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SINESS] 브랜드를 만드는 사람들 - 길고 긴 커피 이름 싹둑 자르니 대박
[BUSINESS] 브랜드를 만드는 사람들 - 길고 긴 커피 이름 싹둑 자르니 대박
오늘날의 소비자는 매일 수백, 수천 개의 상품과 서비스 속에서 살아간다. 그러나 사람들의 눈과 귀를 강렬하게 끌어당기는 브랜드는 극히 드물다. 개인은 물론 국가도 브랜드를 가져야 한다고 외치는 요즘, 자신만의 감각을 십분 활용해 최고의 브랜드를 만드는 사람들을 만나봤다. 그들이 말하는 좋은 브랜드의 조건과 성공 비결, 최근 업계의 동향을 소개한다.“커피 상자를 여자 지갑처럼 열어볼 수 있게 디자인 하는 것은 어떨까요.” “강렬한 검정색 글자로 이름을 돋보이게 하면 좋겠어요.”
지난 해 6월 서울 논현동에 위치한 브랜드 컨설팅 전문업체 ‘인터브랜드’의 세미나실에서 신규 브랜드 출시를 위해 열린 워크숍에서 오고 간 대화 내용이다. 기존에 없는 전혀 새로운 인스턴트 커피 브랜드를 만들기 위해서 수 십 명의 직원들이 모였다. 각자의 아이디어를 스케치한 종이, 잡지를 오려 만든 콜라쥬 등을 벽에 걸고 둘러본다. 새로운 브랜드에 대한 의견을 나누느라 분주한 와중에도 직원들의 눈빛은 반짝인다. 이곳에서 내는 의견에는 제약이 없다. 일종의 브레인스토밍(brainstorming)방식으로 다른 이의 아이디어에 첨언을 하거나 이를 참고해 즉석에서 수정하는 등 최대한 자유롭게 많은 아이디어를 직원들의 머릿속에서 뽑아낸다. 과연 이 혼잡스러운 과정을 거쳐 하나의 브랜드가 완성될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다.
‘브랜드 경영’, ‘국가 브랜드’라는 말이 화두가 될 정도로 브랜드의 중요성이 커졌다. 미국 마케팅 협회는 “판매자가 자신의 서비스나 상품을 인식시키고, 다른 경쟁자들의 것과 구별하기 위해 사용하는 이름, 심볼, 디자인 혹은 이들의 결합체”라고 브랜드를 정의했다. 시장에서 상품을 판매하는 기업으로서는 브랜드를 통해 제품을 차별화 하는 것에 명운을 걸 수 밖에 없다.
상품의 특성을 설명하고 기업 이미지까지 담아내며, 외우기 쉬운 이름에 소비자 눈에 쏙 들어올 우수한 디자인까지. 브랜드가 갖춰야 할 미덕은 많다. 우리가 시장에서 매일 수 천, 수 만개씩 접하는 브랜드는 일련의 치열한 경쟁을 뚫고 선정된 것들이다.
외국어로 속어 아닌지 확인해야업계 선두 기업인 인터브랜드의 경우 고객사로부터 브랜드 제작 의뢰가 들어오면 가장 먼저 이름을 만드는 ‘버벌브랜딩(verbalbranding)’, 디자인을 담당하는 ‘브랜드디자인’, 그리고 경영 컨설팅 부서까지 관련된 모든 팀원들을 한데 불러모아 ‘크리에이션 워크샵(creation workshop)을 진행한다. 고객사가 제시한 기본 컨셉을 놓고 다양하게 아이디어를 내보는 과정이다. 기발한 아이디어가 출몰하지만 실현 불가능해 보이는 것까지도 등장한다. 회사 관계자는 “고객사가 원하는 방향만 고집하다 보면 직원들의 창의성이 저하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브랜드 이름을 결정하는 과정을 설명하며 민은정 인터브랜드 상무는 ‘요리’에 비유했다. “어떤 요리를 할 것인가, 즉 브랜드 컨셉트를 명확하게 한 후에 요리 재료를 고르듯 어떤 단어를 사용할 것인지를 결정한다”고 말했다. 제품에 관련된 단어들을 따로 떼어내고 재조합 하거나 영문 이니셜로 만드는 등 여러 가지 시도를 통해 수백, 수천 개의 이름을 만들어 본다. 중간 중간 고객사와 회의를 거쳐 의견 조정도 수 차례 한다.
최종 단계에서 브랜드 이름이 정해지더라도 끝난 게 아니다. 검토 과정이 남았다. 같은 이름에 대한 권리를 더 빨리 취득한 개인, 혹은 법인이 있는지 법률적으로 확인해야 한다. 제품 수출에 대비해 혹시 이름이 다른 언어권에서 속어, 욕설과 발음이 비슷하지는 않은지도 알아본다. 이 과정에서 이름 결정에 제동이 걸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브랜드 네이밍 작업 중에도 1주일에 한번씩 디자인 부서와 미팅을 가져 동일한 컨셉트로 진행되고 있는지 확인한다.
디자인 부서의 경우 새로운 브랜드는 만드는 경우도 있지만 기존의 브랜드 디자인을 바꿔 달라는 의뢰도 절반 정도 된다. 10년 전에는 브랜드 이미지나 경영 이념 등을 심볼이나 로고로 표현하는 CI(Coporate Identity),BI(Brand Identity)를 만드는 작업이 대부분이었던 반면 요즘에는 홈페이지 디자인에서부터 옥외광고까지 소비자에게 노출되는 모든 브랜드 디자인을 전문 업체에 의뢰하는 추세다.
디자인이라고 해서 마냥 책상에서 스케치만 하지는 않는다. 소비자들이 직접 구매하는 제품일 경우 현장 조사도 필요하다. 브랜드가 노출될 장소, 매체가 어디인지 파악해 경쟁 브랜드 사이에서 시각적으로 어떤 장점을 갖춰야 할지 파악하는 과정이다. 황유진 인터브랜드 이사는 “대형 마트에서 제품이 진열된 매대를 촬영하다가 직원과 실갱이를 벌인 적도 여러 번”이라고 밝혔다. 마지막 단계에 남은 디자인 시안들은 매대에 진열된 모습으로 시뮬레이션 해서 비교해 본다. 최종 시안은 4~5가지 정도 제시를 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고객사가 결정을 한 뒤에도 수정 과정을 거친다.
민 상무와 황 이사의 시너지 효과가 돋보인 최근의 성공작은 동서식품이 내놓은 인스턴트 커피 브랜드 ‘카누(KANU)’다. 동서식품이 전달한 컨셉은 ‘세상에서 가장 작은 카페’ ‘원두커피가 들어간 새로운 스타일의 커피’였다. 먼저 팀원들은 기존의 인스턴트 커피 시장을 들여다 봤다. ‘아로마’ ‘모카’ 등 커피 제품 이름이 각종 수식어로 치장되어 소비자가 기억하기에 너무 길다는 인상을 받았다. 민 상무는 “더 많은 정보를 소비자에게 전달하고 싶다는 생각에 제품 이름도 덩달아 길어지는 경향이 있다”며 “전혀 새로운 제품인 만큼 짧고 강렬한 이름을 만든다는 목표를 세웠다”고 말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카페의 ‘카’와 새롭다(new)는 의미의 ‘누’를 합친 이름이었다. 이름이 짧을수록 패키지에서 더 크게 노출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었다.
디자인 안 한 카드로 소비자 시선 끌어문제는 카누가 배를 연상시킨다는 것이다. 디자인 팀은 단순하고 강렬한 제품 디자인으로 프리미엄 이미지를 표현해내는 한편 배를 연상하는 효과를 차단하고자 했다. 새카만 바탕색에 빨강, 주황색으로 이름을 새겨 넣은 시안으로 최종 완성을 했다. 매대에 진열한 것처럼 시뮬레이션을 해 보니 다른 제품들 사이에서 눈에 확 띄었다. 시장에서의 반응도 좋았다. 덕분에 요즘 황 이사는 고객사들로부터 “카누 작업한 분”으로 불릴 정도다.
컨설팅 회사인 ‘JOH’를 이끄는 조수용 대표는 최근 브랜드 업계에서 가장 주목을 받는 사람이다. 2010년까지 NHN 이사로 일하던 그는 네이버 하면 누구나 가장 먼저 떠올리는 초록색 검색창, ‘그린윈도우’ 만들어낸 것으로 유명하다. 최근에는 삼성카드에서 ‘숫자카드’를 출시해 화제를 모았다.
JOH는 여러모로 특이한 회사다. 내부에는 그래픽 디자이너, 건축가, 심지어 요리사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있다. 이들은 브랜드를 만들면서 단 한가지 판단 기준을 가진다. 시장에서 소비자가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것이다. 다른 브랜드 컨설팅 회사가 시장 분석력을 내세우는 반면 JOH는 소비자로서의 ‘감’을 무기로 삼았다.
삼성카드의 ‘숫자카드’의 경우 조 대표는 “디자인을 하지 않은 카드”라고 설명한다. 시장에 멋진 디자인, 화려한 소재로 만든 카드는 많지만 이 모든 것을 빼고 실용성만 갖춘 제품은 없었기 때문이다. 신용카드마다 혜택이 달라 헷갈리는데 이걸 단순하게 표현하는 효과를 거뒀다.
조 대표는 브랜드를 ‘사람’에 비유한다. 사람에게 타인을 볼 때 각자 주관적인 판단 기준이 있듯이, 브랜드도 다중적인 측면을 가졌고 선별 기준이 다르다는 것. 때문에 시장이 원하는 수많은 요구 중 가장 중요한 한 가지 가치를 극도로 끌어올리는 것이 그의 브랜드 구축 방식이다.
같은 관점으로 JOH의 직원들은 잡지 시장을 들여다봤다. 우수한 브랜드만 소개하는 잡지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브랜드 전문 잡지인 ‘매거진 B’를 매달 내고 있다. 최근에는 JOH의 자체 레스토랑 개장을 준비 중이다. 회사의 가치관과 부합하는 프로젝트라면 브랜드 출시에서부터 건축, 외식업까지 어떤 분야든 가능하다는 것이 조 대표의 생각이다.
대기업마다 브랜드 전략 부서를 내부에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외부업체에 브랜드 업무를 의뢰하는 것일까. 조 대표는 “오래 해온 사업은 오래 시간 축적된 경험들에 의해 단단해진 상태”라며 “새 브랜드를 통해 변신을 하고 싶다면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기 때문에 외부의 의견을 구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인터브랜드의 황 이사는 “기업 내부 구성원이 다른 내부 구성원을 설득하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다”고 지적한다. 브랜드에 대한 평가는 주관적이기 때문에 누구라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좋은 것을 뽑기 위해서 기업 외부의 전문가가 근거를 가지고 설득하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다.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것, 특히 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브랜드를 만드는 것이 전문가의 역할이다. 그만큼 개개인의 감과 능력이 중요한 분야다. 조 대표는 회사 직원들을 가리켜 “소비자로서 민감한 삶을 유지하는 사람들”이라고 설명한다. 조 대표는 자신이 쓰지 않아도 되는 여성 전용 제품까지 일일이 살펴볼 정도다. 근무 환경도 파격적이다. 전 직원의 근무시간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사무실 대부분을 차지하는 면적은 카페로 꾸며져 직원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눈다. 직원 각자의 공간도 신발을 벗고 들어가 방처럼 느껴진다. 조 대표는 “가장 창조적인 업무를 하는 사람들이 일하는 공간인데 일반 사무실과 똑같다면 말이 안된다”고 밝혔다.
황 이사는 창조적인 감을 잃지 않기 위해 손으로 직접 그리는 과정을 꼭 빼놓지 않는다. 브랜드 디자인 작업 대부분이 컴퓨터에 의존을 하고 있지만 기계고 그려낸 디자인은 비슷하기 때문이라고. “손으로 내 생각을 더 풍성하게 펼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인터브랜드에는 매달 금요일 하루를 ‘크리에이티브 데이’로 정해 금요일 오전까지만 업무를 보게 한다. 이후 시간을 감각을 높이기 위한 활동에 쓰라는 의미다.
최근 브랜드 컨설팅 업계는 점점 더 치열해지는 양상을 보인다. 광고대행사와 경영컨설팅 회사까지 브랜드 컨설팅 영역으로 확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 굴지의 광고대행사인 TBWA코리아는 올해 들어 IBC(Intergrated Brand Communications) 부서를 신설하며 브랜드 컨설팅 업계에 도전장을 냈다. 부서를 이끌고 있는 박준형 전무는 ‘통합 브랜드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저서를 내놓기도 했다. 박 전무는 “기업의 경영활동까지 브랜드 통합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제품과 서비스뿐만 아니라 기업 그 자체가 하나의 브랜드로서 일관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브랜드 관리, 오너가 직접 한다예전에 소비자는 시장에서 제품 그 자체만 보고 구매를 결정했지만 정보가 넘쳐나는 요즘은 기업의 모든 활동과 커뮤니케이션이 소비자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일례로 섬유유연제 업계에서 압도적인 1위를 유지하던 ‘피죤’은 기업 오너의 청부폭행 사건 이후 시장 점유율에서 추락을 거듭하고 있다. 지난 해 매출액은 전년 대비 35.8%나 떨어졌다.
TBWA코리아 IMC 부서는 브랜드 컨설팅 의뢰가 들어오면 마케팅에서부터 기업 조직과 전략까지 모두 점검한다. 경영 컨설팅에 가깝다. 예전에는 광고대행사가 경영컨설턴트를 영입하는 소극적인 방식이었다면 이제는 역할 자체가 바뀌는 추세다. 박 전무는 “예전에는 팀장급 직원이 브랜드를 관리했다면 이제는 CEO가 직접 나서는 방식으로 바뀌고 있다”고 말한다. 경영 전략과 브랜드의 일관성이 그만큼 중요해지고 있다.
조 대표도 “브랜드와 경영은 일체화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브랜드는 기업의 핵심 방향을 담는 것이기 때문에 최고 의사결정권자의 결정과 동의가 필요하다. JOH는 실제로 기업 오너 직접 논의하는 방식으로 프로젝트를 추진한다.
기업과 소비자가 선호하는 브랜드에서도 변화가 감지된다. 민 상무는 “예전에는 추상적이고 신비로운 브랜드를 선호했는데 최근에는 이름 자체에서 스토리를 바로 읽을 수 있는 이름이 인기”라고 말했다. 예전에는 대기업이 CI의 색상이나 디자인을 그룹 전체 브랜드에 적용하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었다. 황 이사는 “요즘은 브랜드 디자인 측면에서 다양한 변화를 시도하고 기업 이미지와 브랜드를 분리하는 등 전보다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고 말했다.
예전에는 브랜드가 소비자에게 소구할 때 이성적, 합리적으로 접근했다면 최근에는 감성적으로 접근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박 전무는 “전에는 개인의 만족에 관심을 가졌다면 이제는 소비자를 사회 전체의 일부로 인식하며 사회적 가치를 강조하는 브랜드가 경쟁력이 있다”고 밝혔다.
단순히 이름과 디자인에서 벗어나 브랜드는 기업 활동의 핵심으로 급부상했다. 그렇다면 ‘좋은 브랜드’는 무엇일까. 조 대표는 “가격, 실용성, 아름다움이 기본”이라고 말한다. 더 나아가 “자녀에 대한 사랑, 건강의 가치, 환경 보호 등 인간의 본능을 건드리는 ‘의식’을 갖춘 브랜드라면 가격이 비싸더라도 사람들이 선호하는 것이 된다”고 덧붙이며 “이런 브랜드를 갖기 위해서 기업이 자기 주관과 가치를 오랫동안 밀고 나아가야 한다”고 설명했다.
박 전무는 ‘일관성과 ‘창조성’으로 설명한다. “브랜드가 존재의 의미를 가지려면 기업 말단에서 경영자까지 추구하는 일관된 가치가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조직에 고정관념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며 “창조성을 가져야 고정관념으로부터 탈피할 수 있다”고 말한다.
박미소 이코노미스트 기자 smile83@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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