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파워피플 [49] 마테오 렌치 이탈리아 총리 - ‘유럽의 병자’ 치유할 개혁의 기수
글로벌 파워피플 [49] 마테오 렌치 이탈리아 총리 - ‘유럽의 병자’ 치유할 개혁의 기수
올해 2월22일 이탈리아 총리에 오른 마테오 렌치(39)는 젊다. 1975년 1월생이니까 해가 바뀌어야 40세가 된다. 영국의 최연소 총리인 데이비드 캐머런 현 총리가 취임했을 때 나이가 43세 때였으니 렌치는 유럽 전체 기준으로 봐도 젊다. 지난 20년 간 이탈리아 정치의 간판이던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가 77세니까 자그마치 한 세대를 건너뛴 셈이다.
렌치는 38세였던 지난해부터 이탈리아 민주당의 총재를 맡고 있다. 34세였던 2009년부터 이번에 총리에 오르기 직전까지 르네상스로 유명한 유서 깊은 도시 피렌체의 시장을 지냈다. 렌치는 1861년 이탈리아 통일 이후 최연소 총리다. 아울러 의원이 아닌 시장으로 정부 수반이 된 첫 경우이기도 하다.
혜성처럼 나타난 구원투수사실 렌치는 중앙 정계에서 생소한 인물이다. 29세 때 피렌체의 시의회의장을 맡았고 34세 때 피렌체 시장에 당선된 게 경력의 전부다. 이런 인물이 어떻게 이탈리아 총리가 됐을까? 그는 피렌체 시장에 당선되자 레오폴다 역에서 이탈리아 정치를 토론하는 시민의 모임을 조직했다. 이 모임에서 그는 당당하고 과감한 젊은 논객 시장의 이미지를 얻었다.
특히 자신이 소속된 민주당의 철저한 개혁의 필요성을 설파했으며 현실에 안주하려는 정치인을 비롯한 이탈리아 엘리트 층을 질타했다. 그러면서 전국적인 인기를 모았다. 변화를 열망하는 피렌체 시민과 이탈리아 국민이 그의 든든한 후원자였다. 렌치는 2012년 민주당 대표에 출사표를 던지면서 중앙무대에 도전했다. 정치인 렌치의 이름은 전국에 더욱 많이 알려졌으며 지난해 12월 마침내 대표에 선출됐다. 말 그대로 ‘혜성’과 같이 나타난 셈이다.
렌치는 2011년 이후 총선 없이 총리에 오른 세 번째 총리다. 그 해 총선에서 마땅한 주도 정당이 없는 선거 결과가 나옴에 따라 의회에서 합종연횡이 반복되면서 극심한 정국 혼란이 빚어졌다. 마리오 몬티 총리는 13개월을 버티고 두 손을 들었다. 그의 후임자인 민주당의 엔리코 레타는 1년 남짓 총리직을 수행하다 밀려났다. 렌치는 민주당 최고의사결정기구인 당 중앙지도위원회 회의에 총리 교체안을 전격 상정해 불신임 투표 없이 레타를 몰아냈다.
렌치는 2월 13일 당 지도부 앞에서 “나는 무한한 야망을 가진 사람으로서 이 나라가 지금과 같은 경제적 쇠락을 겪도록 할 수 없다”며 무능한 레타를 몰아내자고 호소했다. 그의 호소가 먹혀 그날 회의에서 집권 여당인 민주당은 같은 당 소속인 레타 총리에게 사퇴를 권고키로 결정했다. 개혁을 외치는 렌치도 당내 반란이란 구습을 통해 경쟁자를 몰아내고 자리를 만든 셈이다.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는 ‘렌치가 위험한 지름길을 택했다’고 평가했다.
그러자 조르조 나폴리타노 이탈리아 대통령은 렌치에게 조각과 총리직 수락을 요청했으며 의회는 이를 추인했다. 사실 이탈리아에서 단명 정권은 흔하다. 이는 만성적인 경기침체 속에서도 정쟁이 끊임없이 진행돼 왔음을 의미한다. 이탈리아의 고질병 중 가장 악성인 정치병이다. 경제 문제를 정상화시키지 못한 상황에서 타협에 의한 수시 정권 교체라는 일시적인 진통제 처방만 계속해온 것이다. 이러다 보니 새 정권이 민주적인 정통성을 얻지 못해 리더십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다.
젊고 변화를 외치는 렌치에게 총리를 맡긴 것은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 달라는 기대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렌치는 젊고 변화를 강조한다는 점 때문에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자주 비교된다. 오마바 대통령처럼 렌치도 새로운 세대에 대한 꿈과 희망·기대를 닮은 <아웃> 이란 자서전을 발간했다.
잠시 젊은 렌치 총리를 낳은 이탈리아의 상황을 살펴보자. 최근 들어 이탈리아는 수많은 문제를 드러내 왔다. 특히 문제는 경제다. 2000년대 이탈리아는 심한 성장률 둔화를 기록했다. 이 기간 연 평균 1.23%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유럽연합(EU) 평균인 2.28%의 거의 반 토막 수준이다. 경제성장률이 오랜 기간 낮은 수준이다 보니 실업률도 높다. 지난해 8월 말 기준으로 12.2%였다.
특히 청년 실업률은 40.1%에 이른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웨이트리스 같은 저임금 단순직 외에는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젊은이들이 대부분이다. 이렇게 경제성장률이 둔화됐는데도 정부는 공공 지출을 줄이지 않아 공공부채가 눈덩이처럼 쌓였다. 나라 빚은 그리스에 이어 EU 2위 수준이다. 국내 총생산(GDP)의 132%에 이른다. 이미 국제통화기금(IMF)은 이탈리아 정부에 과감한 허리 졸라매기를 하도록 주문했다.
아울러 산업화되고 관광객이 붐비는 부유한 북부 이탈리아와 농업 중심의 남부 이탈리아의 대립은 국가 통합을 어렵게 하고 있다. 1인당 GDP가 북부와 중부는 유럽 평균의 120% 정도지만 남부는 70%에 불과할 정도다. 이에 따라 이탈리아 남부는 높은 실업률, 부패, 조직범죄 등으로 치안이 불안하다. 이에 따른 지하경제의 만연화로 경제 발전이 더욱 어려워지는 상황이다. 여기에 정치는 불안정하기만 하다. 연정을 해도 금세 붕괴하기 일쑤다.
지난 몇 년 새 이탈리아 연정은 1년을 버티기가 어려웠다. 의원내각제의 단점이란 단점은 모두 나타나는 형국이다. 여기에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는 수시로 스캔들과 막말을 쏟아내 국격을 떨어뜨려 왔다. 이에 따라 당면 과제인 재정개혁 작업은 더디기 이를 데가 없다. 이탈리아가 종종 ‘유럽의 병자’로 불리는 이유다. 아웃>
총리에 오르자마자 마피아와의 전쟁 선언이런 이탈리아에 혜성처럼 나타난 젊은 그를 총리로 ‘발탁’한 가장 큰 이유로 물불 가리지 않는 그의 과단성이 꼽힌다. 성숙미가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올 수 있지만 지나치게 성숙해서 아무런 일도 하지 않으려는 기성 정치인에게 신물이 난 이탈리아인에겐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실제 렌치는 취임하면서 곧바로 개혁에 착수했다. 누구보다 화술에 뛰어난 그이지만 일단 총리에 오르자 말보다 실천을 먼저 시작한 것이다. 그는 가장 먼저 마피아와의 전쟁을 선언하고 나섰다. 마피아가 더 이상 엄청난 현금 동원력을 바탕으로 주요 산업에 침투해 탈세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선언했다. 마피아 때문에 제대로 거두지 못한 세금을 거둬 세수를 확보하겠다는 것이다. 이탈리아판 ‘지하경제 양성화’의 시동을 건 것이다. 이탈리아의 고질적인 검은 경제를 개혁하겠다고 나선 셈이다.
대부분 이데올로기 정당인 이탈리아에서 중도좌파인 민주당을 이끄는 렌치는 당의 우향우도 주장한다. 국민에게 일을 더 많이 시키고 복지는 줄이자는 주장을 서슴없이 하고 있다. 렌치는 채용을 장려하기 위해 급여소득세를 과감하게 줄일 것이라고 밝혔다. 고질병의 하나인 중과세를 줄여 채용과 취업을 장려하려고 한 것이다.
고용안정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현행 노동법도 과감하게 손질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업 경쟁력을 높여 이탈리아 경제를 살려야 고용도 늘어나고, 고용이 늘어야 젊은이들에게 미래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미 이탈리아에서 불도저라는 별명을 얻고 있다.
이 때문에 영국 노동당을 좀 더 중도적인 ‘제3의 길’로 이끌며 신노동당으로 재창당한 뒤 집권한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와도 비견된다. 하지만 렌치 앞의 현실은 블레어보다 더욱 혹독하다. 지난 3년 새 3명의 총리를 맞은 무능 의회를 데리고 ‘유럽의 병자’인 이탈리아 경제를 회복시키고 정치 마비를 부른 정치 관련 법을 고치는 등 개혁도 이뤄낼 고난도 임무가 그 앞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탈리아는 기반이 튼튼한 선진국이다. 제조업이 거의 무너졌던 블레어 집권 초기의 영국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에 따라 이탈리아의 고질병에는 과감성을 내세우면서 국민과 소통을 유지하고 민간과 정치의 열망을 한데 묶는 거버넌스형 리더십을 발휘하면 효과를 얻을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가 처한 현실을 알아보기 위해 현재 이탈리아의 상황을 좀 더 살펴보자. 누가 뭐래도 이탈리아는 유럽의 핵심 선진국이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지난해 명목 국내총생산(GDP)이 2조719억 달러로 세계 9위다. 1인당 GDP는 3만4714달러로 세계 26위다. 이 수치는 유럽연합(EU) 회원국 평균인 3만4060달러를 웃도는 수치다.
경제력뿐 아니라 국제사회에서 지위도 상당하다. 주요7개국(G7)과 G8(G7+러시아), 유로존(유로화를 쓰는 국가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창립멤버다. 농업과 공업, 서비스 산업을 균형 있게 발전시킨 나라이기도 하다. 세계 최대의 포도주를 생산하고 갖가지 토마토·생햄·치즈 등 최고급 음식재료를 생산해 가공·수출하는 농업선진국이다.
파스타, 피자, 에소프레소 커피를 비롯한 이탈리아의 음식 문화는 세계적인 경쟁력을 자랑한다. 이탈리아 음식은 전 세계에서 가장 먼저, 가장 빠르게, 가장 광범위하게 세계화됐다. 그러면서 창의적이고 개성 있는 최고급 품질의 자동차를 비롯한 의약품, 정밀화학제품, 정밀기계, 산업기계 등 고부가 제품을 생산하는 고도산업국가다. 이탈리아는 유럽에서 가장 빠른 최고 시속 360km의 기차를 보유하고 있다.
세계적인 패션 강국이기도 하다. 의류는 물론 핸드백·구두·벨트를 비롯한 가죽제품도 유명하다. 명품과 장인의 나라다. 영화, 오페라, 클래식 음악, 대중음악 등 문화산업도 월드 클래스다. 이탈리아 미술은 오랫동안 유럽 문화의 산실과 교실 노릇을 했다. 유럽의 수많은 유명 화가가 이탈리아에서 공부한 뒤 본국에 돌아가 배운 것을 퍼뜨렸다. 디자인도 세계적인 강국이다. 특히 자동차 디자인은 이탈리아를 따라올 나라가 없을 정도다.
지역마다 특색 있는 다양하고 풍부한 음식 문화와 포도주 문화, 그리고 넘치는 문화생활, 멋진 패션생활 속에서 사는 이탈리아인의 삶의 질도 수준급이다. 2012년 삶의 질에서 세계 8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이탈리아는 메디치가를 낳은 르네상스의 산실 피렌체, 물의 도시로 한때 교역으로 아드리아해와 지중해를 지배했던 베네치아, 매력적인 도시 나폴리, 장엄한 도시 밀라노, 항구 도시 제노바 등 전국 곳곳이 관광지다.
삼면이 바다이고 북으로는 알프스가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그 아래로는 빙하가 만든 환상적인 호수들이 펼쳐져 눈이 시리도록 푸르다. 고대 로마부터 중세와 근대 유적까지 고개만 돌리면 문화유적이라고 할 만큼 볼거리와 역사가 풍부하다. 온나라가 전 세계에서 몰려온 여행객으로 북적인다. 오죽하면 ‘반드시 나폴리를 보고 죽으라’라는 황당한 농담까지 나왔겠는가.
‘과거와의 단절’ 선언하고 국민과의 소통 강화이런 이탈리아를 정치와 재정 개혁을 통해 정상화시키는 임무가 렌치에게 맡겨진 셈이다. 이런 렌치에겐 노회함보다 과단성이 더 필요할 수 있다. 렌치는 2월 말 ‘과거와의 단절’을 선언했다. 개혁신호탄을 쏜 셈이다. 특히 교육과 인프라 부분에서 과감한 투자가 필요하다며 이를 통해 이탈리아 경제 재도약의 발판을 만들겠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국민과의 소통을 부쩍 강조하고 있다. 리더 개인의 원맨쇼나 행정이나 정치가 알아서 골머리를 짜는 방식을 넘어 민간과 정계가 함께 대화하고 지혜를 모으는 거버넌스형 리더십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렌치는 4월 17일부터 30일 사이 이탈리아 TV 화면에 하루 평균 5시간 정도 등장하는 기록을 세웠다.
렌치 총리 자신이 직접 TV 토크쇼에 출연해서 희망과 비전을 밝힌 것이 17시간이나 된다. 그 밖에 뉴스 단신에 22시간 등장했고, 역할 수행에 대한 소식이 29시간을 차지했다. 그의 이러한 채찍질에 부동의 이탈리아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고 있다. 젊고 박력 있는 렌치에게 기대가 모이는 이유다.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28일 서울 지하철 9호선 일부구간 '경고 파업' 철회
2‘하늘길도 꽁꽁’ 대설에 항공기 150편 결항
3‘이재명 아파트’도 재건축된다…1기 선도지구 발표
4코스피로 이사준비…에코프로비엠, 이전상장 예비심사 신청
5‘3000억원대 횡령’ 경남은행 중징계….“기존 고객 피해 없어”
6수능 2개 틀려도 서울대 의대 어려워…만점자 10명 안팎 예상
7중부내륙철도 충주-문경 구간 개통..."문경서 수도권까지 90분 걸려"
8경북 서남권에 초대형 복합레저형 관광단지 들어서
9LIG넥스원, 경북 구미에 최첨단 소나 시험시설 준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