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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LECTOR - 이왈종 화백 그림 보면 멋있고 즐거워요

COLLECTOR - 이왈종 화백 그림 보면 멋있고 즐거워요



서울 대치동 삼성역 앞 유럽풍 건물이 눈에 띈다. 골프 의류로 유명한 슈페리어 타워(신사옥)다. 김귀열(71) 슈페리어 회장은 지난해 5월 이 건물 지하 1층에 슈페리어 갤러리를 열었다. 김종학·김창열·배병우·오치균·이왈종·이우환 등 유명 화가들의 개관 기념 전시회를 시작으로 다양한 작가의 작품이 이곳에 걸렸다. 김 회장을 만난 1월14일에는 정강자 화백의 강렬한 그림이 관객을 맞았다.

김 회장이 그림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자연’이다. “1990년대부터 그림을 하나 둘 수집하긴 했어요. 그래도 여전히 옷만 쳐다보며 살았는데 나이가 뭔지 일흔에 가까워지니까 주변의 풀·나무가 눈에 들어오더군요. 자연을 담은 한 폭의 그림이 참 아름다웠어요.” 그림을 공부하고 화가들과 친분을 쌓던 중 2009년 대치동에 신사옥을 지으면서 갤러리를 열겠다고 마음먹었다.



사옥 지하에 갤러리 열어슈페리어 갤러리는 시원하게 탁 트인 공간과 심플한 인테리어가 돋보인다. 여러 갤러리를 답사한 김 회장이 “넓게 만들라”고 주문한 결과다. 허전하지 않게 가운데 테이블을 놓고 사탕 바구니를 얹었다. “하나 드세요.” 사탕을 집어 든 김 회장이 갤러리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안쪽에는 예술 관련 동영상과 클래식을 감상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돼 있다. 의자와 테이블, TV 받침대까지 김 회장이 매장을 다니며 손수 고른 것들이다.

의자에 앉은 그의 어깨 너머로 그림 한 점이 보였다. 시원한 폭포수 아래서 골프를 즐기는 모습이 흡사 현대판 신선놀음이다. 이왈종 화백의 ‘제주생활의 중도(中道)’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 화백 그림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져요. 시원스럽잖아요. 유유자적하고 상상만 해도 멋있고 즐겁지 않아요? 골프 치는 모습이 많이 나와서 더 관심이 갑니다.”

이 화백은 골프 치는 사람들을 화폭에 담아 ‘골프 화백’이라는 별칭이 있다. 제주도에 살아 ‘서귀포 화가’로도 불리는 그는 “골프 치러 내려오라”며 10년 지기 김 회장을 꾄다. 둘은 종종 함께 골프를 즐긴다. “이 화백이 아마추어 중에 톱 클래스에요. 저는 예전에는 70대 후반 스코어였는데 요즘은 80대 중반 정도 쳐요. 둘 다 못 하는 편은 아니죠(웃음).”

이 화백은 20년 동안 ‘제주생활의 중도’라는 같은 주제로 작품활동을 해왔다. 모든 작품에 우리 고유의 오방색(청·적·황·백·흑)을 써 친근함을 준다. 김 회장은 이 작품을 3년 전 현대미술관 전시회에서 구입했다. 이날은 인터뷰를 위해 옮겼지만 이 그림의 제자리는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슈페리어 본사의 김 회장 집무실이다.

김 회장은 “저쪽(집무실)에 있으면 직원들이 오갈 때마다 이런저런 생각이 들어 머리가 복잡해진다”며 “이 화백의 그림은 소소한 일상을 밝고 해학적으로 표현해 보고있으면 정서적으로 안정된다”고 말했다.

90년대 초 처음 산 그림은 사군자였다. 오래 전이라 어디서 샀는지, 어디로 갔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거실에 두고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다고 한다. “특별히 그림을 고르는 기준은 없어요. 우선 좋아야 사는 거죠. 화려하고 밝은 그림이 좋습니다.”

패션 사업가다운 취향이다. “스포츠 의류를 예술과 조합하면 어울리지 않는 듯하지만 의류 역시 예술입니다. 색상·디자인·소재가 어우러져 소비자의 감성을 자극하고 또 다른 문화 트렌드를 만드니까요.”

이제까지 모은 작품 수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열 손가락을 두어 번 꼽으면 대충 목록이 만들어진다. “그림을 모은다기보다는 유통하고 있어요. 좋은 그림이 있으면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원하면 주기도 하고, 또 좋은 그림을 보면 사고….” 갤러리를 열면서 본격적으로 ‘그림 유통’을 하게 됐다는 설명이다.



“나는 그림 유통하는 사람”본업인 ‘의류 유통’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을까. 경기도 평택에서 7남매 중 넷째로 태어난 김 회장은 아버지의 농사일을 도우며 자랐다. 패션과는 거리가 먼 성장기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해 친구가 소개해준 의류회사에서 일한 것이 패션업과 첫 인연이다. 7년 동안 안 먹고, 안 쓰고 모은 37만원(당시 백반 1인분이 100원이었다)으로 1967년 슈페리어의 전신인 동원섬유를 세웠다. “빨리 움직여야 한다는 뜻에서 움직일 동(動), 으뜸 원(元) 자를 썼어요.”

처음에는 스웨터를 만들었다. 브랜드를 붙여 서울 평화시장·남대문시장에 내다 팔았다. 판매실적이 제법 좋아 회사가 자리를 잡자 쉬지 않고 외국 출장을 다녔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열심히 하다 보면 패션에 대해 알지 않을까 싶었죠.”

프랑스 파리, 이탈리아 밀라노, 영국 런던 등으로 1년에 열 다섯 번 넘게 출장을 떠났다. 일본 신주쿠는 지하상가 구조를 지금도 외고 있을 정도다. 김 회장의 노력에 슈페리어는 전환기를 맞았다. “70년대 중반에 유난히 일본 출장이 잦았는데 골프 의류가 눈에 띄더라고요. 한국에서 골프 인구가 조금씩 늘어날 때라 이거다 싶었어요.”

1979년 국내 첫 골프 의류 브랜드 ‘슈페리어’를 출시했다. 이후 동마산업의 ‘이동수’, 화승의 ‘캐필드’ 같은 브랜드가 잇따라 등장하면서 골프 의류 시장은 급성장했다. 슈페리어는 라코스테·아놀드 파머·잭 니클라우스같은 수입 브랜드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대표 토종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지금은 골프 의류 브랜드 SGF슈페리어·임페리얼, 남성복 프랑코 페라로, 패션 브랜드 블랙마틴싯봉, 아웃도어 브랜드 윌리엄스버그 등을 보유하고 있다.

45년 동안 꾸준히 성장해 온 슈페리어는 무차입 경영으로 유명하다. “내 지론이 ‘금송아지 값이 10원이라도 돈이 있어야 산다’는 거예요. 아무리 싸도 현금이 있어야 살 수 있다는 거죠.” 내실을 다진 덕에 외환위기 때도 큰 타격 없이 잘 넘어갔다. “한편으로는 성장기에 과감히 투자했다면 회사 규모가 더 커지지 않았을까 싶기도 해요. 하지만 굴곡이 심한 의류업계에서 살아남은 걸 보면 내 방식이 아주 틀린 건 아니지요?”

현재 국내 골프 의류 브랜드는 80여 개에 달한다. 아웃도어 시장과 SPA(제조·유통 일괄형) 시장이 골프 의류 시장을 잠식하고 있다. 김 회장은 “1년에 봄·여름, 가을·겨울 두 시즌이 있는데 요즘 올 가을·겨울 시즌 제품을 기획하고 있다”며 “제품을 내놓을 때마다 대입시험 합격을 기다리는 마음”이라고 밝혔다. 그는 “지속적으로 성장하려면 양보다 질로 승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브랜드의 컨셉트를 유지해야지 무조건 흉내만 내다간 아무것도 안돼요. 브랜드마다 충성도가 높은 팬을 확보하면 성공할 수 있습니다.”

진지하게 사업 이야기를 하던 김 회장이 그림을 한번 쳐다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집무실에 있다가 갤러리에 오면 마치 다른 세상 같아요.” 그는 산책할 겸 업무에 지칠 때 이곳에 들른다고 했다.

올해 5월에는 갤러리 바로 아래층에 골프 박물관을 열 계획이다. “한국이 골프강국이 됐는데도 박물관이 없어요. 골프의 역사와 다양한 골프 장비를 보여주려고 합니다.”

그가 수첩을 하나 꺼냈다. 박물관 개관 외에도 하고 싶은 일들이 빼곡히 적혀 있다. 페이지를 넘기던 그의 손이 멈췄다. “아, 이건 꼭 이루고 싶어요. 힐링센터를 만드는 겁니다. 이름도 지어놨어요. 귀할 귀(貴), 백성 민(民) 자를 써서 귀민원이라고요. 도시에서 지친 사람들에게 식이요법, 건강습관을 가르쳐주고 정신적 안정을 주고 싶어요.”

언제 이룰지 모를 계획이라고 했지만 이미 슈페리어 갤러리가 귀민원의 역할을 조금은 하고 있는 듯했다. 주변 직장인들은 도심 속 갤러리에서 가쁜 숨을 돌리고, 여러 작가들이 이곳에 들러 휴식을 취하곤 한다. 김 회장은 “지나가다 들어오면 차 한 잔 대접할 테니 언제든 들르라”며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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