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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니스에 영원한 적은 없다

비즈니스에 영원한 적은 없다

감정보다 실익 우선 … 삼성-SK하이닉스, 신세계-롯데 손 맞잡아



국내 기업의 라이벌 구도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글로벌 불확실성이 커지고 시장경쟁이 가열되면서 기업들이 실익 위주의 관계로 재편되고 있다. 시장확대 차원에서 지분을 투자하거나 분쟁을 접고 상생을 도모하는 등 협력형태도 갈수록 다양해진다.

지난 7월 3일 두 쌍의 기업이 적과의 동침을 시작했다. 정보기술(IT) 업계의 삼성전자-SK하이닉스와 유통업계의 신세계-롯데다. 메모리 반도체 세계 1, 2위 업체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이날 반도체 특허를 공유하는 크로스 라이선스 계약을 했다. 양사의 반도체 특허 전체를 공유하기로 한 통큰 거래였다. 지난 30년간 ‘치킨게임’을 벌여가며 경쟁하던 두 업체가 손을 맞잡은 것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협력을 두고 업계 관계자는 “더 큰 적과 맞서기 위한 합종책”이라고 설명했다. 반도체 메모리 시장은 치킨게임의 연속이었다. 시장점유율을 끌어올리기 위해 가격을 낮춰 경쟁사를 퇴출시켰다. 이로 인해 1995년 450억 달러 규모였던 시장은 2011년 390억 달러로 오히려 줄었다.

하지만 이제 메모리 업계가 힘을 합치게 되면 구매자는 더 많은 값을 치를 수밖에 없다. 반도체 시장의 가장 큰 구매자는 삼성전자고, 2위는 애플이다. 양사는 다른 해외 경쟁사와 특허괴물로부터 숱한 소송에 시달려왔다. 이번 계약으로 이들과의 다툼 소지도 줄어들었을 뿐아니라 두 회사 간 불필요한 분쟁 가능성도 사라졌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다른 라이벌과도 협력 경험이 있다. SK하이닉스의 상대는 13년 앙숙인 미국의 램버스다. 양사의 관계는 SK하이닉스의 전신인 현대전자가 2000년 8월 미국 캘리포니아 지방법원에 램버스를 상대로 특허무효 소송을 제기하면서 시작됐다.

이후 13년에 걸쳐 법적 공방을 벌였다. 그랬던 두 회사가 6월 12일 특허사용 계약을 하고 진행 중인 모든 소송을 취하하기로 했다. SK하이닉스가 향후 5년간 로열티(특허사용료)로 총 2억4000만달러를 지불하고 램버스의 모든 반도체 관련 특허 사용권한을 갖는 조건이다. 적도 동지도 없는, 특허전쟁의 전형적 결말을 보여줬다는 게 업계 시각이다.

삼성전자는 지난 6월 휴대폰 경쟁사인 팬택에 530억원의 지분 투자를 한 데 이어 지난달에는 양사의 판매 대리점을 공유하기로 했다. 삼성전자는 팬택을 지원한데 대해 “국내 IT 산업의 상생을 위한 대승적 결정”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팬택이 살아남는 것이 삼성전자 입장에서도 부품 고객사의 생존, 독과점 논란 회피, 중국 업체 견제 등 전략적으로도 이익이 된다고 업계는 보고 있다. 삼성전자가 지난 6월 오랜 경쟁업체 샤프와 손잡은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다.

IT 업계에서 이뤄지는 적과의 동침은 특히 ‘전략적 제휴’ 성격이 짙다. 공공의 적을 상대하거나 새로운 시장 진출을 위해 과거의 적과 손을 잡는다. 지난해 스마트폰 시장에서 반(反)애플의 기치를 들었던 안드로이드 진영이 그러했다. 최근에는 숙적 관계인 오라클과 마이크로소프트(MS)·세일즈포스닷컴이 클라우드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동맹을 맺었다. 오라클이 지금까지 MS나 세일즈포스닷컴과 그리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오라클과 MS는 여러 소프트웨어 분야에서 경쟁을 펼쳐왔다. 세일즈포스닷컴과는 단순한 경쟁사가 넘어 앙숙 관계다. 오라클 동료였던 마크 베니오프 세일즈포스닷컴 사장과 래리 엘리슨 오라클 회장은 공개적으로 서로의 제품과 기술을 비판해왔다. 베니오프는 오라클 클라우드가 ‘가짜 클라우드’라고 주장했다. 래리 엘리슨은 세일즈포스닷컴 대표 제품을 ‘바퀴벌레가 나오는 클라우드’ 모델이라고 비꼰 바 있다.

유통업계에서는 전국 곳곳에서 송사까지 불사하며 ‘영토 전쟁’을 벌이던 맞수 롯데와 신세계가 서울 양재동 파이시티(옛 화물터미널)에서 기묘한 동거를 시작했다. 파이시티 인수 우선협상자로 신세계백화점과 롯데마트가 공동 참여한 STS개발 컨소시엄이 선정되면서다. 두 회사는 사업 시행사인 STS개발과 임대차 계약을 하고 각각 백화점과 대형마트를 운영하게 된다. 유통 단지 하나를 사실상 공동 운영하는 셈이다.



IT는 전략적 제휴, 유통은 불황타파 목적두 회사가 한 지붕 아래 자리를 잡은 것이 의도한 작품은 아니다. 롯데와 신세계의 파이시티 입점은 각각 대형마트와 백화점의 서울 강남 거점 확보 목적이다. 그러나 롯데는 파이시티와 가까운 곳에 롯데백화점 강남점과 롯데월드타워가 있어 백화점을 같이 입주시킬 필요가 없다.

신세계는 이마트가 파이시티와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둔 곳에 있어 처음부터 대형마트 입주에는 참여할 의사가 없었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롯데와 신세계가 서로의 손익계산이 맞는 부분에서 만나 다소의 어색함을 참고 공동 운영을 감수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유통업계에서는 전략적 접근보다는 불황타파를 위해 적과의 동침에 나서는 경우가 많다. 백화점들은 경쟁 업체 브랜드를 자사 백화점에 유치하고 있다. 신세계 계열의 신세계인터내셔날의 경우 아르마니·돌체앤가바니·갭 등의 브랜드를 독점 수입해왔다. 이 가운데 적잖은 브랜드가 다른 백화점에도 입점했다. 현대백화점은 신세계인터내셔날이 수입한 갭을 서울 미아점에 입점시켰고 롯데백화점이 독점수입한 훌라를 서울 천호점에서 판매한 바 있다.

갤러리아가 직매입 단독 브랜드로 운영 중인 ‘고야드’도 현대백화점 서울 무역센터점에 들어가 있다. 롯데 그룹의 크리스피크림 도넛은 현대백화점 충북 청주 충청점에 입점했다. 현대백화점도 자사 브랜드 일부를 다른 백화점에 넣었다. 한 백화점 관계자는 “자존심보다는 한 명이라도 더 손님을 끌어들여 실속을 챙기겠다는 계산”이라고 말했다.



협력할 건 협력하고, 싸울 건 싸우고오픈마켓에 상품을 공급하는 백화점이나 경쟁 상대로 여겨졌던 인터넷몰·오프라인 매장끼리 손을 잡는 사례도 부쩍 늘었다. 지난해 오픈마켓 11번가에 현대백화점이 입점한 것이 예다. 백화점은 대부분 자체 온라인 쇼핑몰이나 TV홈쇼핑을 운영하고 있어 타사와의 제휴는 드물었다. 업계 관계자는 “최근 불황으로 판매가 급속도로 위축되자 인터넷몰을 과거처럼 경쟁상대로 보지 않고 하나의 판매 방식으로 시각이 확산됐다”고 설명했다.

국내 기업이 글로벌 시장으로 진출하면서 해외 기업과의 협력과 갈등이 동시에 진행되는 사례도 늘었다. 철강업계에서 포스코는 독일의 지멘스, 일본의 신일본제철과 송사에 얽혀 있으면서도 협력관계를 이어가는 기묘한 사이다. 지멘스는 2011년 말 특허를 놓고 포스코에 제동을 걸었다.

포스코가 상용화하려는 ‘연속연주기술’에 대해 지멘스가 해당 기술의 독점 판매권이 자사에 있다며 포스코에 대해 법적 조치를 강구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특허 분쟁과 별도로 두 회사는 철강·에너지·소재 분야 협력을 대폭 강화하고 있다. 지난해 두 회사는 해당 분야 사업과 기술개발 협력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교환했다. 포스코는 해상풍력에 들어가는 맞춤형 철강소재 공급과 하부구조물 제작 등을 맡게 되고, 지멘스는 터빈과 발전 부문을 담당한다.

신일본제철은 지난해 4월 포스코에 대해 1조4000억원에 달하는 특허소송을 제기했다. 신일본제철은 포스코가 자사의 영업비밀인 기술정보를 사용해 방향성 전기강판을 제조·판매했다고 주장했다. 철강업계에서는 최근 고부가가치 제품인 전기강판 시장에서 급성장하고 있는 포스코를 견제하기 위해 신일본제철이 소송을 제기한 것으로 보고 있다.

오랫동안 전략적 제휴관계를 유지했던 포스코 입장에서는 뒤통수를 맞은 셈이다. 그러나 두 회사는 “소송과는 별개로 기존의 협력 관계는 유지한다”고 공식 입장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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