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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통기한=신선도’ 공식 아니다

‘유통기한=신선도’ 공식 아니다

과도한 유통기한 규제로 한 해 6200억원치 식품 폐기 … 일본은 유통기한 연장 움직임
서울의 한 대형마트 내 우유 진열대 앞. 우유 유통기한은 일반적으로 2주 내외이지만 제대로 냉장만 하면 실제로는 한 달 안까지 먹을 수 있다.



서울 영등포구의 한 대형마트. 주부 김선아(42)씨는 진열대 가장 안쪽에 있는 2.3L 들이 우유를 꺼내느라 애를 먹었다. 맨 앞에 진열된 우유의 유통기한은 7월 27일. 김씨가 꺼내든 건 7월 29일로 별반 차이가 없었다. 그는 애써 찾은 7월 29일자 우유를 마치 보물인 양 쇼핑 카트에 담았다. 김씨는 우유만 이렇게 사는 건 아니다.

당일 요리할 찬거리로 산 찌개용 돼지고기·두부·달걀 등 모든 제품의 유통기한을 꼼꼼히 확인한 뒤 유통기한이 가장 먼 제품만 고른다. 심지어 유통기간이 몇 개월인 가공식품도 예외는 아니다. 김씨는 “유통기한이 더 남은 제품이 아무래도 더 신선하지 않을까 생각해 하루라도 날짜가 더 남은 제품을 산다”며 “요즘 같은 장마철에는 특히 (유통기한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여름철을 맞아 각종 먹거리 안전사고가 빈번히 발생하면서 제품 성분이나 각종 표기사항을 꼼꼼히 보는 소비자가 늘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쉽고, 빠르게 확인할 수 있는 항목이 유통기한이다. 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가 성인 남녀 1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25.4%가 “식품에 적힌 표시사항 중 유통기한을 가장 중요하게 본다”고 답했다. 이는 가격을 중시하는 사람(15.8%)보다 높은 수치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유통기한=신선도’란 공식이 성립하진 않는다고 지적한다. 김우선 한국보건산업진흥원 책임연구원은 “유통기한은 소비자에게 판매가 가능한 최대 기간을 뜻해 실제로 품질이 유지되는 기간은 그보다 긴 것이 보통”이라며 “우유의 경우 현재 기술력으로 제조 후 3~4주까지 먹을 수 있지만 유통기한은 13일 내외로 표기한다”고 말했다.

1995년 이전까지 국내 제조식품이나 수입식품의 유통기한 설정은 국가에서 일률적으로 정해 왔다. 제조업체는 정부가 설정한 유통기간 내에서 제품의 특성에 따라 유통기한을 자율적으로 정할 수 있다. 그러나 제조업체별 사용 원료와 품질, 제조위생수준, 포장 방법·재질에 차이가 있어 유통기한이 달라질 수 있는 점을 고려하지 않았다.

이에 식품의약품안전처(당시 식품의약품안전청)에서는 2000년 4월 이를 완전 자율화했다. 그러나 유통기한제도 또한 식품의 특성에 관계 없이 대부분의 품목에 일괄적으로 적용돼 있었다. 유통기한이 지난 식품의 경우에는 부패·변질 여부에 상관 없이 모두 폐기처분 하도록 돼있어 자원 낭비가 심각하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유명무실한 소비기한한국식품기술사협회에 따르면 식품 폐기물 발생 원인으로 기한내 판매 부진(32%)에 이어 유통업체의 유통기한 임박에 따른 조기 반출 요구(21%)가 차지했다. 유통기한 후 반품율 비중은 65%이며 유통기한이 되기 전 미리 반품이 되는 경우도 35%에 달했다.

박인구 한국식품산업협회장은 “유통기한 경과 등의 이유로 한해 평균 2% 가량의 식품이 반품된다”며 “이를 연간 식품 전체 출하액(2010년 기준 34조원)으로 환산하면 6200억원에 달한다”고 말했다. 이 같은 자원 낭비를 막기 위한 해결책이 2007년 도입한 품질유지 기한 제도다.

품질유지기한은 어떤 조건으로 보관해도 품질 변화가 없는 최종 날짜를 뜻한다. 따라서 보관 상태에 따라 날짜 이후에도 얼마간 식품의 품질이 떨어지지 않고 섭취할 수 있다. 잼·시럽·음료·통조림·레토르트식품처럼 소비자가 일반적으로 장기간 보관하면서 섭취하는 제품이 해당한다.

이 제도에 따르면 국내 유통식품의 15.7%에 품질유지기한 표시가 가능해져 정부는 당초 반품폐기제품률 5% 정도만 줄여도 약 2200억원의 예산절감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이 제도가 도입된 지 5년이 넘도록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품질유지기한이 소비자에게는 유통기한과 동일하게 인식돼 버린 탓이다.

정윤희 한국소비자원 시험검사국장은 “우유·냉동만두·치즈 같은 식품 10종을 대상으로 유통기한 만료 후의 품질변화를 확인한 결과, 우유는 미개봉 냉장 보관 시 유통기한 후 50일, 냉동만두는 유통기한이 지나고 25일, 슬라이스 치즈는 70일까지도 괜찮았다”며 “온도 관리를 제대로 한 식품이라면 유통기한보다는 맛·냄새·색 등으로 판단해 기한이 지나도 충분히 섭취가 가능하다”고 밝혔다.

이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 관계자는 “유통기한이 경과하지 않았는데도 식품이 변질되거나 이상이 생겼다는 접수가 많은데 사실상 유통기한 연장이나 다름 없는 소비기한 제도가 실효성을 발휘하긴 어렵다”고 반박했다. 이 단체에 따르면 지난해 식품 유통기한 관련 상담 775건을 분석한 결과, 이 중 유통기한이 경과하지 않았는도 식품이 변질되거나 이상이 생긴 경우가 345건이나 접수됐다.

30대 주부 박서형씨는 “여름철에는 냉장고를 여닫는 일이 많아 적정 온도로 보관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며 “소비기한만 믿고 날짜가 지난 제품을 그대로 뒀다가 맛에 둔감한 아이가 먹고 탈이라도 날까 겁난다”고 말했다. 박씨는 “소비기한이든 유통기한이든 날짜가 얼마 남지 않은 제품엔 선뜻 손이 가지 않는 게 사실”이라고 덧붙였다.

육류 제품에 대한 기준은 더욱 까다롭다. 통상적으로 냉장육의 유통기한은 쇠고기 90일, 돼지고기 50일이다. 국내산은 유통 구조상 1개월 이내에 다 소비되기 때문에 별반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수입육이 국내에서 유통되려면 항공운송 기간을 제외하고 냉장 또는 냉동 상태로 적어도 40~50일 이상 소요된다.

미국의 경우 동부에서 서부로의 열차운송기간(1주일)과 서부항구로부터 한국에 도착(2주일)해 통관검역과정을 거쳐(1주일) 소비자 손에 들어가기까지(1주일) 최단 기간으로 잡았을 때 걸리는 평균 시간이다. 여기서 또다시 도매유통기간을 빼면 실제 판매기간은 2주 남짓에 불과하다. 결국 판로를 찾지 못한 수입육은 냉동시켜 유통기한을 늘려 받게 마련이다.





육류 유통기한 규제 더욱 엄격일부에서는 수입육이 숙성이 잘돼 맛있고 연하다는 평가도 있다. 한 수입업체 관계자는 “쇠고기는 원래 섭씨 0℃에서 1~2주간 숙성을 해야 풍미가 좋아지고 연도가 증가하므로 1개월 정도의 숙성 과정을 거친 수입육이 오히려 맛이 좋을 수 있다”며 “사실 한 두달이면 풍미가 가장 좋을 때이지만 국내 유통기한이 너무 짧은 탓에 불필요한 냉동을 강행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냉장육에서 냉동육이 되면 유통기한은 최대 2년으로 늘어나지만 상품 가치는 절반 수준으로 떨어진다. 경기 광주의 한 수입업체 대표는 “유통 기한이 지나면 t당 약 30만원의 소각비용이 발생한다”며 “냉동창고 보관 비용도 만만치 않아 유통기한 전에 덤핑으로라도 파는 게 낫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수입냉장육 유통기한은 90일까지이지만 좀 더 늘려도 품질에 문제가 없다는 게 업계 입장”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우리나라의 유통기한 규제는 다른 어떤 나라보다 엄격한 편이다. 냉장 유통 중인 식육을 냉동으로 전환할 때에도 반드시 시·군·구에 신고해야 한다. 신고하지 않고 냉동으로 전환해 보관하면 판매하지 않았더라도 축산물위생관리법에 저촉된다. 실제 6월에 한 지역축협에서 유통기한이 경과한 냉장정육 24t 가량을 냉동으로 보관하다가 적발돼 현재 검찰에 송치돼 조사 중이다. 해당제품이 유통되지는 않았지만 냉장육을 냉동육으로 전환할 때는 지자체에 신고해야 하는 조항을 어긴 것이다.

송성완 한국식품산업협회 식품안전부장은 “식품 제조·가공 업체는 식품위생법에 따라 자체 실험을 통해 각 제품의 유통기한을 정하고, 이를 해당 관청에 신고해 승인을 받는다”며 “업체가 낸 보고서·사유서는 지방의 식약청이 검토하는데 이 과정이 까다로워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지 않고서는 승인을 받기 힘들다”고 말했다.



일본도 ‘식품 로스’ 연 800만t외국은 각 제조사가 자율로 정한다. 미국에서는 우리나라처럼 판매할 수 있는 기한인 유통기한 대신 품질유지기한·소비기한 같은 다양한 표기를 자율적으로 선택해 쓴다.

국내 식품과 원재료·포장재질 등에 차이가 있어 정확히 비교하긴 어렵지만 외국 식품의 유통기한이 우리보다 대체로 길다.

유통기한 위반에 대해서도 우리처럼 정부가 적극 개입하는 경우가 드물다. 국내에선 제조사가 유통기한을 넘겨 판매하면 최대 3개월의 영업정지 혹은 30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물도록 돼 있다.

이에 비해 외국은 처벌 자체가 없거나 영·유아 대상 식품 등 민감한 제품에 한해서만 행정 처분을 내린다. 엄격한 유통기한 설정은 안전한 식품 관리가 가능한 긍정적인 측면이 있지만 식품을 기부하는 문화에는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서울의 한 복지단체에서 일하는 심성훈(43)씨는 “복지단체 자체 조사에 따르면 식품업체 163곳 중 40% 이상이 ‘유통기한이 지났을까봐 식품 기탁이 꺼려진다’고 답했다”며 “유통기한을 좀 더 유연하게 표기한다면 기부 받을 수 있는 식품이 늘 것 같다”라고 말했다.

일본은 낭비를 낳는 과도한 유통기한 규제에 팔을 걷어 부쳤다. 용기·포장재질 개발 등을 통해 유통기한을 연장하려는 움직임이 확산된 것이다. 일본 농림수산성에 따르면 아직 먹을 수 있는 식품의 폐기를 지칭하는 ‘식품 로스(loss)’가 1년에 500만~800만t에 달한다.

이에 일본 하우스식품은 최근 소스의 용기를 태양광이 통과하기 어려운 소재로 개량해 기한을 기존보다 3개월 긴 1년으로 연장했다. S&B식품도 포장재를 개선해 팩 밥의 유통기한을 8개월까지 늘렸다. 일정기간 경과 후 품질을 재시험해 그 결과에 따라 기한을 연장하는 기업도 있다. 기린음료는 주력 차 음료 상품인 ‘오후의 홍차’ 종이 팩 등 4종류를 기존의 180일에서 270일로, 카고메는 캔 채소 음료의 기한을 3년으로 늘렸다.

이와 더불어 식품의 소매점 납품관행도 개선할 계획이다. 현재는 유통기한이 3분의 2 이상 남아 있어야 소매점 납품이 가능하고 3분의 1이 지나면 업체에 반품하는 ‘3분의 1 규칙’이 적용된다. 그러나 이 규칙을 전면 재검토해 유통기한이 임박한 시기까지 판매가 가능하도록 할 방침이다.

KOTRA 도쿄무역관 관계자는 “일본의 엄격한 유통기한 제도는 국내 식품 수출기업에게는 큰 제약이었다”면서 “일본 식품업계가 유효기간을 연장하고, 납품관행을 개선하면 우리 업계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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