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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퍼화요일에 나타난 미국 민심] ‘극단주의자 급부상’ 확 달라진 정치 지형도

[수퍼화요일에 나타난 미국 민심] ‘극단주의자 급부상’ 확 달라진 정치 지형도

2016 미국 대선 경선에서 사회주의자를 자처해온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왼쪽)과 막말로 여성·이민자·소수인종 등을 조롱해온 도널드 트럼프가 파란을 일으켰다.
2016년 미국 대선이 전통적인 미국 정치의 풍토와 색채를 바꾸고 있다. 지난 3월 1일 미국에서 열렸던 ‘수퍼화요일(미국 대통령 선거 후보 동시 경선을 가리키는 말로 민주 12곳, 공화 13곳 경선)’에서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과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가 압승했다. 클린턴은 가장 많은 252명의 대의원이 걸린 텍사스를 비롯한 8곳에서 승리를 거뒀다. 사회주의자를 자처해온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도 만만치 않았다. 지역구인 버몬트를 비롯한 오클라호마·미네소타·콜로라도 4곳에서 승리를 거뒀다.

공화당에선 막말로 여성·이민자·소수인종 등을 조롱해온 도널드 트럼프가 버지니아 등 7곳을 휩쓸었다.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은 텍사스·오클라호마·알래스카의 3곳에서, 마코 루비오 상원의원은 미네소타 1곳에서 승리했다. 공화당 주류에서는 크루즈와 루비오 중 한 명이 사퇴한 뒤 표를 집결해 트럼프에 맞서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둘 다 성적이 비슷해 누구 한 사람이 선뜻 나서기를 꺼리는 상황이다. 이 와중에 트럼프만 어부지리를 보고 있다. 하지만 막말로 악명 높은 트럼프는 본선에 나갈 경우 클린턴에게 상당한 차이로 패배할 것이란 여론조사가 나오고 있다. 아울러 트럼프의 언행이 공화당의 품격을 떨어뜨린다는 우려가 공화당 주류 사이에서 번지고 있다. 이에 따라 지난 대선의 공화당 주자였던 밋 롬니 등이 나서서 트럼프를 공격하고 있다. 지명 전당대회 등을 열어 트럼프가 아닌 다른 후보를 내세우자는 주장도 힘을 얻어간다. 다만, 트럼프가 대선 경선에서 대의원의 과반수를 얻을 경우 이 방안마저도 물 건너 갈 가능성이 크다. 아웃사이더인데다 이민·여성·소수민족에 적개심을 보이고 있어 유럽 같으면 극우로 분류될 트럼프가 미국 공화당에선 의외로 힘을 얻고 있는 것이다.

3월 15일의 미니 수퍼화요일(5개 주 동시 경선)이 남았지만 이번 대선은 이변이 없는 한 ‘클린턴 대 트럼프’의 대결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클린턴은 퍼스트레이디와 뉴욕주 연방상원의원, 국무장관을 거친 워싱턴 주류 정치인이다. 트럼프는 물려받은 재산을 바탕으로 부동산 사업을 벌여 거부가 된 인물이다. 이런 트럼프가 정치적인 반(反) 기득권(Anti-establish ment) 세력의 대표 주자가 돼 클린턴과 맞붙을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샌더스 낙마해도 힐러리가 정책 수용할 듯:
힐러리 입장에서는 젊은 유권자가 샌더스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으니 이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도 샌더스의 분배정책을 따를 수밖에 없다. ‘불평등’이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상황에서 힐러리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샌더스가 제안한 사회주의적인 정책을 상당히 채택할 가능성이 크다. 결과적으로 이번 대선으로 미국에서는 과거 보기 힘들었던 이데올로기적 성격이 짙어지고 있는 것이다.

미국 정치에선 전통적으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중도주의자가 주류를 이뤘다. 이념 지평으로 보면 분배를 강조하는 샌더스 같은 자칭 사회주의자도, 이민자와 여성 등에 대한 차별을 주장하는 트럼프 같은 극우 성향의 정치인도 드물었다. 그러다 보니 주류 정당인 공화당과 민주당 모두가 밋밋하다. 둘 다 사실상 보수 정당이다. 정책에서 비교 우위가 있을 뿐이다. 공화당은 창당 이후 처음 배출한 대통령인 에이브러햄 링컨이 노예제를 폐지했다. 일부 역사학자는 남부 농장에 예속돼 있던 노예를 해방시켜 북부 공업지대에 노동력으로 쓰기 위한 의도였다는 분석도 내놓고 있다. 당시 공화당은 ‘양키’로 불리는 북부인들의 정당이었다. 민주당은 농장과 노예제를 바탕으로 하고 있던 남부인이 좌지우지했다. 하지만 세상은 바뀌어 존 F 케네디가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민권운동을 적극 밀면서 민주당은 유색인종과 상대적인 진보주의자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그러면서 국가 안보, 여성권리, 낙태, 대외정책, 이민, 개인 프라이버시 등 다양한 어젠다를 둘러싸고 공화당은 더욱 강경 보수적인, 민주당은 더욱 온화한 색채를 띠게 됐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기회의 땅’에선 마르크스보다 아메리칸 드림 숭배:
미국에선 사회주의가 들어서기 쉽지 않았다. ‘기회의 땅’이자 모두가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는 나라였기 때문이다. 19세기 남북전쟁 이후 자본주의 경제 발전의 모범국가였다가 20세기 들어 엄청난 생산력으로 글로벌 패권국가로 부상한 미국에서 좌파가 생기기는 쉽지 않았던 것이다. 기회의 땅, 아메리칸 드림 등이 이를 대신했다. 사회주의를 외치는 정치인도 드물었고 국민도 그런 정치인에겐 등을 돌려왔다.

1865년 남북전쟁이 끝난 직후 미국에는 경제성장의 바람이 불었다. 특히 1873년 첫 불황과 두 번의 공황을 맞은 1893년 사이는 미국 북부와 서부에서 자본주의가 고도성장을 이룬 시기였다. 이 28년을 ‘도금 시대(Gilded Age)’라고 부른다. 마크 트웨인과 찰스 두들리 워너가 쓴 [도금 시대, 오늘의 이야기(The Gilded Age: A Tale of Today)]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당시 미국 숙련공 임금은 유럽보다 훨씬 더 높아 수백만에 이르는 이민자를 유인하는 계기가 됐다. 실질 임금은 1860년에서 1890년까지 60% 이상 올랐다고 한다. 철도가 쭉쭉 이어졌고, 노다지를 캐는 광산이 줄이어 개발됐으며 중서부에 대농장이 자리 잡았다. 공장과 은행이 줄을 이었다.

그럼에도 유럽이나 아시아에서 몰려온 이민자들에겐 빈곤과 불평등의 시대이기도 했다. 노동조합은 8시간 노동과 아동 노동의 금지를 위한 투쟁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미국에서도 사회주의가 뿌리내릴 뻔했다. 현재 우리도 쇠고 있는 노동절(May Day)은 1886년 5월 1일 미국에서 벌어졌던 총파업이 시초였을 정도로 미국에선 노동운동이 활발했다. 당시 미국의 시카고에서 8만여 명의 노동자와 가족이 ‘8시간 노동’을 보장받기 위한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그런데 경찰과 군대의 발포로 유혈 사태가 발생하면서 커다란 사회문제가 됐다. 결국 이를 계기로 미국에서 8시간 노동제가 제도로 정착됐다. 1889년에 사회주의 제2인터내셔널이 5월 1일을 노동운동을 기리는 날로 정하면서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하지만 미국에선 사회주의가 뿌리내리지 못했다. 19세기 이 나라에선 당시 유럽을 풍미하던 ‘마르크스 레닌주의 신화’를 이른바 ‘호레이쇼 엘저 신화(Horatio Alger myth)’가 대신했다. 하버드대를 나온 목사 출신의 호레이쇼 엘저 주니어(1832~1899)라는 청소년 문학 작가는 남북전쟁 직후 남자의 성공 이야기를 소설로 써서 인기를 모았다. 보잘것없는 배경과 가난에 찌들었던 소년이 오로지 부지런함과 결단력, 용기, 정직만으로 중산층으로 신분 상승해 안락한 삶을 영위하는 ‘넝마주이에서 부자로’라는 내용이 주류였다. 청교도적인 윤리를 바탕으로 하는 뻔한 ‘아메리칸 드림’ 류의 문학작품이었다. 문학적으로는 별 평가를 받지 못했으나 당시 미국인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당시 독자들은 미국에서 탐욕과 갈등, 폭력 등으로 사회가 혼탁해지자 이런 ‘성인 판타지’에 눈을 돌렸다.



공산혁명과 나치 경험한 유럽에선 중도로 눈 돌려:
이런 미국과 달리 유럽은 20세기 극단주의로 호된 역사를 경험했다. 좌에서는 공산혁명을, 극우에서는 파시스트와 나치가 등장해 유럽을 비극으로 몰고 갔다. 이 때문에 독일을 중심으로 한 유럽에서는 혹독한 ‘탈나치화(Denazification)’를 겪어야 했다. 제도와 인적 청산으로 나치 잔재를 일소했을 뿐 아니라 나치 시대의 재생을 철저히 차단하는 운동을 지금까지도 벌이고 있다. 서독은 1949년 정부 수립 이후 배타적인 민족주의를 지양하고 ‘세계시민으로서 독일인’을 강조하는 교육을 하고 있다. 극단적인 세력이 발붙이지 못하게 하려는 조치다. 이에 따라 우파는 중도우파, 합리적 우파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독일을 비롯한 유럽에서 오랫동안 극우를 보기 힘들었던 이유의 하나다.

좌파도 마찬가지다. 독일을 대표하는 진보정당 사회민주당이 살아있는 역사다. 이 정당은 제2차대전 이후 1949·53·57년 서독 총선에서 3연패했다. 프롤레타리아 계급 혁명, 산업국유화나 외치는 낡은 이념정당은 유권자들로부터 외면당했다. 게다가 동서 냉전에 동서독 간 체제경쟁이 한창인 상황에서 서독 사민당이 집권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사민당은 좌파 색채를 희석한 중도좌파 정당으로의 변신이라는 혁신안을 내놓고 당을 변화시켰다. 1959년 11월 마르크스주의 폐기를 앞세운 당 개혁안인 ‘바트고데스베르크 강령’을 채택했다. 계급투쟁·산업국유화·계획경제 등 이데올로기에 치우친 비현실적 정책은 폐기했다. 그 빈자리에 진보의 본질인 인권보장·기회평등·사회정의·세계평화·복지를 채워 넣었다. 이런 대대적인 수술의 결과는 집권이었다. 이후 사민당은 통일 전 빌리 브란트(1969~74), 헬무트 슈미트(1974~82), 통일 뒤 게르하르트 슈뢰더(1998~2005) 등 3명의 총리를 배출했다. 셋 다 독일의 살아있는 역사가 됐다. 사민당은 20년 간 제1당으로 집권했으며, 연립정부 참여를 포함해 25년 이상 국정을 책임지며 국민과 함께했다. 이데올로기 싸움으로 힘든 시절을 경험한 유럽에선 2차대전 이후 우파든 좌파든 중도만 살아남은 셈이다.



영국 노동당 애틀리 총리는 ‘반공진보’ 추구:
영국도 마찬가지다. 영국에선 2차대전이 끝난 직후 거국내각을 이끌던 보수당의 윈스턴 처칠이 1945년 총선에서 클레멘트 애틀리가 이끌던 노동당에 패배해 야당 당수가 됐다. 처칠의 패배와 애틀리의 승리에는 전시의 물자배급이 한몫했다는 평가다. 거국내각은 사재기를 막고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확보하며 국민에게 기본 생필품을 안정적으로 지급해 사기를 높이기 위해 배급제를 실시했다. 전시라는 특수상황에서 사회주의 국가에서나 있는 줄 알았던 배급을 받게 된 영국 국민은 묘한 경험을 하게 됐다. 전시인데도 굶주린 국민이 없었으며 부자도 고기나 달걀, 우유를 평시보다 덜 받았다고 해서 영양실조에 걸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지원이나 징집으로 전쟁터에 나갔다 돌아온 국민은 복지와 평등에 대한 열망이 생겼다. 처칠이 ‘양의 탈을 쓴 양’이라고 부르며 정치적으로 지나치게 겸손하고 온순하다고 평가했던 애틀리는 이런 국민의 열망을 파고 들어가 집권에 성공했다.

애틀리 총리는 1946년 세금을 재원으로 전 국민을 거의 무료로 진료해주는 국민건강시스템(NHS)을 도입하는 등 복지 국가 건설에 주력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로 불리는 영국식 복지제도를 하나하나 만들어 나갔다. 복지는 진보가 추구하는 핵심 가치다. 하지만 애틀리는 외교·국방 분야에선 중도정책을 폈다. 특히 외교에선 확고하게 친미국·반소련·반공산주의 정책을 폈다. 대숙청·인명경시·인권탄압·관료주의를 비롯한 소련의 비참한 현실과 동유럽을 짓밟은 패권주의를 보고 공산주의를 혐오했기 때문이다. 1947년 당내 좌파가 힘을 모아 ‘계속 좌향좌(Keep Left)’를 구호로 외치며 노동당이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중립적인 제3세력으로서 남을 것을 요구했지만 애틀리는 이를 거부했다. 그는 1949년 4월 공산권에 대항하는 서방의 집단방위기구인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창설에 앞장서는 것으로 당내 좌파에 경고를 보냈다. 토니 블레어가 1997년 ‘제 3의 길’을 내세워 노동당 집권을 다시 이룬 것도 이런 중도 DNA의 결과물일 것이다. 숫제 좌도 우도 아닌 새로운 길을 모색하겠다고 나섰으니 말이다.

극좌 외톨이 코빈, 노동당 대표로:
하지만 최근 들어 영국도 미국처럼 탈중도의 분위기가 나타난 게 사실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해 9월12일 59.5%의 높은 지지율로 노동당의 신임 대표에 선임된 제레미 코빈(66)이다. 그는 영국 런던 북부에 있는 샴페인 좌파의 아성이라는 이즐링턴에서 1983년부터 내리 7선을 했다. 고학력 중산층 좌파가 유권자의 다수를 차지하는 지역이다. 멋진 인테리어의 이탈리아 식당에서 프로슈토 크루도 멜론(돼지 뒷다리를 말려 만든 생햄을 멜론에 얹은 이탈리아 전채요리)에 키안티 와인을 마시면서 사회적 불평등 해소를 위해 정치혁명을 일으켜야 한다고 열변을 토하는 고액 연봉의 은행원·변호사가 수두룩하다.

코빈은 노동당에서도 극좌파로 분류된다. 그래서 오랫동안 주류에 진입하지 못하고 소외되면서 ‘별종’ 취급을 당했다. 중도가 힘을 얻는 유럽에서, 그것도 제3의 길로 집권을 이룬 노동당에서 그의 존재는 미미할 수밖에 없었다. 의회 투표에서 당론과 달리 투표하는 게 다반사였다. 지역구인 이즐링턴에서 국회 의사당인 웨스트민스터 궁까지 1시간 이상 자전거를 몰아 등원한다. 자동차는 아예 없다. 한 인터뷰에서 “고백할 게 있는데, 사실은 사치스럽게도 자전거가 두 대나 된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소박하게 살고 있다. 코빈은 돈을 쓰지 않고도 얼마든지 정치를 할 수 있음을 스스로 입증했다. 영국 하원의원 650명 중 가장 적은 활동 경비를 사용했다. 가족이 허점일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코빈은 예외다. ‘세 번의 결혼과 두 번의 이혼’으로 표현할 수 있는 그의 결혼생활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코빈의 첫 부인은 정치적 동지였다. 대학강사였는데 남편을 ‘정치적 소울메이트’라고 표현했을 정도다. 하지만 코빈이 정치에만 몰두하고 가정은 돌보지 않자 갈라섰다. 둘째 부인은 군사 독재 정권을 피해 망명한 칠레 좌파 출신이었다. 12년 간 살면서 세 아들을 뒀다. 그런데 첫 아들의 상급학교 진학을 둘러싸고 부부 사이에 의견이 갈라졌다. 영국에선 아이가 11살 때 학교를 옮길 수 있는데, 부인은 진학률이 좋은 학교에 보내고 싶어했다. 하지만 (대학 진학률이 높은) 사립학교 폐지와 평준화를 주장해온 노동당 소속의 진보주의자 코빈은 자신의 정치적 신념에 어긋난다며 반대하다 이혼까지 했다. 코빈은 지난해 초멕시코 출신으로 진보적인 공정무역(커피·초콜릿 등 개발도상국의 상품을 수입하면서 가난한 농부나 노동자에게 정당한 대가를 치르는 무역)에 종사하는 셋째 부인과 결혼했다.

이런 인물이 제3의 길을 들고 나왔던 노동당의 대표가 된 것 자체가 중도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는 증거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평론가도 적지 않다. 청년실업, 고용 불안, 소득 양극화, 경기 침체 등 각박해진 현실이 사람들을 중도에서 양극의 세계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 미국과 영국에서 벌어지는 일인데도 먼 나라의 일 같지가 않다.

- 채인택 논설위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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