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FORBES KOREA AGENDA - 일제 시대 문화재 지키는데 재산 아낌없이 쏟아부어
2013 FORBES KOREA AGENDA - 일제 시대 문화재 지키는데 재산 아낌없이 쏟아부어
간송 전형필은 막대한 유산을 민족정신을 지키는데 쏟았다. 일본에 빼앗긴 수많은 문화재를 되찾아왔다.
2월13일 간송의 손자인 전인건(42) 보성고 행정실장을 만났다. 그는 간송이 남긴 유산인 간송미술관과 보성 중·고 관련 행정 실무를 맡고 있다. 이 가문의 부의 역사는 5대조로 거슬러 올라간다. 무반이었던 선조는 장터 상권을 관리하면서 점포를 늘렸다. 현재 광장시장을 중심으로 종각 상권을 장악했다. 간송이 물려받은 재산은 논 2640만㎡(800만평) 이상이었다. 경기도 일대부터 황해도·충청도 등 전국 곳곳에 논밭을 두었다. 한해 수확량이 2만 석에 달했다.
간송이 엄청난 유산을 문화재 수집에 쏟아 부은 뜻은 뭘까. 그는 아버지 뜻에 따라 와세다대 법학과에 들어갔다. 전인건 실장은 “20대에 조선에서 손꼽는 부자였지만 일본 식민지 백성이라는 서러움을 느꼈다”고 말했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간송은 엄청난 유산을 물려 받았다. 조상 대대로 물려온 재산을 지키면서 활용할 방법을 고민했다. 일본인들이 도자기·서화·전적 등 문화재를 가져가는 모습을 보면서 할 일을 찾았다. 바로 조선의 자존심인 문화재를 지키는 일이다.
전 실장은 “할아버지께선 우린 우월한 민족이기 때문에 반드시 독립할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을 가졌다”고 전했다. “우리 민족이 뛰어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일본인에게 뺏긴 문화재를 되찾아와야겠다고 결심한 거죠. 수집 목록을 보면 알 수 있어요. 예쁘고 값비싼 작품을 모은 게 아닙니다. 문화재 계보를 이을 수 있도록 스승과 제자의 작품을 모으거나 시대적 상황을 먼저 고려하셨지요.”
간송이 컬렉션을 하는데 도움을 준 이는 위창 오세창 선생이다. 추사 김정희의 제자로 3·1만세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 중 한 명이다. 유명한 수집가로 국내 최초의 고미술 화첩을 만들었다. 간송은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 그림을 보는 눈과 컬렉션 지식을 익혔다. 간송이란 호도 위창이 지어줬다. 간송(澗松)이란 산골짜기에 흐르는 맑은 물과 사시사철 푸르른 소나무란 뜻이다.
간송은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면 값을 따지지 않았다. 1937년 영국 변호사 개스비에게 청자 20점을 40만원에 샀다. 당시 서울 기와집 400채 값이었다. 그는 미술품을 안전하게 가져오기 위해 비행기를 전세냈다. 화물칸에 싣고 오다 파손이라도 될까 기내석에 모셔왔다. 그가 공들여 가져온 청자 20점 중 7점은 광복 후 국보와 보물로 지정됐다.
간송은 미술품 이외에 민족정신을 높이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1940년 보성고를 인수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전 실장은 보성고가 갖는 역사적 의미를 설명했다. “보성고는 1906년 이용익 선생이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만든 학교입니다. 특히 3·1 운동과 인연이 깊어요.
보성고 내 출판사인 보성사에서 기미독립선언문을 인쇄·배포했고, 민족대표 33인 중 손병희·최린 선생이 보성 출신이에요. 일제 총독부 간섭으로 여러 차례 재정위기를 겪었습니다. 수 차례 주인이 바뀌다가 학교 문을 닫는 위기까지 온 거에요. 할아버지께선 민족 혼이 깃든 보성고가 사라지는 것을 안타까워하셨지요. 몰래 다른 사람을 내세워 학교를 인수하게 됐습니다.”
한국의 정신을 잇고자 했던 간송은 1962년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병명은 급성신우염. 몸이 이상하다며 전철을 타고 병원을 갔지만 그 이후 일어나지 못했다.
예상치 못한 간송의 타개에 집안은 발칵 뒤집어졌다. 이때 상당수 재산을 잃었다. 정확한 재산은 간송만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화가로 활동하던 장남 전성우 보성고 이사장도 귀국했다. 당시 전 이사장은 미국 인명사전에 이름이 오를 만큼 촉망받는 작가였다.
화가로서의 명성은 포기해야 했다. 그보다 아버지 유산을 정리하는 게 급했다. 가장 값진 유산은 1938년 간송이 서울 성북동에 세운 보화각이다. 위창이 ‘빛나는 보배를 모아두는 집’이라는 의미로 지어준 이름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개인박물관이다. 현재 이름은 간송미술관이다.
보다 체계적인 연구를 위해 1966년 한국민족미술연구소를 세웠다. 국립중앙박물관 연구원 출신 미술 사학자 최완수씨가 연구실장을 맡았다. 1971년 봄부터 매년 5월과 10월 중순에 소장품 전시회를 연다. 전시회에 맞춰 ‘간송문화’라는 도록이 나온다.
단순히 전시 작품만 수록하는 게 아니라 간송의 수집품을 중심으로 미술사와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연구 논문을 담았다. 지난해 가을 나온 게 83호다. 보통 한 전시회에 100여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간혹 겹치는 경우도 있지만 간송 소장품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 수치다.
간송이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학문적인 연구 결과도 발표했다. 겸재 정선이 도화서에 주로 들어가던 중인이 아니라 양반 출신 사대부 화가였음을 밝혀냈다. 혜원 신윤복 아버지가 임금 초상 제작에서 주로 채색을 담당하는 수종화사 신한평이며 신윤복의 본명이 신가권이라는 것도 확인했다.
취재 끝 무렵 전 이사장과 통화를 할 수 있었다. 그는 “아버지가 잘난 것을 알리지도 자신을 내세우지도 말라는 얘기를 많이 하셨다”며 말을 아꼈다. “말씀은 많지 않았지만 자녀에겐 늘 다정했어요. 야단을 친 적도 없고요. 묵묵히 소신껏 큰 일을 하셨다는 점에서 존경스럽지요. 아버지를 존경하는 학자가 많다는 점도 자랑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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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13일 간송의 손자인 전인건(42) 보성고 행정실장을 만났다. 그는 간송이 남긴 유산인 간송미술관과 보성 중·고 관련 행정 실무를 맡고 있다. 이 가문의 부의 역사는 5대조로 거슬러 올라간다. 무반이었던 선조는 장터 상권을 관리하면서 점포를 늘렸다. 현재 광장시장을 중심으로 종각 상권을 장악했다. 간송이 물려받은 재산은 논 2640만㎡(800만평) 이상이었다. 경기도 일대부터 황해도·충청도 등 전국 곳곳에 논밭을 두었다. 한해 수확량이 2만 석에 달했다.
간송이 엄청난 유산을 문화재 수집에 쏟아 부은 뜻은 뭘까. 그는 아버지 뜻에 따라 와세다대 법학과에 들어갔다. 전인건 실장은 “20대에 조선에서 손꼽는 부자였지만 일본 식민지 백성이라는 서러움을 느꼈다”고 말했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간송은 엄청난 유산을 물려 받았다. 조상 대대로 물려온 재산을 지키면서 활용할 방법을 고민했다. 일본인들이 도자기·서화·전적 등 문화재를 가져가는 모습을 보면서 할 일을 찾았다. 바로 조선의 자존심인 문화재를 지키는 일이다.
전 실장은 “할아버지께선 우린 우월한 민족이기 때문에 반드시 독립할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을 가졌다”고 전했다. “우리 민족이 뛰어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일본인에게 뺏긴 문화재를 되찾아와야겠다고 결심한 거죠. 수집 목록을 보면 알 수 있어요. 예쁘고 값비싼 작품을 모은 게 아닙니다. 문화재 계보를 이을 수 있도록 스승과 제자의 작품을 모으거나 시대적 상황을 먼저 고려하셨지요.”
간송이 컬렉션을 하는데 도움을 준 이는 위창 오세창 선생이다. 추사 김정희의 제자로 3·1만세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 중 한 명이다. 유명한 수집가로 국내 최초의 고미술 화첩을 만들었다. 간송은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 그림을 보는 눈과 컬렉션 지식을 익혔다. 간송이란 호도 위창이 지어줬다. 간송(澗松)이란 산골짜기에 흐르는 맑은 물과 사시사철 푸르른 소나무란 뜻이다.
간송은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면 값을 따지지 않았다. 1937년 영국 변호사 개스비에게 청자 20점을 40만원에 샀다. 당시 서울 기와집 400채 값이었다. 그는 미술품을 안전하게 가져오기 위해 비행기를 전세냈다. 화물칸에 싣고 오다 파손이라도 될까 기내석에 모셔왔다. 그가 공들여 가져온 청자 20점 중 7점은 광복 후 국보와 보물로 지정됐다.
간송은 미술품 이외에 민족정신을 높이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1940년 보성고를 인수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전 실장은 보성고가 갖는 역사적 의미를 설명했다. “보성고는 1906년 이용익 선생이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만든 학교입니다. 특히 3·1 운동과 인연이 깊어요.
보성고 내 출판사인 보성사에서 기미독립선언문을 인쇄·배포했고, 민족대표 33인 중 손병희·최린 선생이 보성 출신이에요. 일제 총독부 간섭으로 여러 차례 재정위기를 겪었습니다. 수 차례 주인이 바뀌다가 학교 문을 닫는 위기까지 온 거에요. 할아버지께선 민족 혼이 깃든 보성고가 사라지는 것을 안타까워하셨지요. 몰래 다른 사람을 내세워 학교를 인수하게 됐습니다.”
한국의 정신을 잇고자 했던 간송은 1962년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병명은 급성신우염. 몸이 이상하다며 전철을 타고 병원을 갔지만 그 이후 일어나지 못했다.
예상치 못한 간송의 타개에 집안은 발칵 뒤집어졌다. 이때 상당수 재산을 잃었다. 정확한 재산은 간송만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화가로 활동하던 장남 전성우 보성고 이사장도 귀국했다. 당시 전 이사장은 미국 인명사전에 이름이 오를 만큼 촉망받는 작가였다.
화가로서의 명성은 포기해야 했다. 그보다 아버지 유산을 정리하는 게 급했다. 가장 값진 유산은 1938년 간송이 서울 성북동에 세운 보화각이다. 위창이 ‘빛나는 보배를 모아두는 집’이라는 의미로 지어준 이름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개인박물관이다. 현재 이름은 간송미술관이다.
보다 체계적인 연구를 위해 1966년 한국민족미술연구소를 세웠다. 국립중앙박물관 연구원 출신 미술 사학자 최완수씨가 연구실장을 맡았다. 1971년 봄부터 매년 5월과 10월 중순에 소장품 전시회를 연다. 전시회에 맞춰 ‘간송문화’라는 도록이 나온다.
단순히 전시 작품만 수록하는 게 아니라 간송의 수집품을 중심으로 미술사와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연구 논문을 담았다. 지난해 가을 나온 게 83호다. 보통 한 전시회에 100여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간혹 겹치는 경우도 있지만 간송 소장품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 수치다.
간송이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학문적인 연구 결과도 발표했다. 겸재 정선이 도화서에 주로 들어가던 중인이 아니라 양반 출신 사대부 화가였음을 밝혀냈다. 혜원 신윤복 아버지가 임금 초상 제작에서 주로 채색을 담당하는 수종화사 신한평이며 신윤복의 본명이 신가권이라는 것도 확인했다.
취재 끝 무렵 전 이사장과 통화를 할 수 있었다. 그는 “아버지가 잘난 것을 알리지도 자신을 내세우지도 말라는 얘기를 많이 하셨다”며 말을 아꼈다. “말씀은 많지 않았지만 자녀에겐 늘 다정했어요. 야단을 친 적도 없고요. 묵묵히 소신껏 큰 일을 하셨다는 점에서 존경스럽지요. 아버지를 존경하는 학자가 많다는 점도 자랑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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