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ART - 色의 재발견
culture ART - 色의 재발견
휘트 스틸먼의 대학 로맨스 영화 ‘위기의 처녀들(Damsels in Distress)’에는 유아원을 다니지 않아 색채의 기본을 배우지 못한 남학생이 나온다. 영화는 그의 이런 허점을 최대한 이용해 우스꽝스러운 장면들을 연출한다. 좀 모자란 사람 앞에선 누구나 우쭐한 기분이 들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바우하우스에서 훈련받고 나중에 그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미술가 조셉 앨버스는 우리 모두가 그 남학생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책을 써서 그것을 증명했다. 그는 ‘색채의 상호작용(Interaction of Color)’에서 모든 색채가 상대적이며 우리가 어떤 색채를 볼 때는 반드시 다른 색채들과 연관해서 본다고 주장했다.
“색채를 독립적으로 본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앨버스는 멋진 일러스트레이션과 재미있는 연습문제를 곁들인 일련의 강의를 통해 빛의 강도나 명도, 투명도, 색온도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잘못된 생각을 깨우쳤다. 어렵지만 결코 지루하지 않은 강의였다.
이 책은 1963년 처음 출판된 이후 미술가와 디자이너, 건축가 등 색채를 다루는 직업을 가진 모든 사람들의 성서가 됐다. 앨버스의 원서는 두 권으로 구성돼 케이스 안에 들어 있었다. 이 하드커버판의 요즘 소매가는 250달러에 이른다. 값싼 페이퍼백도 있지만 그런 책은 그림의 질이 형편없다. 1963년판의 색채 연습 부분은 제본되지 않은 낱장으로 책에 딸려 나왔다.
그 이후에 나온 여러 판에서도 이 부분은 책이 제본된 후에 “끼워넣기” 형식으로 추가됐다. 색색의 덮개들을 잡아당기면 다른 색상들과 연결되면서 매번 다르게 보이는 걸 알 수 있도록 돼 있었다. 이 책은 집에 가져다 놓으면 주변의 다른 물건들이 다 허름해 보일 정도로 잘 만들어졌다.
최근 책 출판 50주년을 맞아 아이패드 앱이 나왔다. 가격은 하드커버판보다 훨씬 더 현실적인 9.99달러다. ‘색채의 상호작용’이 디지털 시대에 맞는 형태로 다시 나온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책의 고유한 성질을 살려 잘 만들어졌다. 난 이 앱을 이리저리 둘러보면서 꽤 여러 날을 보냈다.
텍스트(예리하고 간결하면서도 재미있지만 때때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를 읽고 나서 연습문제도 몇 개 풀어 봤다. 스틸먼의 영화에 나오는 그 남학생처럼 멍청이가 된 기분이었다. 차이점이 있다면 난 스스로 색채를 잘 안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그보다 착각이 더 심했다는 점 정도였을 듯하다.
원서 옆에 놓고 보면 앱은 여러 모로 부족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우선 종이의 촉감을 느낄 수 없고 그 종이 위에 흠뻑 입혀진 생생하고 풍부한 색감도 느껴지지 않는다. 앱에서는 모든 걸 아이패드의 유리를 통해 봐야 하니 그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책이나 앱을 정보 전달의 도구로만 볼 때는 책과 앱이 어느 정도 동등한 위치에 오른다.
앨버스의 경우엔 책을 도구에 비유하는 것이 특히 적합하다. 그는 미술가일 뿐 아니라 장인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의 할아버지 중 한 명은 대장장이였고 다른 한 명은 목수였다. 아버지 역시 목수였으며 유리회화를 그리는 화가이기도 했다. 유리회화는 바우하우스에서 앨버스가 가르쳤던 과목이다.
장인이었던 그는 특정 작업에 어떤 도구가 다른 도구보다 더 적합하다는 사실을 잘 알았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이라도 달성하지 못하는 일이 있다는 점 또한 말이다. 앱은 바로 그 일을 하기 위해 세상에 태어난 듯하다.
‘색채의 상호작용’의 아이패드 버전은 앨버스의 페이지 구도를 그대로 유지했다. 들쭉날쭉한 행바꿈과 앨버스가 선택한 읽기 쉬운 배스커빌체(바우하우스 출신 중에 간결하고 실용적인 산세리프체를 싫어한 미술가가 있다니 의외다)도 그대로 썼다. 보조자료 중엔 미술사학자와 미술가, 디자이너들의 해설 비디오가 포함됐다. 그들은 앨버스의 테크닉을 설명하거나 자신이 색채에 대한 그의 아이디어를 작품에 어떻게 이용하는지를 보여준다.
이 앱의 가장 두드러진 장점은 빈 페이지와 색상환을 제공해 앨버스의 연습문제를 풀어 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앨버스도 이런 혁신적인 방식을 좋아했을 듯하다. 그가 이 책을 “관찰과 표현의 발전 과정”을 가르치는 안내서로 계획했고 “그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은 연습”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 책은 … ‘이론과 실습’의 학술적인 개념을 따르지 않는다”고 그는 썼다. “그 순서를 뒤집어 실습을 이론 앞에 놓는다. 결국 이론은 실습의 결과가 아닌가?” 그는 학생들이 단순히 스승의 아이디어를 실행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시행착오를 거쳐 자기 자신의 아이디어를 찾아내기를 바랐다.
“난 그림 그리는 법을 가르치지 않았다”고 앨버스는 말했다. “그것은 가르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대신 나는 보는 법을 가르쳤다.” 하드커버판은 텍스트와 이미지를 두 권의 책에 분리해 실었지만 앱은 그것들을 나란히 실었다. 풀 다운 탭을 이용해 어떤 이미지 옆에 적절한 텍스트를 옮겨 놓고 볼 수 있다.
디자이너, 식자공, 시인, 추상미술가 등으로 다양한 방면에 재능을 보였던 앨버스는 ‘사각형에 대한 경의’라는 제목의 회화 시리즈로 가장 잘 알려졌다. 이 시리즈는 다양한 크기와 색상의 사각형이 3~4개씩 겹쳐진 그림들이다. 그는 이 작품들을 제작할 때 실험실에서 실험을 하듯 정확성을 추구하면서 심혈을 기울였다(대다수 그림 뒷면에 사용된 물감의 색상과 그 제조 업체를 꼼꼼하게 기록했다).
이 작품들은 궁극적으로 추상화지만 낭만적인 자기표현의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차갑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 그림들을 더 가까이서, 더 오래 들여다볼수록 최면에 걸리는 듯한 기분이 든다. 미술작품의 의미가 근본적으로 바라보는 재미를 주는 데 있다면 이보다 더 그 의미에 들어맞는 작품은 없다.
앨버스는 1950년 이 시리즈를 시작해 197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 그렸다. ‘색채의 상호작용’은 이 프로젝트의 중간 시점에 출판됐다. 마치 기술자가 자신의 비밀 도구를 작업 중간에 만천하에 공개하듯이 말이다. 하지만 앨버스는 타고난 스승이었고 평생 가르치는 일을 계속했다. 그는 책에서 “이 책을 (블랙마운틴대와 예일대의) 내 학생들에게 바친다”고 썼다.
책 말미에는 연습문제를 만들 때 도움을 준 학생들의 이름을 실었다. 하지만 이들의 이름을 일일이 나열한 것은 그들에게 고마움을 표하는 제스처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이 일이 공동작업을 필요로 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앨버스의 방식이었다. 그는 늘 학생들과 함께 작업하면서 많이 배웠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꼭 해 둘 말이 있다. ‘색채의 상호작용’은 수세대의 미술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지만 꼭 미술가들만을 위한 책은 아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리고 왜 지금 보는 방식으로 세상을 보게 됐는지를 알고 싶은 모든 사람을 위한 책이다. 책이든 앱이든 ‘색채의 상호작용’은 선견지명이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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