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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국적 기업에 여성 CEO가 많은 까닭은?

다국적 기업에 여성 CEO가 많은 까닭은?

한국 기업의 ‘유리천장’은 여전히 높고 단단하다. 하지만 한국에 진출한 다국적 기업은 분위기가 다르다. 최근 4~5년 동안 여성 CEO가 눈에 띄게 늘었다. 다국적 기업에 여성 CEO가 많은 이유를 알아봤다.
중앙포토
다국적기업최고경영자협회(KCMC)는 다국적 기업에서 일하는 한국인 CEO들의 모임이다. 회원 151명 가운데 여성은 17명으로 11.3%를 차지한다. 2003년에는 여성 CEO가 1명 뿐이었지만 2011년부터 눈에 띄게 늘었다. 국내 기업은 어떨까. CEO스코어데일리에 따르면 2013년 매출 기준 500대 기업 CEO 가운데 여성은 8명(1.3%)이었다. 그나마도 3명은 오너일가였다. 2012년 포춘 1000대 글로벌 기업, 미국 500대 기업의 여성 CEO 비율은 각각 4.2%, 4%였다. 한국에 진출한 다국적 기업의 여성 CEO 비율이 확연히 높음을 알 수 있다.

이행희 한국코닝 대표, 채은미 페덱스코리아 대표, 팽경인 그룹세브코리아 대표, 오동은 한국로얄코펜하겐 대표 등이 대표적인 다국적 기업 여성 CEO들이다. 이들을 포함한 주요 여성 CEO 14명의 평균 나이는 49.1세, 학번으로 치면 1983학번 쯤이다. 2011년 들어 다국적 기업에서 여성 CEO가 많이 나온 이유를 알기 위해 먼저 사회적 배경을 살펴봤다. 당시를 떠올려보자. 경영학과 1982학번 김여성 씨는 86년 대학을 졸업하고 대우그룹 공채시험에 응시했다. 면접장에 여성은 많지 않았다. 결과는 낙방. 경영 대학 안에서도 여학생을 찾기 쉽지 않았다.

서울올림픽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하던 1988년, 이때를 기점으로 여성의 사회 진출이 크게 늘었다. 정보기술(IT) 붐을 따라 다국적 기업들이 한국에 진출하기 시작한 때다. 오랜 역사가 있는 다국적 기업은 여성 인력 고용에 거부감이 덜했다. 여성들은 좋은 근무환경을 원했다. 서로 요구조건이 맞아 많은 여성이 다국적 기업에 입사했다. 비슷한 시기에 한국 기업도 여성 인력을 채용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만두는 직원이 늘었다. 결혼, 출산, 육아로 경력 단절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서울올림픽 이후 여성의 사회 진출 늘어
익명을 요청한 한 다국적 기업 여성 임원은 과거 한국 기업에서 일할 때 느낀 점을 토로했다. “현실적으로 한국 기업에서 CEO가 되려면 인맥, 정치력이 필요합니다. 결혼한 여성이 주변 상황을 모두 극복하고 CEO에 오르기 쉽지 않아요. 입사할 때 패기 넘치던 여성 직원들도 10년이 지나면 대부분 힘들어하지요.” LG전자 프랑스 현지법인 대표를 지낸 에릭 쉬르데쥬는 저서 『그들은 미쳤다. 한국인들(Ils sont fous, ces Coréens!)』에서 한국 기업의 분위기가 “아주 위계적이고 군대식”이라고 표현했다.

14명 KCMC 여성 CEO의 평균 근속연수는 13.9년이다. 이행희 대표, 채은미 대표, 김옥연 한국얀센 대표, 이수경 한국피앤지 대표 등은 20년 넘게 한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이들은 타국 지사와 교류하며 글로벌 감각을 키웠다. 지난해 한국경영자총협회의 조사에 따르면 대기업 임원이 되기까지 22.1년이 걸린다. 이를 근거로 1980년대 후반 다국적 기업에 입사한 여성들이 4~5년 전부터 경영자 자리에 오른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전문가들은 다국적 기업의 기업문화와 제도 역시 여성의 성장에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한다. 다국적 기업은 수평적이고 투명한 문화를 강조한다. 행동강령(Code of Conduct)을 중시하는 환경은 여성의 적응을 도왔다. 행동강령은 회사 업무 프로세스, 의사결정 방식에 대한 엄격하고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을 말한다. 한 다국적 기업의 CEO는 “대부분 수십 개 이상 되는 나라에서 사업을 하기 때문에 한국식 영업이나 마케팅으로 무리하게 성과를 내는 것보다 회사 평판 유지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고 말했다. 사내 정치, 네트워킹 등에 대한 부담이 줄어 여성들이 공정하게 경쟁하고 평가 받을 수 있었다는 얘기다.

다국적 기업의 CEO는 본사와 조율, 협력하는 과정에서 소통 능력이 요구된다. 하지만 이 CEO는 “그렇다고 여성이라서 유리하다는 뜻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여성의 섬세한 리더십과 커뮤니케이션 능력 때문에 다국적 기업에서 선호한다는 의견이 있지만 한 부분만 잘한다고 경영을 맡기겠어요? 남성이든, 여성이든 상관 없이 철저하게 성과와 자질을 중심으로 평가합니다.”

다국적 기업들은 여성을 위한 제도 마련에 꾸준히 힘쓰고 있다. 2014년 서울시 자료에 따르면 서울 여성 경제활동 인구의 경력단절 비율이 34.2%다. 많은 다국적 기업이 워킹 맘, 워킹 대디를 포함한 모든 직원이 일을 잘 할 수 있게 업무를 조율한다. 다국적 기업의 CEO들이 직접 쓴 책 『기업문화가 답이다』의 내용을 보자. 한국HP는 사내 여직원 목표 비율을 사장이 관리한다. 매 분기 직원 현황을 논의하며 이 비율을 어떻게 높일지 논의한다. ‘WAVE(Women Adding Value with Enthusiasm)’는 여성 임원을 포함한 멘토들이 주제별 소그룹을 만들고 후배들에게 조언해주는 제도다. 회사는 매년 오픈 하우스를 열어 모든 임직원의 가족을 회사로 초대한다. 자녀가 엄마의 일터와 직장생활을 이해하고 협조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다.

페덱스코리아에는 ‘사내 지원제도(Promotion from within Policy)’가 있어 공석이 생기면 직원들이 우선 지원할 수 있다. 승진, 부서 이동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서다. 채 대표 역시 이 제도로 최연소 부장에 올랐다. 사우디아라비아에 본사를 둔 화학회사 사빅코리아는 남성, 여성 관계 없이 똑같은 기회와 선택권을 준다. ‘SWN(SABIC Women Network)’이 대표적인 여성 직원 지원 제도다. 회사에서 리더를 정해주면 리더가 운영진을 구성하고 프로그램을 기획한 뒤 모든 여직원들과 함께 참여한다. 롤모델이 될 만한 외부인사를 초청해 강연을 듣거나 봉사활동을 함께 한다.
 20년 넘게 한 우물 판 전문가들
미국여성임원협회(NAFE)는 매년 여성 임원진을 위한 상위 50개 회사를 발표한다. 지난해 아스트라제네카, 언스트 앤 영, IBM, KPMG, 메리어트 인터내셔널, P&G 등이 톱10에 들었다.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듀폰, HP, 푸르덴셜, P&G는 10년 이상 이 순위에 포함됐다. 여성 중역 비율이 30%를 넘는 회사로는 에델만, 플레시먼힐러드,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언스트 앤 영, 켈로그, 메리어트 인터내셔널, 마스터카드, 화이자 등이 있다.

기업문화와 함께 여성 CEO 개인의 역량도 작용했다. 이들은 한 분야에서 꾸준히 전문성을 쌓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 자기계발에 열심이다. 한 다국적 기업 여성 CEO는 “한국 기업에서 관계 형성에 에너지를 많이 쏟지만 다국적 기업에서는 역량을 쌓는 데 집중한다”고 말했다. 채은미 대표가 30여 년째 새벽에 영어학원을 나간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1988년 한국코닝에 입사해 영업담당 이사를 거쳐 2004년 CEO가 된 이행희 한국코닝 대표는 역사학을 전공했다. 트랜지스터, 액정 디스플레이 유리 등의 생소한 분야를 익히기 위해 몇 만 가지나 되는 제품 브로슈어를 교과서 삼아 공부하고, 동료와 거래처 직원들에게 수시로 질문을 했다고 한다. 중학교 교과서를 달달 외우며 영어 공부를 했다.

최근 한국 기업들도 여성 인재를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롯데그룹은 신동빈 회장의 여성인재 육성 정책에 따라 3월 1일부터 기존의 육아휴직 1년을 최장 2년, 1개월의 ‘자녀돌봄 휴직’은 최장 1년으로 늘렸다. CJ그룹과 풀무원도 여성인재를 위한 ‘경력단절 여성을 위한 리턴십’, ‘임산부 단축근로 자동시행’ 제도 등을 마련했다. 유효상 숙명여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동양적인 사회 의식이 바뀌지 않는다면 여성 신입사원 할당제 같은 강제적인 제도를 시행하는 것도 방법이지만 제도가 ‘구색 맞추기’에 그쳐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이런 제도로 실제 여성 직원이 획기적으로 늘었을 때 남성 직원들의 목표의식 상실 같은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며 “남성과 여성이 서로에 대해 잘 알고, 함께 일을 잘 할 수 있는 기업문화를 구축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현직 여성 CEO들은 여성 직원 개인의 노력도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박 대표는 “내가 회사에 필요한 존재가 되면 휴직하더라도 눈치 보지 않고 즐겁게 일할 수 있다”고 말했다.

- 글 최은경 포브스코리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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