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 조정·통합에 능한 ‘관용의 제국’ 네덜란드] 융합하지 않지만 싸우지도 않는다
[갈등 조정·통합에 능한 ‘관용의 제국’ 네덜란드] 융합하지 않지만 싸우지도 않는다
유럽연합(EU)이 위기다. 난민·이민자의 과도한 유입, 일부 국가의 탈퇴 움직임, 테러 위협, 우크라이나 사태, 만성적인 경제 침체와 실업 증가 등 현안이 산적해 있다. 이런 상황에서 네덜란드가 올해 상반기 EU 순회 의장국을 맡고 있다. EU 의장국은 각료회의를 비롯한 고위급 회의를 주재하고 28개 회원국 간 이견을 조정하는 역할을 맡는다. 마르크 뤼터 네덜란드 총리는 난민 문제 해결과 통합성 강화, 디지털·서비스 분야 유럽단일시장 완성을 중점 추진 과제로 밝혔다. 네덜란드가 의장국을 맡았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내부적으로 오랜 역사를 통해 갈등 조정과 통합에 능한 모습을 보여왔기 때문이다.
관용·개방·공존의 전통: 네덜란드는 사회 구조 자체가 다른 사람에 대한 관용과 개방성, 공존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생각이나 정체성이 다른 사람을 배척하지 않고 오히려 다양성을 존중하면서 서로 간섭 않는 조화로운 사회 구조가 네덜란드의 전통이다. 이를 ‘병립화(pillarisation)의 사회 구조’라고 부른다. 병립화라고 번역했지만 말 그대로 옮기면 ‘기둥처럼 살기’ 정도 될 것이다. 기둥은 서로 부딪힐 일이 없지만 같은 천장을 지탱하고 있다. 이처럼 네덜란드 국민도 서로 다른 생각이나 정체성을 가진 사람과 서로 부딪히지 않는다는 의미다. 서로 충돌하지 않고 다만 천장, 즉 정부에서만 서로 만난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협상을 통한 사회적 갈등 조정이 의회와 행정부의 핵심 기능임을 강조하는 셈이다.
이런 구조를 형성하게 된 배경에는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이 나라 국민 구성이 자리잡고 있다. 네덜란드인은 종교에 따라 개신교도와 가톨릭 신자, 이념에 따라 사회주의자·보수주의자·자유주의자로 나뉘어져 있다. 종교와 사고방식이 바뀔 가능성이 별로 없는 완고한 집단이다. 이들은 미국처럼 서로 융합해 하나의 문화를 형성하는 용광로라기보다 서로 개성을 존중하며 함께 살아가는 샐러드 같은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이들이 함께 나라를 유지하고 살기 위해 관용원칙에 따라 종교와 이념, 종족 집단끼리 서로 분리해 따로 병존하면서 정부 차원에서만 접촉하는 전통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집단에 따라 정당·신문·방송·대학·은행·청소년클럽·스포츠클럽, 심지어 구호단체까지 서로 별도일 정도다. 심지어 노동조합과 경영자단체까지 각기 존재한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에 점령당한 동안 레지스탕스도 따로 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니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내란이나 국가 분할이 일어나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다. 종교적으로는 가톨릭이 24%, 개신교가 20%(네덜란드 개혁교회 7%, 캘빈교회가 5.5%)를 차지한다. 주목되는 점은 가톨릭과 개신교의 숫자가 비슷하다는 사실이다. 이민자 중심의 무슬림이 5.1%를 차지한다. 국민의 절반 이상이 종교가 없다.
연립정부 구성이 기본: 네덜란드인들은 서로 부딪힐 일을 줄여 갈등을 최소화하고 남의 일에 간섭하기를 싫어하는 전통이 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집단을 인정하면서 다름 속에 하나로 공존하려면 사회적 관용과 정치적 타협과 협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런 독특한 사회 구조 때문에 네덜란드 정치는 연립정부 구성이 기본이다. 19세기 이래 특정 정당이 의회 의석의 과반 수를 차지한 적도 없다. 정치 리더십은 약할 수밖에 없지만 타협과 협상의 합의 정치는 발달했다. 세계적 노사정 합의 모델로 평가받는 ‘폴더 모델’이 네덜란드에서 나온 것은 이런 사회적 전통이 바탕이 됐다. 폴더 모델이란 노조는 임금 인상 요구를 자제하고 대신 사용자도 노조의 부분적 경영 참여 등을 보장하는 상호 협력의 노사관계다. 협력의 의사결정 구조라고도 한다. 폴더(Polder)란 네덜란드에 흔한, 바다를 메운 간척지를 가리킨다. 네덜란드는 국토의 상당수가 해수면 아래에 있는 저지 국가다. 해수면 1m 이상에 있는 땅은 국토의 50%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국가 이름인 네덜란드 자체가 저지 국가를 가리킨다.
네덜란드는 16세기 이후 간척을 통해 국토를 넓혔으며 현재 전국의 17%가 간척지다. 바다를 메워 간척지를 만들고 그 땅을 개간해 농사를 짓는 것이 전형적인 네덜란드인의 삶이었다. 이렇게 간척으로 스스로 땅을 얻어 부유해진 농민들이 도시로 진출해 상업과 국제 무역에 종사하면서 17세기 해상제국 네덜란드를 이룰 수 있었다. 간척지에서의 삶은 물이 들어오지 않도록 둑을 관리하고, 들어온 물을 빼고 사는 것이 주류를 이룰 수밖에 없다. 누구도 둑을 관리하고 간척지에서 물을 빼는 작업을 혼자서 할 수 없다. 그래서 네덜란드인에게 이웃과 서로 타협하고 협력하면서 사는 것은 숙명이 됐다.
노사정 합의로 경제 살린 바세나르 협약: 폴더 모델은 저지의 간척지에서 타협하고 협력하면서 위기를 극복해왔던 노사정이 서로 협력해 공동 발전을 이루자는 뜻이 담겨있다. 그 핵심은 1982년 맺어진 ‘바세나르 협약(Wassenaars Accord)’이었다. 한국 노사정위원회가 수시로 언급하는 협약이다. 당시 네덜란드는 ‘더치병’으로 불리는 과도한 복지와 만성적인 경기 침체에 시달리고 있었다. 당시 누적 재정적자가 국내총생산(GDP)의 58%에 이를 정도였다. 네덜란드는 ‘일하지 않는 복지국가’로 불리며 서서히 침몰해가는 것처럼 보였다. 이 과정에서 중도 우파 루드 루버스 총리가 집권해 예산을 동결하자 전국적인 파업이 벌어졌다. 그러자 루버스 총리는 노동자 대표로 빔 코크 노조총연맹 대표를, 사용자 대표로 찰스 반 빈 산업고용주연합회장을 초청해 협상에 들어갔다. 그 결과 대타협을 이뤄 바세나르 협약을 맺을 수 있었다. 당시 노조는 임금 인상 요구를 자제하고, 정부는 기업들의 비용감축을 위해 세금을 낮추며, 사용자 단체는 고용을 확대하고 기업의 주요 현안을 노조와 협의키로 3자가 합의했다.
구체적인 내용은 혁신적이었다. 노사정 합의로 임금인상률을 4.6%에서 2.2%로 낮추고 주당 근로시간을 40시간에서 38시간(나중에 36시간으로 더 축소)으로 줄였다. 기업이 더 많은 사람을 고용할 수 있는 여력을 만들어주기 위해서였다. 사회적인 일자리 나누기인 셈이다. 이 합의로 네덜란드 기업들은 세금 및 임금 부담이 줄면서 국제적인 경쟁력을 확보했다. 바세나르 협약을 맺는 데 성공하면서 후버스 총리는 1994년까지 12년 간 장기 집권했다.
당시 노조 대표였던 빔 코크는 이를 계기로 정치에 뛰어들었다. 좌파 노동당 대표가 된 그는 1994년 집권해 2002년까지 총리직을 수행하면서 네덜란드판 제3의 길을 추구했다. 그는 임금인상률을 2.2%에서 1.1%로 낮춘 데 이어 궁극적으로 0.5%로 억제했다. 그 결과 1997~2000년 네덜란드의 평균 경제성장률은 유럽에선 상당히 높은 4%대를 유지했으며, 실업률은 완전고용에 접근한 2.6%로 낮아졌다. 같은 기간 다른 유럽 국가들은 경제성장률이 연평균 2.5% 수준에 머물면서 저성장·고실업에 시달렸다.
폴더 구조는 사실 네덜란드의 오랜 타협의 전통이 바탕이 됐다. 무엇보다 전통의 사회통합기구가 폴더 모델을 뒷받침했다. ‘사회경제협의회(SER: Social and Economic council)’라는 노사협의체가 1950년 설립돼 노사문제와 관련한 국가자문 기구 역할을 해왔다. 한국 노사정위원회의 모델이 된 조직이다. 사용자, 노조대표, 전문가(국왕이 임명) 11명씩 33명의 위원이 토론에 임한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5년 설립된 ‘노동재단(The Labor Foundation)’도 있다. 경영자 단체와 노동자 단체가 함께하는 민간 협의·협력기구다. 나치 점령기에 손잡고 레지스탕스 활동을 했던 노동자와 사용자가 나라 일도 함께 논의하자고 결성한 협의체다.
동성애·낙태·안락사·성매매·대마초 세계 최초 합법화: 네덜란드는 관용과 개방 정책을 국민 통합과 국가 번영을 위한 핵심 전략으로 사용해온 드문 나라다. 이 나라에는 관용 정책과 연관되는 ‘세계 최초’ 기록이 수두룩하다. 네덜란드에는 ‘헤도헌(gedogen)’이라고 해서 타인에 관용을 보이고 남의 일에 간섭하지 않는 관용의 전통이 있다. 프랑스어로 ‘레세 페르(laissez faire: 내버려 둬라)’라는 말로 번역돼 전 세계에 유명해진 네덜란드의 관용 전통이다. ‘어차피 벌어질 일이라면 금지 보다 통제가 낫다’라는 실용정신이 바탕을 이룬다.
네덜란드는 1811년 ‘동성애 허용법’을 발표했다. 영국이나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다른 나라들이 동성애를 단속하는 상황에서 네덜란드는 자기의 길을 걸었다. 그 덕분에 네덜란드는 관대한 국가라는 평판을 얻으면서 유럽 전역에서 동성애 등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로 박해받는 다양한 인재가 몰려들었다. 지금도 LGBT(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성전환자)로 불리는 성적 소수자들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국민 인식도 개방적이고 관용적이다. 2011년 여론조사에서 국민 90%가 “동성애는 도덕적”이라고 응답했다. 2001년 동성애 결혼을 합법화했는데 이 역시 세계 최초다.
2002년에는 안락사를 세계 최초로 합법화했다.
미국과 유럽의 거의 모든 국가가 골머리를 앓고 있는 마약 관련 혁신 정책에서도 네덜란드는 모범국가다. 네덜란드는 1976년 중독성과 부작용이 비교적 약한 대마를 세계 최초로 허용했다. 다른 마약의 확산을 막기 위한 정책이다. 네덜란드 보건부는 “대마 정도는 범죄 아닌 공중위생 문제로 관리만 잘하면 사회에 해를 끼치지 않는다”라는 입장을 취했다. 이 정책은 상당한 효과를 거뒀다. 1983년과 2010년 사이에 헤로인 사용이 30%나 감소했다. 미국에서 이 제도를 도입하는 주가 늘고 있는 이유다(네덜란드에서 대마초 카페를 방문한 사람은 한국에서 처벌을 받을 수 있다).
노숙자들에게 마약과 깨끗한 일회용 주사기를 나눠주는 과감한 발상도 네덜란드에서 시작됐다. 이를 통해 마약을 구하기 위해 벌이는 범죄와 지저분한 주사기를 중독자들이 돌아가며 비위생적으로 사용하는 바람에 발생할 수 있는 에이즈를 비롯한 각종 감염 질환의 확산을 막자는 의도다. ‘안전한 마약’으로 불리는 이런 정책은 독일 등 이웃 나라로 확산됐다.
네덜란드는 낙태도 1984년 세계 최초로 합법화했다. 1988년에는 심지어 성매매를 구역을 정해 양성화했다. 성매매자를 합법적 직업으로 인정해 세금까지 받아갔다. 이 정책은 성매매의 음성적인 확산을 막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다.
이러한 관용의 문화는 현대 네덜란드를 다문화 국가로 만들었다. 현재 1700만 명에 이르는 네덜란드 인구 중 11%가 네덜란드 밖에서 태어났다. 8.5%가 EU지역에서, 2.6%는 비EU 국가에서 태어나 이주했다. 2015년 통계에 따르면 이 나라 인구의 78.31%가 네덜란드인(프리즐란트 제도에 사는 프리즐란트인 포함)이고 터키인(쿠르드족 포함)이 2.35%, 북아프리카 모로코인(베르베르족 포함)이 2.25%를 차지한다. 동남아시아 옛 식민지에서 온 인도네시아인이 2.19%, 독일인이 2.15%, 남미 옛 식민지에서 온 수리남인이 2.26%를 차지하고 있다. 중국인도 인구의 0.39%인 6만6000여 명이 거주한다.
세계를 호령한 해상제국 건설: 네덜란드는 개방과 관용정책을 바탕으로 17세기 해상제국을 이룬 소중한 경험이 있다. 당시 네덜란드는 후발 소국의 단점을 뒤집고 유럽은 물론 세계를 호령하는 강소국으로 성장했다. 1602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설립해 무역과 식민지 개척에 나섰다. 이 회사는 세계 최초의 다국적 기업으로 통하며, 17세기 세계 최대의 국제교역회사로 발전했다. 네덜란드는 당시 최초의 주식거래소를 세워 여기서 여러 나라의 자본을 확보해 이 회사의 무역업에 투자했다. 1609년에는 교역에 필요한 자금 마련을 위해 암스테르담에 은행을 설립했다. 이 은행은 중앙은행 및 투자은행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향신료 교역으로 시작해 북미와 남아프리카, 동인도(중남미 카리브해 연안), 서인도(인도 서부), 인도네시아에서 식민지를 경영했다. 1640년에는 일본 나가사키 항구 앞에 붙은 작은 연육도인 데지마에 무역관을 세우고 일본과의 교역 독점권을 확보해 큰 이익을 얻었다.
기독교를 금지한 도쿠가와 막부는 포교에 앞장선 포르투갈과 스페인 선교사를 추방하고, 교역에만 관심이 있는 네덜란드에 교역 독점권을 줬다. 임진왜란 이후 왜군이 잡아간 조선 도공들이 규슈 등에서 만든 도자기를 유럽에 실어가서 판매한 주체가 바로 네덜란드 상인이다. 네덜란드인 박연(벨테브레)과 하멜도 나가사키에서 중국으로 항해하다 한국에 표류했다. <하멜 표류기> 를 쓴 하멜은 조선을 탈출해 나가사키의 데지마로 가서 본국 선원을 만나 귀국했다.
네덜란드는 이 시기 유럽에서의 교역도 주도했다. 지중해에 접한 남유럽의 포도주를 북유럽에 팔고, 중유럽의 곡물을 사서 남유럽에 팔아 큰 이익을 남겼다. 네덜란드는 세계 무역의 중심지로 번영했으며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희귀한 물산이 넘쳤다. 렘브란트의 그림을 보면 얼굴을 찡그린 게 많다. 이는 당시 유럽에 귀했던 설탕이 네덜란드에는 흔해서 이를 즐긴 국민이 충치로 고생했던 흔적이라고 한다.
인재와 자본 집결한 ‘매력국가’: 종교적·사회적 관용과 개방 분위기 덕에 유럽의 인재가 네덜란드에 집결했다. 인재를 끄는 ‘매력국가’가 된 것이다. 중요한 계기가 프랑스에서 발생했다. 가톨릭과 신교도 간의 차별을 금지한 낭트칙령(1598)을 1685년 폐지하고 가톨릭 국가가 되면서 종교관용을 포기한 것이다. 그러자 대부분 기술자와 상인이던 신교도 위그노가 네덜란드로 대거 옮겨왔다. 가톨릭 국가인 포르투갈이 유대인을 추방하자 유대 상인과 수공업자(주로 보석)가 자본과 기술을 들고 대거 네덜란드로 이주했다.
종교뿐 아니라 과학적 관용도 국가 발전에 한몫했다. 네덜란드에선 17세기부터 유럽 다른 나라에선 종교적인 문제로 금지했던 해부가 공공연하게 이뤄졌으며 입장료를 받는 공개 해부학 강의도 유행했다. 이는 유럽의 과학과 의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 생생한 현장은 렘브란트의 그림으로 남아있다. 1575년 스페인 합스부르크 가문에 맞서 네덜란드의 독립 봉기를 이끈 총독 빌렘이 세운 레이덴 대학에는 종교 등 이유로 박해를 피해 이 나라로 몰려든 유럽의 과학자들이 집결했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과학자인 르네 데카르트도 1628~1649년 네덜란드에서 살았다. 18세기 네덜란드에선 개방적인 개혁교회가 국교 노릇을 하면서도 다른 종교에 관용정책을 이끌었다.
네덜란드식 관용에 사상적인 배경을 제공한 인물이 인문학자 에라스무스(1466~1536)다. 가톨릭 사제로 유럽 여러 곳을 다니며 공부했던 그는 도그마에 빠지지 않고 인문주의자로서 개방과 관용을 강조했다. 이교도는 물론 종교개혁도 용서 않던 시절에 ‘종교적 관용’을 사실상 유럽 최초로 주장했다. 기독교적인 숙명론 대신 인간의 자유의지를 주장해 네덜란드인의 국민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 덕분에 네덜란드에서는 물론 유럽 차원에서도 다양성과 단합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1987년 이후 220만 명이 참가한 유럽 대학생 교환프로그램의 이름도 ‘에라스무스 프로그램’이다.
협상과 타협, 관용과 개방의 전통은 네덜란드가 17세기 해상제국을 이룬 것은 물론 현재까지도 번영하고 있는 가장 큰 원동력으로 평가 받는다. 네덜란드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시장경제와 민주주의 발전을 이룬 대한민국의 다음 진로로 고려할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 채인택 논설위원 ciimccp@joongang.co.kr하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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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개방·공존의 전통: 네덜란드는 사회 구조 자체가 다른 사람에 대한 관용과 개방성, 공존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생각이나 정체성이 다른 사람을 배척하지 않고 오히려 다양성을 존중하면서 서로 간섭 않는 조화로운 사회 구조가 네덜란드의 전통이다. 이를 ‘병립화(pillarisation)의 사회 구조’라고 부른다. 병립화라고 번역했지만 말 그대로 옮기면 ‘기둥처럼 살기’ 정도 될 것이다. 기둥은 서로 부딪힐 일이 없지만 같은 천장을 지탱하고 있다. 이처럼 네덜란드 국민도 서로 다른 생각이나 정체성을 가진 사람과 서로 부딪히지 않는다는 의미다. 서로 충돌하지 않고 다만 천장, 즉 정부에서만 서로 만난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협상을 통한 사회적 갈등 조정이 의회와 행정부의 핵심 기능임을 강조하는 셈이다.
이런 구조를 형성하게 된 배경에는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이 나라 국민 구성이 자리잡고 있다. 네덜란드인은 종교에 따라 개신교도와 가톨릭 신자, 이념에 따라 사회주의자·보수주의자·자유주의자로 나뉘어져 있다. 종교와 사고방식이 바뀔 가능성이 별로 없는 완고한 집단이다. 이들은 미국처럼 서로 융합해 하나의 문화를 형성하는 용광로라기보다 서로 개성을 존중하며 함께 살아가는 샐러드 같은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이들이 함께 나라를 유지하고 살기 위해 관용원칙에 따라 종교와 이념, 종족 집단끼리 서로 분리해 따로 병존하면서 정부 차원에서만 접촉하는 전통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집단에 따라 정당·신문·방송·대학·은행·청소년클럽·스포츠클럽, 심지어 구호단체까지 서로 별도일 정도다. 심지어 노동조합과 경영자단체까지 각기 존재한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에 점령당한 동안 레지스탕스도 따로 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니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내란이나 국가 분할이 일어나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다. 종교적으로는 가톨릭이 24%, 개신교가 20%(네덜란드 개혁교회 7%, 캘빈교회가 5.5%)를 차지한다. 주목되는 점은 가톨릭과 개신교의 숫자가 비슷하다는 사실이다. 이민자 중심의 무슬림이 5.1%를 차지한다. 국민의 절반 이상이 종교가 없다.
연립정부 구성이 기본: 네덜란드인들은 서로 부딪힐 일을 줄여 갈등을 최소화하고 남의 일에 간섭하기를 싫어하는 전통이 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집단을 인정하면서 다름 속에 하나로 공존하려면 사회적 관용과 정치적 타협과 협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런 독특한 사회 구조 때문에 네덜란드 정치는 연립정부 구성이 기본이다. 19세기 이래 특정 정당이 의회 의석의 과반 수를 차지한 적도 없다. 정치 리더십은 약할 수밖에 없지만 타협과 협상의 합의 정치는 발달했다. 세계적 노사정 합의 모델로 평가받는 ‘폴더 모델’이 네덜란드에서 나온 것은 이런 사회적 전통이 바탕이 됐다. 폴더 모델이란 노조는 임금 인상 요구를 자제하고 대신 사용자도 노조의 부분적 경영 참여 등을 보장하는 상호 협력의 노사관계다. 협력의 의사결정 구조라고도 한다. 폴더(Polder)란 네덜란드에 흔한, 바다를 메운 간척지를 가리킨다. 네덜란드는 국토의 상당수가 해수면 아래에 있는 저지 국가다. 해수면 1m 이상에 있는 땅은 국토의 50%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국가 이름인 네덜란드 자체가 저지 국가를 가리킨다.
네덜란드는 16세기 이후 간척을 통해 국토를 넓혔으며 현재 전국의 17%가 간척지다. 바다를 메워 간척지를 만들고 그 땅을 개간해 농사를 짓는 것이 전형적인 네덜란드인의 삶이었다. 이렇게 간척으로 스스로 땅을 얻어 부유해진 농민들이 도시로 진출해 상업과 국제 무역에 종사하면서 17세기 해상제국 네덜란드를 이룰 수 있었다. 간척지에서의 삶은 물이 들어오지 않도록 둑을 관리하고, 들어온 물을 빼고 사는 것이 주류를 이룰 수밖에 없다. 누구도 둑을 관리하고 간척지에서 물을 빼는 작업을 혼자서 할 수 없다. 그래서 네덜란드인에게 이웃과 서로 타협하고 협력하면서 사는 것은 숙명이 됐다.
노사정 합의로 경제 살린 바세나르 협약: 폴더 모델은 저지의 간척지에서 타협하고 협력하면서 위기를 극복해왔던 노사정이 서로 협력해 공동 발전을 이루자는 뜻이 담겨있다. 그 핵심은 1982년 맺어진 ‘바세나르 협약(Wassenaars Accord)’이었다. 한국 노사정위원회가 수시로 언급하는 협약이다. 당시 네덜란드는 ‘더치병’으로 불리는 과도한 복지와 만성적인 경기 침체에 시달리고 있었다. 당시 누적 재정적자가 국내총생산(GDP)의 58%에 이를 정도였다. 네덜란드는 ‘일하지 않는 복지국가’로 불리며 서서히 침몰해가는 것처럼 보였다. 이 과정에서 중도 우파 루드 루버스 총리가 집권해 예산을 동결하자 전국적인 파업이 벌어졌다. 그러자 루버스 총리는 노동자 대표로 빔 코크 노조총연맹 대표를, 사용자 대표로 찰스 반 빈 산업고용주연합회장을 초청해 협상에 들어갔다. 그 결과 대타협을 이뤄 바세나르 협약을 맺을 수 있었다. 당시 노조는 임금 인상 요구를 자제하고, 정부는 기업들의 비용감축을 위해 세금을 낮추며, 사용자 단체는 고용을 확대하고 기업의 주요 현안을 노조와 협의키로 3자가 합의했다.
구체적인 내용은 혁신적이었다. 노사정 합의로 임금인상률을 4.6%에서 2.2%로 낮추고 주당 근로시간을 40시간에서 38시간(나중에 36시간으로 더 축소)으로 줄였다. 기업이 더 많은 사람을 고용할 수 있는 여력을 만들어주기 위해서였다. 사회적인 일자리 나누기인 셈이다. 이 합의로 네덜란드 기업들은 세금 및 임금 부담이 줄면서 국제적인 경쟁력을 확보했다. 바세나르 협약을 맺는 데 성공하면서 후버스 총리는 1994년까지 12년 간 장기 집권했다.
당시 노조 대표였던 빔 코크는 이를 계기로 정치에 뛰어들었다. 좌파 노동당 대표가 된 그는 1994년 집권해 2002년까지 총리직을 수행하면서 네덜란드판 제3의 길을 추구했다. 그는 임금인상률을 2.2%에서 1.1%로 낮춘 데 이어 궁극적으로 0.5%로 억제했다. 그 결과 1997~2000년 네덜란드의 평균 경제성장률은 유럽에선 상당히 높은 4%대를 유지했으며, 실업률은 완전고용에 접근한 2.6%로 낮아졌다. 같은 기간 다른 유럽 국가들은 경제성장률이 연평균 2.5% 수준에 머물면서 저성장·고실업에 시달렸다.
폴더 구조는 사실 네덜란드의 오랜 타협의 전통이 바탕이 됐다. 무엇보다 전통의 사회통합기구가 폴더 모델을 뒷받침했다. ‘사회경제협의회(SER: Social and Economic council)’라는 노사협의체가 1950년 설립돼 노사문제와 관련한 국가자문 기구 역할을 해왔다. 한국 노사정위원회의 모델이 된 조직이다. 사용자, 노조대표, 전문가(국왕이 임명) 11명씩 33명의 위원이 토론에 임한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5년 설립된 ‘노동재단(The Labor Foundation)’도 있다. 경영자 단체와 노동자 단체가 함께하는 민간 협의·협력기구다. 나치 점령기에 손잡고 레지스탕스 활동을 했던 노동자와 사용자가 나라 일도 함께 논의하자고 결성한 협의체다.
동성애·낙태·안락사·성매매·대마초 세계 최초 합법화: 네덜란드는 관용과 개방 정책을 국민 통합과 국가 번영을 위한 핵심 전략으로 사용해온 드문 나라다. 이 나라에는 관용 정책과 연관되는 ‘세계 최초’ 기록이 수두룩하다. 네덜란드에는 ‘헤도헌(gedogen)’이라고 해서 타인에 관용을 보이고 남의 일에 간섭하지 않는 관용의 전통이 있다. 프랑스어로 ‘레세 페르(laissez faire: 내버려 둬라)’라는 말로 번역돼 전 세계에 유명해진 네덜란드의 관용 전통이다. ‘어차피 벌어질 일이라면 금지 보다 통제가 낫다’라는 실용정신이 바탕을 이룬다.
네덜란드는 1811년 ‘동성애 허용법’을 발표했다. 영국이나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다른 나라들이 동성애를 단속하는 상황에서 네덜란드는 자기의 길을 걸었다. 그 덕분에 네덜란드는 관대한 국가라는 평판을 얻으면서 유럽 전역에서 동성애 등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로 박해받는 다양한 인재가 몰려들었다. 지금도 LGBT(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성전환자)로 불리는 성적 소수자들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국민 인식도 개방적이고 관용적이다. 2011년 여론조사에서 국민 90%가 “동성애는 도덕적”이라고 응답했다. 2001년 동성애 결혼을 합법화했는데 이 역시 세계 최초다.
2002년에는 안락사를 세계 최초로 합법화했다.
미국과 유럽의 거의 모든 국가가 골머리를 앓고 있는 마약 관련 혁신 정책에서도 네덜란드는 모범국가다. 네덜란드는 1976년 중독성과 부작용이 비교적 약한 대마를 세계 최초로 허용했다. 다른 마약의 확산을 막기 위한 정책이다. 네덜란드 보건부는 “대마 정도는 범죄 아닌 공중위생 문제로 관리만 잘하면 사회에 해를 끼치지 않는다”라는 입장을 취했다. 이 정책은 상당한 효과를 거뒀다. 1983년과 2010년 사이에 헤로인 사용이 30%나 감소했다. 미국에서 이 제도를 도입하는 주가 늘고 있는 이유다(네덜란드에서 대마초 카페를 방문한 사람은 한국에서 처벌을 받을 수 있다).
노숙자들에게 마약과 깨끗한 일회용 주사기를 나눠주는 과감한 발상도 네덜란드에서 시작됐다. 이를 통해 마약을 구하기 위해 벌이는 범죄와 지저분한 주사기를 중독자들이 돌아가며 비위생적으로 사용하는 바람에 발생할 수 있는 에이즈를 비롯한 각종 감염 질환의 확산을 막자는 의도다. ‘안전한 마약’으로 불리는 이런 정책은 독일 등 이웃 나라로 확산됐다.
네덜란드는 낙태도 1984년 세계 최초로 합법화했다. 1988년에는 심지어 성매매를 구역을 정해 양성화했다. 성매매자를 합법적 직업으로 인정해 세금까지 받아갔다. 이 정책은 성매매의 음성적인 확산을 막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다.
이러한 관용의 문화는 현대 네덜란드를 다문화 국가로 만들었다. 현재 1700만 명에 이르는 네덜란드 인구 중 11%가 네덜란드 밖에서 태어났다. 8.5%가 EU지역에서, 2.6%는 비EU 국가에서 태어나 이주했다. 2015년 통계에 따르면 이 나라 인구의 78.31%가 네덜란드인(프리즐란트 제도에 사는 프리즐란트인 포함)이고 터키인(쿠르드족 포함)이 2.35%, 북아프리카 모로코인(베르베르족 포함)이 2.25%를 차지한다. 동남아시아 옛 식민지에서 온 인도네시아인이 2.19%, 독일인이 2.15%, 남미 옛 식민지에서 온 수리남인이 2.26%를 차지하고 있다. 중국인도 인구의 0.39%인 6만6000여 명이 거주한다.
세계를 호령한 해상제국 건설: 네덜란드는 개방과 관용정책을 바탕으로 17세기 해상제국을 이룬 소중한 경험이 있다. 당시 네덜란드는 후발 소국의 단점을 뒤집고 유럽은 물론 세계를 호령하는 강소국으로 성장했다. 1602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설립해 무역과 식민지 개척에 나섰다. 이 회사는 세계 최초의 다국적 기업으로 통하며, 17세기 세계 최대의 국제교역회사로 발전했다. 네덜란드는 당시 최초의 주식거래소를 세워 여기서 여러 나라의 자본을 확보해 이 회사의 무역업에 투자했다. 1609년에는 교역에 필요한 자금 마련을 위해 암스테르담에 은행을 설립했다. 이 은행은 중앙은행 및 투자은행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향신료 교역으로 시작해 북미와 남아프리카, 동인도(중남미 카리브해 연안), 서인도(인도 서부), 인도네시아에서 식민지를 경영했다. 1640년에는 일본 나가사키 항구 앞에 붙은 작은 연육도인 데지마에 무역관을 세우고 일본과의 교역 독점권을 확보해 큰 이익을 얻었다.
기독교를 금지한 도쿠가와 막부는 포교에 앞장선 포르투갈과 스페인 선교사를 추방하고, 교역에만 관심이 있는 네덜란드에 교역 독점권을 줬다. 임진왜란 이후 왜군이 잡아간 조선 도공들이 규슈 등에서 만든 도자기를 유럽에 실어가서 판매한 주체가 바로 네덜란드 상인이다. 네덜란드인 박연(벨테브레)과 하멜도 나가사키에서 중국으로 항해하다 한국에 표류했다. <하멜 표류기> 를 쓴 하멜은 조선을 탈출해 나가사키의 데지마로 가서 본국 선원을 만나 귀국했다.
네덜란드는 이 시기 유럽에서의 교역도 주도했다. 지중해에 접한 남유럽의 포도주를 북유럽에 팔고, 중유럽의 곡물을 사서 남유럽에 팔아 큰 이익을 남겼다. 네덜란드는 세계 무역의 중심지로 번영했으며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희귀한 물산이 넘쳤다. 렘브란트의 그림을 보면 얼굴을 찡그린 게 많다. 이는 당시 유럽에 귀했던 설탕이 네덜란드에는 흔해서 이를 즐긴 국민이 충치로 고생했던 흔적이라고 한다.
인재와 자본 집결한 ‘매력국가’: 종교적·사회적 관용과 개방 분위기 덕에 유럽의 인재가 네덜란드에 집결했다. 인재를 끄는 ‘매력국가’가 된 것이다. 중요한 계기가 프랑스에서 발생했다. 가톨릭과 신교도 간의 차별을 금지한 낭트칙령(1598)을 1685년 폐지하고 가톨릭 국가가 되면서 종교관용을 포기한 것이다. 그러자 대부분 기술자와 상인이던 신교도 위그노가 네덜란드로 대거 옮겨왔다. 가톨릭 국가인 포르투갈이 유대인을 추방하자 유대 상인과 수공업자(주로 보석)가 자본과 기술을 들고 대거 네덜란드로 이주했다.
종교뿐 아니라 과학적 관용도 국가 발전에 한몫했다. 네덜란드에선 17세기부터 유럽 다른 나라에선 종교적인 문제로 금지했던 해부가 공공연하게 이뤄졌으며 입장료를 받는 공개 해부학 강의도 유행했다. 이는 유럽의 과학과 의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 생생한 현장은 렘브란트의 그림으로 남아있다. 1575년 스페인 합스부르크 가문에 맞서 네덜란드의 독립 봉기를 이끈 총독 빌렘이 세운 레이덴 대학에는 종교 등 이유로 박해를 피해 이 나라로 몰려든 유럽의 과학자들이 집결했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과학자인 르네 데카르트도 1628~1649년 네덜란드에서 살았다. 18세기 네덜란드에선 개방적인 개혁교회가 국교 노릇을 하면서도 다른 종교에 관용정책을 이끌었다.
네덜란드식 관용에 사상적인 배경을 제공한 인물이 인문학자 에라스무스(1466~1536)다. 가톨릭 사제로 유럽 여러 곳을 다니며 공부했던 그는 도그마에 빠지지 않고 인문주의자로서 개방과 관용을 강조했다. 이교도는 물론 종교개혁도 용서 않던 시절에 ‘종교적 관용’을 사실상 유럽 최초로 주장했다. 기독교적인 숙명론 대신 인간의 자유의지를 주장해 네덜란드인의 국민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 덕분에 네덜란드에서는 물론 유럽 차원에서도 다양성과 단합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1987년 이후 220만 명이 참가한 유럽 대학생 교환프로그램의 이름도 ‘에라스무스 프로그램’이다.
협상과 타협, 관용과 개방의 전통은 네덜란드가 17세기 해상제국을 이룬 것은 물론 현재까지도 번영하고 있는 가장 큰 원동력으로 평가 받는다. 네덜란드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시장경제와 민주주의 발전을 이룬 대한민국의 다음 진로로 고려할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 채인택 논설위원 ciimccp@joongang.co.kr하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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