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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30년 <이코노미스트>로 되짚은 한국 경제 30년 ① 1989~1993년 - 민주화 열기 속 수출 1000억 달러 돌파

창간 30년 <이코노미스트>로 되짚은 한국 경제 30년 ① 1989~1993년 - 민주화 열기 속 수출 1000억 달러 돌파

1996년 12월, 민주노총 산하 노조원 2만명이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39노동악법 철폐39를 주장하면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3저 시대가 저물던 1988년 중반부터 국내에는 위기론이 서서히 번졌다. 본지 역시 ‘3저 시대가 가고 5고(고환율, 고임금, 고금리, 고원자재가격, 고경쟁)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고 경고한다. 특히 서울 올림픽 이후, 온갖 정치·경제·사회 문제가 분출되고 세계 경제마저 가라 앉으면서 호황의 시대는 서서히 저물기 시작했다.

이코노미스트가 뽑은 1988년 10대 경제 뉴스는, 원화 절상과 수입 개방, 공산권 직교역 확대, 부동산 투기 과열을 막기 위한 8·10조치, 공공기관(서울시 지하철공사노동조합) 첫 파업, 한국은행 독립 논란 등이다. 사상 처음으로 무역 수출입 규모가 1000억 달러를 돌파했고, 중국이 우리나라 10대 교역국에 진입한 것도 이때다.



1990년대 초 세계화 구호 속에 외환위기의 씨앗하지만 당시에도 국내 경제 전문가들은 수출과 내수의 불균형을 우려했다. 요즘도 쉽게 볼 수 있는 논조의 글이 그때도 실렸다. 본지 117호(1989년 1월)에 실린 정병수 성균관대 교수의 지적은 이렇다.

‘내수 성장의 길은 국민경제 각 부문 간의 균형과 조화를 통해 경제민주화에 이르는 길이기도 함을 우리는 명심해야 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수출 성장으로부터 내수 성장으로 방향을 조정해 성공할 수 있다면 우리는 새로운 경제성장의 경험을 역사에 기록하게 될 것이다.’

당시 외신은 한국이 샴페인을 너무 빨리 터뜨렸다는 비판 기사를 싣기 시작했다. 본지 역시 1990년 초 경제개혁 관련 기사를 연이어 실었다. 훗날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금융통화위원을 지낸 김태동 성균관대 교수는 기고에서 이렇게 진단했다. ‘구조개혁 없이 경제력 집중이 계속되는 한 우리 경제는 항상 물가가 불안해 경쟁국보다 인플레이션율이 높을 것이고, 수출 증대를 통한 성장에도 한계가 있을 것이다.’

물가도 불안했다. 1989년 5.7%이던 물가는 1990년 8.6%, 1991년 9.3%로 뛰었다. 1990년 말 이코노미스트에 실린 현장르포는 주부들의 말을 이렇게 전한다. ‘장에 나가기가 겁나요. 물가가 오르게 마련이지만 하루가 다르게 이렇게 오를 수도 있는 건지…. 시장에 다녀오면 마치 돈을 잃어 버린 기분이 들어 지출을 맞춰 보느라 머리가 아프다. 부르는 게 값이다.’ 이런 와중에도 한국 경제는 1990년 9.3%, 이듬해 9.7% 성장했지만, 고성장의 끝자락이었다.

한편, 당시 눈에 띄는 기사가 있다. 175호(1991년 6월)에 실린, ‘재계의 목청 높아지고 있다’는 분석 기사다. 내용은 이렇다. ‘정부와 재계의 갈등은 외견상으로는 정부 정책에 대한 불만으로 심화돼 왔다. 반면 정부는 정부대로, 기업들이 커지니까 정부 말을 안 듣는다는 불만을 표시해 왔다.’ 그만큼 대기업의 영향력이 커졌다는 방증이다.

1990년대 초부터 논의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에 대해선 조심스런 입장을 전했다. 당시 김태준 대외경제정책연구원책임연구원(현 한국금융연구원장)은 OECD 가입이 국내 민주정치체제 발전과 시장경제 확대에 이바지할 것이라면서도, 자본시장 개방과 개발도상국 특혜 포기, 경제 구조조정 압력 강화 등을 우려했다.

가입 자체보다는 가입 시점이 핵심이라는 지적이었다. 하지만, 훗날 김영삼 정부는 OECD 가입을 강행했고 결국 외환위기의 씨앗이 되고 말았다. 또한 국제수지 적자와 임금상승, 수입 자유화에 따른 과소비 풍조, 기업 자금난에 대한 우려도 많았다. 이 역시 훗날 외환위기의 중요한 원인이 된다.

1992년으로 접어들면서 경기 악화에 대한 우려는 더 커졌다. 100대 상장사 대상의 조사에서 전체의 68%가 경기가 전년보다 악화될 것으로 예상했다. 실제로 1992년 우리나라 경제성장률은 5.8%로 급락했다. 당시 한국 경제는 대수술이 필요한 시점이었지만 1992년 치러진 4대 선거(국회의원·지자체·지방의회·대통령 선거)로 실기했다.



노태우 정부 경제정책 지지부진당시 본지는 14개 경제단체와 민간경제연구소를 대상으로 ‘6공화국 남은 1년 과제’를 조사했다. 국제수지 개선, 금리 인하, 노사 안정, 시장개방 대응, 물가 안정, 제조업 체질 강화, 부동산 투기 근절, 임금 안정, 정부 규제 완화 등이 꼽혔다. 제대로 고쳐진 것은 없었다.

정치권과 재계에서는 국민당을 창당해 대권 도전에 나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재벌 해체론’이 큰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206호(1992년 10월) ‘한-중 새 시대’ 특집에서는 1992년 8월 국교 정상화를 계기로 우리 기업의 중국 러시현상을 다뤘다. 수교 당시 양국 교역 규모는 49억 달러였다. 지난해에는 2290억 달러로 급증했다.

3저 호황을 깔고 출발한 노태우 정부 경제정책은 지지부진했다. 당시 본지 평가는 이렇다. ‘6공 경제는 산업 구조조정, 근로자의 권익시장, 재벌의 규제, 북방 경제의 성공 등 긍정적인 평가보다는 국제수지 적자, 고물가와 고임금, 고금리, 부동산 시장 폭등, 소득 불균형, 외채 증가, 노사 갈등, 제조업 경쟁력 상실, 선진국병에 걸린 국민의 과소비, 3D 기피 현상, 일관성 없는 경제정책 등 부정적인 것으로 요약된다’. 1992년에는 선경(현 SK)에 대한 제2 이동통신 특혜 의혹,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정치참여,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의 출마설 등도 화제였다. 외국인에 대한 증시 개방도 핫 이슈였다.

1993년 문민정부 출범과 함께 ‘YS(김영삼) 노믹스’에 대한 기대는 컸다. 김영삼 정부는 ‘신한국 건설’과 ‘신경제’를 내세우며 학계인사를 내각에 대폭 기용했다. 박재윤 경제수석과 이경식 경제부총리를 투 톱으로 경제팀을 꾸렸다. 문민정부 경제팀이 내민 첫 개혁 카드는 금융실명제였다.

본지 218호(1992년 4월)는 ‘경제질서를 바로잡는 근본이 되는 제도’라는 강철규 당시 서울시립대 교수의 기고와 함께 문제점과 보완 대책을 심층적으로 다뤘다. 가장 우려했던 것은 경기회복이 절실한 시점에서 금융실명제가 자칫 경제활성화 노력과 성장 잠재력 확충에 저해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또한 YS정부가 야심 차게 발표한 신‘ 경제 100일 계획’에 대해선, 재계와 전문가들의 의견을 모아 이렇게 지적했다.

‘국민의 고통 분담이라는 비경제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것이 이 계획의 특징이며, 또 그 만큼 모험에 가까운 실험적 성격이 강하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단기적인 경기 부양에 치중한 이 정책은 1993년 후반 경기 반등과 1994년 8.8% 성장, 1995년 8.9% 성장 등 호황으로 이어지는 듯했지만, 결국 그 끝은 IMF 구제금융으로 귀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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