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동부·현대그룹 승부수 통할까
한진·동부·현대그룹 승부수 통할까
구조조정 한파가 재계를 덮치고 있다. 방만한 부채경영과 안일한 금융정책이 빚은 결과다. 일부는 곪아 터져서, 또 일부는 터지기 직전에 수술대에 올랐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최대 규모다. 구조조정은 ‘사즉생(死卽生)’이다. 죽고자 하면 살 수 있다.
재계의 허리를 받치던 한진·동부·현대그룹은 이미 고강도 자구책을 내놓고, 시장의 선택을 기다리는 중이다. 세 그룹의 자구책은 성공할까. 이번 기회에 유동성 위기 꼬리표를 뗄 수 있을까. 올해 기업 구조조정의 승부수를 던진 한진·동부·현대그룹을 취재했다.
‘우물쭈물하다 이럴 줄 알았다.’ 널리 알려진 영국 극작가 버나드 쇼의 묘비명이다. 우리나라 기업 구조조정 상황이 딱 그 꼴이다. 수 년 전부터 빨간 불이 켜졌지만, 일부 중견·대기업 경영진은 경영권에 집착하며 선제 구조조정을 회피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생산성을 올리고 비용을 낮추는 고강도 구조조정과 부채 축소에 나선 미국·유럽 등 선진국과 달리, 한국은 넘쳐나는 유동성에 취했고 무리한 차입으로 화를 키웠다.
누구나 볼 수 있는 한국은행 금융안정보고서에 ‘한계에 다다른 대기업이 늘고 있다’는 경고가 반복됐지만 외면했다. 정책금융당국은 “위험 기업이 몇 개 더 있지만 밝히 수 없다”는 식으로 불안만 키웠을 뿐 신속한 구조조정 방안이나 대책을 내놓지 않았다.
기어이 지난해 웅진·동양·STX그룹이 화를 당했다. 모두 무리하게 덩치를 키웠고 위험을 감추다 부실이 터졌다. 자산 매각 등을 통해 위기를 넘길 기회가 있었지만 경영진의 판단 착오로 적기를 놓치고 그룹 해체 수순을 밟는 것도 공통점이다.
중견·대기업 연쇄 부도 위기가 닥치자 금융당국은 뒷북 대책을 내놨다. ‘제2의 동양사태’를 막겠다며 대기업 부실 감시를 강화하고 채권단을 통해 구조조정을 압박했다. 뒤늦게 빼든 칼은 매서웠다. 그룹에 돈을 대주 던 주채권은행(채권단)은 저승사자로 변했다. “자체적으로 부채를 줄일 수 있다”던 한진·현대·동부그룹은 결국 백기를 들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시장 예상보다 훨씬 강도 높은 자구책을 내놨다.
재계 서열 19위 동부그룹은 그룹 오너가 숙원사업으로 여기는 반도체 회사(동부하이텍)와 알짜 계열사(동부메탈)를 매물로 내놨다. 21위 현대그룹은 현대증권·현대자산운용·현대캐피털 등 금융 3사를 팔기로 했다. 재계 9위인 한진그룹은 한진해운을 살리기 위해 대한항공의 에스오일 지분과 보유 항공기·부동산 등을 매각하기로 했다. 타이밍을 놓치면 자칫 그룹이 해체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반영된 결과다.
매물 넘치는 M&A 시장동부·한진·현대그룹의 승부수는 통할까. 이번 자구계획으로 세 그룹은 약 12조원(한진 5조5000억원, 현대 3조3000억원, 동부 3조원) 자금을 확보해 유동성 위기에서 벗어난다는 복안이다. 시장 전망은 극과 극이다. 알짜 계열사가 여럿 매물로 나온 만큼 치열한 인수전 속에 구조조정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될 것이라는 관측이 있는 반면, 매물은 넘치는데 살 곳이 없다는 비관론도 만만치 않다.
실제로 올해 인수합병(M&A) 시장은 넘치는 매물로 최대 호황을 맞고 있다. 우리은행·KDB대우증권·LIG손해보험 등 금융회사는 물론 ADT캡스·OB맥주·동양매직·동양파워 등이 인수자를 기다린다. M&A 규모만 약 30조~40조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매물이 더 쏟아질 가능성도 있다.
정부는 올해부터 총신용 공여의 0.1% 이상이던 주채무계열 선정 기준을 0.075%로 하향 조정해 재무관리 대상기업을 확대하기로 했다. 이 경우 대성·한국타이어·애경 등 10여 그룹이 금융권 관리대상에 포함될 가능성이 크다. 경제개혁연구소에 따르면 이미 법정관리·워크아웃 중인 웅진·동양·STX·금호아시아나를 제외하고, 연결부채비율이 300%를 넘는 그룹은 9개다.
동부·한진·현대그룹을 포함해 두산·효성·한국GM·한라·한진중공업·동국제강·대성그룹은 부채비율이 200%를 넘고, 영업이익으로 이자비용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기업 중 일부가 구조조정 가시권에 들어올 수 있다.
이런 와중에 나온 국내 재계의 허리그룹인 한진·동부·현대의 자구 계획 성공 여부는 향후 기업 구조조정 전체 판을 흔들 관전 포인트다.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면 숨통이 트이겠지만, 매각 지연이나 헐값 매각 늪에 빠지면 유동성 해소 효과는 미미하고 기업 경쟁력만 약화될 수 있다. 이들 세 그룹마저 무너지면 파장은 가늠하기 어렵다. 재계가 숨죽여 세 그룹을 지켜보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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