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10대 기업 DNA, 창업주의 기업가정신을 찾아서 (8) SK그룹
한국 10대 기업 DNA, 창업주의 기업가정신을 찾아서 (8) SK그룹
포브스코리아와 한국경영사학회가 공동 진행하는 특별기획 ‘한국 10대 기업 핵심 DNA, 창업자들의 기업가정신을 찾아서’의 여덟 번째는 혁신(이노베이션)의 대명사 SK그룹이다. 특히 SK의 전신인 선경을 설립한 담연 최종건 창업회장과 최 회장의 동생으로 혁신경영으로 제2창업을 이뤄낸 최종현 SK그룹 선대회장, 그리고 지금의 SK그룹을 이끌고 있는 최태원 회장의 기업가정신을 두루 조명했다. 장면 하나. 지난 8월 17일 최태원(55) SK그룹 회장이 서울 종로구 서린동 SK사옥에서 그룹의 CEO들과 함께 ‘확대 경영회의’를 주재하고 있었다. 그룹 컨트롤타워인 수펙스협의회 김창근 의장, 정철길 전략위원장, 하성민 윤리경영위원장 등 그룹 내 7개 위원회 위원장을 비롯해 장동현 SK텔레콤 사장, 조대식 SK㈜ 사장, 박성욱 SK 하이닉스 사장 등 그룹을 이끌어가는 17개 주요 관계사 CEO들이 빠짐없이 자리를 채웠다. 최 회장이 오랫동안 현장경영에서 떠나 있을 때 자신을 대신해 그룹의 대소사를 챙겨온 SK그룹의 핵심 인사들이었다.
그는 우선 빈자리를 채워준 임직원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어려운 기간 김창근 의장을 중심으로 노력한 데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참석한 경영진들은 하나같이 오너의 복귀를 반겼다. 하지만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회의 참석자들은 시급한 과제 중 하나로 ‘오너의 부재로 약해진 해외 네트워크 재건’을 건의했다. 최 회장은 “과거처럼 일년의 절반 이상을 해외 사업현장에 머물며 굵직한 해외사업들에서 성과를 거두겠다”고 화답했다. 실제 최 회장은 이후 중국과 스페인의 현지공장을 방문하는 등 본인의 글로벌 네트워크를 활용한 글로벌 경영을 본격화했다.
최 회장은 이날 경제 활성화를 위해 그동안 곰곰이 생각해왔던 바를 경영진들에게 이야기했다. “경영현장에서 떨어져 있는 동안 기업의 활동이 사회양극화, 경제 활력, 청년실업 등의 사회문제와 별개가 아니라고 다시 한번 생각하면서 기업인으로서 막중한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사실이었다. 그는 특별사면으로 경영에 복귀한 직후 그룹의 최고 리더로서 사업보국에 매진하기로 결심한 터였다.
회의를 마무리하며 마침내 최 회장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경제가 어려울 때 기업이 앞장서서 빠른 투자를 하고 계획보다 확대하는 것이 경제 활성화에 실질적으로 기여하는 것입니다… 회장인 제가 앞서서 풍상을 다 맞을 각오로 뛰겠으니 전 구성원이 대동단결해서 경제 활성화에 매진해 주십시오.”
최 회장은 참석한 계열사 CEO들에게 우선 투자가 시급한 반도체를 중심으로 현재 건설 중인 공장의 장비투자 및 2개의 신규공장 증설 등에 대규모로 투자하는 방안을 검토해달라고 요청했다. 참석한 계열사의 CEO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최태원 회장 발언의 무게감을 느끼고 있었다. SK그룹은 확대 경영회의를 마친 뒤 “회의에서 결의된 내용을 중심으로 각 사안별로 구체적인 실행 안을 만들어 대규모 투자를 추진키로 했다”고 밝혔다. 재계의 예상을 뛰어넘은 대한민국 재계 3위 SK그룹의 46조원 투자 발표는 이런 배경 속에서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최태원 회장이 뛰고 있다. 정부가 추진하는 경제 활성화 정책에 적극 부응하는 등 사업보국의 기업가정신을 실천하고 있다. 고려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시카고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박사 과정을 수료한 엘리트 경영인인 최 회장은 1992년 선경 경영기획실 부장을 시작으로 경영수업을 받아오다 1998년 부친인 최종현 선대회장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만 38살에 그룹 회장직을 승계 받았다. 하지만 최 회장은 6년여의 짧은 경영 경험을 우려한 재계의 시선과 달리 선대로부터 이어온 경영철학을 잘 이어받아 성과를 거두었고, 특유의 승부사적 결단력으로 지금 활황을 맞고 있는 SK하이닉스를 인수해 그룹의 외형도 크게 성장시켰다. 하지만 아무리 운이 좋고 능력이 뛰어난 기업인도 한 나라의 실정법 앞에서는 준엄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게 세상 이치다. 그 결과 2년 반의 경영공백을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최 회장은 다시 일어섰다. 경영에 복귀한 직후 그는 자신의 혼이 담긴 반도체 공장부터 찾아 사업보국을 모색했다. 그리고 확대 경영회의를 거친 뒤 지난 8월 25일, 경기도 이천에서 SK하이닉스 M14 반도체공장 준공 및 미래비전 선포식을 갖고 46조원의 반도체 사업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이천의 선포식 현장에서 최 회장으로부터 반도체 생산에 대해 설명을 들은 박근혜 대통령이 그를 격려했음은 물론이다.
현재 서린동 SK사옥 회장 집무실에는 간이침대 등이 있어 늦은 시간까지 업무에 몰두하며 각종 현안을 챙기고 있다. 경영 일선에 복귀한 뒤에는 국내외를 넘나드는 광폭행보다. 대전 한국과학기술원(KAIST)과 세종시 등 SK가 지원하는 창조경제혁신센터 현장을 찾았고, SK이노베이션 울산 공장 등 주력 계열사 현장을 챙겼다. 국내는 물론 중국과 홍콩, 대만 등 중화권을 시작으로 스페인, 네덜란드 등을 오가며 해외 네트워크 재건에 힘쓰는 등 강행군을 벌이고 있다. 이 때문인지 SK그룹 홍보실은 포브스의 이번 기업가정신 취재와 관련해 최 회장의 인터뷰 요청을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밝혀 왔다. 최 회장은 지난 10월에는 박근혜 대통령의 방미 일정에 경제 사절단으로 동행해 자신의 글로벌 행보를 더욱 확대했다. 그는 미국 현지의 SK 사업장을 점검하고, 다수의 미국 정·관계 인사들을 만나 협력을 약속받는 등 자신감을 회복했다는 후문이다. 최 회장은 대전 창조경제혁신센터를 방문해 시대의 핵심인 창조경제를 산업으로 현실화시키는데 골몰하는 등 재계 3위의 대기업 군을 이끌어가는 수장으로서 경제 활성화에 노력하고 있다. 최 회장은 또한 시대의 요청인 고용 창출 주문에도 선도적으로 실천했다. 최 회장은 앞서 지난 8월 확대 경영회의에서 ‘디딤돌’과 ‘비상(飛上) 프로그램’같은 혁신적인 청년일자리 프로그램이 확산되도록 확실히 챙겨 달라”고 강하게 주문한 바 있다. 역시 지난 8월, 비무장지대에서 남북대치로 긴장이 조성돼 전역을 앞둔 병사들의 전역 연기소식이 알려지자 전역을 연기한 장병들이 SK 입사를 희망하면 우선 채용하겠다고 밝힌 것도 같은 연장선상에 있다.
현재 아프리카 소말리아 앞바다 아덴만에서 한국의 선박을 해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활동 중인 이순신 함에는 최태원 회장이 사랑하는 둘째 딸 최민정 해군 소위가 청해부대 소속으로 근무하고 있다. 2014년 4월, 해군 사관후보생 모집에 조용히 응시해 9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한 재원이다. 둘째 딸이 면회를 와서 해군 사관학교 후보생 임관을 통보하자 “깊게 생각해서 선택했으니 건강하고 의미 있게 좋은 시간을 보내라”며 격려한 자상한 아버지였다. 최민정 소위는 재벌가 자녀로서 자발적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사례다.
한 나라의 기업가에게 있어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사업보국이다. 최태원 회장의 혁신경영과 현장경영 등 SK그룹 기업가정신의 바탕에는 최종건 창업회장과 최종현 선대회장에게서부터 비롯된 사업보국 정신이 있다. 지금 SK그룹의 기반인 신용 우위, 기술 우위, 인재 우위의 경영이념도 두 창업회장이 그 뿌리다. 그 뿌리로 들어가 보자. SK그룹의 전신인 선경의 창업자 담연(湛然) 최종건(1926~1973)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 대표적인 창업가형 기업가다. 담연은 경기도 수원 태생으로 최태원 회장의 큰아버지다. 경성공립직업학교(현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기계과를 졸업한 1944년, 그는 18살 어린 나이에 일본인이 경영하던 선경직물 수원공장 견습기사로 입사하면서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다. 그는 성실한 자세와 리더십으로 입사 2년이 채 안 돼 생산부장까지 초고속 승진한다. 하지만 불행히도 6·25전쟁으로 모든 것이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다음의 한 장면을 떠올려보자. 1953년 4월, 한국 전쟁으로 모든 것이 잿더미가 되어버린 선경직물의 공장 앞에 건장한 청년 최종건이 서 있었다. 전쟁으로 인해 청년의 모든 꿈은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하지만 청년 최종건은 그 잿더미 속으로 혼자서 삽을 들고 뛰어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공장이 세워지고, 불에 타 버린 부품들을 조립하기를 2개월, 각고의 노력 끝에 네 대의 직기가 조립되었다.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꿈과 희망의 삽으로 파헤쳐 만들어 낸 그 네 대의 직기는 결국 오늘날의 SK신화를 만들어내는 씨앗이 되었다. 최종건은 그해 10월, 선경직물(주)을 창업한다.
담연 최종건의 삶은 경제난으로 힘들어하는 오늘의 우리에게 희망과 용기의 메시지를 준다. 바로 ‘큰 꿈을 갖고 그 꿈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며 열정과 도전의 삶을 살면 반드시 그 꿈이 이루어진다’는 메시지다. 그의 꿈은 우리나라 제일의 종합섬유제조업자가 되는 것이었다.
창업 이후 담연의 꿈은 더 원대해졌다. 원자재부터 완제품에 이르는 수직계열화를 구상해 1966년 1월 30일 ‘선경 5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그리고는 꿈을 위해 묵묵히 매진했다. 1966년 6월 15일에 선경화섬을 설립했고, 1968년 3월과 6월에 아세테이트 및 폴리에스테르 원사 공장을 각각 착공해 준공했다.
이로써 선경은 원사 제조업체인 선경합섬과 선경화섬, 직물을 생산하는 선경직물과 울산직물, 완제품 생산업체인 해외섬유, 선산섬유 그리고 울산직물로 이루어진 수직적 기업결합을 이룩한 국내 최초의 ‘섬유그룹’이 되었다. 꿈이 현실화되는 고비고비마다 담연의 동생이자 현 최태원 회장의 아버지인 최종현 선대회장의 열성적인 도움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 법이다. 선경과 박정희 정부와의 운명적인 만남은 선경이 성장하는데 또 하나의 원동력이 되었다. 5·16 직후 군사정부는 산업화를 통한 경제발전에 대한 강력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1961년 9월,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회의 의장이 선경직물 수원공장을 방문한다. 민정이양 이후인 1964년 10월에도 박정희 대통령은 수원공장을 방문했다. 대통령의 이러한 관심은 선경에 대한 신뢰를 높여 주었다. 1964년 방문 때 동행한 육영수 여사에게 선경이 선물한 한복 옷감은 소위 ‘청와대 갑사’로 불리며 널리 알려져 히트상품이 되었다. 박정희 정부의 수출촉진정책을 잘 활용한 것도 최종건 회장 형제의 꿈을 펼치는데 도움이 되었다. 최종건 회장은 1962년 4월에 인견직물 10만 마를 한국 직물업계 최초로 해외에 수출하는데 성공했다. 선경은 그때부터 수출을 통하여 그룹의 발전에 필요한 자금과 기술개발을 획득하는 경영전략을 추구해 글로벌 선경그룹으로 성장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담연의 꿈은 다시 진화했다. 그는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미래를 예측하는 통찰력을 가진 기업가였다. 그는 섬유산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석유화학공업을 해야 하고 나아가서 석유 정제사업까지 해야만 원료를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고 저렴한 생산비를 보장 받게 되어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그는 섬유의 원자재를 공급하는 석유사업에 진출하여 ‘석유에서 섬유까지’의 일괄 생산체제를 갖춘다는 비전을 제시한다. 그러나 폐암 진단을 받은 그는 48세이던 1973년 11월 15일 아깝게 세상을 떠나고 만다.
기업가정신은 경제 성장의 원동력이다. 경영학자들은 담연 최종건 회장에게서 불굴의 도전정신과 하면 된다는 신념주의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엔지니어 출신으로서 기술을 통해 나라에 이바지하겠다는 담연의 도전 정신과 사업보국의 기업가정신이 선경의 창업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다. SK그룹 기업가정신을 연구한 남명수 인하대 명예교수는 “오늘날 SK그룹이 글로벌 기업으로 눈부시게 성장한 데에는 무에서 유를 창조한 담연의 도전의식과 개척자정신이 토대가 되었다”고 말했다. (46쪽 기사 참조) 김한원 경희대 명예교수도 “담연의 기업가정신이 오늘날 우리가 당면해 있는 어려운 현실에서 ‘무언가 해낼 수 있다’는 용기를 갖게 하고, 새로운 내일에 대한 도전과 희망을 갖게 한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담연의 꿈은 끊어지지 않고 그의 동생 최종현 회장에게 이어졌다. 1973년 ‘석유에서 섬유까지’라는 SK의 가야할 길을 재천명한 최종현 회장은 이후 (주)유공을 인수해 담연의 꿈을 마침내 현실로 이뤄내고야 만다.
최종현 회장(1929~1998)은 SK그룹의 제2창업자로서 SK그룹을 성장시킨 전문경영자형 기업가로 꼽힌다. 그는 또한 대한민국 재계를 대표하는 전경련 회장을 역임하면서 경제이론에 밝은 기업가로 평가받은 창업자형 기업가라는 성격도 지닌다. 그는 1952년에 서울대를 자퇴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1956년에 위스콘신 대학교를 졸업한 엘리트다. 3년 후 시카고 대학교에서 경제학 석사과정을 마친 뒤 귀국했다. 최종현 회장은 1962년에 선경직물 이사직을 맡으면서 경영인으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 1997년부터 선경그룹 회장으로, 1998년 선경그룹이 SK그룹으로 명칭이 변경되면서 SK그룹 회장으로 취임한다. 지금의 SK그룹의 실질적인 창업자인 셈이다.
경영자로서 최종현 선대회장의 활약은 눈부시다. 그는 1973년 선경직물(주) 창립 20주년 기념사를 통해 ‘석유에서 섬유까지’의 경영목표를 재천명한다.
SK그룹 연구자들에 따르면, SK그룹의 최고 경영자로서 최종현 회장의 경영사는 크게 3기로 구분된다. 제 1기는 1980~1983년 기업변신기, 제2기는 1984~1988년 대단위 투자의 수직계열화 착수기, 제3기는 1989~1991년으로 석유에서 섬유까지의 수직계열화 완성기다. 최종현 회장은 1980년 12월 23일 (주)유공 사장에 취임함으로써 석유공사의 민영화시대를 개막했다. 이후 국내 정유 업체였던 (주)유공을 종합에너지·종합화학회사로 사업영역을 확대하고, 섬유회사이던 선경합섬(주)을 정밀화학회사로 유도하는 한편, 폴리에스텔 필름 생산업체인 선경화학(주)을 마그네틱테이프 메이커로 확대·발전시켜 나갔다. 수직계열화를 위한 그의 이런 노력은 1991년 6월 1조5천억원이라는 엄청난 투자로 마침내 울산 콤플렉스의 9개 공장을 준공시키는 결실을 맺게 된다.
이로써 그가 이끄는 SK는 원유개발에서 유화, 필름, 테이프, 섬유, 봉제에 이르는 완전 수직계열화를 이룬 세계 최초의 기업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최종현 회장이 ‘석유에서 섬유까지’의 수직계열화를 천명했을 때 경제계는 물론 기업 내에서도 무모한 결정이라는 의견이 있었지만 그는 특유의 도전정신으로 이를 19년 만에 완성해 내는 의지력을 보여주었다. 최종현 선대회장 시대 압권은 1996년 세계 최초로 CDMA(부호분할다중접속) 상용화를 이루는데 성공한 것이다. <동아일보> 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보도하고 있다. “1995년 12월 31일, 경인고속도로 인천 톨게이트 부근. 손길승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 부회장이 승합차 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모기업인 선경그룹의 최종현 선대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아주 잘 들리네요. 끊어지지도 않고.” 당시 전화기에서 들리는 최 회장의 목소리는 들떠 있었다고 한다. 승합차에 동승한 한국이동통신 임원진도 번갈아 가며 시험 통화를 했다. 인천 주안역까지 가는 약 30분 동안 통화는 한 번도 끊어지지 않았다. 임원들의 얼굴도 점차 상기됐다. 세계 최초로 부호분할다중접속(CDMA) 상용화의 서막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1990년대 당시는 유럽통화방식(GSM)이 시장을 선점하고 있었고, 세계적으로 아직 CDMA 방식을 상용화한 곳이 없었다. 하지만 한국이동통신은 CDMA 방식에 승부수를 띄웠고, 1994년 선경그룹이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한 뒤 결국 CDMA 세계최초 상용화에 성공한 것이다. 여기에는 특히 최종현 회장이 손길승 당시 부회장을 통해 기술개발자금으로 한국이동통신에 100억원을 지원했던 것이 크게 주효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SK그룹 임직원들과 경영학자들에 따르면, 최종현 선대회장은 특히 경영인으로서 이론과 현실에 다 능통한 기업가로 꼽힌다. 최종현 회장은 자신의 기업경영에 대한 오랜 경험과 연구를 기본으로 지금 SK그룹 관리체제의 바탕이 된 경영지침서라고 할 수 있는 SKMS(SK경영관리체계)를 정립했다. 그가 50세 때 정립한 SKMS는 이후 경영학계에 주목을 끌 정도로 획기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첫째는 사람을 다루는 것, 둘째는 기업을 합리적으로 운영하는 것, 셋째는 현실을 외면하는 운영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정리된다. 최종현 회장은 SKMS를 통해 SK를 국제적인 일류기업으로 만들고자했다. 그리고 “일을 할 때 인간이 달성 가능한 극한치를 찾아서 목표치로 정하고, 그 목표달성을 위하여 꾸준히 노력하는” 경영실천방법으로 수펙스(SUPEX, Super Excellent) 추구를 제시했다. 아울러 패기, 경영지식, 경영에 부수된 지식, 사교자세. 가정 및 건강관리 등 SK인의 자세(SK Manship)를 정해 경영자로서 갖추어야 할 자격요소를 삼았다. SK인이 지녀야 할 경영자질문제는 오늘날까지 활용되고 있다.
최종현 회장은 그의 저서 『도전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는 제목처럼 도전정신으로 SK를 성장시키는 기업가정신을 보여주었다. 그는 “연구도중 한 사람이 쓰러지면 다른 사람이 계속해서 도전하여 연구를 하고 그 사람이 쓰러지면 또 다른 사람이 계속해서 도전하여 연구를 하는 식의 도전정신만 있으면 기업은 성장하고 발전한다”고 말했다. 최종현 회장의 ‘하면 된다’는 캔 두이즘(Can-doism)사상은 그를 신념의 기업가로 만들었다. 자기가 맡은 일은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치밀하게 계획을 수립하여 철저히 처리함으로써 다른 사람이 두 번 다시 손댈 필요가 없도록 해야 한다는 신념은 그의 경영철학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경영학자들은 그의 신념주의 정신의 대표적인 사례로 ‘석유에서 섬유까지’에 이르는 완전계열화의 성공과 (주)유공의 인수, 수펙스 경영, 세계 제일주의 경영, SKMS 정립과 보급 등을 꼽는다. 경영자로서 최종현 회장은 특히 혁신(Innovation)의 기업인으로 꼽힌다. 지금 SK그룹의 상징이 되고 있는 이노베이션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어김없이 최종현 회장이 있다. 최종현 회장은 SK(주)의 산업구조 조정과 영업기능 고도화라고 하는 ‘장기발전계획’을 수립하고 ‘기업의 글로벌화(Globalization)’와 ‘서비스의 첨단화’ 등 2개의 축으로 하는 경영이익 극대화를 위한 혁신을 적극 추진해 갔다.
최종현 회장은 특히 연구개발부분의 혁신에 초점을 맞추었다. 연구개발관리의 혁신은 이윤극대화를 위해서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 내고, 기존상품의 품질 또는 원가를 혁신하거나 경영관리기법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최 회장은 마케팅 혁신은 “소비자의 욕구를 파악하고, 그에 맞는 상품을 만들게 하여 될 수 있는 한 높은 가격으로 파는 것이다.”라고 했다. 인력관리혁신도 중시했다. 기업 구성원의 1인당 생산성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인사관리 각 영역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고, 동적요소의 수준을 지속적으로 향상시키는 것이 인력관리라고 정의했다. 생산현장에서는 생산관리혁신을 강조했다. 그는 생산관리 정의를 “가장 좋은 품질의 상품을 가장 싸게 만드는 것이다”라고 제시했다. 생산관리의 혁신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살 수 있는 기술은 사와야 하며, 생산된 제품은 재빠른 처리”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했다. 정보관리 혁신도 강조했는데, “폭넓게 정보를 수집하여 경영자가 정확한 지식을 갖게 하고 경영활동에 활용하도록 하는 것이다”라고 정의했다. 세월이 흘렀어도 요즘의 경영자들이 모두 귀담아야 할 내용들이다.
‘최종현 경영학’의 또 하나 핵심은 “기업운영에 있어 사람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고 강조한 인재중시의 경영학이다. 국민들에게 익숙한 MBC TV ‘장학퀴즈’ 후원은 최종현 선대회장 때부터 부의 사회 환원과 인재양성을 위한 미래에의 투자라는 취지 아래 이뤄져 왔다. 기업의 홍보 차원이 아니라 순수한 인재 양성이 주목적이었기에 장학금을 받은 학생에 대한 어떤 조건도 없었다.
최종현 회장은 장학퀴즈 후원과 별개로 “천연자원이 부족한 나라에서 인적자원개발만이 우리의 자산이며, 이것만이 앞으로의 경영경쟁시대에 유일한 경쟁력의 원천”이라고 판단하고 한국 최초의 기업의 경영능력과 인재개발을 위한 사원교육의 선경연수원을 1975년 3월에 개원했다. 사람을 우선으로 하는 그의 인간 위주의 경영은 우리나라 기업에 대한 국민들의 이미지를 끌어 올렸다는 평가를 받았고, 당연히 국가 경제 발전에도 이바지했다. 앞서 남북 간 긴박한 대치상황에서 전역 연기 의사를 밝혔던 장병들에 대한 특별 채용방침을 밝힌 SK그룹의 방침도 선대로부터 이어진 인재경영의 경영철학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최종현 선대회장은 또 후진적인 정치문화의 선진화에도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1993년 한국 재계의 총수인 전경련 회장에 취임한 뒤 “기업인의 첫째 의무는 기업 활동”임을 강조하며 정경분리의 필요성을 주장했고, “정치자금모금법에 의한 조성에는 협조하되 비공식적인 정치자금은 거두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기업인으로서 SK그룹을 이끄는 한편으로 한국정신문화연구원과 현대사회연구소의 이사, 한국고등 교육재단 이사장을 맡아 활동하는 등 문화와 교육 발전을 위해 힘썼고, 2002년 FIFA 월드컵 조직위원회 고문, 노사정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하는 등 사회·체육 분야에도 큰 족적을 남겼다.
이처럼 최종현 선대회장은 SK그룹의 실질적 창업자이자 전경련 회장을 지낸 한국 재계의 거물로 활약하다 1998년 갑작스럽게 타계했다. 그의 뒤를 이은 최태원 회장이 벌써 20년 가까운 세월을 재임하고 있다. 이제 SK그룹은 최태원 회장의 경영복귀로 효율적인 오너경영으로 경영위기를 극복하고 다시 한 번 우뚝 설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에너지, 정보통신, 반도체 등 그룹의 3대 주력 사업 중 반도체 사업이 특히 활황이다.
SK그룹의 미래는 밝다. 최태원 회장도 1960년생으로 아직 젊은 편이다. 지난 10월 15일 대통령의 방미 때 경제사절단으로 수행한 최태원 회장과 두산그룹 박용만 회장이 한미 ‘우호의 밤’행사에 나란히 앉아있는 사진이 국내언론에 소개됐다. 그가 꾸준히 기업가정신을 실천하고 그의 진정성이 빛을 발한다면 선친의 뒤를 이어 대한상공회의소장으로 활약하고 있는 박용만 회장처럼 최 회장 역시 전경련 회장을 맡아 사업보국에 매진할 기회를 갖게 될 수 있을 것이다.
- 포브스코리아 특별취재팀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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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우선 빈자리를 채워준 임직원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어려운 기간 김창근 의장을 중심으로 노력한 데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참석한 경영진들은 하나같이 오너의 복귀를 반겼다. 하지만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회의 참석자들은 시급한 과제 중 하나로 ‘오너의 부재로 약해진 해외 네트워크 재건’을 건의했다. 최 회장은 “과거처럼 일년의 절반 이상을 해외 사업현장에 머물며 굵직한 해외사업들에서 성과를 거두겠다”고 화답했다. 실제 최 회장은 이후 중국과 스페인의 현지공장을 방문하는 등 본인의 글로벌 네트워크를 활용한 글로벌 경영을 본격화했다.
최 회장은 이날 경제 활성화를 위해 그동안 곰곰이 생각해왔던 바를 경영진들에게 이야기했다. “경영현장에서 떨어져 있는 동안 기업의 활동이 사회양극화, 경제 활력, 청년실업 등의 사회문제와 별개가 아니라고 다시 한번 생각하면서 기업인으로서 막중한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사실이었다. 그는 특별사면으로 경영에 복귀한 직후 그룹의 최고 리더로서 사업보국에 매진하기로 결심한 터였다.
회의를 마무리하며 마침내 최 회장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경제가 어려울 때 기업이 앞장서서 빠른 투자를 하고 계획보다 확대하는 것이 경제 활성화에 실질적으로 기여하는 것입니다… 회장인 제가 앞서서 풍상을 다 맞을 각오로 뛰겠으니 전 구성원이 대동단결해서 경제 활성화에 매진해 주십시오.”
최 회장은 참석한 계열사 CEO들에게 우선 투자가 시급한 반도체를 중심으로 현재 건설 중인 공장의 장비투자 및 2개의 신규공장 증설 등에 대규모로 투자하는 방안을 검토해달라고 요청했다. 참석한 계열사의 CEO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최태원 회장 발언의 무게감을 느끼고 있었다. SK그룹은 확대 경영회의를 마친 뒤 “회의에서 결의된 내용을 중심으로 각 사안별로 구체적인 실행 안을 만들어 대규모 투자를 추진키로 했다”고 밝혔다. 재계의 예상을 뛰어넘은 대한민국 재계 3위 SK그룹의 46조원 투자 발표는 이런 배경 속에서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최태원 회장이 뛰고 있다. 정부가 추진하는 경제 활성화 정책에 적극 부응하는 등 사업보국의 기업가정신을 실천하고 있다. 고려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시카고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박사 과정을 수료한 엘리트 경영인인 최 회장은 1992년 선경 경영기획실 부장을 시작으로 경영수업을 받아오다 1998년 부친인 최종현 선대회장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만 38살에 그룹 회장직을 승계 받았다.
사업보국 기업가정신으로 다시 뛴다
현재 서린동 SK사옥 회장 집무실에는 간이침대 등이 있어 늦은 시간까지 업무에 몰두하며 각종 현안을 챙기고 있다. 경영 일선에 복귀한 뒤에는 국내외를 넘나드는 광폭행보다. 대전 한국과학기술원(KAIST)과 세종시 등 SK가 지원하는 창조경제혁신센터 현장을 찾았고, SK이노베이션 울산 공장 등 주력 계열사 현장을 챙겼다. 국내는 물론 중국과 홍콩, 대만 등 중화권을 시작으로 스페인, 네덜란드 등을 오가며 해외 네트워크 재건에 힘쓰는 등 강행군을 벌이고 있다. 이 때문인지 SK그룹 홍보실은 포브스의 이번 기업가정신 취재와 관련해 최 회장의 인터뷰 요청을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밝혀 왔다. 최 회장은 지난 10월에는 박근혜 대통령의 방미 일정에 경제 사절단으로 동행해 자신의 글로벌 행보를 더욱 확대했다. 그는 미국 현지의 SK 사업장을 점검하고, 다수의 미국 정·관계 인사들을 만나 협력을 약속받는 등 자신감을 회복했다는 후문이다. 최 회장은 대전 창조경제혁신센터를 방문해 시대의 핵심인 창조경제를 산업으로 현실화시키는데 골몰하는 등 재계 3위의 대기업 군을 이끌어가는 수장으로서 경제 활성화에 노력하고 있다. 최 회장은 또한 시대의 요청인 고용 창출 주문에도 선도적으로 실천했다. 최 회장은 앞서 지난 8월 확대 경영회의에서 ‘디딤돌’과 ‘비상(飛上) 프로그램’같은 혁신적인 청년일자리 프로그램이 확산되도록 확실히 챙겨 달라”고 강하게 주문한 바 있다. 역시 지난 8월, 비무장지대에서 남북대치로 긴장이 조성돼 전역을 앞둔 병사들의 전역 연기소식이 알려지자 전역을 연기한 장병들이 SK 입사를 희망하면 우선 채용하겠다고 밝힌 것도 같은 연장선상에 있다.
현재 아프리카 소말리아 앞바다 아덴만에서 한국의 선박을 해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활동 중인 이순신 함에는 최태원 회장이 사랑하는 둘째 딸 최민정 해군 소위가 청해부대 소속으로 근무하고 있다. 2014년 4월, 해군 사관후보생 모집에 조용히 응시해 9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한 재원이다. 둘째 딸이 면회를 와서 해군 사관학교 후보생 임관을 통보하자 “깊게 생각해서 선택했으니 건강하고 의미 있게 좋은 시간을 보내라”며 격려한 자상한 아버지였다. 최민정 소위는 재벌가 자녀로서 자발적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사례다.
한 나라의 기업가에게 있어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사업보국이다. 최태원 회장의 혁신경영과 현장경영 등 SK그룹 기업가정신의 바탕에는 최종건 창업회장과 최종현 선대회장에게서부터 비롯된 사업보국 정신이 있다. 지금 SK그룹의 기반인 신용 우위, 기술 우위, 인재 우위의 경영이념도 두 창업회장이 그 뿌리다. 그 뿌리로 들어가 보자.
무에서 유를 만들어낸 담연 최종건 창업회장
다음의 한 장면을 떠올려보자. 1953년 4월, 한국 전쟁으로 모든 것이 잿더미가 되어버린 선경직물의 공장 앞에 건장한 청년 최종건이 서 있었다. 전쟁으로 인해 청년의 모든 꿈은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하지만 청년 최종건은 그 잿더미 속으로 혼자서 삽을 들고 뛰어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공장이 세워지고, 불에 타 버린 부품들을 조립하기를 2개월, 각고의 노력 끝에 네 대의 직기가 조립되었다.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꿈과 희망의 삽으로 파헤쳐 만들어 낸 그 네 대의 직기는 결국 오늘날의 SK신화를 만들어내는 씨앗이 되었다. 최종건은 그해 10월, 선경직물(주)을 창업한다.
담연 최종건의 삶은 경제난으로 힘들어하는 오늘의 우리에게 희망과 용기의 메시지를 준다. 바로 ‘큰 꿈을 갖고 그 꿈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며 열정과 도전의 삶을 살면 반드시 그 꿈이 이루어진다’는 메시지다. 그의 꿈은 우리나라 제일의 종합섬유제조업자가 되는 것이었다.
창업 이후 담연의 꿈은 더 원대해졌다. 원자재부터 완제품에 이르는 수직계열화를 구상해 1966년 1월 30일 ‘선경 5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그리고는 꿈을 위해 묵묵히 매진했다. 1966년 6월 15일에 선경화섬을 설립했고, 1968년 3월과 6월에 아세테이트 및 폴리에스테르 원사 공장을 각각 착공해 준공했다.
이로써 선경은 원사 제조업체인 선경합섬과 선경화섬, 직물을 생산하는 선경직물과 울산직물, 완제품 생산업체인 해외섬유, 선산섬유 그리고 울산직물로 이루어진 수직적 기업결합을 이룩한 국내 최초의 ‘섬유그룹’이 되었다. 꿈이 현실화되는 고비고비마다 담연의 동생이자 현 최태원 회장의 아버지인 최종현 선대회장의 열성적인 도움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 법이다. 선경과 박정희 정부와의 운명적인 만남은 선경이 성장하는데 또 하나의 원동력이 되었다. 5·16 직후 군사정부는 산업화를 통한 경제발전에 대한 강력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1961년 9월,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회의 의장이 선경직물 수원공장을 방문한다. 민정이양 이후인 1964년 10월에도 박정희 대통령은 수원공장을 방문했다. 대통령의 이러한 관심은 선경에 대한 신뢰를 높여 주었다. 1964년 방문 때 동행한 육영수 여사에게 선경이 선물한 한복 옷감은 소위 ‘청와대 갑사’로 불리며 널리 알려져 히트상품이 되었다.
(주)유공 인수해 ‘석유에서 섬유까지’꿈 이뤄
담연의 꿈은 다시 진화했다. 그는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미래를 예측하는 통찰력을 가진 기업가였다. 그는 섬유산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석유화학공업을 해야 하고 나아가서 석유 정제사업까지 해야만 원료를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고 저렴한 생산비를 보장 받게 되어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그는 섬유의 원자재를 공급하는 석유사업에 진출하여 ‘석유에서 섬유까지’의 일괄 생산체제를 갖춘다는 비전을 제시한다. 그러나 폐암 진단을 받은 그는 48세이던 1973년 11월 15일 아깝게 세상을 떠나고 만다.
기업가정신은 경제 성장의 원동력이다. 경영학자들은 담연 최종건 회장에게서 불굴의 도전정신과 하면 된다는 신념주의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엔지니어 출신으로서 기술을 통해 나라에 이바지하겠다는 담연의 도전 정신과 사업보국의 기업가정신이 선경의 창업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다. SK그룹 기업가정신을 연구한 남명수 인하대 명예교수는 “오늘날 SK그룹이 글로벌 기업으로 눈부시게 성장한 데에는 무에서 유를 창조한 담연의 도전의식과 개척자정신이 토대가 되었다”고 말했다. (46쪽 기사 참조) 김한원 경희대 명예교수도 “담연의 기업가정신이 오늘날 우리가 당면해 있는 어려운 현실에서 ‘무언가 해낼 수 있다’는 용기를 갖게 하고, 새로운 내일에 대한 도전과 희망을 갖게 한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담연의 꿈은 끊어지지 않고 그의 동생 최종현 회장에게 이어졌다. 1973년 ‘석유에서 섬유까지’라는 SK의 가야할 길을 재천명한 최종현 회장은 이후 (주)유공을 인수해 담연의 꿈을 마침내 현실로 이뤄내고야 만다.
최종현 회장(1929~1998)은 SK그룹의 제2창업자로서 SK그룹을 성장시킨 전문경영자형 기업가로 꼽힌다. 그는 또한 대한민국 재계를 대표하는 전경련 회장을 역임하면서 경제이론에 밝은 기업가로 평가받은 창업자형 기업가라는 성격도 지닌다. 그는 1952년에 서울대를 자퇴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1956년에 위스콘신 대학교를 졸업한 엘리트다. 3년 후 시카고 대학교에서 경제학 석사과정을 마친 뒤 귀국했다. 최종현 회장은 1962년에 선경직물 이사직을 맡으면서 경영인으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 1997년부터 선경그룹 회장으로, 1998년 선경그룹이 SK그룹으로 명칭이 변경되면서 SK그룹 회장으로 취임한다. 지금의 SK그룹의 실질적인 창업자인 셈이다.
경영자로서 최종현 선대회장의 활약은 눈부시다. 그는 1973년 선경직물(주) 창립 20주년 기념사를 통해 ‘석유에서 섬유까지’의 경영목표를 재천명한다.
SK그룹 연구자들에 따르면, SK그룹의 최고 경영자로서 최종현 회장의 경영사는 크게 3기로 구분된다. 제 1기는 1980~1983년 기업변신기, 제2기는 1984~1988년 대단위 투자의 수직계열화 착수기, 제3기는 1989~1991년으로 석유에서 섬유까지의 수직계열화 완성기다. 최종현 회장은 1980년 12월 23일 (주)유공 사장에 취임함으로써 석유공사의 민영화시대를 개막했다. 이후 국내 정유 업체였던 (주)유공을 종합에너지·종합화학회사로 사업영역을 확대하고, 섬유회사이던 선경합섬(주)을 정밀화학회사로 유도하는 한편, 폴리에스텔 필름 생산업체인 선경화학(주)을 마그네틱테이프 메이커로 확대·발전시켜 나갔다. 수직계열화를 위한 그의 이런 노력은 1991년 6월 1조5천억원이라는 엄청난 투자로 마침내 울산 콤플렉스의 9개 공장을 준공시키는 결실을 맺게 된다.
이로써 그가 이끄는 SK는 원유개발에서 유화, 필름, 테이프, 섬유, 봉제에 이르는 완전 수직계열화를 이룬 세계 최초의 기업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최종현 회장이 ‘석유에서 섬유까지’의 수직계열화를 천명했을 때 경제계는 물론 기업 내에서도 무모한 결정이라는 의견이 있었지만 그는 특유의 도전정신으로 이를 19년 만에 완성해 내는 의지력을 보여주었다.
세계 최초로 CDMA 상용화 성공 쾌거
1990년대 당시는 유럽통화방식(GSM)이 시장을 선점하고 있었고, 세계적으로 아직 CDMA 방식을 상용화한 곳이 없었다. 하지만 한국이동통신은 CDMA 방식에 승부수를 띄웠고, 1994년 선경그룹이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한 뒤 결국 CDMA 세계최초 상용화에 성공한 것이다. 여기에는 특히 최종현 회장이 손길승 당시 부회장을 통해 기술개발자금으로 한국이동통신에 100억원을 지원했던 것이 크게 주효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SK그룹 임직원들과 경영학자들에 따르면, 최종현 선대회장은 특히 경영인으로서 이론과 현실에 다 능통한 기업가로 꼽힌다. 최종현 회장은 자신의 기업경영에 대한 오랜 경험과 연구를 기본으로 지금 SK그룹 관리체제의 바탕이 된 경영지침서라고 할 수 있는 SKMS(SK경영관리체계)를 정립했다. 그가 50세 때 정립한 SKMS는 이후 경영학계에 주목을 끌 정도로 획기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첫째는 사람을 다루는 것, 둘째는 기업을 합리적으로 운영하는 것, 셋째는 현실을 외면하는 운영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정리된다. 최종현 회장은 SKMS를 통해 SK를 국제적인 일류기업으로 만들고자했다. 그리고 “일을 할 때 인간이 달성 가능한 극한치를 찾아서 목표치로 정하고, 그 목표달성을 위하여 꾸준히 노력하는” 경영실천방법으로 수펙스(SUPEX, Super Excellent) 추구를 제시했다. 아울러 패기, 경영지식, 경영에 부수된 지식, 사교자세. 가정 및 건강관리 등 SK인의 자세(SK Manship)를 정해 경영자로서 갖추어야 할 자격요소를 삼았다. SK인이 지녀야 할 경영자질문제는 오늘날까지 활용되고 있다.
최종현 회장은 그의 저서 『도전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는 제목처럼 도전정신으로 SK를 성장시키는 기업가정신을 보여주었다. 그는 “연구도중 한 사람이 쓰러지면 다른 사람이 계속해서 도전하여 연구를 하고 그 사람이 쓰러지면 또 다른 사람이 계속해서 도전하여 연구를 하는 식의 도전정신만 있으면 기업은 성장하고 발전한다”고 말했다. 최종현 회장의 ‘하면 된다’는 캔 두이즘(Can-doism)사상은 그를 신념의 기업가로 만들었다. 자기가 맡은 일은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치밀하게 계획을 수립하여 철저히 처리함으로써 다른 사람이 두 번 다시 손댈 필요가 없도록 해야 한다는 신념은 그의 경영철학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경영학자들은 그의 신념주의 정신의 대표적인 사례로 ‘석유에서 섬유까지’에 이르는 완전계열화의 성공과 (주)유공의 인수, 수펙스 경영, 세계 제일주의 경영, SKMS 정립과 보급 등을 꼽는다.
SK이노베이션의 뿌리는 최종현 선대회장
최종현 회장은 특히 연구개발부분의 혁신에 초점을 맞추었다. 연구개발관리의 혁신은 이윤극대화를 위해서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 내고, 기존상품의 품질 또는 원가를 혁신하거나 경영관리기법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최 회장은 마케팅 혁신은 “소비자의 욕구를 파악하고, 그에 맞는 상품을 만들게 하여 될 수 있는 한 높은 가격으로 파는 것이다.”라고 했다. 인력관리혁신도 중시했다. 기업 구성원의 1인당 생산성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인사관리 각 영역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고, 동적요소의 수준을 지속적으로 향상시키는 것이 인력관리라고 정의했다. 생산현장에서는 생산관리혁신을 강조했다. 그는 생산관리 정의를 “가장 좋은 품질의 상품을 가장 싸게 만드는 것이다”라고 제시했다. 생산관리의 혁신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살 수 있는 기술은 사와야 하며, 생산된 제품은 재빠른 처리”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했다. 정보관리 혁신도 강조했는데, “폭넓게 정보를 수집하여 경영자가 정확한 지식을 갖게 하고 경영활동에 활용하도록 하는 것이다”라고 정의했다. 세월이 흘렀어도 요즘의 경영자들이 모두 귀담아야 할 내용들이다.
‘최종현 경영학’의 또 하나 핵심은 “기업운영에 있어 사람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고 강조한 인재중시의 경영학이다. 국민들에게 익숙한 MBC TV ‘장학퀴즈’ 후원은 최종현 선대회장 때부터 부의 사회 환원과 인재양성을 위한 미래에의 투자라는 취지 아래 이뤄져 왔다. 기업의 홍보 차원이 아니라 순수한 인재 양성이 주목적이었기에 장학금을 받은 학생에 대한 어떤 조건도 없었다.
최종현 회장은 장학퀴즈 후원과 별개로 “천연자원이 부족한 나라에서 인적자원개발만이 우리의 자산이며, 이것만이 앞으로의 경영경쟁시대에 유일한 경쟁력의 원천”이라고 판단하고 한국 최초의 기업의 경영능력과 인재개발을 위한 사원교육의 선경연수원을 1975년 3월에 개원했다. 사람을 우선으로 하는 그의 인간 위주의 경영은 우리나라 기업에 대한 국민들의 이미지를 끌어 올렸다는 평가를 받았고, 당연히 국가 경제 발전에도 이바지했다. 앞서 남북 간 긴박한 대치상황에서 전역 연기 의사를 밝혔던 장병들에 대한 특별 채용방침을 밝힌 SK그룹의 방침도 선대로부터 이어진 인재경영의 경영철학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인재중시의 경영철학은 SK그룹의 DNA
이처럼 최종현 선대회장은 SK그룹의 실질적 창업자이자 전경련 회장을 지낸 한국 재계의 거물로 활약하다 1998년 갑작스럽게 타계했다. 그의 뒤를 이은 최태원 회장이 벌써 20년 가까운 세월을 재임하고 있다. 이제 SK그룹은 최태원 회장의 경영복귀로 효율적인 오너경영으로 경영위기를 극복하고 다시 한 번 우뚝 설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에너지, 정보통신, 반도체 등 그룹의 3대 주력 사업 중 반도체 사업이 특히 활황이다.
SK그룹의 미래는 밝다. 최태원 회장도 1960년생으로 아직 젊은 편이다. 지난 10월 15일 대통령의 방미 때 경제사절단으로 수행한 최태원 회장과 두산그룹 박용만 회장이 한미 ‘우호의 밤’행사에 나란히 앉아있는 사진이 국내언론에 소개됐다. 그가 꾸준히 기업가정신을 실천하고 그의 진정성이 빛을 발한다면 선친의 뒤를 이어 대한상공회의소장으로 활약하고 있는 박용만 회장처럼 최 회장 역시 전경련 회장을 맡아 사업보국에 매진할 기회를 갖게 될 수 있을 것이다.
- 포브스코리아 특별취재팀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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