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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기업가정신을 찾아서 (9) 서성환 아모레퍼시픽 창업자

한국의 기업가정신을 찾아서 (9) 서성환 아모레퍼시픽 창업자

장원 서성환(1923~2003)은 개성상인의 기업가정신을 근간으로 70년간 성장을 거듭해 온 장수기업 아모레퍼시픽의 창업자다. “우리만이 할 수 있는 아름다움을 창조해 세계와 소통하겠다”는 원대한 목표를 내걸고 화장품 산업에 매진해 성공한 한국 뷰티산업의 선구자다. 장원은 “소비자를 속이지 말고 소비자에게 더 큰 이익을 주라”는 정도경영으로 승부한 CEO였고, 화장품 마케팅의 귀재였다. 지금의 화장품 한류의 초석을 놓은 서성환의 기업가정신을 정리해 재조명했다.
청년 서성환의 20대 시절, 그는 “아름다움을 창조해 세계와 소통하겠다”는 원대한 목표를 내걸고 화장품 산업에 매진해 성공한 한국 뷰티산업의 선구자다. / 아모레퍼시픽 제공
서성환의 호는 장원(粧源)이다. “화장품은 나의 꿈이고 삶 자체이며, 화장품 없는 내 인생은 아무 의미를 발견할 수 없다”고 말했던 그의 인생에 걸맞다. 장원은 평소 “우리 회사의 모태는 나의 어머니다. 우리 회사는 여성이 키운 기업이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여성 화장품을 만드는 회사라는 뜻인 동시에 장원이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기업가정신과 도전정신을 잇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때문에 장원을 이해하려면 그의 아름다움과 사랑의 근원인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한다.

장원은 일제강점기인 1923년, 황해도 평산군 적암면에서 아버지 서대근과 어머니 윤독정의 3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일곱 살 되던 해, 가족은 개성으로 이주했다. 성품이 곧고 생활력이 강했던 모친은 당시 번창한 상업 도시였던 개성 남문거리에서 시전(市廛) 상인들로부터 등잔기름, 머릿기름을 가져다 얼마간의 이문을 남기고 팔았다. 일이 손에 익고 눈이 뜨이자 모친은 당시 여성의 윤기 흐르는 까만 머리를 가꾸는데 필수품이었던 동백 머릿기름을 직접 만들어 팔았다. 개성 자남산 자락에 있는 기름시장 안에 ‘창성상점’이 모친의 일터였다. 품질이 좋은데다 ‘신용’이라는 덕목이 더해진 그녀의 동백기름은 입소문을 타고 전국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이후 화장품 제조에 눈을 돌린 모친은 구리무(크림), 가루분(백분) 등으로 화장품 제조의 종류와 품목을 넓혀나갔다. 흥미로운 것은, 제품마다 ‘창성당 제품’이라고 눈에 띄게 표기했다는 점이다. 당시 최고급 화장품이라는 뜻으로 ‘당급화장품’이라는 말이 유행했는데, 창성 상점에서 만든 제품이 당급화장품으로서의 가치가 있다는 것을 명확히 하겠다는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독자적인 브랜드를 론칭한 셈이다.
 개성상인의 상도를 이어받다
장원의 모친 윤독정 여사. 장원에게 의(義), 신(信), 실(實)이라는 개성상인의 삼도훈(三道訓)을 장원에게 전수해주었다.
1939년, 중경보통학교를 졸업한 장원은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가업을 돕기로 결심한다. 좋은 물건을 만드는 첫째 조건은 좋은 원료다. 모친은 남대문 시장의 거래처를 찾아가 원료와 자재를 구매하는 일을 장원에게 맡겼다. 장원이 16세 때 일이다. 시장에 가는 날이면 장원은 도시락 세 개를 자전거에 단단히 묶고 새벽 길을 나섰다. 개성에서 서울 남대문시장까지는 180리(45㎞) 길이었다. 가는 길에 날이 밝아오면 도시락 하나를 먹었고, 일을 마친 뒤 또 하나를,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마지막 하나를 먹었다.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은 장원의 평전 『나는 다시 태어나도 화장품이다』에서 이렇게 회고한다. “선대 회장은 어머니의 깊은 지혜를 헤아려 개성에서 서울까지 부지런히 자전거 페달을 밟았고, 사람만이 희망이라는 소중한 믿음으로 아낌없이 자신의 마음을 나누었다. 물건을 파는 일은 진심을 파는 일이요, 마음을 사는 일이라 굳게 믿었던 큰 사람이다.”

그렇다. 장원의 경영철학의 뿌리는 모친 윤독정 여사의 ‘깊은 지혜’였다. 장원이 후에 임직원들과 가족에게 평생을 강조했던 “남다른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 “정직해야 한다”는 가르침의 근원은 바로 어머니였다. 한해 남짓 남대문을 오가면서 장원에게 진심과 여유가 생긴 것을 본 모친은 장원에게 화장품 제조법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장원은 이때를 회고하며 “어머니로부터 제조법이 아니라 제조에 임하는 자세를 배웠다”고 회고했다.

이 대목에서 중요한 것은 장원의 모친이 의(義), 신(信), 실(實)이라는 개성상인의 삼도훈(三道訓)을 장원에게 전수해주었다는 점이다. 장원의 모친은 16살 아들에게 처음 일을 줄 때 “내 일을 거드는 게 아니라 네게 일을 주겠다”며 심부름꾼이 아니라 사업가로서 사람들을 대하고 일하도록 의(義)의 정신을 가르쳤다. 개성에서 서울 남대문 시장으로 원료를 구하기 위해 180리 길을 자전거로 왕래할 때에는 “급하다고 실을 바늘허리에 매어 쓰지는 못한다”며 재료를 구함에 있어 실수가 없어야 고객의 믿음을 지킬 수 있다는 신(信)의 정신을 강조했다. 사업이 번창할 때에는 “얕은 물도 깊게 건너야 한다”, “기술은 훔쳐도 자세는 훔칠 수 없다”는 말로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허세를 부리면 안 된다는 실(實)의 정신을 강조했다. 이는 장원의 신용제일주의, 기술제일주의, 협동정신이라는 기업가정신을 형성하는 바탕이 된다.

장원이 18세 때인 1941년. 개성에 최초로 ‘김재현 백화점’이 문을 열었다. 장원은 어머니의 권유로 백화점 화장품부에 직접 코너를 개설해 판매까지 맡게 된다. 하지만 사업의 재미를 알아가던 것도 잠시, 1945년 1월, 만 20세의 장원은 날벼락 같은 징병통지서를 받는다. 그래도 운명은 장원의 편이었다.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면서 1945년 9월 5일, 장원은 베이징에서 현지 제대를 한다. 아모레퍼시픽의 창립기념일이 이날이다. 왜 이날일까? 서경배 회장은 이를 두고 “선대 회장은 진정한 자유인이 되기 전의 일은 진정한 창립이 아니라고 생각하셨다”고 말한 적이 있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던 스무살 청년 장원의 깊은 고뇌를 짐작할 수 있다.

장원은 귀국 전 베이징에 머물다 자금성 남쪽에 있는 ‘다자란’이라는 큰 시장을 찾게 되는데, 이때의 경험이 잊을 수 없는 평생의 기억으로 남게 된다. 세상 진귀한 것이 다 모여있는 큰 세상, 신세계를 만난 것이다.

1946년 2월, 인천항에 도착한 장원은 중국에서 보았던 넓은 시장의 잔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급기야 장원은 가족의 동의를 얻어 상호를 창성상회에서 ‘태평양상회’로 바꾸게 된다. 바다를 본 사람은 개울물에 만족하지 못하는 법이다. 개성은 ‘태평양’의 꿈을 실현할 무대로는 너무도 좁았다. 장원은 가족을 설득해 상경, 1947년 서울 남대문시장 부근 남창동에 ‘태평양화학공업사’라는 간판을 내건다.
 태평양 너머를 향한 큰 꿈
국내 최초 독립 브랜드인 ‘메로디크림’ (맨 왼쪽)과 남성들이 사용하는 최초의 식물성 포마드ABC 포마드헤어크림(가운데). 1997년 출시된 설화수(오른쪽)는 한해 매출이 8000억원에 달하는 아모레퍼시픽의 대표적인 화장품 브랜드로 성장했다. / 아모레퍼시픽 제공
장원이 새 사업장을 열 때부터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바로 품질이었다. “현재의 이익보다 더 중요한 것이 소비자들의 신뢰와 좋은 평가이며, 그 첫걸음이 바로 품질”이라는 것이 장원의 신념이었다. 장원이 실력으로 세상에 선보인 첫 번째 제품은 ‘메로디 크림’이었다. 고품질에다 차별화된 디자인으로 만들어진 메로디 크림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메로디 크림으로 차곡차곡 사업의 성과가 쌓여나갈 즈음, 날벼락 같은 6·25가 발발했다. 장원은 피난 짐 속에 집 마당에 묻어두었던 향료를 소중히 담아 부산행 피난 열차에 몸을 실었다. 피난처에서도 제품을 만드는 장원의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장원은 번들거리지 않으면서 자연스러운 윤기를 내는 건물론, 외국에서 들여온 고급 향료를 첨가하여 냄새 문제까지 개선한 포마드를 시장에 내놓게 된다. 이 제품이 바로 그 유명한 남성용 헤어크림 ‘ABC포마드’다.

휴전 1년 후, 장원은 서울로 돌아와 용산구 후암동에 둥지를 틀었다. 아내인 변금주 여사도 같이 일손을 도왔다. 사업이 확장되면서 자신의 능력으로만 이끌어가는 사업에는 한계가 있음을 느낀 장원은 지인의 소개로 일본 동경공업고등학교에서 응용화학을 전공한 구용섭 씨를 만나게 된다. 이를 계기로 장원은 1954년 화장품 연구실을 만드는데, 이것이 국내 장업계 최초의 연구실이었다. 장원은 나중에 구 씨를 독일로 유학을 보냈고, 서울에 남아있는 가족들의 생계를 지원했다. 연구실을 만든 후 출시된 첫 번째 제품인 ‘ABC 100번 크림’은 ABC포마드에 버금가는 큰 히트를 기록했다. 1959년에는 프랑스 화장품업체 코티사와 기술제휴로 ‘코티분’도 출시해 대히트를 기록했다.

기쁨이 있으면 슬픔도 있는 법이다. 장원은 36세이던 봄날, 장원은 어머니를 떠나 보내는 아픔을 겪는다. 일생의 롤모델이자 스승이며, 기도이자 위로인 대상을 잃은 것이다. 하지만 장원은 슬픔을 슬기롭게 이겨내고 경영에 매진한다. 장원은 구용섭 씨의 제안에 따라 에어스푼(Air Spun)을 도입하고, ‘ABC분백분’을 시장에 내놓았다. ‘세계에서 가장 가늘고 부드러우면서도 고운 가루를 제조할 수 있는 제분기’에서 만들어진 ABC분백분은 출시되자마자 히트 상품이 되었다. 하지만 장원은 여전히 코티사가 만드는 코티분에 맞먹지는 못한다는 생각에 만족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꼭 그만한 제품을 만들고 싶다는 강한 의지와 도전의식이 세차게 타올랐다.

장원은 1960년, 기술제휴사인 코티사의 초청으로 40일간의 유럽 시찰에 오르게 되었다. 1인당 국민소득이 불과 85달러이던 시절, 파리의 세느 강변에 있는 코티사는 장원에게 신세계였다. 세계적인 품질을 자랑하는 갖가지 화장품을 무한정 쏟아내고 있는 현대적 생산의 현장. 모든 생산 공정을 자동화한 최신 시설과 즐비한 수십 개의 원료 저장 탱크를 보며 장원은 부러운 마음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럭셔리 한방 화장품 설화수
유럽 장업계 시찰 떠나며 비행기에 오르는 서성환 회장.
장원은 남프랑스의 아름다운 도시 그라스도 방문했다. 질 좋은 향료를 만들기 위한 소규모 증류공장, 비누공장, 향료가게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세계적인 향수의 고장이었다. 꽃잎과 건초를 압축해 원액을 얻는 과정과 향수제조 과정에 쓰이는 갖가지 기구들을 보자 오래전 어머니가 동백기름을 짜던 당시의 모습이 그려졌다. 장원은 보랏빛 라벤더를 비롯해 가지각색의 꽃들이 펼쳐진 농장을 돌아보며 식물재배가 경제, 문화, 그리고 환경에까지 기여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이를 잊지 않기 위해 가슴속 수첩에 메모했다. 세월이 흘러 2006년 7월 27일 주한 프랑스 대사관. 이날 프랑스 최고의 훈장 레지옹도뇌르 수훈자가 있었으니 바로 서경배 회장이다. 아모레퍼시픽의 첫 번째 향수 ‘롤리타렘피카’의 세계적인 성공과 두 번째 향수 ‘엘’의 출시를 통해 한국과 프랑스 두 나라의 경제 협력과 우호 증진에 기여한 공로였다. 감회 깊은 얼굴로 훈장을 받아 든 서경배 대표의 손에는 장원이 1960년 첫 프랑스 방문길에 지녔던 대한민국 여권 제22153호가 들어있었다. 화장품 외길을 걸어온 장원의 삶에 대한 존경이자 경배였다.

유럽시찰을 다녀온 뒤 장원은 지독할 정도로 연구에 매진하고 기술개발을 독려했다. 1964년 어느 날, 장원은 연구원들에게 “한국인 몸에 맞는 원료는 역시 한방 원료입니다. 인삼 화장품을 만들어 봅시다”고 제안한다. 기존에 시판하던 국산 화장품은 한국인이 사용하면 자극이 강하고 뾰루지가 나거나 피부가 붉게 올라오는 등의 문제점이 있었다. 국산 화장품도 대부분 미국 화장품 배합을 따라해 역시 한국인 체질에는 잘 맞지 않았다. 장원은 남프랑스 그라스의 여행에서 마음속에 담아왔던 ‘식물 재배로 경제와 문화를 키워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현실화시키는 방법을 모색했고, 그러한 고민 끝에 개성에서 자란 장원의 마음 한 구석에 비켜서 있던 인삼이 불려 나오게 된 것이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66년, 세계 최초의 한방화장품 ‘ABC 인삼크림’을 제품화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만족할 만한 결과는 아니었다. 인내를 요구하는 긴 연구가 다시 시작되었다. 1973년, 드디어 세계 최초로 인삼 사포닌을 원료로 한 화장품 ‘진생삼미’가 탄생했다.

장원의 관심은 인삼에서 더 나아가 다양한 한방 식물들로 자연스럽게 확장되었다. 인삼에서 피부 미용 효능 물질을 추출했듯이 자연 속에서 자라는 수많은 식물로부터 더 많은 이로운 물질들을 얻어낼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생긴 것이다. 1987년,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드디어 피부에 아름다운 눈꽃을 피운다는 뜻을 담은 ‘설화’가 개발된다. 설화는 인삼 화장품을 만든 기술력을 기반으로 율무, 당귀, 치자, 감초 등의 여러 한방 약초들에서 효능 물질을 추출해 만든 제품으로 제대로 된 한방 화장품이었다. 그리고 꼭 10년 후, 비로소 한방 화장품의 진수라고 할 수 있는 ‘설화수’가 태어났다. 고품질 럭셔리 화장품 설화수는 당시 국내 화장품 시장에 잔잔한 충격을 주었다. 설화수는 현재 연간 매출이 8000억원에 달하는 아모레퍼시픽의 대표적인 화장품 브랜드로 성장했다.

장원의 기술개발과 연구 혁신의 사례는 또 있다. 스펀지에 화장품을 넣어 만든 제품 ‘에어쿠션’이 그 사례다. 현대의 여성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써봤을 이 제품은 프랑스의 명품 브랜드 크리스찬디올이 쿠션 기술을 공유해달라고 아모레에 요청했을 정도로 획기적이었다. 지난해 아모레 쿠션제품 판매량은 2600만 개로 1.2초당 하나꼴로 팔렸다고 한다.

기술개발에 대한 장원의 신념은 남달랐다. “판매보다 기술 개발에 더 힘을 쏟아 소비자가 제품을 신뢰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돈이란 노력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벌수도 있고 잃을 수도 있는 것 같아요. 덕 있는 사람으로 정직하게, 부지런히 일한다면 성공 안 할 수가 있겠어요?” 장원이 1973년 4월 당시 선데이서울과 인터뷰에서 ‘30년 가까이 80% 가까운 시장 점유율을 확보하며 화장품 최대 메이커로 군림해온 비결’을 묻자 답한 말이다. 장원은 1991년, 계열사 노조들의 총파업으로 회사가 거의 망할 뻔한 위기에도 중앙연구소를 만들어 미래를 위한 투자하는 것에 게을리하지 않았다. 연구개발만이 시장을 선도할 제품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 과학 기술에서 우위를 확보해야만 세계 선두기업으로 도약할 수 있다는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방문판매 도입한 마케팅의 귀재
녹차밭에서 묘목을 살펴보는 서성환 회장. 꾸준한 관심과 투자로 국내 녹차문화를 대중화하는 데 일조했다.
장원은 정도경영을 실천한 기업가이자 소비자중심 경영의 대가였다. 기술개발에 멈추지 않고 미용정보지 발간, 방문판매제도 도입, 소비자 대상 미용강좌, 마사지 서비스 제도 실시 등 소비자와의 접점을 넓히는 다양한 마케팅을 전개하도록 끊임없이 임직원들에게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특히 장원이 제안한 방문판매 제도 도입은 태평양의 사세 확장에 획기적인 계기가 된다.

1960년대, 화장품 업계의 전근대적인 유통 구조가 여러 문제에 봉착하자 장원은 유통 구조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방문판매 제도다. 태평양은 상금을 내걸고 전 사원을 대상으로 방문 판매 브랜드 이름을 공모했다. 100여 편의 응모작 중 채택된 브랜드가 바로 화장품의 대명사처럼 여성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 아모레(Amore)다. 장원은 판매망 구축을 위해 전국을 행정구역에 따라 바둑판처럼 나누어 구역을 정하고 특약점을 설치해갔다. 1980년에는 특약점과 영업소를 합친 숫자가 664군데, 활동하던 판매원만 해도 1만6000여 명에 이르렀다. 승부처는 판매원의 확보였다. 장원은 당시 37만 명에 달하는 전쟁미망인들에게 주목했다. 여성 가장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함으로써 그들과 회사 모두 이기는 게임을 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장원은 방문판매를 시작한 후 3년 동안 집에서 잠을 잔 적이 거의 없었다. 이같은 노력에 힘입어 ‘아모레 아줌마’라고 불리던 방문판매 사원들은 오늘의 아모레퍼시픽을 만든 주역이 되었다.

1976년 덩샤오핑의 등장으로 중국이 실용주의로 선회하자 세계의 기업들이 중국을 향해 달려갔다. 장원은 중국과 국교가 정상화되기 이전인 1990년대 초반부터 홍콩과 대만에 직원을 파견해 일찌감치 중국 진출을 준비했다. 세계 각지의 화장품 회사들이 중국 경제와 선진 문화의 중심이었던 상하이에 합작법인을 세우거나 생산 공장을 건립했지만 장원은 생각은 달랐다. 중국 심장부인 베이징이나 상하이보다 중국 시장을 이해하는 마케팅 학습장으로 중국 동북 3성의 가장 중심이 되는 선양이 최적이라고 생각했던 것. 먼저 중국 외곽 지역에서 경험을 쌓은 뒤 중국의 중심부로 들어가는 우회 전략이었다. 결과적으로 이 전략은 적중했다. 처음부터 상하이로 들어간 기업들은 어려움을 많이 겪었지만, 아모레퍼시픽은 선양에서의 사업이 안정화되자 거점을 하나둘씩 확대해 1995년에는 다렌에, 1996년에는 창춘과 하얼빈에 각각 분공사를 설립했다. 그리고 지금은 중국 백화점에서 팔리는 화장품 회사들 가운데 빅5에 꼽힐 정도로 중국 시장에서 성공했다. 지금의 아모레퍼시픽 성공의 배경에는 장원의 이같은 선견지명이 있었던 셈이다.

기업가로서 장원은 한국의 차(茶) 문화를 계승하고 발전시킨 독보적인 ‘다인(茶人)’으로 평가받는다. 장원은 1979년 자신의 손으로 제주도 황무지에 녹차밭 개간 사업을 시작하며 이렇게 말했다. “차는 당장 돈이 벌리는 사업은 아니다. 이것은 문화사업이다. 계속 적자가 나겠지만 이 사업이 성공하면 모든 국민에게 사랑받는 기업 이미지를 얻을 것이다.” 직접 개간한 제주의 대규모 차밭에 문화를 체험하고 휴식할 수 있는 박물관을 만들고 싶다는 장원의 꿈은 마침내 2001년 제주 서광다원에 오설록 티 뮤지엄 개장으로 꽃을 피우게 된다.
 다시 태어나도 화장품이다
장원의 유족들은 장원의 뜻을 받들어 저소득층 한부모 가정의 여성 가장의 창업을 지원하는 ‘희망가게’ 사업을 시작했다. 사진은 희망가게 1호점 오픈 현장으로 왼쪽이 서경배 회장이다. / 아모레퍼시픽 제공
아무리 뛰어난 기업인이라도 성공만 있을 순 없다. 아모레퍼시픽의 전신인 태평양은 금융, 서비스 등 3차 산업에 비중을 두고 다각화를 추진한다. 그 결과 1990년 초에 25개의 계열사를 보유하는 거대기업이 되었다. 하지만 그 대가는 컸다. 극심한 노사분규와 계열사의 경영 악화로 자금 압박에 시달리게 된다. 아모레퍼시픽의 70년 역사에서 가장 힘든 해로 기억되는 1991년의 일이다. 그해 5월 노조가 파업에 들어가 장장 25일간 본사를 점거한다. 생산중단, 대금결제 차질, 불매운동 등 심각한 위기를 맞는다. 밤낮으로 지칠 줄 모르고 일하던 장원에게 자신도 모르는 사이 폐암이라는 무서운 병마가 상처를 내고 있었다. 장원은 오랜 고민 끝에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 위기를 돌파하는 최선의 방책”이라는 답을 얻는다.

“회사가 어려울 때마다 ‘만약 우리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게 무엇인가’를 자문했다. 그때마다 나는 다시 태어나도 화장품을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그래 화장품이다. 앞으로도 나는 화장품을 할 것이다. 아니, 다시 태어나도 화장품을 할 것이다.” 그해 겨울, 장원은 서경배 사장을 불렀다. “이제 회사의 의사 결정은 네가 했으면 싶다.”

당시 서경배 사장이 기업 혁신을 주도해 지금의 아모레퍼시픽으로 키워낸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서경배 사장은 ‘가장 잘 할 수 있는’ 화장품만 남기고 다 정리하는 수순을 밟는다. 그런데, 새옹지마였다. 닥쳐온 IMF 외환위기에 진로와 대우, 동아건설 등 대기업들이 줄줄이 쓰러질 때 오히려 아모레퍼시픽은 헤라와 아이오페, 설화수 등의 히트작을 내며 승승장구했다. 장원은 아모레의 이익이 1000억원을 넘었다는 서경배 사장의 보고를 받고는 “잘하는구먼!”이라는 한마디로 깊은 신뢰를 표현했다. 기술개발에만 연간 예산의 3%를 사용하는 아모레퍼시픽은 미국 포브스 조사에서 매년 글로벌 100대 혁신기업에 꼽힐 정도로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국내에서도 대학생들이 취업하고 싶은 기업 중 다섯손가락 안에 드는 기업이 됐다. ‘기술과 정성으로 아름다움과 건강을 창조해 인류에 공헌한다’는 장원의 꿈은 서경배 회장을 통해 ‘아시안 뷰티 크리에이터’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음은 물론이다.

2003년 1월 9일, 장원은 “어려운 이웃을 살펴달라”는 뜻을 유언으로 남기고 그리운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먼 길을 떠났다. 유족들은 장원의 뜻을 받들어 기금을 조성, 저소득층 한부모 가정의 여성 가장의 창업을 지원하는 ‘희망가게’ 사업을 시작했다. 40년 전 방문판매라는 제도를 통해 더 많은 아모레 사원들이 더 큰 희망을 품도록 손을 내밀었던 장원의 따뜻한 마음이 희망가게를 통해 계속해서 타오르게 된 것이다. 지난 9월에는 서경배 회장이 3000억원을 출연해 서경배과학재단을 출범시키며 기술개발로 사회공헌하는 장원의 경영철학을 이어가고 있다.

- 포브스코리아 특별취재팀·자료 협조 아모레퍼시픽 홍보실·자문 한국경영사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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