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의 품격③ 리세스 오블리주 - 재능을 나누는 ‘아름다운 나비’
부자의 품격③ 리세스 오블리주 - 재능을 나누는 ‘아름다운 나비’
유명한 경영 컨설턴트에서 프로보노 전문가로 변신한 고영(37) SCG 대표. 프로보노(pro bono)란 ‘공익을 위하여’라는 라틴어의 줄임말이다. 전문가의 재능 기부를 의미한다. 대학을 졸업한 그는 국제 경영 컨설팅 기업인 헤이 그룹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경영 컨설턴트로서 두각을 나타낸 고 대표는 2007년 딜로이트 안진회계 법인으로 스카우트됐다. 30대 중반에 이사가 됐고 억대 연봉을 받았다. 성공 가도를 달렸던 그가 돌연 사표를 던졌다.
평소 재능 기부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2006년부터 프로보노 활동을 시작했다. 평소 인맥을 활용해 회계사·변호사·세무사·변리사 등을 모아 사회적 기업을 무료컨설팅하는 모임을 만들었다. 이 모임이 2007년 설립된 SCG(소셜컨설팅그룹)이다. 사회적 기업 딜라이트, 청소년아이프랜드 등 성공 사례를 포함해 한 달에 35개가 넘는 사회적 기업을 컨설팅한다. SCG가 한달동안 행하는 재능 기부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면 13억원에 이른다. 체력이 부쳐 힘들 때도 그는 “고맙다”는 말 한마디에 웃음이 절로 난다. 봉사 활동으로 시작한 일이 규모가 커지면서 2011년 다니던 회사를 그만뒀다.
억대 연봉을 포기하면서 고 대표가 재능기부에 나선 이유는 뭘까. 그는 어려웠던 시절 받았던 따뜻한 손길을 잊을 수 없었다. 1997년 외환위기 때 아버지 사업이 부도났다. 당장 하숙비를 낼 돈이 없던 그는 서둘러 입대했다. 제대 후에도 집안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등록금은 커녕 머물 곳도 없었다. 다행히 교회공동체에서 운영하는 합숙소를 소개 받았다. 불평할 겨를이 없었다. 끼니만 때우고 여러 곳을 돌며 과외를 했다. 대학을 졸업하려면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 힘든 시기에 평생의 멘토를 만났다. 고려대 앞에서 ‘영철버거’를 운영했던 이영철 대표다. 당시 고려대 총학생회장에 출마한 그를 이 대표가 눈여겨봤다. 선거에서 떨어지자 이 대표는 고 대표를 가게로 불러 “좋은 학교에 다니고 젊기 때문에 앞으로 더 좋은 기회가 많다”며 응원했다. 말 뿐이 아니었다. 고 대표가 꾸준히 공부할 수 있도록 등록금까지 내줬다.
고 대표는 처음엔 대가 없는 이 대표의 나눔에 당황했다고 한다. “의아해 하자 그저 학생들에게 받은 사랑에 대한 보답이라고 하더군요. 그때 깨달았어요. 자본(돈)은 의미 있게 쓸수록 가치가 생깁니다. 그 방법 중 하나가 기부였습니다.”
고 대표는 첫 월급을 받자마자 기부를 실천했다. 과거 자신처럼 가정 형편이 어려운 후배에게 월급을 전부 줬다. “학교에서 친구들과 해외탐방을 가는데 돈이 없어 홀로 빠지게 될 처지에 놓인 후배였죠. 소외되면 안된다는 생각에 작은 도움을 주고 싶었습니다. 그동안 제가 받았던 도움을 조금이나마 갚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직장에 다닐 때에도 재능기부를 이어갔다. “대기업을 컨설팅하면서 정작 도움이 필요한 곳이 어딜까 생각했습니다. 좋은 일에 앞장서는 사회적 기업들은 대부분 경영이나 재정 상태가 좋지 않았습니다.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했죠.”
2006년 아름다운가게와 맺은 인연이 고 대표의 첫 무료 컨설팅이었다. 하지만 혼자는 무리였다.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가 필요했다. 기업 운영과 자금 관리에 도움을 줄 수 있는 회계사·세무사·변리사·변호사를 모았다. 5명으로 시작한 SCG그룹의 전문가는 현재 550여 명에 이른다.
보청기 가격을 혁신적으로 낮춘 사회적 기업 딜라이트는 SCG의 성공적인 컨설팅 사례다. 고 대표가 컨설팅할 당시 딜라이트는 생산체계·고객관리·장기적 비전의 체계화가 급선무였다. 투자 유치도 중요한 문제였다. 그는 딜라이트 구성원들과 투자유치 제안서를 만들어 20억원을 투자 받는데 성공했다.
국내에 사회적 기업이 생긴 이후 가장 많은 투자금이다. 그림으로 자폐아 마음을 치유하는 사회적 기업 청소년아이프랜드는 컨설팅을 통해 창의력 개발 모델을 만들었다. SCG의 도움을 받아 성과를 낸 사회적 기업은 고마움을 전하며 파트너십을 맺는다.
“글 잘 읽는 재능이 있으면 앞 못 보는 사람에게 책을 읽어줄 수 있습니다. 5~6살 꼬마는 동화를 읽고 녹음해 중환자실 환자들에게 들려줄 수 있고요. 재능기부는 어렵지 않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할 수 있어요. 편하게 해왔던 취미도 모두 재능기부가 될 수 있죠.”
고 대표가 생각하는 재능기부는 쉽고 간단하다. 그는 대학시절에 시작해 변화를 이뤄냈던 ‘쓰레기 줍기 캠페인’을 들려줬다. 고려대 다닐 때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고연전 경기가 끝나고 학생들이 버리고 간 어마어마한 쓰레기를 봤다. 쓰레기를 함께 주울 사람을 모으려했지만 참여율이 낮았다.
“철학 수업 때 세상을 바꾸려면 자신부터 바꾸라는 맹자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그날 이후 강의실 맨 앞에 앉아 적극 수업에 참여했어요. 어느 날 급우들에게 쓰레기를 줍자고 제안했죠. 처음에는 3명이었지만 소문이 나면서 연세대·고려대 학생 500명이 참여하기 시작했어요. 고연전이 끝나면 학생들 스스로 쓰레기 줍는 전통이 생겼습니다.”
고 대표는 “재능 기부가 자살이나 우울증을 해결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도움 받는 사람들이 “감사하다”며 고마움을 표할 때 자신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재능기부가 기부자의 역량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된다고 했다. 사회적 기업의 성장에 필요한 자원이 뭔지 파악하는 능력을 키울수 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가치있는 재능이 사회에 나눠지지 않아 아쉽단다. 그는 재능기부의 가치를 알고 모르고의 차이를 애벌레와 나비에 비유했다. “애벌레로 살다 죽으면 평생 잎사귀 밖에 먹지 못합니다. 나비가 되면 더 멀리 보고 날아갈 수 있죠.” 현재 사회 곳곳을 향한 고 대표의 작은 날개짓이 재능기부의 바람을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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