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int

COLLECTOR - 눈이 오면 보고 싶은 ‘편지 읽는 여인’

COLLECTOR - 눈이 오면 보고 싶은 ‘편지 읽는 여인’



지난 12월13일 서울 청담동 프리마타운 3층에서 이상준(57) 호텔 프리마 대표를 만났다. 사장실은 갤러리를 방불케 했다. 벽마다 대형 그림이 전시돼 있고 곳곳에는 도자기가 놓여 있다. 추사 김정희를 비롯해 이우환·오치균·박수근·강익중 등 누구나 알만한 유명 작가들의 작품이다. 이 대표는 미술업계에서 손꼽는 컬렉터다. 수집 규모만 3000여점에 이른다.

이 중에서도 이 대표는 천경자 화백의 ‘편지 읽는 여인’을 애장품으로 소개했다. 편지봉투 크기의 1호짜리 작품이다. 한 여인이 우수에 찬 눈빛으로 편지를 읽고 있는 모습이다. 대표는 “이 작품과 인연은 특별하다”고 자랑했다.

2005년 11월9일 K옥션의 첫 경매에 ‘편지 읽는 여인’이 나왔다. 이날 이 대표도 경매에 참석했다. 그가 직접 경매장을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이후에는 직원을 보냈다. 그는 그림을 본 순간 “마음 속에 파장이 일었다”고 회상했다. 이 대표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이 그림을 두고 열띤 경쟁이 일었다. 4000만원으로 시작한 경매가는 계속 올라 5000만원을 넘었다. 끝내 6000만원에 이 대표 품에 들어왔다. 천경자 1호 작품이 처음으로 5000만원을 넘은 순간이다. 현재 이 그림은 2억원을 호가한다.

그는 “그림은 크게 3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고 얘기했다. 그림이 좋은 에너지를 주거나 반대로 기운을 뺏는 경우다. 또 하나는 상호 에너지를 교환할 수 있는 그림이다. 이 대표는 “좋은 에너지를 받을 때 작품에 끌린다”고 밝혔다. “작품을 마주한 순간 공유되는 감정이 중요합니다. 밀레의 만종을 떠올려보세요. 해질 무렵 종소리에 부부가 기도하는 모습에서 경건한 마음이 듭니다.”

‘편지 읽는 여인’ 역시 그에게 좋은 기운을 북돋아준다. 이 대표는 “연인처럼 자꾸 보고 싶다”고 말했다. “천경자 화백의 작품 하면 주로 꽃과 여인의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그녀의 전기 작품은 삶과 죽음 등 내면적 갈등을 담고 있어요. 1970년대 이후 선보인 후기 작품은 꿈과 낭만을 표현하는 시기입니다. 편지 읽는 여인은 1993년 작품으로 후기에 속하지요. 편지를 읽은 후 수심이 가득한 그녀의 얼굴에서 연민의 정이 느껴집니다. 눈이 오는 등 계절이 바뀌거나 마음이 침울할 때 유독 보고 싶습니다.”

이후에도 이 대표는 꾸준히 미술 경매에 관심을 가졌다. 2007년에는 미국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18세기 조선백자대호 ‘달 항아리’를 127만2000 달러(14억원)에 낙찰받았다. 최근 그가 참여한 경매는 업계에서 이슈가 됐다. 2012년 12월12일 서울옥션에서 겸재 정선의 ‘숙조도(宿鳥圖)’를 두고 열띤 경합이 벌어졌다.

이 대표는 현장에 직원을 보냈다. 이날 그는 한참 동안 전화기를 붙들고 있었다. 1600만원에 시작한 경매가가 계속 올랐기 때문이다. 숙조도는 나뭇가지 위에서 잠을 청하는 까치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겸재의 그림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것인데다 작품에는 ‘천금물전(千金勿傳·천금을 주어도 남에게 전하지 말라)’ 글귀가 새겨진 인장이 찍혀 경매 전부터 주목을 받았다.



연봉 쏟아부어 3000여점 컬렉션막판에는 이 대표와 한 신사간 경쟁으로 이어졌다. 경매가는 1억원을 넘긴 상태였다. 이 대표는 1억1000만원에서 포기했다. 결국 그림은 시작가의 7배에 이르는 1억1300만원에 다른 사람에게 팔렸다. “처음엔 6000만원까지 예상했습니다. 경매 가격이 계속 오를 것으로 예상하지는 못했어요. 조속도는 멋진 그림이에요. 새가 꾸벅꾸벅 졸고 있는 모습만 봐도 절로 잠이 올 거 같아요. 이 작품을 사신 분께 축하드립니다. 돈으로 가치를 따지는 게 부끄러울 수 있지만요. 정선 그림의 가치를 올리는 데 도움이 된 거 같아 만족합니다.”

이 대표는 “작품을 사랑해야만 컬렉션을 할 수 있다”고 얘기한다. “잠을 자다가도 불현듯 깨서 작품을 봐요. 멋모르는 사람들은 돈이 많아서 작품을 구입한다고 오해하지요. 아닙니다. 안 살수가 없기 때문에 적금을 깨고 연봉을 쏟아서 구입하는 겁니다. 샐러리맨이었을 때도 적금을 깨서 운보 김기창 화백의 작품을 샀어요. 그날 처음으로 부부 싸움을 했지만요(웃음).”

그가 수집에 처음 관심을 보인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다. 공부는 뒷전으로 미루고 수석을 수집하러 다녔다. “고등학교 화학시간에 야외실습을 나간 적이 있어요. 당시 화학 선생님이 수석을 모으는 게 취미였습니다. 그때 제가 찾은 돌을 보더니 대단하다고 칭찬하시더군요. 그때부터 관심을 갖게 됐어요. 남들 예비고사 준비할 때 돌만 보러 다녔어요. 희귀한 돌 모양이나 돌에 그려진 문양에 마음을 뺏겼습니다.”

수석을 시작으로 이 대표는 예술품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특히 동양화에 관심이 많았다. 수묵화와 도자기를 수집했고, 점차 시각을 넓혀 서양화와 추상화까지 관심을 갖게 됐다. 그의 컬렉션은 호텔 경영에도 도움이 됐다. 2007년 그는 호텔 3층에 호텔 프리마 뮤지엄을 열었다.

“호텔은 서비스 산업이에요. 손님을 초대하면 보고, 배우고, 먹고, 줄게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컬렉션을 공개해 호텔을 찾는 고객들에게 충분한 볼거리를 제공하기로 마음 먹었지요. 혼자 보는 것보다 고객과 함께 나누니 더욱 좋더군요.”

그 동안 호텔 프리마 뮤지엄에서는 ‘해외환수문화재 전시전’ ‘조선분청사기전’ 등 전시회가 열렸다. 박물관뿐 아니라 호텔 로비와 식당 곳곳에 동서양과 근·현대를 아우르는 800여점의 예술품이 전시돼 있다. 호텔 로비에는 정상화·강익중·권오상·권기수 등 유명 작가들의 작품이 진열돼 있다. 경영에 예술을 접목하면서 호텔의 가치는 올랐다. 이 대표 취임 당시 연 60억원이던 매출은 현재 300억원 수준으로 뛰었다.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진옥동 신한금융 회장 “韓 밸류업 선도 사명감 갖고 노력”

2‘은둔형’ 정유경 회장, ㈜신세계 ‘미래 메시지’ 던질까

3HD현대重, 캐나다 잠수함 포럼 참석...현지 맞춤 모델 소개

4함영주 회장 “글로벌 시장 눈높이에 맞는 주주환원 이행할 것”

5케이뱅크 “앱에서 한국거래소 금 시장 투자 가능”

6DGB금융, ‘디지털 상생 기부 키오스크’ 이웃사랑 성금 전달

7'고가시계 불법 반입' 양현석, 법정서 입 열었다

8연일 추락 코스피, 2,400선마저 하회…반등 여지 있나

9두나무, ‘업비트 D 컨퍼런스 2024’ 성료…현장 방문객만 1350명

실시간 뉴스

1진옥동 신한금융 회장 “韓 밸류업 선도 사명감 갖고 노력”

2‘은둔형’ 정유경 회장, ㈜신세계 ‘미래 메시지’ 던질까

3HD현대重, 캐나다 잠수함 포럼 참석...현지 맞춤 모델 소개

4함영주 회장 “글로벌 시장 눈높이에 맞는 주주환원 이행할 것”

5케이뱅크 “앱에서 한국거래소 금 시장 투자 가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