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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agement - 생산과잉 시대엔 브랜드 작명이 승부처

Management - 생산과잉 시대엔 브랜드 작명이 승부처

『빨강머리 앤』의 주인공 소녀는 네이밍 전문가 … 대상 부각시키는 작명의 귀재



“그 아름다운 곳을 가로수 길이라고 불러선 안돼요. 그런 이름에는 아무 뜻이 없으니까요. ‘기쁨 가득 새하얀 길’ 어때요? 새롭고 멋진 이름 아닌가요? 저는요, 어떤 장소나 사람의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항상 새로운 이름을 상상해서 그들을 그 이름으로 생각했어요.”

참 수다스런, 상상력이 풍부한 소녀가 있다. 얼굴은 주근깨 투성이고, 빨간 머리를 땋아 내린 빼빼 마른 여자 아이다. 그 아이의 이름은 앤이다. 『빨강머리 앤』은 캐나다 여류 소설가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작품이다. 1908년 출간됐으니 앤의 나이는 벌써 100살이 넘었다. 배경은 캐나다의 프린스 에드워드 섬이다. 작가 몽고메리의 고향이다. 그는 수 차례 출판사에 원고를 보냈다 퇴짜를 맞았다.



네이밍은 사물과 대화하는 상상놀이빨강머리 앤은 국내에서 애니메이션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더 많다. 1979년 일본에서 제작됐다. 1980년대 중반 국내 방송사에서 방영했다. 감독은 다카하타 아사오, 연출은 미야자키 하야오다.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려고 직접 프린스 에드워드섬까지 갔다. 섬의 아름다움이 화면에 매혹적으로 담긴 건 그런 이유가 있다.

앤의 입양은 실수였다. 에이번리의 초록지붕 집에 사는 독신 남매 매튜와 마릴라는 남자 고아를 찾았다. 자신들의 일을 도와줄 인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실수로 앤이 입양된다. 앤을 되돌려 보내려 한 매튜 남매. 하지만 앤의 어두운 과거를 듣고는 마음을 고쳐 먹는다. 무엇보다 앤의 발랄함과 순수함·엉뚱함은 적막한 남매에게 활기를 준다. 앤은 인근 비탈길 과수원집 딸인 다이애나와 ‘절친’이 된다. ‘고아’라는 딱지가 붙어 있지만 앤은 진실함과 솔직함으로 편견에 빠진 어른을 하나씩 설득해 나간다.

앤은 빨간 머리에 빼빼 말랐다는 콤플렉스가 있다.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에는 가차없다. 학교 친구인 길버트 블라이드가 앤에게 ‘홍당무’라고 한번 놀렸다가 5년이 넘도록 대화하지 않는, 고집 불통이다.

에이번리의 아름다운 숲과 시내·하늘은 앤의 상상력에 날개를 달아준다. 요즘 말로 하면 앤은 감성지수(EQ)가 매우 높다. 길버트와의 경쟁까지 더해지자 학교 성적이 쑥쑥 오른다. 앤은 퀸스학교를 길버트와 함께 공동 수석으로 입학한다. 졸업 때는 레드먼드 대학 4년 장학금을 받는다. 거기서 국문학을 공부할 꿈을 키운다. 하지만 매튜 아저씨가 돌연 사망한다. 앤은 시력을 잃어가는 마릴라 아줌마를 위해 초록지붕 집에 남기로 한다.

빨강머리 앤은 속편이 많다. 『앤의 청춘』 『앤의 행복』 『앤의 꿈의 집』 등이다. 앤이 결혼하고, 아이를 나아 그 아이가 장성하기까지 이야기는 이어진다. 캐나다가 사랑하는 대표 캐릭터라 할 만하다.

앤의 장기는 ‘이름 붙이기’다. 사물과 대화하는 상상놀이를 하는데 ‘이름’이 필요했다. 김춘수의 시 ‘꽃’처럼 이름을 붙여야 사물은 비로소 생명력을 갖는다. 수십 년 전 한 농부가 사과나무를 심어 아치를 이룬 400~500m터의 길은 ‘기쁨 가득 새하얀 길’이라 이름 붙였다. 새하얀 사과꽃으로 덮인 때문이다.

다이애나의 아버지, 배리씨네 연못은 ‘반짝반짝 호수’다. 앤의 농장과 다이애나네 농장 사이 하얀 자작나무가 에워싼 동그란 땅은 ‘한가로운 황무지’다. 앤은 이 이름을 짓는데 거의 하루 밤을 꼬박 세웠고, 막 잠이 들려고 할 때 영감처럼 떠올렸다.

배리시네 풀바위의 작고 동그란 연못은 ‘버드나무 연못’이다. 그 이름은 다이애나가 빌려준 책에서 힌트를 얻었다. 버드나무 연못을 지나 벨씨네 큰 숲의 그늘진 곳에 움푹 팬, 제비꽃이 엄청나게 피는 곳은 ‘제비꽃 골짜기’다. ‘유령의 숲’도 있다. 시내 건너 가문비나무 숲이다. 다이애니랑 앤은 숲에서 유령이 나온다고 그냥 상상했다. 가문비나무 숲을 고른 건 그곳이 음침하기 때문이다.

사물에 이름을 붙이는 행위를 마케팅에서는 ‘네이밍’이라 부른다. 새로운 상품의 브랜드명을 정하거나 기업 혹은 그룹의 명칭을 결정하는 것도 네이밍이다. 이를 등록하면 ‘상표권’이 생긴다. 과거 네이밍은 단순했다. 맥도널드·포드처럼 창업자의 이름을 붙이는 게 흔했다. 생산의 시대, 소비자는 ‘메이커’를 보고 물건을 샀다. 하지만 생산과잉 시대가 되면서 네이밍이 중요해졌다. 소비자의 눈길을 끌기 위해서는 친근감 있는 기업명과 브랜드명이 중요해졌다.

브랜드 네이밍이 제품의 운명을 바꾼 사례는 많다. 대표적인 성공 사례가 삼성전자의 폴더형 휴대폰인 ‘애니콜’이다. 언제 어디서던 통화가 잘 터진다는 뜻의 ‘애니콜’은 다른 브랜드보다 제품을 확실히 각인시켰다. 애니콜은 국내 시장은 물론 세계 시장에서도 최고 브랜드로 통했다.

‘휘센’은 LG전자 에어컨을 세계적인 브랜드로 발돋움시켰다. LG전자 에어컨의 옛 브랜드는 ‘바이오’. 하지만 2000년 새 에어컨을 내면서 ‘휘센’으로 바꿨다. 회오리바람을 뜻하는 훨윈드(Whirlwind)와 보내는 사람(Sender)의 합성어다. 혹은 ‘휘몰아치는 센바람’의 약자이기도 하다. 휘센 출시와 함께 시장점유율이 껑충 뛰었고 세계 시장에도 먹혔다.



애니콜·휘센·키미테…네이밍 성공사례의약품계에도 명칭 전쟁은 예외가 아니다. 붙이는 멀미약의 대명사 ‘키미테’가 대표적이다. 이 상품의 원래 이름은 ‘스코로보’였다. 명문제약은 판매가 저조하자 이름을 바꿨다. 키미테는 발음도 재미있었거니와 ‘귀 밑에 붙이는 멀미약’이라는 이미지를 소비자에게 확실히 심어줬다. 대웅제약의 간기능 개선제 ‘우루사’도 성공한 네이밍이다. 약에 들어있는 곰 쓸개 성분과 회사의 상징인 곰을 잘 연관시켜 상품명과 회사명의 인지도를 모두 높였다.

네이밍은 얼마나 영향을 미칠까. 재밌는 실험이 있다. 미국 코넬대 브라이언 완싱크 박사팀은 4세 아이 그룹에 하루는 그냥 ‘당근’이라면서 당근을 줬다. 다른 날에는 ‘X-레이 눈빛 당근’이라고 이름을 붙여서 줬다. 그랬더니 두 번째 당근을 아이들이 두 배 더 먹었다고 밝혔다. 과거 네이밍은 기업의 오너가 하사하듯 붙이는 경우도 많았다. 혹은 팀의 회의에서 우연히 채택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네이밍은 전문가 그룹에게 맡긴다. 그만큼 중요해졌다는 얘기다.

앤은 자신의 이름도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앤은 마릴라 아줌마에게 말한다. “정확하게 말해서 제 이름은 아니지만 코델리아라고 불러주셨으면 좋겠어요. 정말 흠잡을 데 없이 우아한 이름이니까요.” 마릴라 아주머니가 말을 듣지 않자 다른 제안을 한다. “저를 앤으로 부르신다면 끝에 ‘e’가 있는 앤으로 불러주세요. 앤(A-N-N)은 끔찍하지만 앤(A-NN-E)는 훨씬 나아 보여요.”

심지어 자신의 분신에게도 이름을 붙인다. 거울에 비친 자신은 ‘캐티 모리스’다. 자신의 목소리를 반사시키는 메아리는 ‘비올레타’다. 앤은 이름이 사람의 이미지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간 머리 소녀는 이름을 통해 자신의 이미지를 바꾸고 싶어했다.

앤은 대상을 유심히 관찰해 그 특징을 정확히 찾아내고, 대상이 최대한 부각될 수 있는 단어를 찾아내는 천부적인 자질이 있었다. 그 배경에는 풍부한 상상력이 밑바탕이 됐다. 앤은 마릴라 아줌마에게 자랑하듯 말한다. “다이애나는 저처럼 어울리는 이름을 잘 짓는 사람을 본 적이 없대요. 뭔가를 잘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죠?” 앤은 마릴라 아줌마와 함께 있기 위해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교사가 된다. 하지만 오늘날 태어났다면 네이밍 전문가가 됐을 것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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