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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포 엘칸, ‘와일드’하게 달리는 인생

라포 엘칸, ‘와일드’하게 달리는 인생

밀라노의 코르소 베네치아에 위치한 라포 엘칸(Lapo Elkann)의 사무실, 약속 시각이 몇 분 지나 빠르게 걸어 들어온 엘칸이 담배 때문에 거칠어진 목소리로 “미안합니다. 신사 여러분”하며 품위 있는 사과를 건넸다. 곧장 그와 손님을 위한 에스프레소가 들어왔다. 엘칸은 에스프레소 한 잔을 들이켜더니 연이어 또 한 잔을 마셨다. 그리고 말보로 담배 2개비를 피우며 책상 위에 놓인 서류를 훑어보고, 지시를 내리더니 곧장 옷을 벗기 시작했다. 재킷을 휙 벗어 던지고 신발을 벗더니 바지도 벗었다. 신속한 움직임이었다.

이것만은 분명하다. 엘칸은 강력한 회오리바람, 특히 하늘 끝까지 치솟은 지중해의 용오름 같은 사람이다. 원심력으로 치솟는 바람은 무서운 힘으로 이 남자의 주변을 맴돈다. 사람, 아이디어, 펜, 종이, 담배, 안경, 커피, 그리고 또 커피, 유벤투스 축구클럽 라이터(그의 가문은 1923년부터 유벤투스 구단주였다), 휴대전화 두 대,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은 바지 한 벌이 그가 끌어당기는 힘에 따라 그의 주변을 돌고 있다.
 피아트 제국의 상속자
구찌와 협업으로 시작한 맞춤형 ‘캡슐 컬렉션(유행을 타지 않는 클래식 스타일로 개인의 상징적 스타일을 구성해주는 아이템)’으로 자신의 이름을 그대로 딴 ‘라포 워드롭(Lapo’s Wardrobe)’에서 정장을 꺼낸 그는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다 입은 모습은 사진으로 찍어 남겨 둔다. 효율성 좋은 홍보다. 그러나 아무리 홍보에 좋아도 래리 엘리슨 오라클 CEO나 레슬리 문베스 CBS 사장이 엘칸처럼 사무실을 탈의실로 사용하며 4~5명이 지켜보는 상황에서 태연하게 옷을 갈아입을 수 있을까? 이처럼 엘칸은 아무 비밀이 없는 사람이다. 말 그대로도 그렇고, 비유적으로도 그렇다. 공개되지 않는 비밀이 거의 없다고 표현해도 무방하다. 새로 갈아입은 옷은 더블 버튼의 초크 스트라이프 정장이다. 은행가로 볼 수 있을 만큼 얌전하지만, 스트라이프 간격이 넓어 ‘마피아 룩’같은 느낌도 든다. 그러니까 은행가에게서 엄청난 자금을 취하는 그에게 맞는 패션이다. 복고풍이지만 동시에 미래에서 온 것 같은 세련된 매력이 있다. 1930년대 뉴욕 나이트클럽의 재즈가수 캡 캘러웨이 같으면서도 <배트맨> 차기작에 나올 듯한 악당의 모습이다.

정장 안에는 넥타이를 매지 않고 칼라만 있는 하얀색 남성용 테리 셔츠를 입었다. 피카소가 연인 프랑스와즈 질로와 함께 앙티브 해변을 거닐 때 입었음직한 셔츠다. 어디에서 어떤 시간에 보든, 엘칸은 근처에 정박한 요트에서 막 내린 듯한 분위기를 풍긴다. 어떤 남자에도 어울리지 않을 법한, 아니 어울려선 안 되는 앙상블도 엘칸이 입으면 타고난 매력과 장난스러움, 반항기, 세상을 알고 지루해진 ‘나쁜 남자’의 거친 느낌과 잘 어우러져 멋진 패션으로 변하고 만다.

2주 뒤 그는 비행기를 타고 상하이로 날아가 라포 워드롭을 홍보할 예정이다. 요트와 브랜드, 파티에 열광하고 허세를 좋아하는 소비자가 넘치는 곳이라 라포 워드롭에는 완벽한 시장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아시아 방문은 일종의 자선 행위로도 볼 수 있다. 남성 패션을 긴급 구조하기 위한 선교 활동이랄까. 상하이 신흥 부유층이 자신의 부와 경험을 내세우며 아무리 자랑해도 그만큼 능숙하고 무심하게 라포 워드롭에서 멋진 스타일을 뽑아내려면 어느 정도의 가르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에스프레소가 접시에 올려져 나왔고, 우리는 다시 미친 듯이 카페인을 들이켰다. 체스판 모양을 한 12피트 길이의 탄소섬유 소재 책상 위에 놓인 커피와 말보로는 마치 아침 식사 같았다. 그에게는 말보로가 페이스트리와도 같을 것이다.

37세의 엘칸은 기업 경영, 마케팅, 자동차 맞춤제작, 글로벌 청바지와 안경 사업, 보드카 생산, 영화 배급, 남성 패션 디자인, 시계 디자인, 그리고 무엇보다 피아트(Fiat) 제국 상속자 등, 어지러울 정도로 많은 커리어를 곡예 하듯 오가며 믿기 힘들 정도로 다채로운 몸짓을 선보이고 있다. 엘칸은 총 8개 기업의 설립자다. 이 중 6개는 이탈리아인디펜던트그룹의 계열사로 증시에 상장됐고(인터뷰를 진행한 곳은 이탈리아인디펜던트 사무실), 여기에 더해 영화 제작 및 배급사 굿필름을 여동생 지네브라(Ginevra)와 함께 공동 소유하고 있다. 굿필름은 여동생이 로마에서 운영 중이다. 8번째 마지막 기업은 이번 3월에 설립된 비상장 기업 가라지이탈리아커스텀즈다. 세계 시장에서 자동차와 비행기, 보트 등을 맞춤제작 하는 최신 유행의 디자인 및 제작 사업이다. 왜 그렇게 다양한 기업을 운영하는지, 그리고 왜 더 많은 기업을 세우려고 노력하는지, 엘칸은 기운찬 목소리로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나를 움직이는 가장 큰 힘은 바로 사랑이다. 나는 차를 정말 사랑한다”고 그가 단호히 말했다. 피아트 설립자 지오반니 아넬리를 고조부로 둔 사람답다. “자동차는 나에게 사랑이다. 디자인도 마찬가지다. 자동차 모양을 만드는 일을 사랑하고, 자동차가 태어나는 걸 사랑한다. 자동차가 출시됐을 때도 좋다. 소형, 중형, 대형 상관없다. 디자이너, 자동차 기계공과 함께 일하는 걸 열정적으로 좋아한다. 페라리의 맞춤제작 차량과 유일무이한 헌정용 모델을 만들도록 도운 적도 있다. 하지만 이미 덩치가 커져버린 가족기업에서 일하다 보면 항상 원하는 대로 일할 수는 없다. 각자 위치와 처지가 다르기 때문이다. 아넬리 가문과 엘칸 가문에 대한 깊은 존경심으로 ‘라포’ 기업을 만들었다. 그리고 엘칸이나 아넬리의 세상이 아닌, 라포의 세상을 만들었다.”

그는 문장으로 말하기보다 단락으로 말하는 사람이었고, 대화에 끌려가기보다 주도권을 갖고 끌고 가길 좋아했다. 주먹 쥔 손에 턱을 괸 그의 모습은 토론에 골몰한 로마 상원의원처럼 보였다. 푸른색 펜 뚜껑을 딸깍대며 두 번 여닫은 그는 이를 시작으로 추억에 젖어 들었다.

“외조부와 친조부 두 분에게 많은 걸 배웠다”고 그는 말했다. “당연하다. 그러나 나의 모험에 가족의 돈을 쓰지는 않았다. 나 스스로 내린 결정과 선택이었고, 주체적으로 끌고 가고 싶었다. 내 회사와 가족회사 사이에는 분명하지만 친절한, 꽃으로 장식된 벽을 세웠다. 나는 남동생(존, 피아트 회장), 여동생과 함께 가족기업의 최대 주주 중 한 명이다. 가족기업을 진지하게 생각하며, 나도 이들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일상에서는 내 그룹, 내 기업, 내 제국, 내 이야기를 만드는 데 열중한다. 내가 만든 걸 언젠가 내 아이들에게 남겨주길 희망한다.”
 자신만의 제국을 신속하게 건설하다
그는 아직 자식이 없다. 참고로 말하자면 아직 아내도 없다. 하지만 결혼해서 자식이 생길 때쯤에는 분명 남겨 줄 유산이 상당할 것이다. 분석을 위한 문학적 재능과 함께 확실한 기업가적 자질을 가진 덕분에 이탈리아 인디펜던트는 2013년 밀라노 증권거래소에서 성공적 IPO를 하며 안정된 시작을 했고, 지난해 매출 3600만 달러를 기록했다. 전년 대비 32.1%나 증가한 금액이다. 모험을 찾아 방랑하는 중세기사의 이미지로 대중의 끝없는 관심을 받았던 이전 모습과 성공한 기업가의 모습은 서로 매력적인 모순을 이룬다. 플레이보이라고? 그럴지도 모르지만, 이 또한 그가 마음대로 입고 벗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옷일 뿐이다. 속을 파헤치면 그는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제국 건설의 재능을 발휘하며 세계 무대를 누비는 기업가에 더 가깝다.

여러 대륙으로 사업을 확장하고 엄청나게 많은 사업 지시를 내리는 와중에 어떻게 재기와 개성이 넘치는 구찌 셔츠와 정장을 디자인할 수 있는지, 그럴 시간이 있는지 물어봤다.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짓궂은 미소가 떠올랐다. 큰 안경 건너편에 있는 푸른 눈이 똑바로 나를 쳐다봤다. “일단 일에 빠지면 아주 빨리 처리한다”고 그는 말했다. 웃음기가 거의 사라진 얼굴이었다.

두어 가지 면에서 그의 말은 전혀 농담이 아니었다. 우선, 그의 제국은 8년 만에 진행됐다. 2005년 그는 뉴욕 약물중독 재활센터에서 나와 회복 중에 있었다. 이탈리아인디펜던트그룹으로 발전한 사업 아이디어는 훨씬 이전부터 가지고 있었지만, 재활치료를 통한 회복은 이를 현실화하는 계기가 됐다. 그는 2007년 이탈리아인 디펜던트를 공동 설립했다. 이후에는 폭발하듯 터져 나오는 에너지로 브라질과 아시아, 아메리카 등 전 세계를 오가며 파트너십과 서비스 계약을 체결하고 사업을 구축해 나갔다.

어디서든 억누를 수 없는 개성을 가졌고 만화경처럼 다채로운 모습을 항상 유지하겠지만, 죽음 직전까지 갔던 경험은 그의 영혼 깊이 깨달음과 지혜를 새겨주었다. 그래서 지금은 힘들게 얻은 도구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용하는 데 집중한다. “사랑하는 일을 한다는 건 대단하다”고 그는 말했다. “그 중에서도 나만의 공간을 가진 곳에서 좋아하는 일을 하고 아직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 사람들이 내가 원하는 일을 하도록 돕는 게 좋다. 요즘 창의적이 된다는 건 기업가가 되는 걸 의미한다. 리스크를 감수하는 것도 좋다. 그러나 리스크는 기회를 포착한 후 감수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건 그냥 위험(danger)이다.

“여동생과 영화산업에도 진출했다”고 그는 말을 이었다. “지난해 우리는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 과 라스 폰트리에 감독의 <님포매니악> , <스틸 앨리스> 를 배급했다. 더 좋은 일을 하는 방법이 있다는 걸 알았다.”

이탈리아인디펜던트로 아이웨어 산업에 진출한 방식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자. “왜 아이웨어로 정했을까?” 그가 물었다. “안경은 무엇보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자신의 영혼을 지켜주는 방패다. 또한, 우리 이탈리아인이 가장 자랑스러워 하는 산업 중 하나이기도 하다. 안경은 럭셔리 산업이 아니다. 80달러 정도 하는 안경테가 있었으니까 대중적 명품, ‘어포더블 럭셔리’ 시장으로 분류할 수 있겠다. 나는 이런 시장의 잠재력이 높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온갖 종류의 사람이 소비자가 될 수 있었다. 칼 라거펠트 또한 모피로 장식한 안경테를 썼다.”

엘칸은 사업 아이디어 실행에서만 신속한 게 아니다. 가라지이탈리아 사업을 위해서, 또 고옥탄가의 가솔린이 유전적으로 혈관에 흐르는 까닭에 그는 페라리 456GT2로 레이스 트랙 ‘오토드로모디몬자(Autodromo di Monza)’에 재참가하는 방안을 계획 중이다. 지난 9월 오토바이를 타다가 뼈가 으스러지는 사고를 겪었던 그는 굴하지 않고 시속 240km로 직선코스를 달리며 속도에 대한 열망을 충족시키려 한다.

“자동차 산업, 대규모 생산업체는 잠에서 깰 필요가 있다”고 그는 피아트 500 빈티지 엔진베이를 떼어내고 만든 2인용 소파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말했다. 누구나 자신의 자동차에서 맘에 드는 부분이 있고, 맘에 들지 않는 부분도 있다. 우리는 모든 걸 바꿔줄 수 있다. 가라지 이탈리아의 맞춤제작 대상은 자동차에 국한되지 않는다. 보트나 제트스키, 모터바이크, 사륜구동, 헬리콥터, 걸프 스트림 비즈니스 제트기에 이르기까지 고객이 원하는 방식으로 모두 개조해 줄 수 있다.

“이 정도 시장 수준이면 한계가 없다. 사업을 시작한 지 몇 개월밖에 되지 않았지만, 일을 거절해야 할 정도로 축복받은 상황이다. 지구상 어느 곳, 어떤 종류의 운송수단도 모습을 바꿔 어디로든 배송이 가능하다. 글로벌 규모의 디자인 사업이다.”

올해 3월 제네바에서 개최된 오토쇼에서 모두의 시선을 잡아끈 업체는 단연코 ‘가라지이탈리아’였다. 엘칸과 15명의 핵심 디자이너 겸 자동차 조립업자들은 50년대 말에서 60년대 초 대유행으로 피아트의 아이콘이 된 딱정벌레 모양의 피아트 500을 흥미로울 정도로 우아하게 디자인해 선보였다. 토리노 생산공장은 디자인에 변화를 주어 매끈하게 잘 빠졌으면서도 편리한 중저가 도심형 주행차량을 선보였다. BMW가 새롭게 선보인 오스틴 미니(Austin Mini)만큼 성공적이었다. 제네바에서 엘칸은 특유의 활기를 가지고 ‘블랙 타이(Black Tie)’ 피아트 500X를 소개했다. 턱시도 직물과 캐시미어, 가죽 테두리 장식이 인테리어로 들어갔고, 블랙온 블랙 스트라이프로 자동차 표면에 ‘랩 페인트(wrap paint)’를 했다. 중저가 모델에서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디자인이었다. 엘칸의 의도가 바로 그거다.
 기업인의 삶보다 유명인사로 더 조명
“랩 페인팅은 정말 놀라웠다”고 엘칸은 말했다. “우리는 페인트 R&D에 많은 돈을 투자하고 있다. 지금도 무한대의 색상을 제공할 수 있다. 우리는 계절별로 다른 걸 원한다. 어떤 차는 여름에, 또 어떤 차는 내장을 바꿔 가을에 이용할 수 있다. 옷도 계절에 따라 바꿔 입지 않는가?” 엘칸은 감추는 것이 별로 없다. 아니, 아주 빠르고 노련하게 투명성을 이용한다고 표현할 수 있겠다. 가라지이탈리아, IPO, 아이웨어 라인의 브라질 및 일본 진출, 아디다스와의 협업, 위블로와 신규 계약 체결까지, 기업인으로서 엘칸의 삶은 그야말로 엄청나다. 그러나 기업인의 삶을 차치하고 유명인사로 사는 삶에서도 엘칸은 초음속의 능수능란함을 보여준다. 그의 행보는 이탈리아 타블로이드 신문과 소셜 미디어, 패션 페이지에 숨 가쁘게 상세히 보도되기 때문에 ‘라포’라는 단어는 그의 이름이라기보다 이탈리아 하늘을 눈 깜짝할 새 지나가는 혜성과 같은 현상을 일컫는 단어가 됐다.

경제적 효과로 살펴보면, 엘칸은 자기 회사 밖에서도 수많은 파파라치와 에디터를 먹여 살리는 고용주라 할 수 있다. 베니티페어 이탈리아(Vanity Fair Italia)는 지난 10년간 그의 세계적 연애사를 되짚는 ‘라포 엘칸의 여자들’섹션 웹페이지를 따로 만들었을 정도다. 엘칸은 현재 일정하게 만나는 여성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지중해의 여름이 시작된 만큼 그의 뒤를 열렬히 캐고 다니는 유럽 타블로이드 에디터와 카메라로 무장한 행동대장들은 안테나를 잔뜩 세운 채 유럽 전역의 멋진 공항이나 항구, 바, 레스토랑, 리조트 등을 돌아다니고 있다. 그 많은 자극적인 보도에도 엘칸은 결코 발끈하는 법이 없다. 언론에 게재된 사진은 좋든 나쁘든 혹은 무관심한 모습이든 상관하지 않고 벽지로 만들어 집무실로 이어지는 복도에 도배해 놨다. 보란 듯이 장식한 건 요란한 반항의 표시다. ‘나한테 한 방 먹였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절대 그럴 수 없지. 그러니 한 번 해보자’란 의미다.

그러나 이탈리아 언론이 그에게 끊임없는 관심을 퍼붓는 데에는 더 큰 이유가 있다. 역사적인 이유다. 이탈리아에서 엘칸은 ‘신의 아들’과 같은 존재다. 19세기 이탈리아에는 거물이라 할 사람이 많지 않았다. 엘칸의 고조할아버지 지오반니 아넬리는 자동차 산업에 투자해 피아트를 설립하고 회장이 됐다. 게다가 그의 할아버지 지아니는 수십 년간 토리노 경제를 지배하며 나이가 들어도 결코 스타일을 잃지 않는 20세기 남성 패션의 아이콘으로 남아 있다. 이탈리아를 현대로 이끌어 준 가문의 자손 엘칸은 기업계의 남신(男神)과 같은 존재로, 이제야 자신의 힘을 실현하는 중이다.
 이탈리아에서 ‘신의 아들’과 같은 존재
용무를 보기 위해 가라지이탈리아에서 맞춤제작한 마세라티(Maserati)를 타고 그와 함께 짧은 드라이브에 나섰다. 은백색 핀스트라이프(점선 무늬)로 색상을 칠하고 블랙 소모사 울 핀스트라이프 천으로 시트 커버를 씌웠다. 돌아갈 때는 걸어가기로 했다. 요즘 엘칸에게는 조금 벅찬 운동이다. 수개월 전 오토바이 사고를 겪고 아직 거동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예전에 그는 자신이 “뉴욕에서 태어난 프랑스-토리노-나폴리-가톨릭계 유대인”이라고 장난스레 표현했는데, 그 모든 혈통이 정말 다 보인다. 그러나 매부리코를 가진 옆모습과 날렵하고 무심한 듯하면서 완벽한 패션 센스를 보면 전설로 남은 그의 조부 지아니가 떠오른다. 엘칸의 얼굴은 조상의 DNA 특징을 그대로 내보인다. 이탈리아 전 국민은 그의 코와 눈, 얼굴선을 익숙하게 알아본다.

함께 길을 걷는 밀라노 거리는 평일 오전의 분주함으로 꽉 차 있었다. 보도 반대쪽에서 페인트가 묻은 흰색 작업복의 페인트공 2명이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차오(Ciao: 이탈리아식 인사). 라포”, 그들이 잘 아는 사람을 본 것처럼 친숙하게 인사를 건넸다.

“차오,” 그가 인사를 받으며 대꾸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50보 정도 더 갔을까, 풍채 좋은 경찰관 2명이 말을 건넸다.

“차오, 라포”

“차오”

그대로 계속 걸었다면 이렇게 익숙하고 오래된 19세기식 매너로 밀라노 전 시민과 인사를 나눴을 것이다. 그가 이곳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얼마나 대중의 인정을 받는지 확실히 보여주는 증거다. 경찰관과 페인트공이 다가와 인사를 건넨 대상은 ‘라포’라는 유명인사가 아니라 자신들의 조국 이탈리아와 산업 발전의 역사였다. “많이 물려받은 걸 부인하진 않는다”고 그는 말했다. “아름다움을 보고, 추구하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배울 기회와 호사를 누렸다. 인생에선 자신의 삶을 만들고 이루고자 하는 걸 위해 노력해야 할 순간이 있다. 가족기업 속에서는 내가 원하는 일을 모두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원하는 걸 나만의 방식으로 하자고 결심했다.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고 말한 그는 펜 뚜껑을 딸깍거리는 동안 잠시 멈췄던 말을 이었다. “나는 멈추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다.”

- GUY MARTIN 포브스 기자

위 기사의 원문은 http://forbes.com 에서 보실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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