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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의 ‘스포츠 경영학’

CEO의 ‘스포츠 경영학’

대한체육회 산하 58개 가맹 경기단체 중 32개 단체의 수장이 기업 CEO다. 재력가를 단체에서 원하기도 하지만, 경영자 입장에서도 기업 이미지를 높이고 마케팅 효과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내년 소치 동계올림픽·브라질 월드컵 등을 앞두고 기업의 스포츠 마케팅 열기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지난 11월 1일 대구구장에서 프로야구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한 삼성 선수단에게 구본능 한국야구위원회 총재(양복 차림 맨 오른쪽)가 우승 트로피를 시상하고 있다.





# 1 지난 10월 30일 대한체육회는 내년 소치 동계올림픽 대한민국선수단장에 김재열 대한빙상경기연맹 회장을 선임했다. 삼성엔지니어링 경영기획총괄 사장인 그는 2011년 3월부터 빙상연맹을 이끌어오며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 단장은 “명예롭게 생각하고 많은 책임감을 느낀다. 얼마 남지 않은 기간 동안 선수들이 훈련하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최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틀 후인 11월 1일 윤석민 대한스키협회장은 긴급이사회를 열고 사퇴를 선언했다. 윤세영 태영그룹 회장의 아들인 그는 태영건설·SBS홀딩스 부회장이다. 스키협회 관계자는 “그동안 동계올림픽 선수단장은 관례적으로 스키협회와 빙상연맹이 번갈아 맡아 왔는데 이번은 스키협회장차례였다. 대한체육회의 결정으로 협회 안팎에 불만이 크다”고 말했다.

체육계 인사는 “선수단장은 국제 스포츠무대에 이름을 알릴 수 있는 자리다. 특히 한국은 평창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있기에 더욱 주목 받는다”며 “기업 CEO로서는 욕심 낼만한 자리”라고 말했다.



# 2 지난해 런던 올림픽 여자양궁 단체전 결승전이 열린 로즈 크리켓 그라운드. 결승에서 중국을 꺾고 올림픽 7회 연속 금메달을 획득한 여자 궁사들이 달려가 포옹한 사람은 정의선 현대자동차 부회장이었다. 부친 정몽구 현대기아자동차그룹 회장에 이어 2005년부터 대한양궁협회장을 맡고 있는 그는 여자 양궁 선수들을 차례로 껴안고 기쁨을 나눴다.

다음날 신문에는 ‘대 이은 양궁 사랑’ ‘금빛과녁 맞춘 태극전사 뒤 재계 총수 있었다’ 등의 보도가 잇따랐다. IOC위원인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핸드볼협회장인 최태원 SK 회장, 대한탁구협회장인 조양호 한진 회장과 대한사이클연맹 회장인 구자열 LS 회장의 동정도 올림픽 기간 내내 국내 언론에 보도됐다.

체육단체장이라는 또 다른 직함을 다는 기업 CEO가 늘고 있다. 공정하고 역동적인 스포츠의 이미지를 얻을 뿐 아니라 운영 리스크도 적기 때문에 기업인들 사이에서 주목받고 있다. 현재 한국야구위원회, 한국프로축구연맹,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KLPGA), 한국배구연맹 등 프로스포츠 단체 4곳과 대한체육회 산하 58개 가맹 경기단체 중 32개 단체의 수장이 기업인이다.

특히 범현대가(家)의 진출이 눈에 띈다. 정의선 현대자동차 부회장은 대한양궁협회장 3선째다. 특히 1985년부터 1997년까지 2~5대 대한양궁협회장을 지낸 정몽구 현대차 그룹 회장에 이어 부자(父子)가 한국 양궁계를 오래 이끌어 주목받는다. 현대차는 30년 가까이 300억원 이상을 투자해 한국 양궁을 세계 최강으로 끌어올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지난해에는 런던 올림픽에서 선전한 양궁 대표선수단에게 16억원의 포상금을 지급하기도 했다.

정몽규 현대산업개발 회장은 대한축구협회장을 맡고 있다. 정 회장은 15년 간 축구협회장을 맡았던 정몽준 축구협회 명예회장의 사촌동생이다. 프로축구 울산 현대와 전북 현대, 부산 아이파크 구단주에 이어 한국프로축구연맹 총재를 지냈다. 권오갑 현대오일뱅크 대표이사는 K리그를 주관하는 한국프로축구연맹 총재를 맡고 있다. 범현대가가 아마추어부터 프로까지 한국 축구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펼치고 있는 셈이다. 정몽원 한라그룹 회장은 대한아이스하키협회장을 맡고 있다.



공정·역동 이미지 갖춘 체육단체장 선호범LG가와 범GS가도 체육단체 곳곳에 이름을 올렸다. 야구 사랑이 남다른 것으로 유명한 범LG가에서는 구본무 LG그룹 회장의 동생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이 한국야구위원회를 이끌고 있다. ‘자전거 전도사’로 유명한 구자열 LS 회장은 올해 대한사이클연맹 회장 연임에 성공했다. 허동수 GS칼텍스 회장은 한국기원 이사장 겸 대한바둑협회장으로 재임 중이고 허광수 삼양인터내셔날 회장은 대한골프협회장을 맡고 있다.

체육단체장 역시 재계 파워와 맞물린다. 삼성·현대차·SK·LG 등 대기업 CEO들은 단독출마에 이은 ‘연임’이 대세다. 비인기 종목인 핸드볼에 관심을 가져온 최태원 SK 회장은 올초 대의원 만장일치로 대한핸드볼협회장 연임에 성공했다. 손길승 SK텔레콤 명예회장도 대한펜싱협회장에 연임 중이다.

한국기원 이사장 겸 대한탁구협회도 단독 출마한 조양호 한진 회장의 연임을 만장일치로 추대했다. 정의선 부회장, 김재열 사장, 구자열 회장도 마찬가지다. 전문가들은 기업총수 단독출마의 경우 든든한 지원군 역할뿐만 아니라 장기적인 스포츠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연임 가능성이 크다고 말한다.

반면 인기 종목은 치열한 양상을 띠기도 한다. 한국축구협회장은 연간 1000억원에 이르는 예산을 다루는 ‘축구대통령’으로 불린다. 지난 1월 선거에서는 정몽규 회장을 비롯해 김석한 전 중등축구연맹 회장, 허승표 피플웍스 회장, 윤상현 새누리당의원 등이 경합했다. 1차 투표에서 범GS가인 허승표 회장에게 뒤진 정 회장은 결선투표에서 극적으로 뒤집었다. 오랫동안 아이스하키단체를 이끈 박갑철 회장과 맞붙었던 정몽원 한라 회장도 간발의 차로 당선됐다.

재계 수장들이 직접 체육단체장에 나서는 것은 체육 발전 지원이라는 명분과 함께 기업 이미지를 높이고 글로벌 브랜드로 올라서는 실리를 챙길 수 있기 때문이다. 김종 한양대 예술체육대학장은 “기업이 수익의 사회 환원 방법을 찾을 때 스포츠 종목에 투자하는 것만큼 매력적인 방법도 없다”고 말했다.

“스포츠를 통해 기업의 이미지를 높이고, 수치로 환산할 수 없는 엄청난 광고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또 기업 CEO 입장에서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나 종목별 세계 연맹·협회 등에 진출하면서 국제무대에서의 비즈니스 발판을 마련하고, 개인적인 위상을 높이는 효과도 볼 수 있다.”

체육계 역시 거액의 출연금과 다양한 지원을 제공하는 기업인을 선호한다. 정희윤 스포츠산업경제연구소장은 “체육단체가 기업 CEO를 원하는 가장 큰 이유는 재정이다. 전 세계 어떤 경기단체든 스폰서 유치가 가장 큰 과제”라고 말했다. “외국의 경우에는 기업이 스폰서십 투자로 끝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직접 단체장을 맡아 지원한다. 큰 단체의 경우 회장이 약 30억원 정도를 출연한다. 회장이 내는 후원금이 해당 단체 수익의 60%가량 된다.”



비인기 종목 버팀목 역할기업과 체육단체의 인연은 서울올림픽을 유치한 198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정부는 ‘서울올림픽이 성공하려면 각 기업들이 경기단체 하나씩 맡아야 한다’며 기업별로 체육 종목을 할당했다. 레슬링-삼성, 양궁-현대, 축구-대우, 탁구-동아건설, 복싱-한화, 유도-두산 식이었다. 체조·사격 등을 후원할 기업이 나서지 않자 정부는 대한주택공사에 근대 5종을, 옛 한국전기통신공사에 사격을, 포항제철에 체조협회장을 떠맡겼다.

지난해 6월 런던 올림픽을 앞두고 전국경제인연합회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10대 그룹이 2011년 국내 스포츠에 지출한 비용은 총 4276억원이다. 이는 같은 기간 문화체육관광부의 체육 예산(8403억원)의 절반 수준이다. 특히 비인기 종목에도 1325억원을 지원한 것으로 나타나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했다는 평가다. 삼성·현대차·SK·한화·포스코·한진 등 10대 그룹은 다양한 비인기 종목의 선수단을 운영 하면서 협회장까지 맡아왔다.

2010년 기준 10대 그룹이 자사의 CEO가 협회장으로 활동 중인 체육단체에 찬조한 금액은 140억원에 이른다. 아낌 없는 투자는 큰 성과를 내고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런던 올림픽이 끝난 후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우리 선수단이 획득한 28개 메달 가운데 80%가량인 22개의 메달이 국내 10대 그룹이 후원하는 종목이었다.

삼성과 이건희 회장이 대표적이다. 레슬링 선수 출신인이 회장은 1982년부터 15년간 대한레슬링협회장을 맡으면서 300억원 이상 재정적 지원을 해왔다. 체육계 인사들은 “당시가 한국 레슬링의 르네상스 시대였다”고 입을 모은다. 선수 출신이 회장을 맡고 있는 현재도 삼성은 해마다 6억원 이상을 협회에 지원한다.

삼성이 회장사를 맡고 있는 빙상은 2010년 캐나다 밴쿠버 올림픽을 계기로 한 단계 더 도약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올림픽 사상 처음으로 쇼트트랙외에도 스피드스케이팅과 피겨스케이팅 등 빙상 세 종목에서 금메달을 땄다. 이는 꾸준한 투자의 결실이다. 삼성은 동계올림픽 메달 종목 육성차원에서 1997년부터 후원을 시작했다. 2011년엔 이 회장의 사위인 김재열 사장이 직접 대한빙상경기연맹 회장을 맡아 한층 투자를 늘렸다.

SK는 핸드볼과 펜싱을 지원한다. 최태원 SK 회장은 2008년 10월 대한핸드볼협회 회장으로 취임한 후 국제 핸드볼 대회 유치를 돕는 등 후원활동에 적극 나섰다. 2011년에는 핸드볼 전용 경기장 완공을 위해 그룹 차원에서 434억원을 기부하기도 했다. 그는 최근 횡령 등 혐의로 구속된 상태에서도 핸드볼협회 운영을 걱정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변방에서 세계의 중심에 우뚝 선 펜싱 역시 SK의 든든한 후원이 뒷받침됐다. 펜싱협회장은 손길승 SK텔레콤 명예회장(전 SK 회장)이 맡고 있다.

조양호 한진 회장의 탁구 사랑도 잘 알려졌다. 그는 탁구선수들의 개인사를 직접 챙기기도 한다. 조 회장은 올초 대한항공 탁구팀 소속 김경아 선수가 ‘2세 계획’을 위해 은퇴를 결정하자 “일보다 가정을 우선할 때”라며 애정을 드러냈다.

현정화 전 국가대표 감독이 탁구 국제행정가를 목표로 지난해 8월 어학연수를 떠날 때는 조 회장과 딸 조현민 대한항공 통합커뮤니케이션실 상무의 모교이자 조 회장이 재단이사를 맡고 있는 미국 남캘리포니아대(USC)를 소개해줬다. 조 회장은 USC 총장에게 편지를 보내 어학코스의 추천을 부탁했다고 한다.

김승연 한화 회장의 사격에 대한 애정도 오래다. 그는 한화의 이름을 건 사격 대회를 만들고 전자표적지를 국내에 도입하는 등 힘써왔다. 2000년 호주 시드니 올림픽 은메달리스트 강초현 선수가 실업팀이 없어 진로가 불투명해지자 갤러리아사격단을 창단했고, 한화 고위 임원들이 대한사격연맹 회장을 번갈아 맡아 지원하고 있다. 포스코 역시 한국 체조를 27년간이나 묵묵히 지원해 왔다.

반면 기업의 후원을 받지 못하는 종목은 재정난에 빠지기 일쑤다. 한화가 1997년 손을 뗀 아마추어복싱연맹은 10여년이 지난 지금도 허덕인다. 복싱연맹 관계자는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지원을 중단해 연맹 운영 자체가 힘들다. 선수층도 얇아지면서 지금은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엘리트 스포츠의 ‘돈줄’ 넘어 사회체육 지원해야물론 기업 CEO들의 체육단체장 겸임에 비판의 목소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기업의 스포츠 지원이 자사 CEO의 부정 행위에 면죄부를 주는 데 이용돼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높다. 정희준 동아대 스포츠과학대학 교수는 “한국은 정치·경제·스포츠가 삼각동맹을 맺고 있는 독특한 국가”라며 “국가와 재벌이 스포츠에 다목적으로 관여하고 있다”고 말했다.

기업의 재정 지원이 장기적으로 보면 체육단체의 자생력을 약화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한다는 지적도 있다. 기업의 지원 없이도 순수 스포츠 마케팅으로 생존해야 하는 체육단체가 생존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한다는 것이다.

또한 엘리트체육에 대한 편중된 지원도 고쳐야 할 사항이다. 금메달 획득을 겨냥하는 엘리트체육은 국가의 위상을 높이고 전 국민의 자긍심을 고취하는 순기능이 있다. 하지만 앞으로는 전인양성의 학교체육과 국민건강 증진 차원의 사회체육에 대한 지원을 늘려야 한다는 지적이다. 독일의 대표 제약회사 바이엘은 기업의 스포츠 육성에 대한 모범 사례로 꼽힌다. 스포츠를 통해 직원과 주민에게 투자했다. 바이엘이 운영하는 스포츠클럽은 29개 종목으로 회원 수만 5만 명에 달한다.

축구·배구·농구·핸드볼·펜싱·유도·체조·육상 등에서 프로와 아마추어 선수들이 구슬땀을 흘리고, 다른 한쪽에서는 노약자·어린이·장애인들도 초현대식 시설에서 스포츠를 즐긴다. 바이엘 소속 구단인 레버쿠젠은 400개의 팬클럽을 관리하고 연령별 유소년 팀 운영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 이처럼 사회체육 저변 확대를 통해 글로벌 스포츠시장에서 지속적인 성공을 모색해야 한다는 목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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