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의 품격③-리세스 오블리주 - 기부 대상 찾아 줄 인프라 구축해야
부자의 품격③-리세스 오블리주 - 기부 대상 찾아 줄 인프라 구축해야
‘부자의 품격’ 두번째 좌담회가 4월 16일 서울 중구 을지로 입구 하나은행 골드클럽에서 열렸다. 이번 주제는 부자의 사회적 책임을 의미하는 리세스 오블리주(Richesse Oblige)다. 포브스코리아는 품격있는 부자의 조건으로 리세스 오블리주를 꼽았다(3·4월호 참조). 부자들이 리세스 오블리주를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평소 나눔을 연구하거나 실천하는 사람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강철희 연세대 사회복지대학원 교수, 김효진 사회복지공동모금회 국민참여추진단장, 이혜원 중부재단 이사장이다.
강 교수는 나눔 제도 연구 분야에서 손꼽히는 전문가다. 1997년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설립에 필요한 공동모금회법 틀을 만들었다. 2005년에는 고액기부 활성화를 위한 연구를 진행했다. 그 결과 국내 최초의 고액기부자모임 아너소사이어티(Honor Society)가 탄생했다. 최근에는 정부와 함께 나눔문화 확산에 필요한 나눔기본법 토대를 마련했다.
김 단장은 아너소사이어티를 총괄한다. 기획 단계부터 참여해 자산가들의 기부문화를 이끌었다. 2007년 설립 이후 4년 동안 가입회원은 102명이었다. 지난해 126명이나 확보했다. 현재 회원수는 275명. 올해 선보인 기부자조언기금(Donor Advice Fund)의 1·2호 기부자를 발굴했다.
이 이사장은 2003년 12월 설립된 중부재단의 운영자다. 사재 30억원을 출연한 독립재단이다. 남편은 SK그룹 부회장을 지낸 김항덕 중부도시가스 회장이다. 김 회장은 매년 회사 수익의 5%를 이곳에 기부한다. 올해 설립 10주년인 중부재단은 지원 사업이나 자금 운용 면에서 두루 좋은 평가를 받는다. 특히 사회복지사 지원사업은 중부재단의 자랑이다.
리세스 오블리주를 어떻게 생각하나요.
김효진 사회복지공동모금회 국민참여추진단장 리세스 오블리주는 유대교 지도자인 조너선 삭스의 저서 『차이의 존중』이 제시한 개념입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지도층의 의무를 강조했다면 리세스 오블리주는 부유층의 도덕적 의무와 사회적 책임을 말합니다. 성장만을 좇던 자본주의 체제에서 수많은 갈등이 생기고 있어요. 대표적인 게 양극화죠. 사회를 되돌아본다는 의미에서 리세스 오블리주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혜원 중부재단 이사장 리세스 오블리주에서 얘기하는 부자의 기준이 명확하지 않아요. 돈이 얼마나 있어야 부자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정신이 풍요로운 부자도 있어요. 오랫동안 써온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친숙하게 들리네요. 사회에서 재단이 필요한 이유는 뭘까요? 상당수가 다른 사람을 위해 재단을 운영한다고 하잖아요. 남편은 자본주의와 시장경제 시스템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라고 말하더군요. 저 역시 공감하고 있어요.
강철희 연세대 사회복지대학원 교수 두 분 얘기 들으니 1889년에 앤드류 카네기가 쓴 『재부의 복음』이 떠오릅니다. 그는 부자가 재산을 그대로 갖고 죽는 건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했어요. 신은 부자에게 자금을 관리할 책임만을 주었다고 믿기 때문이죠. 부자는 사회 전체에 이익을 줄 의무가 있고 돈은 사회를 개선하는 데 써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리세스 오블리주의 의미와 비슷하지요.
부자의 나눔이 필요한 이유는.
김효진 사람은 이기적이기 때문에 이타적일 수 있어요. 타이타닉호가 빙하에 부딪혀 가라앉는 순간 사람들은 여자와 아이들을 먼저 요트에 태워 보냅니다. 혼돈 속에서도 가족을 살리기 위한 이타적 선택입니다. 역시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가 지속되려면 개인을 포함한 공동체가 이익을 낼 수 있는 공동선(共同善)이 필요합니다. 사회 발전을 가로막는 갈등을 해소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공동선 중 하나가 나눔이고요.
강철희 김 단장이 얘기한 내용이 경제학에서 말하는 이타성입니다. 경제학은 결과로 현상을 파악하죠. 현재 자본주의 시스템을 안전하게 운영하려면 사회적 문제부터 해결해야 합니다. 부자의 역할이에요.
이 이사장께서 나눔 활동에 나선 계기는.
이혜원 기독교 신자라는 게 가장 큰 이유에요. 그동안 좋은 환경에서 편안하게 살았다면 이제 사회에 되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재단 설립 전까지는 마음이 불편했어요. 자원봉사 활동을 하다 아예 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했습니다. 석사 과정을 끝낸 후 재단을 설립하게 됐습니다. 청지기의 삶을 시작한 거죠.
강철희 역사적으로 나눔의 뿌리는 사회적 규범과 종교에서 찾아볼 수 있어요. 그리스 도시국가에서 사회적 지도층은 기부가 의무였습니다. 기부가 사회적 규범으로 존재했으니까요. 자본주의로 넘어오면서 부유층에게 영향을 준 것은 기독교에요.
대표적인 예로 존 록펠러와 앤드류 카네기가 있어요. 록펠러의 자문 고문을 맡은 분이 침례교 목사였습니다. 록펠러가 세계적인 자선 사업가로 존경받을 수 있었던 데도 목사의 영향이 컸지요. 청지기를 처음 얘기한 사람은 카네기에요. 기독교에서는 재물을 소유하는 게 아니라 관리하는 청지기의 삶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국내 자산가들의 기부는 종교적인 영향이 더 큽니다. 기부가 사회적 규범으로 정착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해요.
김효진 실제 기부자들을 만나면 “왜 기부하는지” 묻습니다. 상당수가 숱한 역경을 딛고 성공했지만 삶의 공허함을 느낀다는 거에요. 기부를 통해 인생의 의미를 찾았다는 분이 많으세요.
자산가들의 기부를 늘릴 방법은 뭔가요.
강철희 부자들의 기부 규모는 일반인과는 차이가 있어요. 그들이 나눔을 생각할 때 쓰는 돈은 수천만원에서 억 단위가 넘어요. 오랫동안 고액 기부자를 연구해 보니 그들은 돈을 쓸 때 영향력이 있기를 원해요. 문제는 부자들이 선뜻 큰 돈을 내놓을 곳이 없다는 겁니다. 기부가 활성화되려면 인프라부터 제대로 갖춰야 합니다. 부자들은 특별한 기부프로그램을 원해요. 이 프로그램을 전문적으로 이끌 기부 전문가, 체계적인 시스템, 운영 재단의 투명성 등이 보장돼야 합니다.
김효진 강 교수님의 고액기부의 활성화 방안 연구를 토대로 만든 게 아너소사이어티입니다. 1억원 이상 고액 기부자들의 모임이죠. 설립 전에는 명칭을 두고 고민이 많았어요. 사랑방 기부, 최부자 기금 등 한국적인 이름을 하려다 아너소사이어티로 정했습니다.
부자들이 비공개 모임을 선호한다는 점을 고려했는 데 반응이 좋습니다. 회원간 교류의 장을 마련했어요. 1년에 3번 전국 총회가 열리고 지역마다 클럽 회의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법정 모금기관으로 보건복지부·감사원과 외부 회계 감사 등의 감시로 투명하게 자금을 관리하고 있어요.
이혜원 물론 아너소사이어티에 참여해 기부할 수 있어요. 그럼에도 재단을 설립한 이유는 나만의 가치를 만들어 실현하기 위해서죠. 사업 초기에는 경험이 부족해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다양한 시도 끝에 사회복지사 지원사업에 주력했어요. 어려운 이웃을 위해 헌신하는 사회복지사들이 열악한 근무 환경으로 과도한 업무에 시달리고 있어요. 그들을 챙기는 일이 사회복지 분야가 발전하는 데 밑거름이 될 겁니다. 사회복지사가 재충전의 시간을 갖도록 돕는 안식월 제도와 사회복지사의 대학원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어요.
강철희 이 이사장처럼 나눔의 가치가 실제 기부로 연결되려면 믿고 의지할 파트너가 필요합니다. 록펠러를 기부로 이끈 침례교 목사처럼요. 선진국에서는 그 역할을 PB(private Banker)가 하고 있습니다. 요즘엔 금융사마다 변호사·세무사와 부동산 전문가 등 각 분야 전문가가 PB 업무를 지원해요.
앞으로 PB들은 부자들이 나눔에 관심을 갖고 효율적인 자산 관리로 기부 자금을 마련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김효진 단장과 저는 부자들이 원하는 기부의 장을 마련해줘야 하고요. 이 플랫폼이 완성된다면 부자들의 기부는 활성화 할 것이라고 봅니다.
이혜원 재단을 운영하려면 투철한 책임과 의무가 필요해요. 아너소사이어티는 기부자에게 큰 부담이 없어요. 자금 운영을 비롯해 지원 서비스를 모금 기관에서 맡아서 해주기 때문이죠. 재정 상태가 어려워지면 기부 금액도 줄일 수 있잖아요. 반면 재단은 한번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어요. 사업 규모도 갈수록 커지기 때문에 꾸준히 사업비를 늘려야 해요. 출연금 이자로는 턱없이 부족해요. 다행인 점은 남편이 매년 회사 이익금의 5%를 재단에 기부하고 있습니다. 굳은 결심이 없다면 힘들 수 있어요.
김효진 200호 아너 소사이어더 회원인 영화배우 수애 씨는 어린 시절을 보낸 서울 봉천동에 써달라며 돈을 기부했어요. 그때부터 사업을 기획합니다. 봉천동 일대를 다니며 아이들을 도울 수 있는 일을 찾는 거에요. 부모가 일터에 나가고 아이들이 늦게까지 집을 지키는 가정이 많더라구요. 저녁에 아이들을 돌봐주고 숙제를 돕는 공부방 프로그램을 짜서 수애 씨에게 보여드렸더니 좋아하더군요. 또 분기별로 기부금이 어떻게 사용되는지 알려드려요.
강철희 자산가들의 욕구에 따라 재단 설립이나 고액기부자 모임을 선택하면 됩니다. 재단은 기부자가 100% 참여해 자신만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다는 게 장점입니다. 재단 설립에는 많은 돈이 필요합니다. 출연금 이자로 재단을 운영하면서 사업하기 때문이죠. 반면 고액 고액기부자 모임은 재단보다 비용 부담이 적어요. 자금 관리부터 사업 운영까지 위임할 수 있고요.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끼리 인맥을 쌓을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해 기부자의 역할이 크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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