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우대하는 외국계 기업문화 본받자
여성 우대하는 외국계 기업문화 본받자


“경력 단절 억울해 말고 더 부지런해야”
손 병옥 푸르덴셜생명 사장 … 출산·육아로 3년 공백 딛고 재입사손병옥(61) 푸르덴셜생명보험 사장은 국내 생명보험 업계 첫 여성 CEO다. 그는 이화여대 영문학과를 졸업한 후 1974년 체이스맨해튼은행에 들어갔다. 이후 줄곧 외국계 은행에서 근무하다 1996년 푸르덴셜생명으로 옮겨 15년 만에 사장이 됐다. 두 딸의 엄마인 그는 외국계 회사에 입사한 덕을 봤다고 말한다.
그는 “한국 기업은 남성 중심 문화가 여전한데 30년 전에는 어떠했겠느냐”며 “외국계 기업은 능력 위주로 평가 받고 육아휴직을 비롯한 복지 혜택도 받을 수 있었다”고 했다. 1970년대 한국 기업은 대졸 여성사원에 대한 직급체계조차 없었다. 현장에서 박한 대우를 받았고 업무 기회를 제대로 얻기 어려웠다.
미들랜드은행과 HSBC은행에서 경력을 쌓은 그는 1993년 2월 사표를 내고 두 딸을 키우는 전업주부로 돌아갔다. 남편(이석영 전 중소기업청장, 작고)이 미국 워싱턴 상무관으로 발령받으면서다. 일을 다시 시작하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한 그는 한국에 돌아와 영어선생님이라도 하자는 생각에 영어교사 자격증(TESL)을 취득했다.
그러다 천신만고 끝에 3년간의 공백을 딛고 푸르덴셜생명의 인사부장을 맡았다. 그는 “일생을 두고 일과 가정에 충실해야 할 때를 구별하는 현명한 자세가 필요하다”며 “가정을 위해 직장을 포기했지만 의지가 있고 열정만 있으면 기회는 주어진다”고 말했다.
그는 시간을 철저히 관리하고 준비하고 배우는 자세를 가진 게 경쟁력이라고 말한다. 그는 매일 새벽 5시 30분에 일어나 오전 7시에 회사에 출근한다. 조찬 세미나에 참석해 공부하고 사람들과의 네트워크를 쌓기 위해서다. 손 사장은 “주말에 뭐할 거냐는 질문에 영화를 보거나 청소를 하겠다고 대답하면 곤란하다”며 “구체적으로 몇 시에 어떤 일을 하고 남은 시간에는 무엇을 할 것인지 계획을 세워야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외국 금융회사에서 일하고, 외국에서도 살았지만 요즘도 영어테이프를 듣고 강사에게 영어를 배운다.
그는 직위가 올라갈수록 양보나 희생을 알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푸르덴셜생명 인사부장 시절 때다. 출산휴가를 앞둔 여성 후배가 왜 눈치를 보며 휴가를 써야 하냐며 볼멘소리를 했다. 손 사장은 “아이를 낳고 키우는 건 고귀한 일이지만 동료의 업무가 늘어날 수밖에 없는데 조금은 미안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게 아니냐며 크게 혼냈다”고 말했다.

“애 핑계로 회사 소홀할거면 그만두라”
송 승선 롯데마트 이사 … 동병상련 동료와 소통 늘리면 도움송승선(43) 롯데마트 온라인사업부 이사는 ‘독한 사람’이다. 14년 전 첫 아이를 가졌을 때 페덱스코리아의 마케팅팀장을 맡고 있었다. 당시 몸이 좋지 않아 유산 위험이 있었다. 결혼 3년 만에 힘들게 가진 아이였다. 다행히 회사에서 일주일 병가를 줘 무사히 아이를 낳았다. 그는 회사 내규로 정해진 출산 휴가 2개월을 마치고 복귀했다. 이전보다 더 열심히 일했다. 육아는 친정 어머니 도움을 받았다.
2년 후 둘째를 출산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제도가 바뀌어 출산휴가가 한 달 늘었다. 이전보다 한 달 더 쉬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았다”고 말했다. 첫째가 다섯 살, 둘째가 세 살이 되면서 직장·육아스트레스가 심했다. 많은 사람이 퇴사를 고려할 법한 상황에서 그는 대학원에 진학해 경영학석사(MBA) 과정을 수료했다.
틈틈이 영어 학원도 다녔다. “당시 그 상태를 계속 유지하면 ‘얼마나 버티나’의 싸움이 될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힘들어도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야 그 다음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자녀·남편·회사 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 자신을 위한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죠.”
송 이사는 1994년 삼성그룹 여성공채 1기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3번의 이직을 거치며 경력을 쌓았다. 두 명의 자녀를 기르며 고비가 많았지만 매 순간 정면돌파 했다. 육아와 직장 사이에 충돌이 생길 때마다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지자’는 뜻을 마음에 새겼다.
“현재 직장을 선택한 것도, 자녀를 낳은 것도, 이후 이직을 한 것도 모두 제 선택입니다. 성인이라면 자신이 한 선택에 책임을 질 줄 알아야해요. 아이에겐 직장 핑계 대며 소홀히 대하고, 직장에는 육아 핑계로 설렁설렁할 거라면 둘 중 하나는 그만 두는 게 낫습니다. 회사는 영리단체지 복지단체가 아닙니다. 나는 아이를 키우니까 회사 일은 조금 소홀해도 되겠지라는 생각은 스스로 가치를 떨어뜨리는 일이란 걸 명심해야 합니다. 성과와 타협해서는 안돼요.”
이 말을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책임감 또한 중요하다. 현재의 위치에서 ‘바른 모습’을 보여야 후배에게 더 많은 기회가 생길 수 있어서다. 또 먼 미래에는 자녀에게 그 열매가 돌아간다는 것을 송 이사는 잘 알고 있다.
최근까지는 자녀 교육 문제를 놓고 고민이 많았다. 회사에서 워낙 오랜 시간을 머물기 때문에 자녀 교육에 소홀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고민도 하지 않기로 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최선을 다해 멋지게 해내는 모습, 그걸 몸으로 보여주는 것 자체가 훌륭한 교육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비싼 과외 시키고 쫓아다니며 학원보내는 게 아이를 위한 길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대신 일이 없을 땐 자녀와 최대한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애쓴다. 출근 전에는 녹색어머니 활동을 하면서 정기적으로 아이들 교통지도를 했다. 회사에 월차를 써 한 학기에 4번 초등학교 배식 당번을 한다. 대신 자신이 자리를 비운 시간만큼의 일을 어떻게든 성과를 내서 만회한다.
그는 후배들에게 “마음을 공유할 수 있는 모임을 만들라”고 말한다. 조직 내에 비슷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끼리 정기적으로 만나 대화를 나누다 보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는 것이다. 의외의 도움을 얻을 수도 있다. “자녀를 키우며 일하는 직장 여성동료를 만나 얘기하면 ‘답이 없다’는 말을 많이 해요. 사실 어떤 제도가 생겨도 육아로 인한 경력단절 문제는 완벽하게 해결되지 않아요. 그저 인내하며 이겨나가는 거죠. 그 때 주변에 비슷한 고민을 하는 동료가 많으면 위안을 얻어요.
그러다 도울 일이 있으면 돕고, 도움 받을 일이 있으면 받고요. 요즘은 많은 회사가 출산과 육아에 대한 복지를 늘리고 있잖아요. 선배들에게 ‘그래도 예전에 비해선 많이 좋아졌다’는 말을 들으며 현재의 상황을 긍정적으로 해석할 필요도 있는 것 같습니다.”

“아이 문제로 휴가 내면 선뜻 OK”
이 명희 한화투자증권 상무 … 자기계발 하며 네트워크 넓혀가야이명희(47) 한화투자증권 상무는 이화여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1989년 쌍용투자증권(현 신한금융투자)에 입사해 20년 넘게 현장에서 일했다. 이 기간 삼성증권 외에도 영국계 투자은행인 제임스 카펠(현 HSBC)과 일본의 도쿄-미쓰비시 은행계열사인 월드섹 인터내셔널 등 외국계 증권사에서 8년 동안 일했다. 그 역시 임원에 오르기까지 가장 힘들었던 때를 “결혼 후 출산과 육아 과정”이라고 말했다.
“지금은 임신해도 회사에 나오는 것이 당연하고 출산휴가를 얻는 것이 당연하지만 예전만 해도 그렇지 않았습니다. 제 입사 동기들이 사회생활을 하나 둘씩 그만뒀던 큰 이유도 출산·육아였어요.” 그의 첫 직장인 쌍용투자증권은 1989년에 증권업계 최초로 여성 텔러가 아닌 여성 브로커를 정규 채용했다. 당시 그의 입사 동기 여성은 모두 12명. 이 중 현업에 있는 이 상무와 현주미 신한금융투자 PWM압구정센터장을 제외한 10명은 중도 퇴사했다. 대부분 가사와 출산·육아 문제 때문이었다.
그의 외아들은 대학 2학년이다. 아들을 낳아 한창 키울 때 외국계 증권사에서 일한 게 행운이었다. 이 상무는 단적으로 우리 기업문화와 외국계 회사의 기업문화가 달랐다고 말한다.
“국내 기업은 공동체와 조직을 굉장히 중시하죠. 또 숫자 상으로 남성 인력이 절대적으로 많으니 남성 위주 문화가 자리잡게 마련입니다. 임산부로 일할 땐 배가 나온 채로 회사에 출근하는 게 눈치가 보여서 티가 안 나게 하려고 책상에다 배를 바짝 붙여 앉아 일할 정도였어요. 몇 개월짜리 출산휴가를 쓰느니 차라리 사표를 쓰라는 식의 암묵적 분위기도 느껴졌습니다.”
국내 기업에서는 인사고과를 매길 때 여성이란 이유로 불이익을 받는 사례도 적잖다. 이에 비해 외국계 기업에서는 육아문제를 존중할 뿐 아니라 개인 능력과 실적에 따라 남녀 구분 없이 공정하게 평가하고 따로 불이익도 없었다. 이 상무는 “외국의 기업문화가 한국보다 낫단 의미가 아니라 여성 입장에서 그렇다는 얘기”라며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우리 기업문화도 많이 개선된 것을 느낀다”고 덧붙였다.
여성 인력이 다른 업종보다 많이 진출한 증권업계이지만 여성 임원이 되기까지는 매 순간이 쉽지 않았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서는 부모로서 역할을 맡아야 할 일이 늘었지만 제때 시간을 낼 수 없어 애를 먹었다. “초등학교에서 엄마들이 모여서 급식이나 청소를 담당하기도 하는데 못 갈 땐 돈 주고 고용하는 ‘대타 엄마’를 보내기도 했죠. 직장생활을 하는 대한민국 엄마라면 이런 경험이 있을거예요.”
그는 “엄마로서 일과 가정생활을 병행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기 때문에 최근에는 여성 직원이 아이 문제로 휴가를 내려하면 기꺼이 오케이 사인을 낸다”고 했다. 이 상무는 일과 가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면 무엇보다도 진취적이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영업 직군은 설령 인사고과에 불이익 가능성이 있더라도 숫자로 반박할 수 있는 확실한 객관적인 실적 자료를 확보하는 분야입니다. 금융권에 여성 임원이 많은 이유도 많은 남성 임직원이 공감할 수 있는 눈에 보이는 실적 자료를 갖게 되기 때문이죠. 끊임없이 자기계발 하면서 용기를 갖고 네트워크를 쌓는 데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 집에 주부 따로 없죠”
조 영란 한국지멘스 이사 … 장기 육아휴직 제도 정착돼야“우리 딸이 나중에 저 같은 엄마가 되고 싶대요. 다른 엄마들처럼 가정적이지 못했는데 그런 소릴 해주니 너무 고맙죠.” 조영란(44) 한국지멘스 헬스케어영상진단사업본부 이사는 회사에서는 임원이지만 가정에서는 고등학생 딸을 둔 평범한 엄마다. 조 이사는 “어려서부터 남의 손에 맡겨 키운 딸이 철이 들자 엄마처럼 되고 싶다는 소릴 종종 한다”며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직장 계속 다니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2010년 이사직에 오른 후 한국지멘스 헬스케어 부문에서 실질적인 최고재무책임자(CFO)를 맡고 있는 그는 꼼꼼한 일 처리로 정평이 나있다. 회사 일에는 한 치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는 대신 집안 먼지는 어느 정도 허락하는 것이 그가 일과 가정, 두 마리 토끼를 잡은 비결이다.
그가 일과 가정을 모두 성공적으로 일군 ‘수퍼맘’이 되기 위해 택한 전략은 ‘선택과 집중’이었다. 잘하는 것에 집중하고 못하는 건 다른 가족의 도움을 받으면 된다는 식이다. 조 이사는 “우리 집에 가정 주부는 없다”고 말했다. “신혼 때 나는 빨래, 남편은 설거지 이렇게 역할을 나눴는데 이제는 먼저 퇴근하는 사람이 밥하고 세탁기도 돌려요.
저는 물론 남편과 딸도 너나없이 집안일을 하지만 살림만 하는 사람은 따로 없으니 우‘ 리 집에는 가정 주부가 없다’고 말하곤 해요.” 조 이사는 대학을 졸업한 1991년 한국지멘스 경남 창원지사에 사원으로 입사했다. 3년 후 서울 본사 발령을 받은 그는 능력을 인정받아 30대 초반이던 1998년에 커머셜 매니저로 승진했다.
“일이야 하면 되지만 아이가 있으니 회식이나 야근은 부담스러울수밖에 없어요. 누가 눈치 주는 것도 아닌데 동료끼리 전날 회식 자리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말할 때면 소외감을 느끼기도 했죠.” 그럴수록 조 이사는 ‘감성 리더십’을 발휘했다. 회식 자리에서 술을 마시며 동료와 정을 쌓을 기회는 적었지만 일을 할 때만큼은 상대방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려고 하며 유대 관계를 이어나갔다.
그는 “직원들과 업무와 관련해 더 많은 질문과 대화를 하고, 매니저로서 업무를 완벽하게 소화하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며 “남을 배려하면서 동료에게 동기부여를 해주는 역할은 여성들이 선천적으로 강한 부분이니 이를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그는 “23년간 한 회사에서 일하면서 단 한 번도 직장을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더러 마음이 약해질 때도 있었다. 바로 딸에게 ‘엄마’로서 역할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 때였다.
“아이가 서너 살 됐을 무렵이에요. 쉬는 날이면 딸이 제 무릎에 앉아서 떨어지질 않더라고요. 끊임없이 엄마와 눈을 맞추고, 볼을 비비고, 품에 파고드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짠해졌어요. 엄마의 정이 얼마나 고프면 저럴까 싶어서요. 그런데 아이와 있는 시간을 늘릴 형편은 안 되고. 그래서 함께 있는 동안만이라도 아이에게만 집중하려고 애썼어요. 사실 하루 종일 아이와 함께 있더라도 엄마가 귀찮아하거나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있으면 아이가 애정을 못 느끼는 건 똑같아요. 얼마나 오래 함께 있느냐 보다는 짧은 시간에 얼마나 사랑을 주느냐의 문제인 것 같아요.”
조 이사는 “능력 있는 신입 여직원들이 리더로 성장하려면 안정적인 가정생활이 필수적”이라며 “육아휴직 제도 정착 등 여성이 일을 계속할 수 있는 근무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일할 때만 해도 육아휴직 제도는 유명무실했지만 현재 한국지멘스에서는 1년간 육아휴직을 내는 직원이 적지 않다.
아이를 키우기 위해 퇴사한 후 재입사하는 경우도 있다. 조 이사는 “누가 육아휴직을 썼더니 다녀와서 불이익을 당하더라는 소리가 들리면 아무도 쓰지 않을 것”이라며 “아이를 키우고 와서도 이전에 하던 일을 변함 없이 할 수 있어야 기업이 여성 인재를 놓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허윤홍 GS건설 대표 “AI는 피할 수 없는 물결, 생존의 문제와 직결”
2337조원 썼지만 부족하다…한국 복지지출, OECD 평균의 69%
3현대면세점, 동대문점 폐점 이어 희망퇴직 실시
4코스피 2300선 붕괴…환율 금융위기 이후 최고치
5“4월이 분수령”…3월 가계대출 4000억원 증가에 그쳐
6뷰노, 김택수 최고전략책임자 영입…삼성종기원 출신
7SK에코플랜트, 반도체 기술 가진 스타트업 찾는다
8EV·픽업·자율주행…기아, 다각화 전략으로 미래차 선도
9하이브 방시혁, 3개월 만에 주식 5000억원 늘었다...총수 주식 살펴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