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int

오! 상트페테르부르크!

오! 상트페테르부르크!



위대한 도시는 이름을 잘 바꾸지 않는다. 물론 뉴욕은 과거 뉴암스테르담이었다. 하지만 이름을 바꿀 만한 이유가 분명히 있었다. 네덜란드 식민지를 영국이 점령했기 때문이었다. 그럴 경우 옛 이름을 유지하는 것은 예를 들어 호텔의 이전 숙박자가 사용한 방에서 침대보를 갈지 말라고 요청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콘스탄티노플(고대 그리스 시대엔 비잔티움으로 불렸다)은 1453년 오스만 제국이 그곳을 점령한 후 이스탄불로 이름을 바꿨다. 또 봄베이는 뭄바이가 됐고, 사이공은 호찌민 시티로 변했다. 심지어 미국 뉴멕시코주 핫스프링스는 1950년 트루스오어컨시퀀시스로 개칭했다[유명한 라디오 프로그램 ‘트루스 오어 컨시퀀시스(Truth or Consequences)’의 진행자 랠프 에드워즈가 이 프로그램의 이름으로 명칭을 바꾸는 도시에서 첫 번째 방송을 시작하겠다고 하자 핫스프링스는 그렇게 이름을 바꿨다]. 하지만 지금까지 거론한 도시들은 매우 특이한 경우다. 일반적으로는 도시가 위대할수록 그 이름이 변하지 않는다. 런던은 늘 런던이고 파리는 언제나 파리다.

그렇다면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어떤가? 그 도시는 이름이 두 개가 아니라 세 개나 됐다. 두 번 개칭했다가 수십 년 뒤 다시 원래 이름으로 돌아갔다. 현재 그 이름은 몇 십 년 만에 꺼내 입은 외투처럼 어울리지 않게 그 도시를 덮어 싸고 있다. 그 이름이 겪은 수난은 여러 면에서 러시아와 서구 사이의 고통스러운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늘 그랬듯이 지금도 그 관계는 매우 불안하다



첫 개칭은 정확히 100년 전인 1914년 9월 1일 시작됐다. 그날 상트페테르부르크는 페트로그라드가 됐다. 외부 세력이 그 도시를 점령한 것도 아니었다(누구도 그곳을 점령한 적이 없다). 슬라브식으로 이름을 바꾼 것은 단지 국민 정서가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유럽을 등지려는 고립주의를 말한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원래의 유럽식 이름이 다시 돌아왔지만 한때 러시아의 가장 전위적인 도시로서 상트페테르부르크(줄여서 페테르부르크라고도 한다)의 상징이던 유럽적 이상은 과거의 영광 속에 남아 있을 뿐이다.

물론 중앙대로 네브스키 프로스펙트(먼지 날리는 샹젤리제 격이다) 노변에는 서양식 부티크들이 늘어서 있다. 미국인 관광객은 없지만 핀란드인 관광객들이 에르미타주 미술관에서 사진을 찍는다. 누군가 마티스나 고갱 작품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험상궂은 안내원들이 엄격하게 저지한다.

그러나 겉과 달리 속은 페테르부르크가 아니라 예전의 페트로그라드 그대로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1703년 러시아 황제 표트르 1세가 ‘유럽으로 통하는 창(window into Europe)’을 만들고자 건설했다. 어린 시절 서유럽을 다니며 교육받은 그는 어지러운 모스크바의 슬라브식 혼돈을 혐오했다. 그래서 그의 도시는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건축가들이 설계하고 지었다. 러시아로선 지나치게 격식화되고 직선적인 설계였다. 러시아가 마침내 멋진 현대로 진입했다는 것을 유럽인들에게 선언하기 위해 세워진 도시였다.

그 다음 2세기 거의 대부분 로마노프 왕조의 통치자들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궁전에서 지냈다. 그 궁전은 서구를 향한 그들의 열망을 상징하는 건축이었다. 당시 디드로 같은 프랑스 철학자들은 예카테리나 2세와 어울렸고, 러시아 탐험가들은 캘리포니아에 전초기지를 세웠다. 러시아의 대부분은 중세의 봉건제 농업에 얽매어 있었지만 제국의 끝자락인 페테르부르크에선 화학자 멘델레프가 원소의 주기율을 발견했고, 차이코프스키가 ‘호두까기 인형’을 작곡했다.

그러나 1914년 여름 러시아 제국은 독일을 상대로 전쟁에 돌입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었다. 서구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감정은 이미 상해 있었다. 게르만식으로 들리는 페테르부르크라는 제국의 수도 이름이 그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 역사학자 솔로몬 볼코프에 따르면 러시아의 1차대전 참전에 따른 애국주의의 광분 속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이름을 바꾸자는 결정이 내려졌다. 볼코프는 저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문화역사(St. Petersburg: A Cultural History)’에 이렇게 썼다. “독일 가게들이 공격을 당했고 독일 대사관 꼭대기에 세워진 거대한 말 주철상들이 거리로 내팽개쳐졌다. 그 와중에 상트페테르부르크를 페트로그라드로 개칭하는 안이 진지한 논의 없이 통과됐다.”

독일에 대한 적대감이 부른 터무니없는 사건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이름의 기원은 독일이 아니라 네덜란드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원래는 수호성인 성베드로의 이름을 딴 도시였지만 페트로그라드로 바뀌면서 그 도시는 인간 표트르, 황제 표트르의 도시가 됐다”고 볼코프는 지적했다. 그런 유치하고 치명적인 ‘위인’ 숭배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페트로그라드란 이름은 오래 가지 못했다. 1924년 1월 26일 그 도시는 레닌그라드로 다시 이름을 바꿨다. 그 직전 작고한 볼셰비키 지도자 레닌을 기리기 위한 조치였다. 그 두 번째 개칭으로 러시아의 가장 유럽적인 도시 이름에서 유럽의 마지막 흔적까지 지워졌다. 그후 수십 년 동안 스탈린과 그의 후계자들 아래 소련은 과대망상과 광적인 편집증으로 지탱되면서 더욱 고립됐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겨울궁전 앞에서 시민들이 ‘국기의 날’을 축하하고 있다 (2014년 8월 22일).
나는 레닌그라드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당시 핵 재앙과 부패한 자본주의 서방에 대한 승리라는 상충하는 비전이 가득했던 것을 지금도 기억한다. 또 그곳은 ‘영웅 도시’였다. ‘900일간의 전투’로 알려진 잔혹했던 독일군 포위에서 살아남은 뒤 붙여진 이름이었다. 스탈린은 사실상 히틀러를 러시아의 문간까지 초청했다. 또 그의 망상적인 숙청으로 러시아인 약 30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그런 사실은 한번도 언급되지 않았다. 사회주의 혁명은 숙명에서 벗어나는 그런 언급을 용인할 수 없었다.

1991년 여름, 소련이 명을 다해 생명유지 장치에 의존하게 되자 레닌그라드가 원래의 이름을 되찾는 문제를 두고 주민투표를 해도 좋다는 승인이 떨어졌다. 거의 모두가 그 발상을 환영했다. 러시아인들은 과거에 대한 향수가 강하기 때문이다. 뉴욕타임스 신문은 개칭을 지지하는 은퇴 배우의 말을 이렇게 인용했다. “아주 자연스러운 이름이다. 우리 도시는 지난 70년 동안 추하고 부자연스러운 이름을 가졌었다. 지금 우리 모두는 그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이고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돌아왔지만 그 속에는 페트로그라드가 그대로 남아 있다. 그 도시는 푸틴의 통치 아래 해가 갈수록 레닌그라드를 더욱 닮아간다.주민투표에서 개칭안이 통과됐다. 드디어 상트페테르부르크가 돌아왔다. 하지만 너무도 조용한 귀환이었다. 뉴욕타임스는 1991년 9월 7일 이렇게 보도했다. “이 역사적 변화에 대한 의회의 공식 승인은 간단한 팩스로 저녁 9시께 시장 사무실로 전달됐다. 아나톨리 A 소브차크 시장은 보이지도 않았다. 불꽃놀이도, 군중대회도,연설도 없었다. 추운 밤거리에는 시민들이 이제 과거와 이름이 다른 도시에서 살게 됐다는 사실도 모르는 채 집으로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시민 다수는 옛 이름을 되찾은 것을 상서로운 조짐으로 간주했다. 고립주의와 편협한 지역주의에 사로잡혔던 러시아 정부에 의해 빛을 잃었던 페테르부르크가 러시아와 유럽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다시 맡게 됐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게다가 무명인사이긴 하지만 충직한 KGB 요원 출신이자 그 도시 출신인 블라디미르 푸틴이 크렘린에 입성한 것도 마찬가지로 좋은 조짐으로 비쳐졌다. 전임자 보리스 옐친 대통령이 술집 메뉴보다 약간만 더 복잡한 일이 닥쳐도 전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보드카에 절어 지냈기 때문이었다. 미국에서 조지 W 부시가 백악관에 텍사스인들을 데려간 것처럼 푸틴도 크렘린을 페테르부르크 충성파로 채웠다. 그에 따라 권력이 네바 강둑으로 돌아왔다. 표트르와 예카테리나가 권력을 휘둘렀던 바로 그곳 말이다.

그러나 역사는 결코 그렇게 아름답지 못하다. 푸틴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무의미하게 페트로그라드로 개칭했던 바로 그 국수주의를 다시 불러일으키려고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분명히 잘못됐지만 정치적으로 유용하기 때문이었다. 1991년 레닌그라드를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개칭하는 문제를 두고 실시된 주민투표에서 푸틴이 반대표를 던졌다고 해도 나는 놀라지 않을 것이다. 서방을 향한 그의 반감, 세계에서 러시아의 역할에 관한 그의 열등의식이 너무도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푸틴은 러시아인들의 향수를 교묘히 역이용했다. 러시아인 다수가 갈망하는 것이 유럽으로 돌아가는 험난한 길이 아니라 옛 소련으로 돌아가는 훨씬 쉬운 길이라는 것을 그는 영리하게 파악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명칭 회복 20주년 기념식에서 군인들이 축하행사를 진행하고 있다(2011년 9월 6일).
그래서 푸틴은 러시아가 모든 유럽적인 것을 버릴 것이라고 선언했다(물론 그렇게 하는 게 편리하다고 판단될 때만 말이다). 붉은 광장에선 자유 언론과 동성애자 권리가 용인되지 않는다. 파시즘과 주먹다짐을 좋아하는 친정권 폭력배가 아니라면 평화적인 시위를 벌일 자유도 없는 경우가 많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동부의 술에 취한 분리주의자들이 민간 항공기를 격추시키는 것을 돕고, 시리아에 무기를 판매하고,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나 존 케리 미 국무장관의 말을 무시하고, 시민사회와 법의 지배에 관한 훈계를 듣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1918년 메리얼 뷰캐넌(러시아 주재 영국대사 조지 뷰캐넌경의 딸)은 ‘곤경에 빠진 도시 페트로그라드(Petrograd, The City of Trouble: 1914-1918)’라는 책을 펴냈다. 그 책에서 뷰캐넌은 1917년의 절박한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전쟁이 지리멸렬하고 러시아인들의 불만이 고조됐던 때였다. 그녀는 그 병든 도시를 두고 이렇게 썼다. “모든 게 나쁘거나 불쾌함을 암시했다. 영광스러운 어머니 러시아를 망치려는 사악한 영향력이 작용하는 게 분명했다.”

사악한 힘이 성스러운 러시아 땅을 덮치려 한다는 그런 의심은 1세기 전 페트로그라드에서처럼 지금 모스크바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당시엔 적어도 두려워해야 할 진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적의 대부분을 푸틴이 스스로 만들어냈다. 뜬소문, 블로그, 크렘린의 시혜를 받은 TV 방송인 등이 부추기는 음모설이 난무하는 실정이다. ‘우크라이나 동부 상공의 말레이시아항공 MH17편 격추는 이스라엘의 소행’,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의 시위자들은 나치’, ‘동성애자는 선동가’, ‘외국 구호요원들은 스파이’라는 온갖 유언비어가 떠돈다. 외교관 출신으로 브루킹스 연구소장인 스트로브 탤벗은 미국 정치전문 매체 폴리티코에 기고한 글에서 푸틴이 러시아를 “스스로 적을 만들어내는 피해망상 국가(a paranoid state that makes its own enemies)”로 전락시켰다고 질타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크렘린은 그런 음모론을 즐긴다. 그들은 유대인, 미국인, 체첸인 등 적으로 간주하는 모든 존재를 상대로 그런 이야기를 갖다 붙인다. 제2차 세계대전 이래 그 적들 대부분은 허위로 만들어냈거나 과장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건 그들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비극을 견디면서 끝내 승리한다는 역사적인 서사만이 중요할 뿐이다. 그에 따라 모두 러시아를 적대시하지만 러시아만 승리한다고 설파한다.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국민은 자신을 희생하고, 정권이 말하는 대로 따라야 하며, 크렘린의 붉은 성벽에서 무심하게 침묵을 지키는 통치자를 의심해선 안 된다.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이전의 두 이름으로 되돌아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도시들은 그런 운이 없을지 모른다. 소련 시절에 스탈린그라드로 불렸던 지금의 볼고그라드는 그 옛 이름으로 되돌아갈 가능성이 크다. 2차대전 당시 그곳에서 치러진 피비린내 나던 전투에 대한 헌사로서 말이다. 아직 개칭이 현실화되진 않았지만 그런 조짐은 조지아 출신 독재자 스탈린을 향한 푸틴의 노골적인 애정과 맥을 같이 한다.

인구 수백만 명인 대도시의 이름을 갈아치우는 것은 단칼에 역사를 바꾸는 일과 마찬가지다. 상트페테르부르크가 페트로그라드가 됐을 때 그 도시는 유럽을 등졌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어른들의 방에 들어가고 싶어하는 어린 아이처럼 그 도시는 유럽의 끝자락에서 서성거렸다. 그러다가 레닌그라드가 되면서 더욱 내면으로 침잠했다. 1991년 77년만에 다시 원래 이름을 찾았지만 외면상의 변화에 불과했다. 그 아래 깔린 소비에트 정서를 지우려는 노력은 전혀 없다. 푸틴은 스스로 무릎을 칠 정도로 효과적으로 그 정서를 잘 이용하고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돌아왔지만 그 속에는 페트로그라드가 그대로 남아 있다. 그 도시는 푸틴의 통치 아래 해가 갈수록 레닌그라드를 더욱 닮아간다.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코오롱 ‘인보사 사태’ 이웅열 명예회장 1심 무죄

2‘코인 과세유예·상속세 완화’ 물 건너가나…기재위 합의 불발

3최상목 “야당 일방적 감액예산…결국 국민 피해로”

4日유니클로 회장 솔직 발언에…中서 불매운동 조짐

5최태원은 ‘한국의 젠슨 황’…AI 물결 탄 SK하이닉스 “우연 아닌 선택”

6서울지하철 MZ노조도 내달 6일 파업 예고…“임금 인상·신규 채용해 달라”

7인천시 “태어나는 모든 아동에게 1억 준다”…출생아 증가율 1위 등극

8경기둔화 우려에 ‘금리 인하’ 효과 ‘반짝’…반도체 제재 우려↑

9얼어붙은 부동산 시장…기준금리 인하에도 한동안 ‘겨울바람’ 전망

실시간 뉴스

1코오롱 ‘인보사 사태’ 이웅열 명예회장 1심 무죄

2‘코인 과세유예·상속세 완화’ 물 건너가나…기재위 합의 불발

3최상목 “야당 일방적 감액예산…결국 국민 피해로”

4日유니클로 회장 솔직 발언에…中서 불매운동 조짐

5최태원은 ‘한국의 젠슨 황’…AI 물결 탄 SK하이닉스 “우연 아닌 선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