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영의 CEO를 위한 인문학-역사를 만든 ‘죽은 백인 남자들’(3) 괴테
김환영의 CEO를 위한 인문학-역사를 만든 ‘죽은 백인 남자들’(3) 괴테
좋은 머리를 타고 났으면서도 괴테는 항상 만족하지 않고 발전과 변화를 추구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뱀과 같다. 허물을 벗고 새로 시작한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1749~1832)는 중국 북송의 유학자 정이(程蓬, 1033~1107)가 말한 ‘인생의 세가지 불행’에 대한 예외를 극적으로 대표하는 사례다. 괴테는 소년등과(少年登科)했으며 석부형제지세(席父兄弟之勢)였으며 유고재능문장(有高才能文章)이었다.
우선 ‘소년등과’ 문제부터 살펴보자. 괴테는 24~25세 나이에 국제적 저명인사가 됐다. 자신의 짝사랑 경험을 작품으로 승화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1774)이 근대적인 의미에서 ‘세계 최초의 베스트셀러’가 된 것이다. 전 유럽이 ‘눈물바다’가 됐고 애독자 중에는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1769~1821)도 포함됐다. 괴테는 1808년 나폴레옹으로부터 레지옹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작품 속 주인공 복장이 크게 유행한 것은 물론, 2000여명의 젊은이가 권총으로 ‘모방 자살’을 했다는 추산도 있다. 일부 도시와 지역에서는 금서목록에 올랐다. 20세기에는 유명인이 사망하면 따라 죽는 ‘베르테르 효과(Werther effect)’가 사회학 용어로 등장했다. 괴테는 벼락 출세도 했다.『젊은 베르테르의 슬픔』를 읽고 감동한 바이마르 공국의 어린 군주(당시 18세) 카를 아우구스트 공(公)이 1775년 괴테를 초빙한 것이다. 바이마르에서 괴테는 재상의 자리에 올랐다. 군주의 최고 측근이 됐다. 괴테는 ‘행정의 천재’였다. 정부 예산, 군비 지출, 도로·광산·관개시설 관리 등의 일을 솜씨 있게 처리한 괴테는 인구 10만에 불과한 바이마르가 독일의 지성계 수도로 발전하는데 일조했다. 괴테를 보려고 신·구 대륙의 ‘순례자’들이 바이마르로 몰려들었다. 괴테는 바이마르의 ‘관광자원’이 된 것이다. 독일 바이마르공화국(1919~1933)의 제헌의회가 1919년 바이마르에서 개최된 것도 괴테와 무관하지 않다.
집안 배경으로 보면, 괴테는 다이아몬드 수저는 아니더라도 금수저는 물고 태어났다. 귀족은 아니고 부르주아 계급에 속했다. 아버지는 법률가 출신의 황실 고문이었다. 어머니의 아버지는 시장이었다. 신분상승을 달성했다. 1782년 요제프 2세로부터 귀족 작위를 받아 귀족을 표시하는 ‘폰(von)’을 이름에 붙이게 됐다.
괴테는 어떻게 중국 유학자 정이의 주장에 보기 좋게 한방 먹이는 인생을 살 수 있었을까. ‘불행하기에는 너무 똑똑한(too smart to be unhappy)’ 인물이었기에 그랬는지도 모른다. 괴테의 지능지수(IQ)는 210~230으로 추정된다. 좋은 머리를 타고 났으면서도 괴테는 항상 만족하지 않고 발전과 변화를 추구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뱀과 같다. 허물을 벗고 새로 시작한다.” 결국 괴테는 “예외가 규칙을 입증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출세의 시점, 금수저·흑수저, 재능 유무는 결코 중요하지 않다. 3가지 불행이건 4가지 불행이건, 불행을 막으려면 항상 발전하고 변화하면 된다.
엄청나게 생산적인 인생을 살았다는 측면에서 괴테는 모든 CEO의 표상이다. 원도 한도 없는, 부러울 게 없는 인생이었다. 근대라는 시대에 ‘뒤늦게’ 태어난 ‘르네상스적 인간’이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가 연상된다. 괴테 전집은 143권 규모다. 한때 연금술·점성술·신비철학에 심취하기도 했지만, 과학자로서는 식물학·생물학·비교해부학·광물학·지질학 등 분야의 저서도 14권을 펴냈다. 화가로서는 그림 3000점을 남겼다. 서신 2만 건을 보냈다. 플라토닉·에로틱을 가리지 않고 전설적인 염문을 뿌렸다. 1809년에 18세 소녀에게, 1821년 72세가 됐을 때에도 17세 소녀에게 연정을 품었다.(괴테는 1788년 그보다 낮은 신분의 크리스티아네 불피우스와 동거를 시작했고 이듬해 장남 아우구스트스를 얻었다. 오랜 동거 끝에 1806년 혼례를 치렀다.)
서양 문학사에서 괴테와 동급을 꼽는다면 호메로스·셰익스피어·단테 정도다. 괴테는 질풍노도(슈투름 운트 드랑, Sturm und Drang) 운동에 이어 바이마르 고전주의 운동의 지도자였다. 운동의 선봉에 섰다가 그 운동이 성공하면 후세가 기린다. 그는 우리나라로 치면 세종대왕, 중국으로 치면 공자와 같은 범주에 속한다. 대한민국 해외 문화원의 이름은 세종학당, 중국은 공자학원, 독일은 괴테인스티투트(Goethe-Institut)가 아닌가.
유학자 정이의 경고가 무력화된 본질적 이유가 있다. 괴테는 인문교육의 힘을 증명했다. 괴테 사상의 중심인 ‘빌둥(Bildung)’은 수양(修養)이나 도야(陶冶)와 거의 동의어 관계다. 그는 아버지의 모교인 라이프치히대학과 슈트라스부르크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잠시 변호사 개업을 했지만, 어려서는 집에서 아버지와 가정교사에게 인문과 과학을 배웠다. 특히 고전 연구에 필요한 외국어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교육이었다. 프랑스어·이탈리아어·영어·라틴어·그리스어·히브리어를 공부했다. 괴테는 이렇게 말했다. “외국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은 자신의 모국어도 전혀 모르는 것이다.” 승마·펜싱·춤·그림도 배웠다. 한마디로 전인교육을 받았다. 그는 또 성찰하는 인간이었다. 52년동안 일기를 쓴 ‘일기 작가(diarist)’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그를 싫어했던 바이마르의 귀족들도 그를 좋아하게 됐다.
괴테의 경우에도 정이의 말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괴테는 이탈리아 여행(1786~88)에서 돌아온 후에 연구와 집필에 전념했는데 이탈리아에서 생활했을 때가 자신이 진정으로 행복했던 유일한 시기라고 술회한 적이 있다. 그는 바이마르에서는 아무런 작품도 완성하지 못했다. 창작의 기쁨을 맞볼 수 없는 게 그에겐 큰 고통이었는지도 모른다. 자살 이야기가 출세작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뿐만 아니라 『파우스트』에 나오는 것을 보면 괴테 자신이 자살 충동을 느꼈는지도 모를 일이다. 괴테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핵심단어는 그리스도교와 『파우스트』다. 『파우스트』는 평생을 바친 역작이다. 어렸을 때 민담에서 유래한 인형극 형태의 ‘파우스트’ 공연을 봤다. 24살에 구상을 시작해 별세 1년 전에야 완성했다. 제1권과 2권이 각각 1808년, 1832년에 출간됐다. 작업 기간은 1771년에서 1831년까지 60년 걸렸다. 사실 괴테는 마치 ‘파우스트를 쓰기 위해 태어난 사람’같았다. 얄궂게도 당시 사람들은 괴테 하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떠올렸다.
당시 사회는 20세기, 21세기에도 여전히 감지되는 흐름을 타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괴테는 오늘의 삶에서 연관성을 확보한다. 프랑스혁명(1789~1799년) 이후 ‘대중 사회’가 도래했다. 그때도 지금 못지 않게 인공지능(AI)가 아닌 개인이 처리하기에는 벅찬 양의 정보가 넘쳤다. 유럽이 기록과 문헌이 넘치는 시대로 진입했던 것이다. 괴테는 셰익스피어(1564~1616)를 상당히 의식하며 작품 활동을 했다. 괴테의 삶을 재구성하는데 문제는 셰익스피어에 비하면 알려진 게 너무 많다는 게 문제다. 정치적으로는 당시에도 보수·진보가 서로 적대했다. 괴테는 ‘자유주의적 보수주의자’였다. 프랑스혁명뿐만 아니라 프랑스혁명에 맞선 독일 민족주의에도 적대적이 입장을 취했다. 그는 “애국주의가 역사를 망친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어쩌면 민족주의를 대체하는 포스트민족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 역설적으로 민족주의 시대 초기에 괴테가 한 이 말이 묘한 여운을 남긴다.
당시에도 탈그리스도교적인 흐름이 감지됐다. 그 흐름에 대한 병행 혹은 반발의 결과로 경건주의가 발생했다. 17세기 말 독일의 루터교 내에서 발생한 경건주의(Pietism)는 신앙의 내면화·경건화를 주장했다. 괴테는 어머니를 통해 경건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스피노자의 범신론에 정착했다. 그는 자신이 ‘시인으로서는 다신론자, 과학자로서는 범신론자’라고 자신의 신앙을 규정하기도 했다.
그리스도교에 대한 괴테의 태도는 평생을 통해 좀 왔다갔다한 면도 있다. 하지만『파우스트』는 의심 없이 그리스도교 문명을 배경으로 하는 역작이다.『파우스트』에서는 신(神)과 악마가 인간을 사이에 두고 내기를 하는『욥기(Job記)』와 에로틱한 신비주의 성향이 있는 솔로몬의『아가(雅歌)』와 동일한 이야기 구조가 느껴진다. 특히『욥기』에서와 마찬가지로『파우스트』에서도 ‘악마·마귀’ 또한 신께서 창조한 질서의 일부로 묘사된다.
지식과 행복에 대한 욕구 때문에 인간이 ‘영원한 지옥살이(damnation)의 수렁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파우스트』가 던지는 메시지 중 하나는 ‘몸부림치는(struggling)자가 멸망하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괴테에게 ‘영원한 지옥살이’란 절대(the absolute)에 대한 몸부림이 멈추는 것이었다.
파우스트는 자신이 이룩한 탁월한 지식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불만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절망한다. 자살까지 생각한다. 허무주의적이며 파괴적인 힘을 상징하는 메피스토펠레스가 그에게 접근했다. 둘은 계약을 맺는다. 파우스트가 요구한 것은 어떤 초능력이 아니라 다양한 체험의 가능성이었다. 그 가능성을 펼치다가 파우스트가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라는 체험’을 하면 메피스토펠레스가 영혼을 가져가기로 했다. 사실은 애초에 ‘불공정’ 계약이었다. 인간은 만족하지 않고 항상 더 높은 곳을 향하기 때문이다. 괴테는 알게 모르게 우리 삶 속에 침투했다. 우리가 좋아하는 하인리히 베르너(1800~1833)와 슈베르트(1797~1828)의 ‘들장미’는 괴테가 1771년에 쓰고 1799년에 발표한 ‘들장미(Heidenroslein)’에 곡을 붙인 것이다. 대기업 롯데그룹의 사명(社名)은『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등장 인물인 샤를로테(Charlotte, 줄여서 Lotte라고도 함)에서 영감을 얻었다.
CEO는 괴테로부터 어떤 영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괴테가 실제로 한 말을 토대로 가상의 인터뷰를 꾸며보면 다음과 같다.
자신이 경영하는 회사가 마치 마법에 홀린 듯 융성하기를 바라지 않는 CEO는 없을 것 같다.
마법이란 자신을 믿는 것이다. 스스로를 믿으면 무엇이든지 일어나게 할 수 있다. 여러분 스스로를 믿는 순간부터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게 될 것이다.
자신을 믿는 것은 어렵다.
의혹을 없앨 수 있는 것은 행동뿐이다. 생각하는 것은 쉽다. 행동하는 것은 어렵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행동을 낳는 것은 생각이지만, 생각이 겉도는 듯한 느낌이 들 때도 많다.
진정으로 지혜로운 모든 생각은, 무수한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헤아릴 수 없이 여러 번 품었던 생각들이다. 하지만 그 생각들이 진짜 여러분의 것이 되게 하려면, 여러분의 개인 체험에 뿌리 내릴 때까지 정직한 자세로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한다.
CEO가 배우고 알아야 하는 이유는?
행동하는 무지보다 무서운 것은 없다.
‘아는 게 힘이다’, ‘모르는 게 약이다’라고 했는데 어느 쪽 말이 맞는가.
조금만 알아야 진짜 아는 것이다. 많이 알수록 의심도 커진다.
CEO들은 직업상 크고 작은 어려움을 겪는다. 그들에게 특별히 해 줄 말이 있다면.
모든 일은, 그 일이 쉽게 되기 전까지는 어렵다. 목표에 다가갈수록 어려움이 더 많아진다.
회사를 어떻게 하면 강하고 창의적인 조직으로 만들 수 있나.
어떤 사람을 그의 현재 모습에 따라 대접하면 그는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더 나쁘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를 ‘그가 앞으로 마땅히 될 수 있는 모습’에 따라 대접하면, 그는 자신이 타고난 당위성과 가능성을 실현한 인물이 될 것이다.
무엇이 임직원 능력을 극대화하는가.
지시로 많은 것을 할 수 있지만, 격려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가능하면 사람들을 이해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이해할 수 없는 없는 사람도 많다.
다른 사람을 이해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는 다른 사람을 이해한 적이 없다. 나를 이해한 사람도 아무도 없다.
비즈니스를 하다 보면 언제 어디서 사기꾼을 만날지 모른다.
우리가 속임을 당하는 일은 없다. 우리 자신이 우리를 속인다.
비즈니스도 세상의 일부다. 세상은 왜 혼란스러울까.
여러분 눈에 보이는 세상은, 눈에 보이기 전에 이미 여러분 여러분 마음 속에 들어있던 세상이다. 오해와 방치가 사기와 악의보다 세상을 훨씬 더 혼란스럽게 만든다.
김환영 - 중앙일보 심의실장 겸 논설위원. 서울대 외교학과, 스탠퍼드대 중남미학 석사, 정치학 박사. 쓴 책으로 『 마음고전』,『세계사의 오리진을 만나다』등 이 있다.
괴테의 말 중에서 음미할만한 몇 가지● 사랑이 없는 세상은 세상이 아니다.
● 뭔가를 하기 위해서는 뭔가가 되어야 한다.
● 능력은 조용한 곳에서, 인품은 세파(世波) 속에서 발전한다.
● 자신이 자유롭다고 잘못 믿는 사람만큼 절망적인 노예는 없다.
● 삶은 우리에게 우리 스스로와 타인을 덜 가혹하게 대하라고 가르친다.
● 사람들을 분열시켜 지배하는 것은 좌우명으로서 타당하다. 단결시켜 이끄는 것은 더욱 타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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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소년등과’ 문제부터 살펴보자. 괴테는 24~25세 나이에 국제적 저명인사가 됐다. 자신의 짝사랑 경험을 작품으로 승화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1774)이 근대적인 의미에서 ‘세계 최초의 베스트셀러’가 된 것이다. 전 유럽이 ‘눈물바다’가 됐고 애독자 중에는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1769~1821)도 포함됐다. 괴테는 1808년 나폴레옹으로부터 레지옹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작품 속 주인공 복장이 크게 유행한 것은 물론, 2000여명의 젊은이가 권총으로 ‘모방 자살’을 했다는 추산도 있다. 일부 도시와 지역에서는 금서목록에 올랐다. 20세기에는 유명인이 사망하면 따라 죽는 ‘베르테르 효과(Werther effect)’가 사회학 용어로 등장했다.
‘불행하기에는 너무 똑똑한 인물’
집안 배경으로 보면, 괴테는 다이아몬드 수저는 아니더라도 금수저는 물고 태어났다. 귀족은 아니고 부르주아 계급에 속했다. 아버지는 법률가 출신의 황실 고문이었다. 어머니의 아버지는 시장이었다. 신분상승을 달성했다. 1782년 요제프 2세로부터 귀족 작위를 받아 귀족을 표시하는 ‘폰(von)’을 이름에 붙이게 됐다.
괴테는 어떻게 중국 유학자 정이의 주장에 보기 좋게 한방 먹이는 인생을 살 수 있었을까. ‘불행하기에는 너무 똑똑한(too smart to be unhappy)’ 인물이었기에 그랬는지도 모른다. 괴테의 지능지수(IQ)는 210~230으로 추정된다. 좋은 머리를 타고 났으면서도 괴테는 항상 만족하지 않고 발전과 변화를 추구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뱀과 같다. 허물을 벗고 새로 시작한다.” 결국 괴테는 “예외가 규칙을 입증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출세의 시점, 금수저·흑수저, 재능 유무는 결코 중요하지 않다. 3가지 불행이건 4가지 불행이건, 불행을 막으려면 항상 발전하고 변화하면 된다.
엄청나게 생산적인 인생을 살았다는 측면에서 괴테는 모든 CEO의 표상이다. 원도 한도 없는, 부러울 게 없는 인생이었다. 근대라는 시대에 ‘뒤늦게’ 태어난 ‘르네상스적 인간’이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가 연상된다. 괴테 전집은 143권 규모다. 한때 연금술·점성술·신비철학에 심취하기도 했지만, 과학자로서는 식물학·생물학·비교해부학·광물학·지질학 등 분야의 저서도 14권을 펴냈다. 화가로서는 그림 3000점을 남겼다. 서신 2만 건을 보냈다. 플라토닉·에로틱을 가리지 않고 전설적인 염문을 뿌렸다. 1809년에 18세 소녀에게, 1821년 72세가 됐을 때에도 17세 소녀에게 연정을 품었다.(괴테는 1788년 그보다 낮은 신분의 크리스티아네 불피우스와 동거를 시작했고 이듬해 장남 아우구스트스를 얻었다. 오랜 동거 끝에 1806년 혼례를 치렀다.)
서양 문학사에서 괴테와 동급을 꼽는다면 호메로스·셰익스피어·단테 정도다. 괴테는 질풍노도(슈투름 운트 드랑, Sturm und Drang) 운동에 이어 바이마르 고전주의 운동의 지도자였다. 운동의 선봉에 섰다가 그 운동이 성공하면 후세가 기린다. 그는 우리나라로 치면 세종대왕, 중국으로 치면 공자와 같은 범주에 속한다. 대한민국 해외 문화원의 이름은 세종학당, 중국은 공자학원, 독일은 괴테인스티투트(Goethe-Institut)가 아닌가.
유학자 정이의 경고가 무력화된 본질적 이유가 있다. 괴테는 인문교육의 힘을 증명했다. 괴테 사상의 중심인 ‘빌둥(Bildung)’은 수양(修養)이나 도야(陶冶)와 거의 동의어 관계다. 그는 아버지의 모교인 라이프치히대학과 슈트라스부르크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잠시 변호사 개업을 했지만, 어려서는 집에서 아버지와 가정교사에게 인문과 과학을 배웠다. 특히 고전 연구에 필요한 외국어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교육이었다. 프랑스어·이탈리아어·영어·라틴어·그리스어·히브리어를 공부했다. 괴테는 이렇게 말했다. “외국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은 자신의 모국어도 전혀 모르는 것이다.” 승마·펜싱·춤·그림도 배웠다. 한마디로 전인교육을 받았다. 그는 또 성찰하는 인간이었다. 52년동안 일기를 쓴 ‘일기 작가(diarist)’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그를 싫어했던 바이마르의 귀족들도 그를 좋아하게 됐다.
괴테의 경우에도 정이의 말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괴테는 이탈리아 여행(1786~88)에서 돌아온 후에 연구와 집필에 전념했는데 이탈리아에서 생활했을 때가 자신이 진정으로 행복했던 유일한 시기라고 술회한 적이 있다. 그는 바이마르에서는 아무런 작품도 완성하지 못했다. 창작의 기쁨을 맞볼 수 없는 게 그에겐 큰 고통이었는지도 모른다. 자살 이야기가 출세작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뿐만 아니라 『파우스트』에 나오는 것을 보면 괴테 자신이 자살 충동을 느꼈는지도 모를 일이다.
괴테 이해의 키워드는 그리스도교와 『파우스트』
당시 사회는 20세기, 21세기에도 여전히 감지되는 흐름을 타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괴테는 오늘의 삶에서 연관성을 확보한다. 프랑스혁명(1789~1799년) 이후 ‘대중 사회’가 도래했다. 그때도 지금 못지 않게 인공지능(AI)가 아닌 개인이 처리하기에는 벅찬 양의 정보가 넘쳤다. 유럽이 기록과 문헌이 넘치는 시대로 진입했던 것이다. 괴테는 셰익스피어(1564~1616)를 상당히 의식하며 작품 활동을 했다. 괴테의 삶을 재구성하는데 문제는 셰익스피어에 비하면 알려진 게 너무 많다는 게 문제다. 정치적으로는 당시에도 보수·진보가 서로 적대했다. 괴테는 ‘자유주의적 보수주의자’였다. 프랑스혁명뿐만 아니라 프랑스혁명에 맞선 독일 민족주의에도 적대적이 입장을 취했다. 그는 “애국주의가 역사를 망친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어쩌면 민족주의를 대체하는 포스트민족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 역설적으로 민족주의 시대 초기에 괴테가 한 이 말이 묘한 여운을 남긴다.
당시에도 탈그리스도교적인 흐름이 감지됐다. 그 흐름에 대한 병행 혹은 반발의 결과로 경건주의가 발생했다. 17세기 말 독일의 루터교 내에서 발생한 경건주의(Pietism)는 신앙의 내면화·경건화를 주장했다. 괴테는 어머니를 통해 경건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스피노자의 범신론에 정착했다. 그는 자신이 ‘시인으로서는 다신론자, 과학자로서는 범신론자’라고 자신의 신앙을 규정하기도 했다.
그리스도교에 대한 괴테의 태도는 평생을 통해 좀 왔다갔다한 면도 있다. 하지만『파우스트』는 의심 없이 그리스도교 문명을 배경으로 하는 역작이다.『파우스트』에서는 신(神)과 악마가 인간을 사이에 두고 내기를 하는『욥기(Job記)』와 에로틱한 신비주의 성향이 있는 솔로몬의『아가(雅歌)』와 동일한 이야기 구조가 느껴진다. 특히『욥기』에서와 마찬가지로『파우스트』에서도 ‘악마·마귀’ 또한 신께서 창조한 질서의 일부로 묘사된다.
지식과 행복에 대한 욕구 때문에 인간이 ‘영원한 지옥살이(damnation)의 수렁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파우스트』가 던지는 메시지 중 하나는 ‘몸부림치는(struggling)자가 멸망하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괴테에게 ‘영원한 지옥살이’란 절대(the absolute)에 대한 몸부림이 멈추는 것이었다.
파우스트는 자신이 이룩한 탁월한 지식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불만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절망한다. 자살까지 생각한다. 허무주의적이며 파괴적인 힘을 상징하는 메피스토펠레스가 그에게 접근했다. 둘은 계약을 맺는다. 파우스트가 요구한 것은 어떤 초능력이 아니라 다양한 체험의 가능성이었다. 그 가능성을 펼치다가 파우스트가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라는 체험’을 하면 메피스토펠레스가 영혼을 가져가기로 했다. 사실은 애초에 ‘불공정’ 계약이었다. 인간은 만족하지 않고 항상 더 높은 곳을 향하기 때문이다.
‘몸부림치는 자가 멸망하는 일은 없다’
CEO는 괴테로부터 어떤 영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괴테가 실제로 한 말을 토대로 가상의 인터뷰를 꾸며보면 다음과 같다.
자신이 경영하는 회사가 마치 마법에 홀린 듯 융성하기를 바라지 않는 CEO는 없을 것 같다.
마법이란 자신을 믿는 것이다. 스스로를 믿으면 무엇이든지 일어나게 할 수 있다. 여러분 스스로를 믿는 순간부터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게 될 것이다.
자신을 믿는 것은 어렵다.
의혹을 없앨 수 있는 것은 행동뿐이다. 생각하는 것은 쉽다. 행동하는 것은 어렵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행동을 낳는 것은 생각이지만, 생각이 겉도는 듯한 느낌이 들 때도 많다.
진정으로 지혜로운 모든 생각은, 무수한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헤아릴 수 없이 여러 번 품었던 생각들이다. 하지만 그 생각들이 진짜 여러분의 것이 되게 하려면, 여러분의 개인 체험에 뿌리 내릴 때까지 정직한 자세로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한다.
CEO가 배우고 알아야 하는 이유는?
행동하는 무지보다 무서운 것은 없다.
‘아는 게 힘이다’, ‘모르는 게 약이다’라고 했는데 어느 쪽 말이 맞는가.
조금만 알아야 진짜 아는 것이다. 많이 알수록 의심도 커진다.
CEO들은 직업상 크고 작은 어려움을 겪는다. 그들에게 특별히 해 줄 말이 있다면.
모든 일은, 그 일이 쉽게 되기 전까지는 어렵다. 목표에 다가갈수록 어려움이 더 많아진다.
회사를 어떻게 하면 강하고 창의적인 조직으로 만들 수 있나.
어떤 사람을 그의 현재 모습에 따라 대접하면 그는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더 나쁘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를 ‘그가 앞으로 마땅히 될 수 있는 모습’에 따라 대접하면, 그는 자신이 타고난 당위성과 가능성을 실현한 인물이 될 것이다.
무엇이 임직원 능력을 극대화하는가.
지시로 많은 것을 할 수 있지만, 격려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가능하면 사람들을 이해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이해할 수 없는 없는 사람도 많다.
다른 사람을 이해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는 다른 사람을 이해한 적이 없다. 나를 이해한 사람도 아무도 없다.
비즈니스를 하다 보면 언제 어디서 사기꾼을 만날지 모른다.
우리가 속임을 당하는 일은 없다. 우리 자신이 우리를 속인다.
비즈니스도 세상의 일부다. 세상은 왜 혼란스러울까.
여러분 눈에 보이는 세상은, 눈에 보이기 전에 이미 여러분 여러분 마음 속에 들어있던 세상이다. 오해와 방치가 사기와 악의보다 세상을 훨씬 더 혼란스럽게 만든다.
김환영 - 중앙일보 심의실장 겸 논설위원. 서울대 외교학과, 스탠퍼드대 중남미학 석사, 정치학 박사. 쓴 책으로 『 마음고전』,『세계사의 오리진을 만나다』등 이 있다.
괴테의 말 중에서 음미할만한 몇 가지● 사랑이 없는 세상은 세상이 아니다.
● 뭔가를 하기 위해서는 뭔가가 되어야 한다.
● 능력은 조용한 곳에서, 인품은 세파(世波) 속에서 발전한다.
● 자신이 자유롭다고 잘못 믿는 사람만큼 절망적인 노예는 없다.
● 삶은 우리에게 우리 스스로와 타인을 덜 가혹하게 대하라고 가르친다.
● 사람들을 분열시켜 지배하는 것은 좌우명으로서 타당하다. 단결시켜 이끄는 것은 더욱 타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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