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지표엔 온기, 체감경기엔 냉기
경제지표엔 온기, 체감경기엔 냉기
#1. “손님이요? 당연히 없죠. 뻔한 걸 왜 물어요. 경기좋을 때야 그릇도 세트로 사가는 손님이 많고 가게에서도 한꺼번에 사가기도 하는데 요새는 거의 없어요. 쓰던 그릇 깨지거나 해서 한두 개 사가는 사람들뿐이에요. 그런데 그렇게 몇 개 사가면서도 신용카드 긁으면 한도 초과인 사람이 수두룩해요. 다들 카드값 못 내고 하다 보니 그런 거겠죠. 경제가 어떻게 될라 그러는지….” - 서울 영등포시장에서 32년째 그릇 가게를 운영하는 박순옥(가명·58)씨
#2. “뉴스에서는 살만해졌다고 떠드는데 거기서 말하는 복잡한 숫자는 잘 모르겠고요. 경기는 그냥 여기 포장마차 오시는 손님보면 잘 알아요. 경기가 안 좋을 때는 사람들이 포장마차 많이 찾고, 혼자 오는 사람도 많거든요. 요즘이 딱 그래요. 저야 손님 많으면 좋지만 한편으론 씁쓸하기도 하죠.” - 서울 중구 북창동에서 12년째 포장마차를 운영하는 김경자(58)씨
#3. 경기도 수원의 한 대형마트. 지나가는 사람마다 일명 ‘뽁뽁이’라고 불리는 단열시트를 한두 개씩 집어든다. 뽁뽁이는 원래 파손 방지용 포장지였지만 최근에는 창문에 붙이는 단열시트로 애용된다. 이 대형마트 관계자는 “여기서만 하루 1000개 정도 팔릴 정도로 인기”라고 말했다.
갑작스럽게 추워진 탓도 있지만 불경기에 난방비를 조금이라도 줄여보려는 심리가 작용했다는 설명이다. 뽁뽁이를 사기 위해 대형마트를 찾은 한 주부는 “요새는 은행대출 갚고 각종 세금·공과금 내고 나면 남는 게 없다”며 “번거롭지만 가스비·전기세를 조금이라도 아끼려면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 하지 않겠냐”며 푸념했다.
박근혜정부 원년인 올해 경제지표는 회복 기미를 보이고 있지만 서민경제는 냉랭하기만 하다. 시장에서 감지하는 불황의 신호가 무색할 정도로 거시지표만 보면 경제에 온기가 있는 듯하다. 금융권이 추산한 올해 1인당 국민소득(GNI)은 2만4044달러다. 1인당 국민소득은 국민 총소득을 인구로 나눈 값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2009년 1만 달러 대로 내려 앉은 이 수치는 2010년 2만 달러를 회복한 후 2011~2012년 2만2000달러 대에 머물다가 올해 2만4044달러로 5.9% 늘었다.
경상수지 흑자 규모는 600억 달러를 넘어 사상 최대치를 기록할 전망이다. 국내총생산(GDP) 대비로도 5%가 넘고 일본의 경상수지 흑자보다도 더 큰 규모다. 한국은행이 발표한 ‘10월 국제수지’에 따르면 경상수지 흑자는 95억1000만 달러를 기록했다. 종전 경상수지 흑자 사상 최대치인 5월 86억4000만 달러를 넘어서는 규모다. 이로써 올해 들어 10개월 간 경상수지 흑자는 582억6000만 달러다.
지난해 같은 기간의 1.5배 수준에 달한다. 한국은행이 예상한 올해 흑자 규모는 630억 달러다. 현재 추세가 이어지면 700억 달러를 넘어설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1997년 204달러에 불과하던 외환보유액은 3400억 달러를 돌파하며 사상 최대치를 경신 중이다. 올 10월 고용률은 65.2%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고용률은 5월에는 변동이 없었으나 9월과 10월에 각각 0.7%포인트, 0.9%포인트 늘면서 두 달 연속 증가세를 보였다.
장밋빛 경제지표 어느 나라 얘기?그러나 각종 경제지표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시장은 여전히 얼어 붙은 상태다. 서민들은 오히려 지갑을 닫고 있다. 3분기 가계동향을 보면, 가구당 월 평균소득은 426만원으로 전년 동기보다 2.9% 증가했지만 물가상승률을 고려한 실질 소비지출은 0.1% 감소해 5분기 연속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최대’ ‘최고’의 수식어를 단 거시지표를 접한 국민들은 ‘어느 나라 얘기냐?’ ‘제대로 된 수치냐?’는 반응이다.
한국은행이 10월 1일 공개한 9월 금융통화위원회 의사록을 보면 한 금통위원은 “최근 들어 거시지표와 일반 국민의 체감경기간 괴리가 어느 때보다 커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2011년 4분기 이후 2년째 경기판단은 점진적인 회복세라는 표현이 계속되고 있지만 일반 국민이 느끼는 체감경기는 부정적’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최근 한 민간연구기관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올 상반기 국민의 체감물가 상승률은 5.4%로 지표물가 상승률의 4배 수준이다. 이런 통계를 고려하면 올해 경제고통지수는 4%대에서 10%대를 훌쩍 넘게 된다.
경제지표와 체감경기의 괴리가 큰 이유는 뭘까. 전문가들은 부의 쏠림 현상, 기업과 개인 간 소득 괴리, 일자리 부족과 임금 정체로 인한 가계 실질소득 저하, 가계부채 증가와 고정지출 증가, 집값 하락으로 인한 마이너스 부의 효과를 원인으로 꼽는다. 하나 하나가 박근혜정부 초기부터 해결 과제로 제기된 경제 현안이다.
지난해 가처분소득 기준 평균 가구소득은 3645만원이다. 그런데 최근 통계청·금융감독원·한국은행이 전국 2만 가구를 상대로 조사해 발표한 ‘2013 가계금융·복지조사 결과’를 보면 전체 가구 중 50.2%의 가처분소득이 3000만원 미만, 64.7%는 4000만원 미만이다. 소수의 고소득 가구가 평균치를 끌어올린 셈이다.
이마저도 올해 1인당 국민소득 추정치인 2만4000달러로 계산했을 때 4인 가족 한 가구의 소득이 1억원 이상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낮은 평균치다. 다수의 저소득 가구에게 경제회복의 온기가 퍼지지 못하는 이유다.
“나는 하류층” 35%나 돼이를 방지하기 위한 중산층의 확대는 8월 29일 국민경제자문회의에서 현 정부 경제정책의 최상위 목표로 거론된 내용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날 “창조경제 구현과 함께 중산층 복원은 새 정부 경제정책의 핵심”이라며 중산층 70% 복원을 최우선 과제로 내세웠다.
박 대통령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소득 기준으로는 중산층에 속하는 데도 스스로를 서민층으로 인식하는 분들이 많은데 (그럴수록) 국민 눈높이에서 문제를 파악하고 짐을 덜어 드리는 노력을 펼쳐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근 소비자보호원이 발표한 체감중산층의 비중은 62.5%로 1994년(81.3%)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자신이 하류층이라고 인식하는 비중은 34.8%에 이른다.
전문가들은 “기업의 수출이 늘어나는데 비해 내수 부진이 지속되는 점도 서민경제에 치명적”이라고 설명한다. 내수에 의존하는 경제주체 중에서도 대기업 계열의 사업자나 전문직 자영업자는 그나마 사정이 낫다. 내수가 부진하면 서민층이 주로 종사하는 업종의 타격이 크게 마련이다. 도소매, 음식·숙박 등 전통서비스, 사업지원서비스, 건설 부문 침체에 따른 부동산중개·임대·가구·도배·이삿짐센터 등이다. 이들에게 불경기의 타격이 집중되면서 체감하는 실제 경기가 더 안 좋아진다는 설명이다.
앞서 언급한 한국은행 의사록에 따르면 전통서비스업의 생산증가율은 전체 서비스업을 밑돈다. 더구나 증가하는 전체 자영업자의 대부분은 55세 이상 인구다. 상대적으로 높은 학력에 은퇴 전까지 고임금 근로자로 안정적인 생활을 누리다가 은퇴 후에도 자녀부양과 부채상환 부담에 떠밀려 영세 자영업에 나선 세대기때문에 불경기를 가장 민감하게 느낀다.
부동산 침체가 체감경기 냉각 부추겨청년층이라고 희망적이진 않다. 취업난 탓이다. 우리나라의 10월 공식 고용률은 65.2%, 실업률은 2.8%다. 실업률 3%면 완전고용에 가깝다. 그러나 주위에는 취업난에 허덕이는 젊은이가 넘쳐난다. 고용통계와 현실의 격차가 있는 것이다. 경제활동인구 자체가 현실과 괴리가 있다. 14세 이상 인구 가운데 구직을 포기한 사람들은 경제활동인구에 포함되지 않아 실업률 통계의 모집단에서 제외된다. 일자리를 원치 않는 것으로 분류돼 실업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취업이 여의치 않아 휴학했거나 대학원에 진학한 젊은이, 군에 입대한 학생도 실업자 통계에서는 빠진다. 아르바이트생 등 시간관련불완전취업자도 취업자로 분류된다. 한국고용정보원은 10월 고용통계를 기준으로 노동저활용지표를 산출한 결과 실업자를 비롯해 시간관련불완전취업자, 잠재적 경제활동인구 등 ‘숨은 실업자’를 모두 포함한 체감실업률을 7.2%로 추산됐다.
부동산 문제는 가계소득과 경기에 대한 심리에 영향을 미친다. 정부에서 다양한 부동산 대책을 내놨지만 올해 수도권을 중심으로 한 주택 매매 시장은 침체를 면치 못했다. 과거 부동산 시장이 호황일 때는 집값 상승은 ‘부의 효과(wealth effect)’를 불러왔다. 집값이 오르면 개인들은 자신의 자산이 늘었다고 느끼기 때문에 투자와 소비가 증대되는 효과다.
그러나 최근의 부동산 침체는 그 반대인 마이너스 부의 효과를 내 투자와 소비를 위축시킨다. 더구나 과도한 대출로 집을 마련해 고통을 겪는 ‘하우스푸어’마저 양산되는 분위기다. 이들에게 부동산 가격 하락이 주는 여파는 더 강렬하다. 부동산 침체로 인한 투자·소비 위축 심리가 깊어질 수밖에 없다.
집값 하락은 다시 전셋값 상승, 그리고 가계부채 증가로 이어졌다. 빚이 많으면 그만큼 실제로 쓸 수 있는 여윳돈이 줄어든다. 소비 위축이 깊어지는 원인이다. 3월 말 기준 가구당 평균 부채는 5818만원으로 전년 대비 6.8% 증가했다. 같은 기간 가처분소득의 증가율은 4.9%다. 소득이 빚이 늘어나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 대출을 받아서 살 집을 마련한 경우나 살집 이외의 부동산을 사는데 썼다는 사람은 지난해 각각 35.2%와 16.6%에서 올해 각각 34.7%와 16.6%로 줄었다. 반면에 전·월세로 쓴 경우는 5.8%에서 6.2%로, 사업자금 마련용은 27.7%에서 28.3%로, 생활비로는 5.8%에서 6.5%로 늘었다. 김한기 경제정의 실천연합회 경제정책팀장은 “정부의 전월세 대책이 빚을 떠안기거나 유예해주면서 서민경제에 오히려 안 좋은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
가계부채는 경제성장의 발목을 잡을 수 있는 뇌관으로 지목된다. 올 3분기 가계부채는 991조7000억원을 기록했다. 연말에는 1000조원을 돌파하고 내년에 만기가 도래하는 가계부채가 110조원에 달할 전망이다. 한 거시경제 전문가는 “우리나라 가계부채는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마저 지적할 정도로 누구나 알고 있고 이미 오래 전부터 제기된 사안”라며 “가계부채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알면서 해결 못하는 게 문제”라고 말했다.
박종규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노동생산성은 향상됐지만 실질임금이 정체됐다”며 “경제지표와 체감경기의 괴리는 가계와 기업 소득 사이의 관계가 끊어진 탓이 크다”고 설명했다. 기업들이 수익을 내면서 경제지표 자체는 좋게 나오지만 이것이 일자리 증가나 임금상승으로 연결되지 않으면서 가계 지출여력이 적다는 말이다. 경제성장의 과실이 가계에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셈이다. 기업에서 가계로 흘러가는 낙수효과가 축소되면 수출 중심의 성장전략을 보완하던 선순환 고리가 끊어진다.
일본형 디플레이션 우려CEO스코어에 따르면 국내 10대 그룹의 금융사를 제외한 82개 상장 계열사의 사내유보금은 올 6월 말 기준 477조원으로 3년 전인 2010년 말 331조원에 비해 43.9% 늘어났다.
사내유보율도 같은 기간 1376%에서 1668%로 292%포인트 상승했다. 사내유보금이란 기업이 쓰고 남은 돈을 사내에 축적한 금액이다.
많을수록 기업의 재무구조가 탄탄해지지만 투자나 임금 상승(가계소득 증가)에는 소극적이라는 지적도 제기된다. 김한기 팀장은 “재정지출로 인해 정부 정책이 제한됐기 때문에 기업의 역할이 필요한 시점임에도 이를 외면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모든 책임을 기업에게만 돌리기도 어렵다. 엔화 가치 하락 등 환율 불안정, 미국의 양적완화 축소 우려, 가계부채 확대, 불황업종 기업의 자금난 등 대내외 경제 여건상 기업활동도 쉽지 않다. 실적 부진에 빠진 기업도 많다. 일각에선 정부와 정치권이 뚜렷한 해법 없이 경제 주체들을 쥐락펴락하는 사이 기업들은 방향성을 잃고 안전 위주 경영에만 나선 것이 주요 원인이라고 해석한다.
전국경제인연합회 관계자는 “기업 규제 강화와 정책의 불확실성이 기업 투자를 저해한다”고 말했다. 임희성 현대경제연구원 경제동향실장은 “정부가 투자 활성화 대책을 내놓고 있지만 저성장 기조 때문에 투자 불안심리가 가시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 경제성장률이 2%대에 머물면서 저성장 우려가 팽배하다. 올해 11월 소비자물가는 지난해 같은 달보다 0.9% 오르는 데 그쳐 3개월 연속 0%대 상승률을 나타냈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지난해 10월 2.1% 이후 13개월 연속 2% 미만을 기록했고, 지난해 5월 이후 19개월 연속 한국은행이 정한 물가관리 범위인 2.5∼3.5%에 미치지 못했다. 12월 소비자물가 상승률마저 2% 미만에 그치면 최장기 연속 2%대 미만 물가상승률 기록을 경신하게 된다. 종전 기록은 1999년 1월부터 2000년 2월까지 14개월이다.
장기간 저물가가 이어지면서 일부에선 우리나라가 일본처럼 장기 불황에 빠진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디플레이션 국면에서는 물가가 하락하면서 경제 주체가 소비보다는 저축을 하고, 기업들이 투자를 꺼리게 돼서 경제가 전반적으로 침체에 빠진다. 앞으로도 물가가 계속 내려갈 것으로 예상한 경제 주체들이 소비와 투자를 계속 미루기 때문에 경기가 지속적으로 둔화된다는 뜻이다. 투자 심리는 얼어붙을 수밖에 없다.
임 실장은 “투자활성화가 가계부채 문제와 상충할 수 있지만, 불안심리를 끊고 성장에 대한 희망을 보여줘야 선순환 구조로 돌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선순환 구조로 돌아서는 불씨의 단초가 될 곳은 기업 투자”라며 “정부에서 기업에 미래 먹거리에 대한 확신을 줄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박종규 선임위원은 “지금 시점의 경제 문제는 여러 요소가 얽히고 설켜 어느 것 하나 먼저 손 대기 어렵다”며 “지엽적인 정책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다만 “근본적인 패러다임 전환을 위해 각 문제에 대한 방안을 따로 보지 말고 하나하나 조합해 순서를 짜는 안목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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