인기를 끌었다.
지난해 10월 말에는 평양 김일성광장 옆 조선중앙역사박물관에 서구식 비엔나커피숍이 문을 열기도 했다. 세계 25개국에 진출한 오스트리아의 세계적인 커피 전문회사인 헬무트 사커(Helmut Sachers Kaffe)에서 2009년부터 개점을 추진해 성사된 이 커피숍은 커피 한 잔에 북한 평균 월급의 10분의 1 수준인 2유로를 받고 있지만 북한 부유층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
앞서 2010년 6월에는 싱가포르 회사와 계약을 맺은 햄버거 가게인 ‘삼태성청량음료점’이 문을 열기도 했다. 흥미로운 건 김정일 위원장이 생전에 ‘고기겹빵(햄버거의 북한식 표현)’ 공급을 지시했다는 점이다.
평양방송은 김정일이 2000년 9월 노동당 중앙위원회의 한 간부를 불러 햄버거 도입을 지시한 일화를 전하면서 “뜻밖에도 지금 세계적으로 이름이 있다고 하는 한 빵 품종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시었다”고 전했다. 이에 따르면 김정일은 “나는 그 빵에 못지않은 고급 식빵과 감자튀기(튀김)를 우리식으로 생산해 대학생들과 대학교원·연구사들에게 공급할 결심”이라고 말한 뒤 빵 생산을 지시했다.
전문가들은 김정일이 위성TV 등을 통해 맥도널드 등 유명 햄버거 제품을 접했고 이를 토대로 우선 대학생 등에게 공급할 것을 지시한 것으로 보고 있다. 감자튀김까지 곁들여 먹는 방식을 김정일이 언급한 점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서구풍 음식과 함께 일부 상류계층을 대상으로 한 명품이나 고급 생필품 소비도 늘고 있다. 2010년 문을 연 평양 보통강백화점에는 지난해 2월부터 샤넬과 아르마니 같은 외제 명품을 판매하는 코너도 생겼다. 방북자들에 따르면 독일산 초콜릿과 머스터드 소스는 물론 일회용 아기 기저귀 등 특권층을 상대로 한 물품을 팔고 있다.
이 같은 특권·부유층의 사정과 달리 일반 주민과 지방 거주민들은 만성적인 식량난 속에서 시달리고 있다. 식량 부족 사태는 일부 군부대에까지 닥쳐 장기간 군복무를 해야 하는 병사들이 영양실조로 복무기간을 제대로 채우지 못하고 귀가하는 사태까지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강한 영양실조에 걸린 사람’이란 의미의 ‘강영실 동무’라는 표현까지 등장했다는 것이다. 북한군 최고사령관에 오른 김정은이 새해 첫 현지지도 일정으로 북한군 제105탱크사단을 방문하는 과정에서도 군인들의 궁핍한 생활상이 드러났다. 김정은이 세면장을 방문한 사진 뒤편에 ‘칫솔질은 하루 두 번 하되 아침에는 치약 없이, 저녁에는 0.5센티미터’라고 적힌 안내판이 노출된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서울에 가장 먼저 진주해 ‘근위사단’ 칭호까지 받고 김일성·김정일이 수차례 방문한 최정예 부대도 치약 없이 양치질을 해야 할 정도로 보급품 부족에 시달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김정은 체제가 들어선 첫 해인 2012년 북한 경제를 조망하는 데 가장 큰 변수는 김정일 사망의 충격파가 어디까지 미칠 것이냐 하는 점이다. 당장 신년 공동사설만 살펴봐도 그동안 공언해온 강성대국이란 구호 대신 ‘강성국가’라는 완화된 표현이 주를 이루고 있다. 2010년 신년 사설에서 강성대국은 16차례 등장하고 지난해는 19회에 걸쳐 거론했지만 올해는 5차례에 그친 것이다. 강성대국 구호가 달성하기 어려운 허상이란 것을 북한 당국도 잘 알고 있고 주민들에게도 먹혀들지 않을 것이란 걸 예감하고 현실적인 수준으로 하향 조절해 눈높이를 맞추려한 것이란 분석이다.
공동사설에서 언급된 올해 경제과제는 예년과 비교할 때 크게 두드러진 항목이 없다. 경공업과 농업이 강성국가 건설의 주공전선이라거나 이른바 ‘4대 선행부문’이라고 불리는 전력·석탄·금속·철도와 기초공업 부문의 생산력 강화 등을 강조하고 있다. 임강택 통일연구원 남북협력연구센터 선임연구위원은 “2012년 과제를 발표하는 공동사설에 김정일 사망 사태를 충분히 반영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기존 정책기조가 그대로 제시된 것”이라고 말했다. 향후 정책 추진과정에서 김정일 사망 변수를 고려한 조정이 이뤄질 수 있다는 분석이다.
경제 문제가 체제 불안 요소 될 수도또 하나의 관전 포인트는 북한이 예정대로 ‘강성대국 진입’ 선언을 강행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김일성 출생 100주년이 되는 오는 4월 15일에 맞춰 강성대국 진입을 선포하겠다는 게 김정일 사망 이전까지 북한의 구상이었지만 사정이 달라졌다. 이 때문에 북한 당국이 강성대국 진입에 차질이 생겼음을 밝히고 그 시기를 1~3년 정도 늦출 가능성이 점쳐진다. 물론 특별한 언급 없이 유야무야 하고 넘어갈 것이란 전망도 있다. 애초 계획대로 강성대국 진입을 선언한 뒤 김정은 후계권력 구축에 활용할 것이란 관측도 있다. 김정일의 생전 과업이 ‘2012년 강성대국’이었다고 강조하면서 김정일이 “이를 위해 불면불휴의 노력을 하다 안타깝게 서거했다”는 논리를 펼 수 있다는 것이다.
통일연구원이 1월 초에 공개한 ‘2012년 북한정세전망보고서’는 “경제강국 진입의 성과가 특권층이 모여 사는 평양시에 집중돼 있다는 사실이 사회적 갈등과 정책에 대한 거부감 또는 불신을 심화시킬 수 있다는 점은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화폐개혁 이후 잘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간의 격차가 더욱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평양에 편중된 국가적 지원은 강성대국의 표본을 제시하겠다는 당국의 의도와 달리 지방주민들이 새로운 지도자에 대해 불만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최진욱 통일연구원 북한연구센터 소장은 “김정은 정권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함께 강성대국 기대에 대한 허탈감을 느끼게 될 북한 주민들이 경제사정까지 악화된다고 생각할 경우 체제불안 요소가 될 수 있다”며 “이를 관리하는 것이 새로운 통치자 김정은이 당면한 가장 큰 과제일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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