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연근무제 확대하는 국내 기업 살펴보니] ‘무조건 하라’ 오너의 강력한 의지 있어야
[유연근무제 확대하는 국내 기업 살펴보니] ‘무조건 하라’ 오너의 강력한 의지 있어야
“저는 아침보단 저녁에 집중이 잘 되는 편인데, 이런 이유로 출근을 늦게 한다면 다른 회사에선 미쳤다는 소릴 들을지도 모르죠(웃음). 사실 아침에 한 시간만 늦게 출근해도 삶의 질이 확 달라지거든요. 훨씬 맑은 정신으로 일할 수 있고, 10시에 출근하면 러시아워도 피할 수 있죠. 아이에게 좀 더 좋은 엄마가 될 수도 있고요. 그 한 시간이 문제였는데 회사를 옮긴 뒤 그런 고민이 없어졌어요.”
이 회사 좀 독특하다. 직원이 2000명 이상이니 작은 회사도 아니다. 그런데 좀처럼 모여서 일하는 법이 없다. 출퇴근 시간도 제각각, 일하는 장소도 제각각이다. 국내 여행 업계 1위 하나투어 얘기다. 하나투어 직원들은 하루 8시간, 주당 40시간, 주 5일제 근무를 한다. 여기까진 다른 기업들과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실제 근무 방식은 완전히 다르다. 2011년 전사적으로 유연근무제를 도입한 덕분이다. 하나투어의 유연근무제는 크게 재택근무·거점근무·시차출퇴근·재량근무 등 4가지로 나뉜다. 사안별로 상급자의 허락이 필요한 재량근무를 제외하고, 나머지 3가지는 직원이 자율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 직원들 사이에서 가장 호평을 받는 건 거점근무제다. 하나투어는 직원의 희망에 따라 거주지에서 가까운 사무실에서 일할 수 있도록 신도림·왕십리·노원·선릉·일산 등 9곳의 거점 사무실을 운영한다. 선릉 사무실로 출근한다는 김모 사원은 “50명 정도가 이곳으로 출근하는데, 출근시간이 30분 이상 걸리는 직원은 거의 없다”며 “대부분 선릉에서 가까운 분당이나 강남에 거주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더 큰 매력은 재택근무·거점근무·시차출퇴근제를 동시에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송모 과장의 일상은 특이하다. 일주일 중 월요일과 수요일만 사무실로 출근하고, 3일은 집에서 근무한다. 출근하는 날에도 집에서 가까운 일산 사무실로 10시까지 나온다. 그는 “매일 아침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 줄 수 있어 좋다”며 “출퇴근 시간이 크게 줄어들기 때문에 남는 시간을 자기계발에 활용하는 장점도 있다”고 말했다.
아무래도 집에서 일하면 효율성이 떨어지지 않느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지만 재택근무를 하는 직원들의 생각은 다르다. 정모 사원은 “재택근무를 시작한 뒤 출근하는 날에는 주로 대면 업무를, 집에선 통계 업무를 하는 식으로 계획을 세웠다”며 “이리저리 허비하는 시간이 거의 없기 때문에 업무 효율성이 더 높아졌다”고 말했다. 자기관리의 중요성을 더욱 체감하게 됐다는 목소리도 있다. 송모 과장은 “처음에는 직장과 가정 사이에서 맺고 끊음이 명확하지 않아 혼란스럽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업무 시간을 더 정확히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재택근무를 하는 직원일수록 안 보이는 만큼 잘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더 강한 것 같다”고 말했다.
현재 하나투어에선 월 평균 약 100명의 직원이 재택근무를, 전 직원의 4분의 1인 약 500명이 시차출퇴근제를 활용한다. 하나투어가 파격적인 유연근무제를 도입한 이면엔 박상환 회장의 강력한 의지가 있었다. 2009년쯤 박 회장은 “앞으로는 개인과 회사가 함께 성장해야 하는데 업무 환경에 따라 유연하게 근무하는 방식으로 바꿔야 노동 생산성이 높아지고, 결국 회사 수익도 좋아질 것”이라며 유연근무제 캠페인을 제안했다. 하지만 직원 대부분이 눈치를 보느라 활용하지 않았다. ‘그래도 회사에 나와야 한다’는 관리자의 암묵적인 지시도 여전했다. 캠페인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 박 회장은 2011년 아예 제도를 만들어 못을 박았고, 사무실을 쪼개 근무 환경을 바꿔버렸다. 동시에 인사팀은 유연근무제 활용을 방해하는 관리직을 단속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직원들이 조금씩 생각을 바꿨고, 4년이 지난 지금 유연근무제는 이 회사에서 일상이 됐다. 하나투어는 2016년부터는 거점근무를 더욱 활성화할 계획이다. 현재 거점 사무실에서 일하는 직원은 약 900명. 이 인원을 더욱 늘려 내년엔 본사에 딱 400명만 남긴다는 계획이다. 덕분에 하나투어는 최근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주관한 ‘2015 여가친화기업 인증캠페인’에서 여가 친화기업으로 선정됐다. 여가친화기업 인증 캠페인은 근로자가 일과 여가생활을 조화롭게 병행할 수 있도록 모범적으로 지원하는 기업을 선정, 인증하는 제도다. 하나투어 관계자는 “하나투어의 중요한 경영 목표 중 하나가 ‘스마트워킹을 통한 균형성장’”이라며 “사내 소통을 강화하고, 유연근무제를 꾸준히 확대해왔다는 점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말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에 따르면 자산순위 30대 그룹 중 유연근무제를 시행 중인 그룹은 15곳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일부 계열사나 특정 사업 부문에 한해 시행하거나 보육 문제로 고민하는 직원에게만 기회를 준다. 유연근무제가 확산하는 분위기지만 아직 기업 문화를 전반적으로 바꾸는 단계에 이르지는 못했다는 의미다. 대기업 중에서는 롯데가 가장 전향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롯데그룹은 최근 ‘창의적인 기업문화 형성 및 근무 효율화, 가족친화적 근무환경 조성을 위해 유연근무제를 올 연말까지 전 계열사로 확대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11월 27일 열린 두 번째 기업문화개선위원회 회의에서 결정한 사안이다. 기업문화개선위 관계자는 “조직 자긍심, 일하는 방식, 경직된 기업문화, 상생협력, 일자리 창출 기업이미지 등 집중 개선 과제를 선정해 현황과 원인을 분석 중”이라며 “유연근무제 전면 도입 시작으로, 중장기적 과제를 하나하나 구체화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롯데그룹은 올 초부터 10여 개 계열사에서 유연근무제 실험을 해왔다. 6개월쯤 지나 직원들 사이에서 호평이 나오자 이를 그룹 전체로 확대하기로 한 것이다. 크게는 시차출퇴근제와 주 5일 40시간의 근무시간을 자유롭게 조정하는 탄력근무제로 나뉜다. 출근은 오전 8시부터, 퇴근은 오후 5시부터 각각 30분 단위로 구분돼있다. 이 중 원하는 시간을 선택하면 된다. 올 4월부터 시차출퇴근제를 도입한 롯데맴버스 장모 사원은 “집이 용인이라 사무실(서울 서소문)까지 출퇴근 시간이 오래 걸렸는데 출근시간을 1시간 늦추면서 시간을 상당히 절약하게 됐다”며 “직원들의 3분의 2가 제도를 활용할 정도로 반응이 좋다”고 말했다. 롯데멤버스 관계자는 “자율적인 출퇴근 문화가 조성되자 팀별로 회의 시간을 조정하는 등 조직 전체에 새로운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며 “세종시나 남양주 등지에서 장거리 출퇴근을 하는 직원 중에 이직을 고민하던 이가 많았는데 최근 많이 줄었다”고 말했다. 롯데 역시 신동빈 회장이 유연근무제 확산에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신 회장은 12월 3일 열린 ‘2015 와우 포럼’에 참석해 전 계열사 유연근무제 도입과 여성 공채비율 40% 유지 등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그는 “2020년까지 롯데그룹 간부사원(과장급 이상) 3분의 1을 여성으로 구성하고, 반드시 여성 CEO를 배출하겠다”며 “소수집단을 위한 적극적인 우대정책으로서 이 같은 조치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직원 수가 적고, 개인 단위 업무가 많은 벤처기업의 경우 유연근무제 적용이 비교적 쉽다. 교육용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스타트업 A사(직원 수 약 100명)는 창업 초기부터 자율근무제를 활용하고 있다. 기본 출퇴근 시간은 오전 10시에서 오후 7시지만 직원들은 개인 스케줄이나 컨디션에 따라 근무 장소와 시간을 자유롭게 선택한다. 예컨대 개인적인 사정으로 수요일에 재택근무를 하고 싶다면, 팀원들과 먼저 상의한다. 업무에 큰 지장이 없다고 판단돼 팀원들이 동의를 하면, 관련 내용을 e메일을 통해 전체 직원들과 공유한 뒤 자율적으로 근무한다. 별도의 결재 절차는 없다.
이 회사 직원들은 보통 1~2일 단위로, 한 달에 3~4번 정도 재택근무를 한다. 팀원들의 동의만 있다면 횟수나 기간에 제한은 없다. 지방에 오래 머물러야 하거나 결혼, 이사, 아이의 유치원 적응 기간 등 개인 사정에 따라 열흘 넘게 재택근무를 할 수도 있다. 외근이 필요한 날에는 동선을 고려해 출퇴근 경로를 정한다. 가령 집이 서울 노원구고 사무실은 역삼역인데, 광화문에서 점심 미팅이 있다면 오전에 재택근무를 하고 광화문에서 미팅을 마친 뒤 사무실에 출근하는 식이다. 이 회사 김모 사원은 “기혼자들은 아이를 돌보거나 집안일을 틈틈이 할 수 있고, 미혼 직원들도 은행·관공서 업무를 처리할 시간이 생겨 편하다”고 말했다.
불이익은 없을까? 또 다른 직원 박모 과장은 “초창기부터 적용한 방식이라 눈치 보는 사람은 적다”고 말했다. ‘규칙이나 규정이 아니라 기업 문화로 정착됐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얘기다. A사는 이 덕에 메르스 사태 때도 일의 능률을 높일 수 있었다. 당시 이 회사는 전 직원에게 한달 간 재택근무를 권했다. 이전부터 재택근무가 활성화한 덕에 업무에 큰 혼란이 없었다.
재택근무라고 해서 일을 안 하는 것은 아니다. 회사 전산 시스템을 통해 수시로 동료들과 의사소통을 한다. 거의 실시간으로 서로의 업무 상태를 확인할 수 있다. 프로젝트성 업무의 특성상 기한 내에 일을 마쳐야 하는 경우가 많다. 어느 시간에 어디서 일하느냐보다 본인에게 맡겨진 업무를 언제까지 어떻게 끝냈는지가 더 중요하다.
이 때문에 ‘재택근무=휴식’이라는 등식이 성립되지 않는다. A사 관계자는 “회사 측에서 자율근무를 실시하는 이유는 능률을 높여 직원들로부터 최고의 생산성을 뽑아내기 위함이지 직원 복지 차원이 아니다”라며 “근무태도로 성과를 평가하는 게 아니다 보니 오히려 맡은 업무에 대해 더 무거운 책임감과 부담을 느끼기도 한다”고 말했다. 메르스 사태로 전 직원이 재택근무를 할 때도 ‘할 일은 많은데 집에서는 집중이 잘 안 된다’며 사무실에 출근하는 이들이 꽤 많았다고 한다. 물론, 자율 근무에 따른 크고 작은 문제도 있다. 최근 A사는 유연근무제 사례로 언론 보도되면서 이른바 ‘편한 회사’로 알려졌다. 자율성을 확대하고 능률을 높인다는 의도와 달리 직원이 편한 회사로 오해를 받은 것이다. 최근엔 이런 이미지만 보고 입사를 지원하는 사람이 늘어 인사 담당자들은 어떻게 이들을 솎아 낼지가 고민이다. 부정적인 사안이 아님에도 A사가 극구 익명 보도를 요청한 이유다. A사 관계자는 “유연근무제가 보편화돼야 편견이 조금씩 옅어질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공공기관과 지방자치단체도 유연근무제를 확대하는 추세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 김모 과장은 집 근처 분당 스마트워크 센터에서 영상회의를 한다. 세종시의 국토교통부 공공주택관리과와 갖는 공공주택 건설 관련 업무 협의다. 김과장은 세종시에 자주 가지 않아도 원격회의를 하고 업무를 볼 수 있어 편하다.’ 행정자치부가 공개한 공공기관 유연근무제 사례다. 정부는 ‘유연근무제 운영지침’을 중앙부처와 지자체에 통보하는 등 2010년부터 본격적인 유연근무제 추진을 유도해왔다. 올해 7월에는 유연근무제를 ‘국가공무원 복무규정’에 명문화해 공무원들의 활용을 장려하고 있다.
기획재정부가 공공기관 경영정보공개시스템 ‘알리오’에 공개한 경영정보에 따르면 전체 공공기관 중 올 들어 상반기까지 유연근무제를 선택한 인원은 총 4만2455명이다. 전년 동기 3만 3925명보다 25% 증가했다. 특히 공공기관 지방 이전에 따라 유연근무를 활용하는 직원 숫자가 빠르게 증가한 것으로 분석된다. 정부는 기관의 지방 이전에 따른 잦은 출장과 업무단절, 우수 인재 확보의 어려움을 유연근무제가 해결해줄 수 있을 것으로 보고 관련 정책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공무원들은 기관에 따라 시간제근무, 시차출퇴근, 근무시간 선택, 집약근무, 재량근무, 재택근무, 스마트워크(거점) 근무를 이용할 수 있다. 정부는 수도권 14곳, 대전·세종시 3곳에 스마트워크센터(거점 근무지)를 운영 중이다. 행정자치부 자료에 따르면 스마트워크센터 이용자는 2011년 7018명에서 지난해 10만750명으로 늘었다.
한국고용정보원은 충북혁신도시로 이전한 직후인 지난해 10월부터 유연근무제를 확대했다. 공공기관 중에서는 선도적으로 재택근무를 도입하고 ‘근무시간 선택제’와 ‘시차근무제’ 등의 제도 확대를 통해 직원의 업무만족도와 효율성을 높였다는 평가다. 고용정보원의 유연근무제는 기획재정부가 주관하는 ‘2014 공공기관 경영 우수사례’에 선정됐다. 고용정보원 관계자는 “노조가 ‘일가(家)양득’ 태스크포스 같은 각종 협의체에 적극 참여해 의견을 개진하고 합의안을 도출하는 등 노사의 적극적인 협력 덕분에 재택근무제를 포함한 유연근무제가 성공적으로 정착했다”고 말했다.
지자체 중에서는 서울시가 유연근무제 확산에 적극적이다. 현재 소속 공무원 중 5800명이 시차출퇴근제를 이용했다. 이밖에 350명이 근무시간선택제, 80명이 재택근무, 64명이 스마트워크근무, 7명이 시간제근무를 이용했다. 서울시 관계자는 “아이가 있거나 장거리 출퇴근을 하는 직원을 대상으로 개별적으로 권장하고, 이용자가 많은 부서에 소정의 인센티브를 주는 등 유연근무제 확대에 힘쓰고 있다”고 밝혔다.
- 장원석·함승민 기자 jang.wonseok@joi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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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회사 좀 독특하다. 직원이 2000명 이상이니 작은 회사도 아니다. 그런데 좀처럼 모여서 일하는 법이 없다. 출퇴근 시간도 제각각, 일하는 장소도 제각각이다. 국내 여행 업계 1위 하나투어 얘기다. 하나투어 직원들은 하루 8시간, 주당 40시간, 주 5일제 근무를 한다. 여기까진 다른 기업들과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실제 근무 방식은 완전히 다르다. 2011년 전사적으로 유연근무제를 도입한 덕분이다.
하나투어 직원 4가지 근무제 자유롭게 선택
더 큰 매력은 재택근무·거점근무·시차출퇴근제를 동시에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송모 과장의 일상은 특이하다. 일주일 중 월요일과 수요일만 사무실로 출근하고, 3일은 집에서 근무한다. 출근하는 날에도 집에서 가까운 일산 사무실로 10시까지 나온다. 그는 “매일 아침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 줄 수 있어 좋다”며 “출퇴근 시간이 크게 줄어들기 때문에 남는 시간을 자기계발에 활용하는 장점도 있다”고 말했다.
아무래도 집에서 일하면 효율성이 떨어지지 않느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지만 재택근무를 하는 직원들의 생각은 다르다. 정모 사원은 “재택근무를 시작한 뒤 출근하는 날에는 주로 대면 업무를, 집에선 통계 업무를 하는 식으로 계획을 세웠다”며 “이리저리 허비하는 시간이 거의 없기 때문에 업무 효율성이 더 높아졌다”고 말했다. 자기관리의 중요성을 더욱 체감하게 됐다는 목소리도 있다. 송모 과장은 “처음에는 직장과 가정 사이에서 맺고 끊음이 명확하지 않아 혼란스럽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업무 시간을 더 정확히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재택근무를 하는 직원일수록 안 보이는 만큼 잘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더 강한 것 같다”고 말했다.
현재 하나투어에선 월 평균 약 100명의 직원이 재택근무를, 전 직원의 4분의 1인 약 500명이 시차출퇴근제를 활용한다. 하나투어가 파격적인 유연근무제를 도입한 이면엔 박상환 회장의 강력한 의지가 있었다. 2009년쯤 박 회장은 “앞으로는 개인과 회사가 함께 성장해야 하는데 업무 환경에 따라 유연하게 근무하는 방식으로 바꿔야 노동 생산성이 높아지고, 결국 회사 수익도 좋아질 것”이라며 유연근무제 캠페인을 제안했다. 하지만 직원 대부분이 눈치를 보느라 활용하지 않았다. ‘그래도 회사에 나와야 한다’는 관리자의 암묵적인 지시도 여전했다. 캠페인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 박 회장은 2011년 아예 제도를 만들어 못을 박았고, 사무실을 쪼개 근무 환경을 바꿔버렸다. 동시에 인사팀은 유연근무제 활용을 방해하는 관리직을 단속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직원들이 조금씩 생각을 바꿨고, 4년이 지난 지금 유연근무제는 이 회사에서 일상이 됐다.
롯데그룹, 유연근무제 전 계열사로 확대
전국경제인연합회에 따르면 자산순위 30대 그룹 중 유연근무제를 시행 중인 그룹은 15곳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일부 계열사나 특정 사업 부문에 한해 시행하거나 보육 문제로 고민하는 직원에게만 기회를 준다. 유연근무제가 확산하는 분위기지만 아직 기업 문화를 전반적으로 바꾸는 단계에 이르지는 못했다는 의미다. 대기업 중에서는 롯데가 가장 전향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롯데그룹은 최근 ‘창의적인 기업문화 형성 및 근무 효율화, 가족친화적 근무환경 조성을 위해 유연근무제를 올 연말까지 전 계열사로 확대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11월 27일 열린 두 번째 기업문화개선위원회 회의에서 결정한 사안이다. 기업문화개선위 관계자는 “조직 자긍심, 일하는 방식, 경직된 기업문화, 상생협력, 일자리 창출 기업이미지 등 집중 개선 과제를 선정해 현황과 원인을 분석 중”이라며 “유연근무제 전면 도입 시작으로, 중장기적 과제를 하나하나 구체화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롯데그룹은 올 초부터 10여 개 계열사에서 유연근무제 실험을 해왔다. 6개월쯤 지나 직원들 사이에서 호평이 나오자 이를 그룹 전체로 확대하기로 한 것이다. 크게는 시차출퇴근제와 주 5일 40시간의 근무시간을 자유롭게 조정하는 탄력근무제로 나뉜다. 출근은 오전 8시부터, 퇴근은 오후 5시부터 각각 30분 단위로 구분돼있다. 이 중 원하는 시간을 선택하면 된다. 올 4월부터 시차출퇴근제를 도입한 롯데맴버스 장모 사원은 “집이 용인이라 사무실(서울 서소문)까지 출퇴근 시간이 오래 걸렸는데 출근시간을 1시간 늦추면서 시간을 상당히 절약하게 됐다”며 “직원들의 3분의 2가 제도를 활용할 정도로 반응이 좋다”고 말했다. 롯데멤버스 관계자는 “자율적인 출퇴근 문화가 조성되자 팀별로 회의 시간을 조정하는 등 조직 전체에 새로운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며 “세종시나 남양주 등지에서 장거리 출퇴근을 하는 직원 중에 이직을 고민하던 이가 많았는데 최근 많이 줄었다”고 말했다.
개인 스케줄 따라 출퇴근 경로 조절하는 자율근무제
직원 수가 적고, 개인 단위 업무가 많은 벤처기업의 경우 유연근무제 적용이 비교적 쉽다. 교육용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스타트업 A사(직원 수 약 100명)는 창업 초기부터 자율근무제를 활용하고 있다. 기본 출퇴근 시간은 오전 10시에서 오후 7시지만 직원들은 개인 스케줄이나 컨디션에 따라 근무 장소와 시간을 자유롭게 선택한다. 예컨대 개인적인 사정으로 수요일에 재택근무를 하고 싶다면, 팀원들과 먼저 상의한다. 업무에 큰 지장이 없다고 판단돼 팀원들이 동의를 하면, 관련 내용을 e메일을 통해 전체 직원들과 공유한 뒤 자율적으로 근무한다. 별도의 결재 절차는 없다.
이 회사 직원들은 보통 1~2일 단위로, 한 달에 3~4번 정도 재택근무를 한다. 팀원들의 동의만 있다면 횟수나 기간에 제한은 없다. 지방에 오래 머물러야 하거나 결혼, 이사, 아이의 유치원 적응 기간 등 개인 사정에 따라 열흘 넘게 재택근무를 할 수도 있다. 외근이 필요한 날에는 동선을 고려해 출퇴근 경로를 정한다. 가령 집이 서울 노원구고 사무실은 역삼역인데, 광화문에서 점심 미팅이 있다면 오전에 재택근무를 하고 광화문에서 미팅을 마친 뒤 사무실에 출근하는 식이다. 이 회사 김모 사원은 “기혼자들은 아이를 돌보거나 집안일을 틈틈이 할 수 있고, 미혼 직원들도 은행·관공서 업무를 처리할 시간이 생겨 편하다”고 말했다.
불이익은 없을까? 또 다른 직원 박모 과장은 “초창기부터 적용한 방식이라 눈치 보는 사람은 적다”고 말했다. ‘규칙이나 규정이 아니라 기업 문화로 정착됐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얘기다. A사는 이 덕에 메르스 사태 때도 일의 능률을 높일 수 있었다. 당시 이 회사는 전 직원에게 한달 간 재택근무를 권했다. 이전부터 재택근무가 활성화한 덕에 업무에 큰 혼란이 없었다.
재택근무라고 해서 일을 안 하는 것은 아니다. 회사 전산 시스템을 통해 수시로 동료들과 의사소통을 한다. 거의 실시간으로 서로의 업무 상태를 확인할 수 있다. 프로젝트성 업무의 특성상 기한 내에 일을 마쳐야 하는 경우가 많다. 어느 시간에 어디서 일하느냐보다 본인에게 맡겨진 업무를 언제까지 어떻게 끝냈는지가 더 중요하다.
이 때문에 ‘재택근무=휴식’이라는 등식이 성립되지 않는다. A사 관계자는 “회사 측에서 자율근무를 실시하는 이유는 능률을 높여 직원들로부터 최고의 생산성을 뽑아내기 위함이지 직원 복지 차원이 아니다”라며 “근무태도로 성과를 평가하는 게 아니다 보니 오히려 맡은 업무에 대해 더 무거운 책임감과 부담을 느끼기도 한다”고 말했다. 메르스 사태로 전 직원이 재택근무를 할 때도 ‘할 일은 많은데 집에서는 집중이 잘 안 된다’며 사무실에 출근하는 이들이 꽤 많았다고 한다.
점차 확대되는 공공기관 유연근무제
공공기관과 지방자치단체도 유연근무제를 확대하는 추세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 김모 과장은 집 근처 분당 스마트워크 센터에서 영상회의를 한다. 세종시의 국토교통부 공공주택관리과와 갖는 공공주택 건설 관련 업무 협의다. 김과장은 세종시에 자주 가지 않아도 원격회의를 하고 업무를 볼 수 있어 편하다.’ 행정자치부가 공개한 공공기관 유연근무제 사례다. 정부는 ‘유연근무제 운영지침’을 중앙부처와 지자체에 통보하는 등 2010년부터 본격적인 유연근무제 추진을 유도해왔다. 올해 7월에는 유연근무제를 ‘국가공무원 복무규정’에 명문화해 공무원들의 활용을 장려하고 있다.
기획재정부가 공공기관 경영정보공개시스템 ‘알리오’에 공개한 경영정보에 따르면 전체 공공기관 중 올 들어 상반기까지 유연근무제를 선택한 인원은 총 4만2455명이다. 전년 동기 3만 3925명보다 25% 증가했다. 특히 공공기관 지방 이전에 따라 유연근무를 활용하는 직원 숫자가 빠르게 증가한 것으로 분석된다. 정부는 기관의 지방 이전에 따른 잦은 출장과 업무단절, 우수 인재 확보의 어려움을 유연근무제가 해결해줄 수 있을 것으로 보고 관련 정책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공무원들은 기관에 따라 시간제근무, 시차출퇴근, 근무시간 선택, 집약근무, 재량근무, 재택근무, 스마트워크(거점) 근무를 이용할 수 있다. 정부는 수도권 14곳, 대전·세종시 3곳에 스마트워크센터(거점 근무지)를 운영 중이다. 행정자치부 자료에 따르면 스마트워크센터 이용자는 2011년 7018명에서 지난해 10만750명으로 늘었다.
한국고용정보원은 충북혁신도시로 이전한 직후인 지난해 10월부터 유연근무제를 확대했다. 공공기관 중에서는 선도적으로 재택근무를 도입하고 ‘근무시간 선택제’와 ‘시차근무제’ 등의 제도 확대를 통해 직원의 업무만족도와 효율성을 높였다는 평가다. 고용정보원의 유연근무제는 기획재정부가 주관하는 ‘2014 공공기관 경영 우수사례’에 선정됐다. 고용정보원 관계자는 “노조가 ‘일가(家)양득’ 태스크포스 같은 각종 협의체에 적극 참여해 의견을 개진하고 합의안을 도출하는 등 노사의 적극적인 협력 덕분에 재택근무제를 포함한 유연근무제가 성공적으로 정착했다”고 말했다.
지자체 중에서는 서울시가 유연근무제 확산에 적극적이다. 현재 소속 공무원 중 5800명이 시차출퇴근제를 이용했다. 이밖에 350명이 근무시간선택제, 80명이 재택근무, 64명이 스마트워크근무, 7명이 시간제근무를 이용했다. 서울시 관계자는 “아이가 있거나 장거리 출퇴근을 하는 직원을 대상으로 개별적으로 권장하고, 이용자가 많은 부서에 소정의 인센티브를 주는 등 유연근무제 확대에 힘쓰고 있다”고 밝혔다.
- 장원석·함승민 기자 jang.wonseok@joi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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