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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수단 구하기 ’ 나선 조지 클루니의 좌절 … 스타 인도주의의 가능성과 한계

‘ 남수단 구하기 ’ 나선 조지 클루니의 좌절 … 스타 인도주의의 가능성과 한계

미국 워싱턴 의사당 앞에서 열린 다르푸르 인종학살 규탄대회에서 조지 클루니가 연설하고 있다 (2006년 4월 30일).
2012년 3월 어느 날 오전 나일 강변의 술집에선 종업원이 바닥을 닦고 빈 병과 잔들을 치우고 있었다. 조지 클루니가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내가 앉은 테이블로 느릿느릿 걸어왔다. 클루니는 북쪽 교전지역으로 가기 전에 두어 시간 정도가 남는다고 했다. 그래서 그를 나일 강변의 구호요원용 호텔에서 만나기로 했다.

녹색으로 흐르는 넓은 나일강이 장관이었지만 클루니는 경관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술집 위의 잔디 지붕과 벽에 부착된 빈 술병들, 아직도 작은 원 모양으로 모여 있는 빈 의자를 둘러봤다. “밤중에 여기 온 적이 있나요?” 클루니가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가 싱긋 웃었다. “그렇다면 이곳이 열광의 도가니라는 걸 잘 알겠군요. 나도 여기서 아주 열띤 밤을 몇 번 보냈죠.”

클루니는 수단에서 활동하는 인도주의 운동가 존 프렌더가스트와 함께 남수단의 수도 주바에 방금 도착했다. 몇 시간 뒤 그들은 전투지역으로 들어갈 계획이었다. 그곳에 가려면 비행기를 타고 새로 생긴 수단 국경 바로 아래의 비포장 활주로에 내린 다음 바닥에 철판을 깐 낡은 SUV로 갈아타야 한다.

그 SUV는 라이언 보이옛이 운전한다. 보이옛은 미국인 구호요원으로 수단에서 결혼한 뒤 그곳에 정착했다. 그 역시 인도주의 운동가로 수단 정권의 누바족 박해 만행을 폭로하는 일에 전념하고 있다. 그는 클루니와 프렌더가스트를 태우고 수단 국경을 불법으로 넘어가 그들을 누바 산악지대로 데려다 주기로 자원했다.

그곳 반군 지역에 보이옛이 아내와 함께 살려고 손수 지은 집이 있다. 몇 달 전 수단 공군이 그 집을 폭격하려 했다. 그들 세 명이 가야 하는 길도 거의 매일 폭격을 받는다. 수단 공군은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석유를 담은 통에 폭약을 붙여 고도 1.6㎞ 이상의 상공에서 떨어뜨린다. 클루니는 그런 공습을 직접 목격하러 그곳에 간다.

“그들은 1.8㎞ 상공에서 그 폭탄을 떨어뜨려요”라고 클루니가 말했다. “따라서 실제로 인명을 살상하기보다 공포심을 유발하려는 겁니다. … 더 큰 문제는 지상의 폭력이죠. 일부 괴한들이 그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총격을 가하고, 죽이고, 흉기로 목을 그어요. 그러니 아주 조심해야 하지요.”

신변에 위협을 느끼지 않는지 물었다. 클루니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그런 경험은 충분히 했어요. 또 현지 사정과 요령을 잘 아는 사람들과 함께 가기 때문에 문제없어요. 아무튼 내가 해야 할 일이죠.”




스타 인도주의 운동가이런 일에 유명인사가 꼭 필요하다면 클루니가 적격인 듯하다. 그때가 클루니의 일곱 번째 수단 방문이었다. 그는 그 일을 하느라 사재 수십만 달러를 썼다. 그가 아프리카의 전쟁 지역에 간다고 발표했을 때 할리우드의 영화제작사 간부들과 에이전트들이 성난 목소리로 말렸을 게 뻔하다. 그의 세대에서 최고 스타 중 한 명인 클루니가 이제 오지 중의 오지로 향하는 위험천만한 길을 가려고 한다.

부족간의 충돌로 유혈사태가 벌어지자 피난길에 오른 남수단의 주민들.
클루니는 수단에서 일어난 여러 차례의 반란을 목격했다. 수단은 2011년 7월 남과 북으로 공식 분단되기 전만 해도 아프리카와 아라비아의 경계선에 위치한 아프리카 최대의 국가였다. 아프리카 남부에서 유럽 기독교 제국주의자들이 그랬듯이 이곳에선 아랍인들이 수세기 동안 이교도 아프리카인들을 계몽시킨다는 명분 아래 그들을 노예로 삼고, 정복하고, 착취했다.

1956년 독립한 후 수단의 수도 하르툼에 들어선 정권은 그런 과거의 전철을 그대로 밟아 독재 국가를 세웠다. 그들은 석유를 착취해 축재와 낭비를 일삼았다.

제국주의 시대에 아프리카 해방 물결을 일으킨 것도 바로 그런 행동이었다. 독립으로 식민지에서 탈피했지만 수단 정권은 제국주의와 똑같은 행동을 함으로써 또다시 나라 전역에서 발생한 반란에 시달렸다. 특히 좀 더 기독교적이고 아프리카적인 남부 지역에서 투쟁이 심했다. 정부는 탄압으로 대응했다.

또 1989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부는 급진적인 이슬람주의를 실천했다(1990년대에 오사마 빈 라덴은 그런 점이 마음에 들어 하르툼에서 5년을 지냈다). 반세기 동안 거의 끊임없는 싸움으로 20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새천년 초 수단은 젊은 미국인 인도주의 운동가들의 주목을 받았다. 수단 내전의 희생자가 너무도 많고, 9·11 후 이슬람주의자들이 미국의 공적 1호가 됐으며, 건국 신화가 노예무역과 얽혀 있는 미국의 시민으로서 수단이 노예제를 계속 유지하는 것을 도덕적으로 용인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클루니가 그 대의에 앞장섰다.

클루니는 먼저 2003년 수단 서부 지역 다르푸르에서 자행된 수단 정부의 만행을 규탄했다. 수단 정부의 아랍화 정책에 비아랍인들이 반기를 들고 정부군을 상대로 투쟁한 유혈사태였다. 2004년 미국 정부가 그 내전을 집단학살로 규정하자 클루니를 비롯한 인도주의 운동가들은 국제형사재판소에 탄원해 오마르 알-바시르 수단 대통령을 전쟁범죄와 인도에 반하는 범죄 혐의로 기소하도록 했다.

2005년 미국은 수단 정부와 남부의 최대 반군인 수단인민해방군(SPLA) 사이의 평화협정을 중재했다. 그 협정에는 분리독립 주민투표 조항이 들어 있었다. 그후 클루니는 인터뷰, TV 출연, 미 의회와 유엔 안보리에서의 증언, 오바마 대통령 면담 등을 통해 휴전이 남부의 완전한 독립으로 가는 첫 단계가 돼야 한다고 세계를 설득했다.

2011년 1월 남부 수단 주민 98.8%가 분리독립 투표에 참여해 최신생 국가를 탄생시켰을 때 클루니는 주바에 있었다. “그때는 정말 대단했다”고 클루니가 돌이켰다. “평생 투표를 해보지 못한 아흔 살 할머니가 몇㎞나 걸어 투표소에 가서 난생처음 자유를 선택하는 투표를 했다. 내 눈으로 직접 봤다. 투표율이 98%가 넘었다는 사실이 너무도 감동적이었다. 그들은 그 투표를 의무이자, 명예, 특권으로 생각했다.”

협정에도 불구하고 수단 정부는 남부인들, 그리고 새로 생긴 국경선 안에 남은 누바족 같은 반정권 세력을 계속 공격했다. 2010년 10월 클루니는 수단에서 프렌더가스트와 함께 그런 유혈사태를 막을 방법을 모색했다. 그들은 사막 한가운데 누워 별을 쳐다보면서 아프리카의 신생 국가를 탄생시키는 데 일조한 것보다 더 기발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독자적인 첩보 위성을 띄우는 발상이었다. 클루니는 이렇게 돌이켰다. “구글 어스로 개인의 집 위치까지 확인할 수 있는 판에 전쟁 범죄가 저질러지는 현장을 구글 어스로 확인할 수 없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지요. 프렌더가스트도 어쩌면 우리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어요.”

클루니와 프렌더가스트는 미국으로 돌아가 구글맵스와 위성사진 전문 업체 디지털 글로브(Digital Globe)에 협조를 구했다. 그들은 디지털 글로브가 소유한 위성 중 수단 상공에 위치한 세대를 특정 시간대에 한해 임대한 뒤 그 이미지들을 처리해 구글맵스에 덧씌웠다. “이미지를 단순히 확보만 하는 게 아니라 거의 실시간으로 확보해서 신속하게 분석하는 게 관건이었어요.” 클루니가 말했다. “그래야 ‘닷새 전에 이곳은 이런 모습이었는데 이틀 전에는 이렇게 변했다’고 말할 수 있지요.”

“아주 효과적인 수단이죠. 병력 15만 명을 국경에 배치할 때 위성으로 정밀하게 사진이 찍힌다면 발뺌을 하기 힘들거든요. 그렇게 얼렁뚱땅 넘어가기가 어렵죠. 그럴 경우 유엔 안보리가 수단 정부 제재에 거부권을 행사하기는 불가능하죠. 수단 정부가 우리의 일을 터무니없다고 매도하고 공평하지 않다고 말하기 때문에 그런 수단을 동원하면 매우 효과적이죠.”

클루니는 말을 잠시 멈추고 웃었다. “공평하지 않다고요? 좋은 이야기잖아요? 바로 그들이 제 발등을 찍는 꼴이죠.”

스타로서 늘 파파라치에게 사생활을 침해당하는 클루니가 이제는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려고 자신이 파파라초가 되어 독재 정권의 사생활을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아주 근사한 반전이 아닌가? 클루니는 자신이 없었다면 훨씬 더 암울한 상황이 됐을 곳을 바꿔 놓으려고 명성과 재산을 쏟아 부었다. 그는 일반적인 유명인사보다 덜 방종한 모델을 제시했다. 그가 할리우드에서 갖는 지명도와 영향력으로 ‘명성’이라는 개념 자체를 바꿔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클루니는 자신의 한계를 안다. 그의 목표는 명확하다. 사람들이 고통당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자신의 역할도 잘 안다. “내가 정책을 만드는 사람이거나 군인이기 때문에 이곳에 온 게 아닙니다. 단지 이곳의 실상을 TV와 신문에 전하는 게 내 역할이죠. 사람들은 늘 ‘실상을 알면 조치를 취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아요. 예를 들어 우리는 르완다나 보스니아에 관해 잘 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실제는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그곳의 가해자들은 얼마든지 그럴 듯하게 둘러댈 수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적어도 그들이 모른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계속 큰 목소리로 외치며 실상을 알릴 겁니다.”

물론 클루니의 인도주의 운동은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게 더 이상했다. 클루니는 매력적이고 잘 생겼고 유명하고 부자였기 때문에 지구 반대편에서 거대한 새 국가의 탄생을 도울 수 있었다. 영화와 고급 시계, 커피를 광고하던 할리우드의 주연급 배우 중 한 명인 그가 기막힌 솜씨로 수백만 명의 삶과 역사의 흐름을 바꿔 놓았다. 클루니로선 용한 일을 해냈다. 하지만 그게 서방의 영향력이 작동하는 방식이라면 터무니없어 보인다.

클루니에게 수단 북부에 있는 정부 인사들을 만난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수단의 미래는 미국 배우가 간섭할 일이 아니다”라고 불만을 드러냈다. 그가 아무리 ‘쿨’해도 말이다. 클루니는 하르툼에 한번 갔지만 실망만 했다고 대답했다. 수단 정부는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게 그를 더욱 분투하게 만들었다. 클루니는 수단이 자신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회의를 품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자신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믿고 명확한 도덕적 의무도 인식했다. 클루니로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기에 그 일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나는 문제가 그보다 훨씬 복잡하다고 본다. 멀리 떨어진 외국 땅에서 할리우드 배우가 그런 영향력을 발휘해야 할 이유가 뭔가? 어떤 외부인이라도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의 자유와 독립을 어떻게 대신 가져다 줄 수 있는가? 자유와 독립이란 스스로 쟁취해야 하는 게 아닌가?
남수단의 독립을 확정한 투표 결과가 발표되자 주바의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기뻐하고 있다.




뼈의 도시그로부터 21개월 뒤 남수단은 내부적으로 무너져 내렸다. 2013년 12월 15일 남수단 육군의 파벌 중 누에르족 일파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누에르족 일파는 딩카족 일파가 살바 키이르 남수단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자신들을 강제로 무장해제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진실이 무엇이든 병영 안에서 총격전이 벌어져 시가전으로 확대되면서 군인 500명이 사망했다.

딩카족 군인들은 누에르족 군인과 민간인들을 색출해 학살하기 시작했다. 누에르족 군인들이 반격했다. 각각의 민병대가 가가호호 수색하며 누에르족과 딩카족을 서로 색출했다. 수천 명이 처형돼 거리에 그대로 버려졌다. 도망가던 어린이들도 총에 맞아 숨졌다. 아버지들은 가족 앞에서 목이 잘렸다. 여성들은 납치돼 성폭행당했다.

살바 키이르 남수단 대통령이 유엔 총회에서 연설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2014년 9월 27일).
그 사건으로 세계는 20년 전 르완다에서 100일 동안 거의 100만 명이 학살당한 기억을 되살렸다. 르완다에서처럼 가족의 구성원들이 서로 공격했고 교회, 병원, 학교, 유엔기지 외곽으로 피신한 여성과 어린이는 집단 학살됐다.

올해 4월 15일과 16일 누에르족 민병대가 북부 도시 벤티우를 공격해 수백 명을 학살했을 때 유엔은 현지 라디오 방송의 선동이 도화선이었다고 발표했다. 르완다 사태 당시와 판에 박은 듯이 똑같았다. 다음 날 딩카족 민병대가 보르의 유엔 기지를 습격해 누에르족 난민 58명을 살해했다. 20년 전 세계는 다짐했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으리라고. 지금 미국과 유럽의 신문들은 묻는다. 그게 빈말이었는가? 제2의 르완다 사태가 올까?

2014년 4월 중반 내가 주바에 도착했을 때 남수단의 폭력사태는 4개월째로 접어들고 있었다. 주도 세 곳이 폐허가 됐다. 약 4만 명이 희생됐다. 100만 명 이상이 집을 잃었고, 그중 25만 명이 나라 밖으로 걸어 나갔다. 농사를 지을 사람이 없어서 많은 사람이 굶주렸다. 유엔은 남수단인 700만 명에게 식량 구호가 필요하며 어린이 4만 명이 몇 달 안에 기아로 숨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런 수치로 볼 때 남수단의 붕괴 속도와 심도는 시리아보다 더했다.

유엔 본부에서 남수단의 국기 게양식이 거행되는 동안 남수단 대표가 기뻐 춤을 추고 있다(2011년 7월 14일).
그러자 클루니는 위성의 초점을 남부에 맞췄다. 특히 주바에서 비행기로 1시간 거리에 있는 국경 도시 말라칼이 그 표적이었다. 누에르족 반군들이 말라칼을 세 차례 점령했고, SPLA가 세 차례 탈환했다. 지난 2월 반군들이 그곳을 점령했을 때 피해가 가장 컸다. 클루니가 제시한 이전과 이후의 위성사진들은 이전에 양철집과 초가집 수백 채가 있었던 곳에 검은 자국밖에 남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말라칼과 그 주변에서 추가적인 전투가 임박한 듯했다. 남수단 정부는 국고 수입의 98%를 말라카 부근의 유전에 의존한다. 남수단의 최초 부통령인 리에크 마차르 테니 두르곤은 그 유전과 주바를 점령한 뒤 키이르를 타도하겠다고 선언했다. SPLA가 그를 막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유엔 비행기로 말라칼로 갈 계획이었지만 여의치 않았다. 남수단의 기자 마딩 응고르가 SPLA에 있는 친구에게 연락했다. 1시간 안에 우리는 우크라이나인들이 운용하는 흰색 일류신 76 수송기의 화물칸에 올라탔다.

그 전날 밤 주바에서 응고르와 나는 말라칼에서 방금 돌아온 정부 관리를 만났다. 그에게 그곳 상황을 물었다. “대부분 뼈뿐이죠. 그들이 거리와 교회, 병원에서 양민을 학살을 하고 도시를 완전히 불태웠어요. 개와 새들이 뼈가 있는 곳에 몰려들었어요. 이제 말라칼은 없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말라칼에 도착한 뒤 우크라이나인들이 수송기의 옆문을 열어젖히자 즉시 시체 썩는 냄새가 났다.

말라칼이 완전히 파괴됐기 때문에 우리는 도시에서 1.6㎞ 떨어진 유엔 기지에 머물기로 했다. 기지의 도로에는 로프로 만든 침대 수백 개가 야외 기숙사처럼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그 아래엔 비닐 봉지, 양철 접시, 자동차 바퀴 커버, 대나무 막대기가 쌓여 있었다. 사람들은 판자, 함석 조각, 플라스틱 의자를 계속 갖다 쌓았다. 대머리황새가 그 사이를 돌아다니며 무언가를 쪼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응고르는 다른 SPLA 친구에게 연락했다. 지프 한 대가 우리를 데리러 왔다. 지프가 도시로 향하는 간선도로로 들어서자 처참하게 파괴된 도시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느리고 조용히 시작됐다. 여기엔 박살 난 출입구, 저기엔 불에 탄 오두막집. 작은 가판대에서 비닐 봉지와 종이가 거리로 날아갔다.

독립이 선포된 직후 남수단의 수도 주바에서 한 남자가 텐트 앞에 앉아 있다.
그러다가 갑자기 말라칼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동서남북 어디를 봐도 검게 탄 땅과 무너진 벽, 구부러진 함석판뿐이었다. 초강력 태풍이 지나간 듯했다. 응고르와 나는 차에서 내려 주변을 걸었다. 재에 발이 푹푹 빠졌다. 양쪽 벽은 다 사라지고 금속 대문만 덩그러니 서 있었다. 그 뒤에는 벽돌집이 아직 서 있었지만 창은 전부 부서졌고 벽은 검게 그을려 있었다. 화장터와 다름없었다.

우리는 나일 강변에 있는 말라칼 항구로 차를 몰았다. 지난 1월 초 수용인원을 초과한 페리가 이곳에서 침몰하는 바람에 폭력사태를 피해 탈출하려던 난민 200명 이상이 익사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대다수는 어린이였다. 일부는 페리를 타지도 못한 것 같았다. 항구 정문 부근에 작은 두개골이 작은 정강이뼈 곁에 놓여 있었다. 항구 안에는 뼈가 더 많았다. 팔뼈, 다리뼈, 또 다른 작은 두개골 곁에는 검은 실크 머리띠가 놓여 있었다. 걸어가던 내 발에 뭔가가 걸렸다. 아주 작은 꼬리뼈가 콘크리트 바닥을 굴러갔다.

응고르와 나는 유엔 기지로 돌아와서 난민들을 취재했다. 청록색 유니세프 모자를 쓴 에르네스트 우루아르(52)는 영어를 좀 했다. “지난 크리스마스 직후 병원에 있었어요”라고 그가 말했다. “살기 위해 그곳으로 피신했어요. 열여섯 살, 열네 살짜리 두 아들은 크리스마스 날에 카누를 타고 탈출하려다가 익사했고요. 남은 가족은 아내와 장모, 그리고 나뿐이었어요. 우리가 그 병원에 있을 때 반군이 세 번째로 그곳을 공격했어요. 그들은 마구잡이로 사람들을 죽였어요. 부상자들도 장모도 그들의 손에 죽고 말았어요. 그들은 ‘누가 딩카족인가? 누가 누에르족인가? 누가 실루크족인가?’라고 물었어요. 딩카족은 그 자리에서 쏴 죽였어요. 어린이도 예외가 아니었어요"

소수 부족인 우루아르는 아내를 데리고 다른 난민 수백 명과 함께 성당으로 피신했다고 말했다. “반군이 도시를 약탈했어요. 그 다음 그들은 여자들을 찾으려고 성당에 들이닥쳤어요. 그들은 여자들을 성폭행했어요.” 그런 만행이 얼마나 오래 진행됐는지 내가 물었다. “반군이 도시를 점령한 두 달 내내 그랬어요.”

“두 달 동안이라고요?” 내가 다시 물었다. “반군이 두 달 동안 성당을 성폭행 캠프로 사용했다는 말인가요? 10분 거리에 평화유지군이 가득한 유엔 기지가 있는데 말이에요?”

“예, 두 달 동안 그랬어요.” 그가 대답했다. 곁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한 젊은 남자가 끼어들었다. “그들은 ‘너, 너, 너 나와’라고 말했어요. 그들은 그 여자들을 데리고 가서 성폭행했어요. 어느 날 밤 그들은 일곱 명을 데려갔는데 두 명이 돌아오지 않았어요.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도 몰라요. 내 누이와 다른 식구들도 전부 살해됐어요.” 그 남자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나지막하게 말했다. “나 혼자 도망쳤어요.” 그러고는 불쑥 떠나버렸다.

우루아르는 그가 걸어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어떻게 이 지경이 됐는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어요. 그들이 여자들을 데려갈 때 남자라고 나서서 항의하려고 하면 그들은 구타하고 죽였어요. 두 달 동안 그랬죠. 죽이고 구타하고 성폭행했어요. 그 다음 유엔군이 들어왔어요. 반군이 떠난 뒤에 말이에요. 그들은 상황이 조용해질 때까지 위험한 행동을 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그들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도 기지 밖으로 나오지 않았어요.”

우루아르에게 유엔이 제공하는 보호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보면 그들이 이런 파괴행위에 일조했어요. 그들은 너무 늦게 우리를 구했어요.”

그날 오후 응고르와 나는 말라칼을 탈환한 존슨 고니 빌리외 SPLA 장군을 만나러 갔다. 거리에는 SPLA 군인 수백 명이 빈 집에서 가구를 들고 나와 트럭에 싣고 있었다. 그런 상황을 언급하자 장군은 즉시 방어적인 태도를 보였다. 부하 중 약탈자는 없다는 이야기였다. 우리는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나는 장군에게 희생자가 얼마나 되는지 물었다. 그는 정확한 수치가 없다며 수천 명이라고 말했다. 개들이 시신들을 많이 물고 갔고, 두개골이 쪼개지고 수백 구의 시신이 강에 떠내려갔다고 그는 설명했다. 그에게 유엔의 민간인 보호 노력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대처가 느리죠”라고 그가 대답했다.

오후 늦게 기지로 돌아가면서 흙더미가 많은 곳을 지나쳤다. 곧 그게 뭔지 깨닫고 SPLA 운전병에게 차를 돌려 그곳으로 가보자고 했다. 그곳은 공동묘지였다. 묘지 정문 바로 안쪽에 최근에 파낸 거대한 흙더미가 있었다. 가로와 세로가 20m쯤 됐다. 그 뒤와 양쪽으로 그런 흙더미가 수없이 늘어서 있었다.

흙더미를 세어 보았다. 큰 흙더미가 13개, 중간 크기가 24개, 작은 흙더미가 100개 이상이었다. 공항에서 그랬듯이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한 흙더미 위에는 반쪽만 남은 두개골이 얹혀 있었다. SPLA 운전병에게 각 흙더미에 시체 몇 구가 묻혔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약 이삼십 구”라고 그가 대답했다.

응고르가 장군에게 전화를 걸었다. 장군은 SPLA가 그 묘지를 판 게아니라고 답변했다. 그때쯤 우리는 알았다. 땅바닥에는 유엔기지 입구에 있던 것과 같은 중장비의 넓은 바퀴 자국이 찍혀 있었다. 세계가 남수단인들을 자유의 길로 인도했지만 2년 반 뒤 세계는 그들의 시신을 불도저로 집단 묘지에 파묻고 있었다.
남수단 반군 대원들이 홍수로 침수된 지역에서 누에르족 민간인을 안내하고 있다 (2014년 9월 20일).




백인 구원자들1994년 4월 르완다 대학살 뉴스가 전해졌을 때 미국과 국제사회는 두 손 놓고 있다는 비난을 받았다. 빌 클린턴 대통령의 국가안보회의에서 일하던 젊은 관리 수전 라이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나중에 라이스는 이렇게 말했다. “그런 위기가 다시 발생한다면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겠다고 맹세했다. 필요하다면 불 속이라도 뛰어들겠다.”

르완다 사태는 인도주의적 개입의 필요성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1999년 전 유엔 인권 고등판무관 세르지오 비에이라 데 멜로는 코소보에서 유엔 특사로 활동했다. 그때 나토(NATO, 북대서양조약기구)는 인도주의 차원에서 세르비아계를 표적으로 공습을 단행했다. 당시 그곳에는 젊은 기자 사만 사 파워도 있었다. 파워는 그 체험을 바탕으로 데 멜로의 전기 ‘지옥에서 비롯된 문제: 미국과 대량학살의 시대(A problem from Hell: America and the Age of Genocide)’를 써서 2002년 퓰리처상을 받았다. 그 책에서 파워는 서방의 인도주의적 개입을 도덕적 의무로 정당화하는 새로운 개념을 소개했다.

1999년 데 멜로는 동티모르에서 유엔 행정관으로 활동했다. 그는 가톨릭 신자인 동티모르인들을 공격하는 인도네시아 보안군과 무슬림 민병대를 적극 저지했다. 2003년 프랑스 철학자 베르나르 앙리-레비는 미국의 이라크·아프가니스탄 공격을 지지했다. 당시 영국 정부 외에는 그 전쟁을 지지하는 유럽인이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는 급진 이슬람주의와 싸우는 것이 인도주의적 대의라고 외쳤다. ‘국경 없는 의사회(MSF)’를 창설해 1999년 노벨 평화상을 받은 베르나르 쿠시네르는 2007년 프랑스 외무 장관이 된 뒤 프랑스의 대테러전 반대 입장을 뒤집었다. 이라크전과 뒤이은 유혈 종파분쟁은 서방으로서는 큰 충격이었다. 데 멜로도 거기서 목숨을 잃었다. 그는 바그다드에서 유엔 특사로 활동하다가 2003년 유엔 사무소를 공격한 폭탄테러로 직원 20명과 함께 숨졌다. 그 테러를 감행한 알카에다 분파는 데 멜로가 동티모르에서 이슬람주의 민병대의 활동을 차단한 데 대한 복수라고 선언했다.

세계에서 으뜸가는 인도주의자였던 데 멜로의 죽음으로 동료들의 결의는 더 굳어졌다. 2005년 유엔 세계정상회의는 인도주의적 개입[보호책임(R2P: Responsibility to Protect)이라고도 한다]을 유엔의 공식 원칙으로 채택했다. 인도주의적 개입의 이유와 의무를 국제법화한 것이다. 그 원칙에 따르면 한 국가가 자국에서 극단적인 인권 유린을 자행하거나 그런 행동을 막을 능력이 없을 때는 주권을 몰수당한다. 그런 상황에서는 외부 세계가 외교와 제재, 필요하다면 군사력을 동원해 재앙을 막는 행동을 취할 수 있으며, 또 반드시 취해야 한다.

교수가 된 파워는 같은 해 서부 수단의 다르푸르 반군과 수단 정부 사이의 내전에 관해 젊은 미국 상원의원 버락 오바마에 자문을 제공했다. 다르푸르 사태는 또 다른 인도주의의 시금석이었다. 수단은 오랫동안 인도주의자들의 초점이었지만 9·11 사태 후 수단 내전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크게 늘어났다. 수단의 남북 분쟁을 기독교인과 무슬림 사이의 싸움으로 규정한 미국의 우익 기독교인들이 그 주류를 이뤘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아들 프랭클린 그레이엄 같은 복음주의자들이 남수단을 돕는 구호단체를 설립했다. 미국 공화당 의원들은 돈가방을 들고 가서 무슬림 주인들로부터 기독교인 노예들의 자유를 사주었다. 곧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남북 수단 사이의 평화협상을 중재했다.

파워는 다르푸르와 수단에서 프렌더가스트와 함께 일했다. 프렌더가스트 역시 미국의 아프리카 개입을 지지했다. 그는 수단에서 인권단체 휴먼 라이츠 워치를 위해 남수단 내부의 경쟁 민병대 사이에서 발생하는 잔혹한 폭력행위에 관해 보고서를 쓰면서 인도주의 활동을 시작했다. 프렌더가스트는 빌 클린턴 행정부의 국가안보회의에서 아프리카 문제 책임자로 일했고, 조지 W 부시 행정부에선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 장관의 보좌관을 지냈다. 그후 국제위기그룹(ICG)에서 일하다가 ‘이너 프 프로젝트(Enough Project, 집단학살과 반인도주의 범죄 방지 프로젝트)’를 공동 설립했다. 거기서 프렌더 가스트는 할리우드 엘리트층과 인도주의 운동가들 사이의 가교 역할을 맡아 클루니(수단), 앤절리나 졸리(난민), 매트 데이먼(물), 벤 애플렉(콩고), 돈치들(집단학살과 환경) 등의 인도주의 활동을 돕기 시작했다.

오바마가 대통령에 선출되자 인도주의자들은 정부 깊숙이 영향력을 행사했다. 오바마는 사만사 파워를 국무부 대통령 특별보좌관, 국가안보회의 선임국장으로 발탁했고, 수전 라이스를 유엔 대사로 임명했다. 2011년 라이스와 파워는 백악관에서 리비아 공격을 주장했다. 민간인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2013년 오바마는 라이스를 힐러리 클린턴 국무 장관 후임으로 앉히려 다가 결국 국가안보보좌관으로 기용했고, 파워는 라이스 후임으로 유엔 대사를 맡았다.

1960년대 운동권이 추구하던 이상적인 목표로 시작된 인도주의가 50년 뒤 서방 외교정책의 초석이 된 것이다.

남수단의 반군 대원들이 벤티우 부근의 마을을 지키고 있다 (2014년 9월 20일).




사전에 실패한 국가인도주의자들을 향한 가장 흔한 비난은 그들의 노력이 종종 구제 받는 쪽보다 구제하는 쪽에 비중을 둔다는 것이다. 아프리카는 심리학자 칼 융이 말한 ‘개성화(individuation)’를 추구하는 외국인들을 수없이 받아 들였다. 개성화란 넓은 세계로 나가서 자신을 발견하는 자아실현의 과정을 가리킨다.

서방에서는 칭찬 받을 만한 통과의례이지만 그 과정에서 아프리카인들은 자신의 이야기에서 조역이 돼버린다. 남수단인들은 막대한 희생을 치르며 자유를 얻었지만 그후의 사태 발전 대부분을 만들어낸 쪽은 외국인들이었다. 이론상으론 남수단은 독립으로 번창하는 미래를 약속받았다.

수단의 유전 대부분이 남부에 있기 때문이다. 또 남부는 거대한 수드 습지를 둘러싼 넓고 비옥한 땅으로 축복 받았다. 두당 250~400달러인 소가 사람보다 더 많다. 인도주의자들에겐 가장 순수하고 야심적인 프로젝트를 무에서 시작해 멋지게 이뤄낼 수 있는 곳이었다.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일을 말한다.

나는 2009년 초 처음 남수단을 찾았다. 그때도 국가 건설 계획을 두고 너무도 이상적이고 지나치게 야심적 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았다. 지금으로부터 겨우 5년 전이었지만 주바는 사하라 사막 남부 변방의 특징인 바 위 언덕과 텅 빈 평지에 비닐 봉지로 지붕을 씌운 움막집들이 모여 있는 작은 마을에 불과했다. 회사 몇 개, 경찰 몇 십 명, 학교 몇 개, 낡은 병원 하나, 공무원 수백 명이 있었다. 구호요원 수천 명이 그곳에 도착하면서 주바의 포장도로에서 가끔씩 흰색 SUV들로 교통체증이 생기기 시작했고, 외국인들의 돈을 노리는 매춘부들이 가득한 술집 몇 개가 생겨났다. 하지만 하나의 국가가 되기엔 무리였다. 기반이 전혀 갖춰지지 않은 상태였다.

외교관들은 대부분 새 국가 건설에 회의적이었다. 그들은 이런 특이한 상태를 일컫는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 냈다. ‘사전에 실패한 국가(pre-failed state)’였다. 미국 이 남수단에서 최대의 단일 주자였다. 다름 아닌 키이르 대통령이 미국의 영향력을 상징했다. 그는 부시가 선물 한 카우보이 모자를 어디서나 쓰고 다녔다. “남수단은 미국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고 당시 주바의 한 서방 외교관이 내게 말했다.

새로 구성된 내각의 주된 관심사는 석유 판매수입을 자신들이 나눠 갖는 것이었다. 2011년 나는 여러 외교관들로부터 남수단 정부가 2005년 이래 석유 판매수입 140억 달러를 착복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도 남수단은 2012년 북부 수단을 공격해 그곳에 남아 있는 석유를 훔치려 했다. 기자들이 구타당하고 투옥되고 살해됐다. 키이르가 새 국가를 위해 제정한 헌법은 그에게 독재 권력을 부여했다. 무엇보다 남수단 지도자들이 서로 반목했다. 딩카족과 누에르족 사이의 내전이 발생하기 전에도 매년 토지와 가축 소유권을 두고 부족간의 충돌로 수천 명이 사망했다.

국가 건설이라는 과제의 중요성과 선례의 필요성을 생각할 때 인도주의자들은 인상적인 결과를 보여줄 수 있었다면 그들의 가치를 입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 나 그런 결과는 없었다. 자유는 속성상 다른 사람을 대신해 얻어줄 수 없다는 점이 분명히 드러났다. 남수단 지도부는 새로 얻은 자유를 서로 죽이는 자유로 해석했다. 세계는 경악했다. 그러자 키 이르와 남수단 지도자들은 세계가 뭔가를 착각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들에게 자유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했다. 수단 정부만이 아니라 과거의 친구들에게도 등을 돌릴 수 있다고 그들은 해석했다. 키이르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빚을 졌다는 주장에 특히 참지 못했다. 2012년 반 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키 이르 남수단 대통령에게 북부 수단 침공을 중지하라고 촉구하자 키 이르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신의 명령을 받는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우리 국민을 책임지는 국가의 수반입니다. 병력을 철수하지 않겠습니다.”

2014년 9월까지 외국 구호기관들은 닥쳐오는 기아를 몇 달 동안 경고했다. 그러나 키이르 정부는 외국인들이 남수단에서 떠나야 한다고 선언했다. 한 달 안에 남수단 의 모든 기관과 사업체의 임원직 중 80%가 남수단인들로 채워져야 한다고 선언했다.

기근이 발생할 가능성이 큰 남수단의 말라칼에서 일꾼들이 구호 식량을 내리고 있다 (2014년 7월 25일).




포기하고 철수?지난 4월 주바에서 프렌더가스트에게 전화했을 때 그는 인류 역사 자체가 폭력으로 점철돼 있기 때문에 남수단이 새로운 국가로 순조롭게 태어날 수 있다는 기대는 금물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세계의 인도주의적 개입 방식이 “크게 잘못됐다”는 점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가 남수단이라고 덧붙였다. “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절대 발전을 이룰 수 없다. 우리 모두가 남수단에서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유엔은 남수단의 살육을 막으려고 작전을 펼치기는커녕 그곳에 있는 자체 기지마저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다. “유엔은 전쟁이 아니라 국가 건설을 위해 파견됐다”고 프렌더가스트는 말했다. “따라서 유엔보다는 전투를 마다 하지 않는 군대가 필요하다.”

남수단 주바에 유엔이 설치한 난민촌에서 아이들이 프리스비를 던지며 놀고 있다 (2011년 8월 17일).
긴급구호 노력도 마찬가지로 미흡했다. 지난 9월 기준으로 집을 잃은 남수단 주민이 약 170만 명이었다. 지난 5월 우기가 닥치면서 주바에 콜레라가 퍼져 130명 이상이 사망 하고 약 6000명이 감염됐다. 그중 다수는 주바의 유엔기지 외곽에 텐트를 치고 기거하던 난민들이었다. 콜레라 가 주춤하는가 싶더니 곧 말라리아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구호기관들은 영양실조와 기아가 늘어나고 있 으며 몇 달 안에 전면적인 기근 사태가 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최악의 시나리오에 따르면 “연말까지 남수단 인구 1200만 명 중 절반이 국내에서 난민이 되거나 해외로 탈출하거나 굶주리거나 사망할 것”이라고 안보리에 경고했다.

따라서 그냥 철수하는 편이 나을지 모른다고 주바의 몇몇 고참 외교관들은 말했다.

수단에서 수십 년을 지낸 한 고참 서방 외교관은 남 수단에서 세계가 성취한 것이 무엇인지 묻자 “많은 생명을 구했지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두 세대에 걸친 외국의 노력이 오히려 역효과를 내지 않았는지 물을 수도 있 다고 그는 덧붙였다. “우리가 이런 상황을 만들었을까요?”라고 그는 되물었다. “만약 우리가 20년 전에 철수 했더라면 이 나라가 지금쯤 정치적으로 더 성숙했을까요? 그렇게 됐을 가능성이 큽니다.” 몇 분 뒤 그는 자괴감에 사로잡혀 눈물을 글썽였다. 그는 담 높은 저택의 철문까지 응고르와 나를 배웅하며 이렇게 말했다. “솔직히 말해 이곳 외교관들은 더는 아무런 대답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의구심에도 불구하고 인도주의자들 이 노력을 중단할 가능성은 없다. 미국 외교관들, 유엔 관리들, 구호요원들, 운동가들은 전부 책임을 통감하고 더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포기하기를 거부했다. 실패했다고 해서 자신들이 생각하는 대의에 회의를 가질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2012년 나일 강변에서 클루니를 만났을 때 왜 남수단을 계속 방문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이렇게 답했다. “사실 어떤 사람이든 자신의 능력 밖에 있는 일을 시작했을 때 잘 되지 않는다고 그만둔다는 생각을 하면 무엇인가 크게 잘못했다고 느낀다. 그런 잘못을 안고 살아갈 순 없다. 따라서 계속할 수밖에 없다.”

클루니는 자신과 특히 가까웠던 남수단 관리가 주미 대사를 지낸 에제키엘 롤 가트쿠오스라고 말했다. 내가 주바에 있을 때 그는 반역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었다 (그후 풀려났다). 가트쿠오스는 지난해 12월의 유혈 사태를 부추겼다고 지목된 정부 인사 4명 중 한 명이었다. 그들은 가끔씩 법정에 출두할 때를 제외하고는 교도소에서 지냈다.

응고르와 내가 주바에 있을 때 그 재판 중 하나가 열렸다. 우리는 일찍 도착해 법정 입구에 자리 잡았다. 그 네 명이 차로 도착해 군인과 보좌관들에 둘러싸여 지나 갈 때 응고르는 내가 준비한 몇 가지 질문을 적은 쪽지를 가트쿠오스의 변호사 손에 슬쩍 집어주었다.

내 질문은 이랬다. “어떤 사람은 외국인들이 철수해야 한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국제사회의 더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 가?” 그 변호사가 다음 날 쪽지를 돌려주었다. 가트쿠오스의 답변이 내 질문 아래 흘려진 필체로 적혀 있었다. 남수단의 위기를 해결할 확실한 방법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 나라의 미래를 만들어가는 데 보탬이 되도록 조지 클루니가 좀 더 노력해야 한다.”

[ 필자 앨릭스 페리는 최근 ‘클루니의 전쟁: 남수단과 인도주의 노력의 실패, 그리고 유명인사(Clooney’s War: South Sudan, Humanitarian Failure and Celebrity)’를 전자책으로 펴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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