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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두 채 살 돈 들고 다니며 골동품 하루 5억 원어치 사

아파트 두 채 살 돈 들고 다니며 골동품 하루 5억 원어치 사



서울 삼청동 골목길을 따라 걷다 보면 가파른 계단이 나온다. ‘맑은 하늘길’이라는 이름의 이 계단을 올라 조금 더 걸으면 꽃담에 둘러 쌓인 한옥이 보인다. ‘북촌동양문화박물관’이다.6월8일 오전 8시40분쯤 찾은 박물관은 공사 때문에 휴관 중이었다. 정갈한 개량한복을 입은 권영두(53) 관장이 환한 모습으로 맞이했다. 출근 시간을 물으니 아예 박물관에서 산다고 했다. 그는 지난 2월 박물관에 딸린 건물로 이사 왔다. 먼저 살던 곳에 비해 면적이 4분의 1로 줄었다. 권 관장은 “박물관 문 열면서 아내한테 생활비하고 집은 건드리지 않겠다고 했는데…”라며 멋쩍게 웃었다.


체험 후 감사 편지 받아북촌동양문화박물관은 2009년 6월 문을 열었다. 서울시 사립박물관으로는 유료관람객이 가장 많은 곳 중 하나다. 초·중·고 학생부터 외국인관광객까지 박물관을 찾는 이는 다양하다. 이 박물관의 특징은 체험형 이라는 것이다. 권 관장이 직접 가르치는 선비 체험부터 전통 다도·민화·전통 천연염색·전통음식 등 다양하다. 예약할 때 어떤 프로그램을 언제 몇 시간 정도를 체험하고 싶은 지 말하면 박물관에서 그에 맞춰 프로그램을 짠다.

이야기를 하던 중 한 여성이 입구에 찾아와 서성인다.휴관이라는 직원의 말에 서툰 한국말로 “일본에서 왔어요”라고 말했다. 권 관장은 “들어오시라고 해”라고 말했다. 고맙다며 들어오는 이 여성에게 권 관장은 박물관 내부를 차근차근 설명했다. 그는 “이게 사립박물관의 장점”

이라며 “관장이 직접 관람객과 교감할 수 있다”고 말했다.

4월에는 그의 선비체험 강의를 들은 경기 산본중학교 3학년 학생들과 교사가 감사의 편지와 선물을 보냈다. 한 학생은 편지에서 ‘선생님(권관장)의 말씀을 듣기 전, 나 자신을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체험학습 후 좀 더 자신감을 갖게 됐다’고 썼다. 박물관에 들렀던 중국인, 일본인 관광객이 보내온 편지도 있다.

2층에 있는 관장실로 갔다. 권 관장은 “그 동안 변변한 관장실이 없었다. 찾아오시는 분들이 불편한 것 같아 이번 공사 때 만들었다”며 찻물을 올렸다. 어제 한 나절 만에 만들었다는 탁자와 책상·작은 책장이 들어선 좁은 공간에도 전통 공예품과 그림 등이 가득하다.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 선생이 그린 한국화도 보인다.

그는 박물관을 열기 훨씬 전부터 우리나라 유물은 물론 중국, 티베트 등 동양 유물을 수집했다. 한 때 권 관장의 별명은 ‘아파트 두 채 들고다니는 남자’였다. 인사동 등에서 옛 물건을 하루에 4억~5억 원어치 사서 양 손 가득 들고 다녔기 때문이다. 20년 전 서울 시내 30평형 아파트 한 채가 1억 5000만원 정도 할 때였다. 그는 언제부터 유물을 모으기 시작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저 습관적으로 옛 물건이 보이면 수집하곤 했다.

어렸을 때 우표·동전 수집부터 어머니가 결혼할 때혼수로 해 온 베갯잇도 버리지 않고 간직하고 있다. 여태까지 모은 유물은 대략 1만여 점.도자기나 그림보다는 목공예나 불상 등 공예품이 많다.


술 안 마시는 건설업자권 관장은 원래 건설업을 했다. 서울 강동구에서 아파트와 빌딩을 짓던 정산건설이라는 업체를 운영했다. 권 관장의 아버지는 집을 지어 파는‘집 장사’를 했다. 중학교 1학년이던 그는 기술자가 설계하는 걸 어깨너머로 보고 다음 집을 지을 때 자신이 그린 설계도를 아버지께 내밀었다. 그의 설계대로 아버지는 집을 지었다. 이후 아버지가 짓는 집의 설계는 그가 도맡았다.

대학에 들어가서도아놓고 집 설계를 했다. 현장소장을 두는 대신 직접 현장에 나갔다. 이렇게 지은 집은 완성되기도 전에 팔려나갔다. 거실과주방을 터 넓어 보이게 하고 좁은 공간을 잘 활용하도록 설계해 인기가 좋았다. 자연스럽게 강동역, 길동역 인근의 빌딩, 아파트를 짓는 건설회사로 규모가 커졌다.

그는 술을 안 마셨다. 아직까지 골프를 못 친다. 로비는커녕 업자들 모임에도 잘 끼지 않았다. 틈만 나면 인사동이나 장안동으로 골동품 구경하러 다니기 바빴다. 권 관장은 스스로를 “내성적”이라고 표현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건설사를 운영했을까.

“규모가 작을 때 건설업은 공예와 비슷합니다. 일단 예쁘게 잘 만들면 사람들이 좋아해요. 하지만 내 방식대로 해서는 몇 조원씩 매출을 올리는 회사로 키울 수 없다는 걸 알았어요. 그게 내 한계지요.”아파트를 지을 때마다 들어오는 각종 민원, 이권 단체의 농성 등을 해결하러 다니면서 권 관장은 사업에 점점 흥미를 잃었다.

갑상선암에 걸려 수술도 했다. 2002년의 일이다. 그는 그 동안 모은 골동품을 보면서 결심했다. ‘대한민국에 좋은 건설회사는 많지만 제대로 된 사립박물관은 적다. 적성도 그렇고 차라리 쓸만한 박물관을 만들어 놓고 가자.’

권 관장은 박물관 부지를 보러 다녔다. 처음에는 인사동에서 부지를 알아봤다. 하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계약을 하기로 해 놓고는 갑자기 주인이 안 판다고 하거나 계약서를 쓰기 직전에 몇 억씩 값을 올리기 일쑤였다. 그렇게 4번이나 계약이 성사되지 못하고 그는 삼청터널을 통과해 집에 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부동산 업자가 이야기했던 집이 생각났다.

북촌 골목에 있던 한옥이었다.권 관장은 “정신이 나갔냐”고 핀잔을 주며 구경도 안 했던 집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보니 그곳이 조선시대 맹사성의 집터였다. 권 관장은 “맹사성 선생은 우리 조상인 양촌 권근 선생의 아들 같은 제자”라며 “그냥 발을 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사방이 탁 트인 위치도 좋았다.당장 그 집을 산 권 관장은 80년 된 한옥을 고치고 주차장으로 쓰던 자리에‘고불서당’을 지었다. 담은 모두 꽃담으로 3년 동안 직접 쌓았다. 보통 담보다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다. 이후 박물관 입구 옆에 있던 빌라도 사서 작업실 겸 아트숍으로 꾸몄다.


제대로 된 전통혼례 한다권 관장은 “경쟁사회가 되면서 인성 교육이 부족해졌다”고 아쉬워했다. 그는 “인성교육을 하면 선진국으로 더 빨리 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범죄나 치안에 들이는 비용을 줄여 성장동력에 집중시킬 수 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권 관장이 선비 체험, 다도 체험 등 을 개설한 이유다.

인터뷰를 끝내고 내려오는 길에 보니 한옥 1층 벽을 부수고 있었다. 1층 입구 쪽은 기둥만 두고 벽을 모두 뚫을 계획이다. 이유를 묻자 “전통 혼례 때문”이라고 했다.9월부터 매달 1번 이 박물관에서 전통 혼례를 할 예정이다. 어설프게 흉내만 내는 전통혼례가 아니다. 신랑이 말을 타고 북촌 입구부터 짐꾼들과 함께 박물관에 입장한다. 혼례에 사용되는 도구 역시 남다르다. 중요무형문화재 자수장 한상수 여사, 금박장김덕환 선생, 윤숙자 한국전통음식연구소장 등 북촌의 장인들이 혼례에 필요한 것들을 준비한다.

2층은 각국의 차를 체험할 수 있는 차 박물관으로 탈바꿈 중이다. 이미 한 켠에는 중국과 일본 등에서 온 다기가 빼곡히 들어차 있다. 하반기부터 이용할 수 있다.권 관장의 장기 계획 중 하나는 행복마을. 마을 조성을 위해 강원도 홍천에 2만3140㎡의 땅을 사 뒀다. 박물관을 중심으로 수목원, 공방 등이 들어설 예정이다. 여기서 산야초를 유기농으로 재배하고 공방에서 작품을 만들어 팔계획이다. 내년에 착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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