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원경의 ‘노벨경제학자의 은밀한 향기’ (39)] 완전히 새로운 교육 시스템이 필요하다
[조원경의 ‘노벨경제학자의 은밀한 향기’ (39)] 완전히 새로운 교육 시스템이 필요하다
조셉 스티글리츠 창조적 학습사회 이론... 제대로 된 교육, 사회안전망, 법적 제도, 혁신 시스템 갖춰야 ‘이상하고 아름다운 도깨비 나라, 방망이로 두드리면 무엇이 될까, 금 나와라 와라 뚝~딱! 은 나와라 와라 뚝~딱!’
요즘 드라마 ‘도깨비’가 장안의 화제다. 전래 동화 도깨비에서 모티브를 얻은 드라마는 작가의 풍부한 상상력으로 안방극장에 흥미와 감동을 주고 있다. 우리나라 도깨비는 무서운 모습부터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엿보이는 장난스러운 모습까지 다양하다. 관촉사 도깨비처럼 뿔이 없는 것도 있고, 강진 사문안 석조상은 뿔이 있으며 방망이까지 들고 있다. 도깨비는 상황에 따라 변화무쌍하게 변신하고 창의성을 발휘하는가 하면,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면서 인간과 어울리는 포용성까지 갖춰 풍부한 이야기 소재가 되었다. 도깨비가 도둑과 악귀를 물리치고, 술에 취한 사람과는 씨름을 하거나 노래를 부르며 같이 놀아 주기도 한다.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는가 하면 어른의 넘치는 분을 삭이고 응어리진 한을 풀어주기도 한다. 도깨비는 무섭기도 하지만 귀여운 케릭터이기도 하다. 그런 도깨비의 캐릭터에 다채로운 특성을 입혀서 ‘쓸쓸하고 찬란하神-도깨비’ 드라마가 탄생했다. 사람들은 작가의 창의성에 열광한다. 원작은 따로 없지만 많은 설화와 역사 속 이야기들이 원작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했을 것 같다. 하나의 드라마가 수출도 하고 문화 상품으로서 수많은 부가가치를 만들어 냈다. 한 사람의 천재가 수백 만 명을 먹여 살리듯이 드라마 한편이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저성장, 양극화로 신음하는 세계경제에 도깨비 방망이를 든 신화적 영웅이 나타나 지구를 구해주면 좋으련만…. 그런 영웅이나 천재는 타고난 것인가, 아니면 노력하는 것인가. 이 말에는 논쟁이 붙을 것 같지만 부단한 노력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될 것 같다. 경제 성장과 사회 발전과 세계의 진보에 새로운 접근법으로 창조적 학습사회를 들고 나온 인물이 있다. 세계화의 모순을 지적한 불평등 연구의 대가로 우리에게 익숙한 조셉 스티글리츠다. 그는 경제·사회 전체의 획기적 생산성 향상을 위해 교육의 역할을 중시한다. 그런데 한국 사회의 모습을 보면 한편으로는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 우리는 태초의 아름다운 교육의 정신에 기반하여 살고 있는가. 교육은 밥벌이의 수단이나 즐거움의 가치가 있는 대상이면서, 서로 가르치고 배우며 사회 전반적인 편익을 확대해 나가는 수단이었다, 그래서 진정한 교육에는 조건이 있다. 교육은 학습자가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행하게 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도깨비에게 3행시로 물어본다. 도대체 한국의 교육은, 깨우침을 주고, 비전을 제시하고 있나요? 드라마 ‘도깨비’에서 900년이나 산, 도깨비로 분한 배우 공유는 삶을 대하는 한국인에게 용기를 주고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으려는 듯 이렇게 말한다.
“그대의 삶은 그대가 바꾼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그대의 삶을 항상 응원했다.”
그의 말은 교육이 자신의 삶을 제대로 개척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믿음에서 나온 것 같다. 사실 다른 도깨비들은 획일적인 한국 교육과 처절하게 정답을 외우는 학생들을 바라보며 또 다른 3행시를 지어 비웃을지도 모르겠다. 요즈음 ‘엄마 매니저’의 손바닥 안에서 하루 24시간을 감시받는 한국 학생들이 스스로 삶의 주인의식을 가지지 않은 경우도 있다. 누군가는 회사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엄마를 찾으니 도깨비가 아연실색을 한다. ‘도무지 한국 교육을 이해할 수 없어요. 깨달음이라는 단어는 서랍장에 꽁꽁 숨어 있고 한자라도 틀리면 깨진다고 생각해서인지 학생들은 소심하고 다양성으로 무장한 기(氣)가 전혀 느껴지지 않아요.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을 공장에서 찍어내듯 대량생산하는 게 학교 같아요.’ 요즈음은 잘 만든 로봇 하나가 수만 명의 일을 대체해 생산성을 증진하고 있다. 그런 로봇을 만드는 것은 창의성이 기본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먼저 한국 교육의 역사와 현주소를 제대로 파악해 보기로 하자. 과거에 우리 교육은 한국을 지독한 가난에서 세계 10위권의 경제 강국으로 이끈 일등 공신이었다. 높은 교육열이 선진기술을 빠른 속도로 흡수하게 하였고, 물적·자본 투자도 유도했다. 그래서 초등교육도 제대로 이수하지 못하는 빈곤국에서는 아직도 교육이 경제성장의 가장 중요한 토대이고 교육을 통해 인적자본을 쌓아 나가는 것이 분명한 개발경제학의 한 축이다. 인적자본론을 주장한 시어도어 슐츠는 ‘개발도상국의 경제 발전 연구’로 노벨상을 받은 학자다. 교육에 대한 국가재정은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투자 활동’이라 했다. 그는 교육을 통해 국민의 능력과 학력을 신장시키고, 이를 통해 개인은 계층 상승을 이루고, 국가는 생산성 증가를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확실히 한국 사회에는 이러한 신화가 압도적으로 지배했다. 경제적으로 가치 있는 지식·기능·능력을 교육이나 훈련을 통해 얻으면 개인과 나라의 역량은 늘어난다는 게 한국에서 불멸의 신화였다. 그렇다면 교육이 국가 전체적으로 성장에 득이 된다는 게 항상 성립하는 참인 명제일까.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나라의 교육은 마치 고인 물과 같아졌다. 학교는 점포로, 학생은 소비자로, 교사는 판매원으로 변해서 교육이라는 상품을 ‘과거 지향적으로’ 소비한다. 학교가 비판적 사고와 창의성을 지닌 학생을 길러내기보다는 규율과 시간 엄수, 매너리즘을 가르치는 장소라면 그래도 교육과 경제성장 간의 비례 관계가 성립할까. 공교육이 사회적, 경제적 변화나 혁신을 위한 매개체 역할을 할 수 없다면, 교육 수준과 경제 성장의 정비례 관계는 성립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교육 수준이 높으면 인적 자원이 좋기 때문에 고용이 원활하고 경제도 성장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반대일 수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업을 못한 소위 ‘청년 백수’가 넘쳐나고 있다. 중등교육 과정에서 직업 교육은 외면당하고 교육과 고용은 동떨어져 서로 유기적으로 돌아가지 않을 때도 있다. 언제부터인가 한국은 교육과 고용, 경제 성장이 따로 놀게 됐다. 교육과 경제 성장의 선순환 구조는 어떻게 복원해야 할지가 우리의 지상과제가 되고 있다.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인 랜트 프릿쳇은 2004년 [교육은 전부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가]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1960년에서 1987년에 걸쳐 여러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을 대상으로 교육과 경제 성장 간의 관계를 분석한 내용이다. 프릿쳇 교수는 이 논문을 통해, 교육 수준이 높아진다고 경제 성장이 빨라진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고 보았다. 스위스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산업화한 나라 중 하나이나, 대학 진학률은 선진국 중에서도 가장 낮은 편에 속한다.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다른 부자 나라 대학 진학률의 3분의 1에 지나지 않았다. 이를 통해 그는 부자 나라와 가난한 나라의 가장 큰 차이는 구성원 개인의 교육 수준이 얼마나 높은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교육에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각 개인을 잘 아울러서 높은 생산성을 지닌 집단으로 조직화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교육은 중요하지만, 고등교육과 같은 높은 교육 수준이 항상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한 나라가 번영할 수 있느냐의 여부는 개인의 교육 수준에 전적으로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생산성 높은 산업 활동에 개인들을 조직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하는 사회 전체의 능력이 중요하다. 미래의 성장 동력을 위해 창조적 인적 자본 육성에 집중하는 교육이 필요한 것이다. 조셉 스티글리츠 역시 교육의 이러한 역할에 주목을 하고 있다. 한국은 지금 4차 산업혁명의 기회와 도전에 직면해 있다. 4차 산업혁명은 1차 산업혁명(증기기관), 2차 산업혁명(전기), 3차 산업혁명(정보화)에 이어 도래할 제조업, 정보통신기술(ICT), 빅데이터, 사물인터넷(IoT) 등을 융합해 생산 경쟁력을 증진하는 차세대 산업혁명을 가리킨다. 농업혁명으로 인류는 만물의 영장이 되었고, 과학혁명으로 문명의 놀라운 발전을 이룩했다. 과학기술의 놀라운 발전은 인류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앞으로도 예측하기 어려운 영향을 미칠 것이 확실하다. 이러한 시대가 요구하는 교육은 모두가 똑같아지는 교육이 아니라, 다양성을 인정하는 교육이어야 한다. 오히려 획일적인 높은 교육열이 경쟁 비용을 상승시키고 노동 시장과 자원 배분을 왜곡시켜 경제 성장을 저해하는 문제가 생긴 점을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한다. 여기서 생산성 향상을 위해 ‘창조적 학습사회’ 구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조셉 스티글리츠를 불러 보자. 그의 이론을 통해 구태의 소비가 아닌 미래지향적 투자로서 교육의 방향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우선 그의 핵심 말을 들어 보자.
“국가와 기업 사이에 크고 꾸준한 차이가 존재하는 이유는 왜일까요? 바로 지식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선진국과 개도국을 갈라놓는 것은 자원의 격차가 아니라 지식의 격차입니다. 경제개발이 후진국에서 빠르게 발생하는 이유는 교육을 통해 시장의 비효율을 제거함으로써 자원을 효율적인 방향으로 투입해 생산성을 증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후로는 새로운 혁신을 통해서만 생산성을 향상할 수 있습니다. 지식은 국경이나 기업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이동하는 것은 아닙니다. 국가와 기업의 진보와 퇴보를 만드는 것이 바로 지식인데 지식과 학습을 생산하고 전파하는데 시장이 가장 효율적이라고 추정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시장이 비효율적일 수 있기 때문에 국가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창조적 학습사회란 기업들이 생산성 향상을 위해 빠르게 학습하도록 하는 사회를 말합니다. 정부는 이러한 학습의 이익이 극대화되도록 정책적 뒷받침을 제대로 해야 합니다.” 정부의 이러한 노력이 성공적일 경우 자원의 효율적 배분과 경제 성장, 나아가 우리 삶의 질적 향상이 가능하다는 게 스티글리츠의 주장이다.
그의 주장처럼 현대 경제의 성공이 혁신과 학습에 있다면, 정책이 어떻게 혁신의 속도를 향상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이해가 경제의 중심에 서야 한다. 그는 거의 모든 정부 정책이 학습의 관점에서 재조명돼야 한다며 네 가지를 특히 강조한다. 제대로 된 교육, 사회안전망, 법적 제도, 혁신 시스템이 바로 그것이다. 그에 의하면 교육과 관련해 젊은이에게 창의성과 바람직한 공부방법을 전수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긴 학교를 벗어나면 또 다른 사회의 삶이 우리를 기다린다. 현대인은 평생학습의 운명 속에서 자신을 부단히 개척하지 않으면 안 된다. 변화의 속도가 빨라지면서 학교에서 습득한 지식은 쉽게 낙후된다. 이제 교육은 정보의 바다에 접속해 정보를 캐내는 것에 있지 않다. 누구나 정보에 접근하는 것은 쉽다. 제대로 된 정보를 재빨리 입수해 남들보다 훌륭하게 평가하고 어떤 의미로 사용할 것인지에 대한 고심을 하는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이직률이 높아진 현실에서 개인은 기업이 제공하는 직업교육의 혜택을 온전히 누리지 못한다. 자연스레 학습의 부담은 개개인, 정부에게 지워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스티글리츠는 이렇게 주장한다. “영국 왕의 계보를 외우는 것도 중요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은 컴퓨터를 치면 나오잖아요.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가 요구하는 필수 지식을 습득하는 것입니다. 압도적인 수의 아프리카 시골지역의 아이들은 시골마을에서 살아갈 확률이 높습니다. 이들에게 도시의 직업에 필요한 지식을 제공하는 것보다는 아프리카 시골마을의 환경을 개선하는 방향에 교육의 초점을 맞춰야 하지요.” 과연 우리가 배우는 교육이 우리의 문제를 제대로 해결해 주고 있는지 반문해 보고 싶다.
그가 강조하는 창조적 학습사회를 위한 다른 세 요소를 분석해 보자. 사회안전망은 개천에서 용이 나는 시스템을, 법적 제도는 파산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와 기회를 주는 것을, 혁신 시스템은 기초연구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말한다. 기초연구 지원으로 과학 기술 진보를 위한 인센티브를 부여하고 사회 전체에 지식을 전파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스티글리츠는 누구든지 세상을 더욱 살기 좋게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를 위해서는 학습자가 사고의 혁신자, 식견 있는 낙관주의자, 통찰력과 너그러움을 지닌 유연한 인간이 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독창력과 창의성이 있어도 4차 산업혁명의 시대정신인 남과 어울려 협업하고 서로의 사고를 잘 연결하는 융합능력을 향유해야 성공한다는 주장과도 일맥상통한다. 스티글리츠의 말을 들어 보자.
“나는 시장경제에서 경쟁이 효율적이며 탐욕의 추구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인해 사회 후생으로 이어진다는 전통경제학의 관점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롭게 경제정책을 학습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난 사반세기 동안 경제개발 정책을 지배해온 워싱턴 컨센서스에 나는 반기를 들어왔습니다. 탈규제와 무역·금융·투자의 자유화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여전히 견지합니다. 우리는, 그리고 세계는 무엇보다 혁신경제를 구축하고 학습을 촉진하게 하는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창조적 학습사회에서 요구하는 학습자의 태도는 어떠해야 할까. 인생을 살면서 어떤 사람은 실패하고, 또 다른 사람은 성공한다. 무엇이 그들을 가를까. 핵심은 성공한 자는 성공하지 못한 동료보다 ‘성공 동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올림픽 정신과 같은 필승의 비전과 사명감, 목표의식을 가지고 자기가 처한 위치에서 후회 없는 노력을 다해야 한다. 인류사회에 공헌하고 국가 번영과 자기의 행복을 위해 치밀한 계획과 전략을 세워 땀과 눈물의 값진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조셉 스티글리츠는 “신념이라는 인식은 행동이라는 선택에 영향을 준다”고 강조한다. 무기력하고, 비생산적이며, 불공정하게 대우를 받는다는 인식은 사람들의 행동에 잘못된 영향을 준다. 국가는 국민이 이런 잘못된 인식을 가지지 않도록 정책을 만들어 나가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 ‘보이는 손’에 대한 그의 강한 믿음이다. 창조적 학습사회에서 인류의 미래는 인간에게 달려 있고, 인간의 미래는 전인 교육에 달려 있다고 본다. ‘생생하게 바라보고 열정적으로 바라며 깊이 믿고 실천하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반드시 실현 된다’는 믿음과 성공철학을 가진 인간은 승리한다. 다만 창조적 학습사회에서 주요 기업은 천재급 인재를 단순히 능력 하나만으로 뽑지는 않는다. 목표를 향한 열정적인 헌신, 위험을 감수하는 용기, 가치 있는 꿈을 최상의 방법으로 실현할 수 있는 지적·도덕적 성품을 골고루 갖추어야 한다. 그래서 창조적 학습사회에 걸 맞는 제대로 된 공부 즉, 학습에 대한 정의를 공부의 영어 철자 ‘STUDY’로 풀어 보기로 하자. 우선 ‘작은 성공(Small Success)’의 관리다. 작은 성공이 큰 성공으로 이어지도록 격려해 학습에 집중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음으로 ‘신뢰의 시간(Trusty Time)’이다. 믿음이 잉태되어 보내는 시간은 역경의 부담을 줄이고 즐거운 마음으로 효율적인 학습을 하게 한다. 그러니 먼저 자신을 믿어라. 역경이 쌓여 경력이 된다. 그 경력은 인생을 판단하는 멋진 준거가 된다. 다음은 ‘철저한 독창성(Utter unique ness)’이다. 남들과 똑같이 사고한다면 그렇고 그런 인물 중 하나일 뿐이다. 남들과 다른 자신만의 독창성을 갖추기 위해 경쟁력을 키우자. 그 다음은 ‘깊은 헌신(Deep Dedication)’이다.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 재능을 키우는 의식적인 연습이 없다면 성공은 멀다. 노력은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되새기자. 열정 페이만을 강요하는 것은 옳지 않지만 열정이 중요한 것은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그래 배우자(Yes and Yearning to Learn)’는 태도이다. 배움에 대한 목마름으로 적극적인 학습 태도를 가져야 한다. 공부란 몸과 마음의 근력을 키워나가는 과정이다. 불확실성이 일반화되고 로봇이 인간을 대체하는 사회가 온다고 하더라도 심신의 조화된 근력으로 무장된 사람은 겁날 게 없다. 타인에 대한 배려가 약하면 너무 딱딱해 부러지기 쉬운 존재가 된다. 그래서인지 갑자기 메마른 대지에 도깨비가 뿌린 촉촉한 사랑 비를 노래하고 싶어진다. 질량의 크기는 부피와 비례하지 않는다. 제비꽃같이 조그마한 그 계집애가, 꽃잎같이 하늘거리는 그 계집애가 지구보다 더 큰 질량으로 나를 끌어당긴다. 순간, 나는 뉴턴의 사과처럼 사정없이 그녀에게로 굴러 떨어졌다. ‘쿵’ 소리를 내며, ‘쿵쿵’ 소리를 내며 심장이 하늘에서 땅까지 아찔한 진자 운동을 계속했다. 첫사랑이었다. 창조적 학습 사회에서 영웅은 사랑의 물리학을 아는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자신의 과업에 열정을 갖고 노력하는 자를 일컫는다.
조원경 - 연세대(경제학과)와 미국 미시간주립대(파이낸스 석사)를 졸업했다. 행시(재경직) 34회 출신으로 재무부·재정경제원·재정경제부·기획재정부에서 관세, 물가, 복지, 소비자, 국제금융, 통상, 대외경제 분야에서 일했다. 미주개발은행 이사실에서 한국 대표로 근무했다. 현재 기획재정부 국제금융심의관으로 근무하고 있다. 저서로는 [명작의 경제] [법정에 선 경제학자들] [식탁 위의 경제학자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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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드라마 ‘도깨비’가 장안의 화제다. 전래 동화 도깨비에서 모티브를 얻은 드라마는 작가의 풍부한 상상력으로 안방극장에 흥미와 감동을 주고 있다. 우리나라 도깨비는 무서운 모습부터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엿보이는 장난스러운 모습까지 다양하다. 관촉사 도깨비처럼 뿔이 없는 것도 있고, 강진 사문안 석조상은 뿔이 있으며 방망이까지 들고 있다. 도깨비는 상황에 따라 변화무쌍하게 변신하고 창의성을 발휘하는가 하면,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면서 인간과 어울리는 포용성까지 갖춰 풍부한 이야기 소재가 되었다. 도깨비가 도둑과 악귀를 물리치고, 술에 취한 사람과는 씨름을 하거나 노래를 부르며 같이 놀아 주기도 한다.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는가 하면 어른의 넘치는 분을 삭이고 응어리진 한을 풀어주기도 한다. 도깨비는 무섭기도 하지만 귀여운 케릭터이기도 하다. 그런 도깨비의 캐릭터에 다채로운 특성을 입혀서 ‘쓸쓸하고 찬란하神-도깨비’ 드라마가 탄생했다. 사람들은 작가의 창의성에 열광한다. 원작은 따로 없지만 많은 설화와 역사 속 이야기들이 원작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했을 것 같다. 하나의 드라마가 수출도 하고 문화 상품으로서 수많은 부가가치를 만들어 냈다. 한 사람의 천재가 수백 만 명을 먹여 살리듯이 드라마 한편이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저성장, 양극화로 신음하는 세계경제에 도깨비 방망이를 든 신화적 영웅이 나타나 지구를 구해주면 좋으련만….
학교는 점포, 학생은 소비자, 교사는 판매원
“그대의 삶은 그대가 바꾼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그대의 삶을 항상 응원했다.”
그의 말은 교육이 자신의 삶을 제대로 개척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믿음에서 나온 것 같다. 사실 다른 도깨비들은 획일적인 한국 교육과 처절하게 정답을 외우는 학생들을 바라보며 또 다른 3행시를 지어 비웃을지도 모르겠다. 요즈음 ‘엄마 매니저’의 손바닥 안에서 하루 24시간을 감시받는 한국 학생들이 스스로 삶의 주인의식을 가지지 않은 경우도 있다. 누군가는 회사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엄마를 찾으니 도깨비가 아연실색을 한다. ‘도무지 한국 교육을 이해할 수 없어요. 깨달음이라는 단어는 서랍장에 꽁꽁 숨어 있고 한자라도 틀리면 깨진다고 생각해서인지 학생들은 소심하고 다양성으로 무장한 기(氣)가 전혀 느껴지지 않아요.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을 공장에서 찍어내듯 대량생산하는 게 학교 같아요.’
각 개인을 생산성 높은 집단으로 조직화하려면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나라의 교육은 마치 고인 물과 같아졌다. 학교는 점포로, 학생은 소비자로, 교사는 판매원으로 변해서 교육이라는 상품을 ‘과거 지향적으로’ 소비한다. 학교가 비판적 사고와 창의성을 지닌 학생을 길러내기보다는 규율과 시간 엄수, 매너리즘을 가르치는 장소라면 그래도 교육과 경제성장 간의 비례 관계가 성립할까. 공교육이 사회적, 경제적 변화나 혁신을 위한 매개체 역할을 할 수 없다면, 교육 수준과 경제 성장의 정비례 관계는 성립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교육 수준이 높으면 인적 자원이 좋기 때문에 고용이 원활하고 경제도 성장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반대일 수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업을 못한 소위 ‘청년 백수’가 넘쳐나고 있다. 중등교육 과정에서 직업 교육은 외면당하고 교육과 고용은 동떨어져 서로 유기적으로 돌아가지 않을 때도 있다. 언제부터인가 한국은 교육과 고용, 경제 성장이 따로 놀게 됐다. 교육과 경제 성장의 선순환 구조는 어떻게 복원해야 할지가 우리의 지상과제가 되고 있다.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인 랜트 프릿쳇은 2004년 [교육은 전부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가]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1960년에서 1987년에 걸쳐 여러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을 대상으로 교육과 경제 성장 간의 관계를 분석한 내용이다. 프릿쳇 교수는 이 논문을 통해, 교육 수준이 높아진다고 경제 성장이 빨라진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고 보았다. 스위스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산업화한 나라 중 하나이나, 대학 진학률은 선진국 중에서도 가장 낮은 편에 속한다.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다른 부자 나라 대학 진학률의 3분의 1에 지나지 않았다. 이를 통해 그는 부자 나라와 가난한 나라의 가장 큰 차이는 구성원 개인의 교육 수준이 얼마나 높은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교육에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각 개인을 잘 아울러서 높은 생산성을 지닌 집단으로 조직화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교육은 중요하지만, 고등교육과 같은 높은 교육 수준이 항상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한 나라가 번영할 수 있느냐의 여부는 개인의 교육 수준에 전적으로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생산성 높은 산업 활동에 개인들을 조직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하는 사회 전체의 능력이 중요하다. 미래의 성장 동력을 위해 창조적 인적 자본 육성에 집중하는 교육이 필요한 것이다. 조셉 스티글리츠 역시 교육의 이러한 역할에 주목을 하고 있다.
4차 산업의 영웅은 누가 될 것인가?
“국가와 기업 사이에 크고 꾸준한 차이가 존재하는 이유는 왜일까요? 바로 지식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선진국과 개도국을 갈라놓는 것은 자원의 격차가 아니라 지식의 격차입니다. 경제개발이 후진국에서 빠르게 발생하는 이유는 교육을 통해 시장의 비효율을 제거함으로써 자원을 효율적인 방향으로 투입해 생산성을 증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후로는 새로운 혁신을 통해서만 생산성을 향상할 수 있습니다. 지식은 국경이나 기업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이동하는 것은 아닙니다. 국가와 기업의 진보와 퇴보를 만드는 것이 바로 지식인데 지식과 학습을 생산하고 전파하는데 시장이 가장 효율적이라고 추정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시장이 비효율적일 수 있기 때문에 국가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창조적 학습사회란 기업들이 생산성 향상을 위해 빠르게 학습하도록 하는 사회를 말합니다. 정부는 이러한 학습의 이익이 극대화되도록 정책적 뒷받침을 제대로 해야 합니다.” 정부의 이러한 노력이 성공적일 경우 자원의 효율적 배분과 경제 성장, 나아가 우리 삶의 질적 향상이 가능하다는 게 스티글리츠의 주장이다.
그의 주장처럼 현대 경제의 성공이 혁신과 학습에 있다면, 정책이 어떻게 혁신의 속도를 향상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이해가 경제의 중심에 서야 한다. 그는 거의 모든 정부 정책이 학습의 관점에서 재조명돼야 한다며 네 가지를 특히 강조한다. 제대로 된 교육, 사회안전망, 법적 제도, 혁신 시스템이 바로 그것이다. 그에 의하면 교육과 관련해 젊은이에게 창의성과 바람직한 공부방법을 전수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긴 학교를 벗어나면 또 다른 사회의 삶이 우리를 기다린다. 현대인은 평생학습의 운명 속에서 자신을 부단히 개척하지 않으면 안 된다. 변화의 속도가 빨라지면서 학교에서 습득한 지식은 쉽게 낙후된다. 이제 교육은 정보의 바다에 접속해 정보를 캐내는 것에 있지 않다. 누구나 정보에 접근하는 것은 쉽다. 제대로 된 정보를 재빨리 입수해 남들보다 훌륭하게 평가하고 어떤 의미로 사용할 것인지에 대한 고심을 하는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이직률이 높아진 현실에서 개인은 기업이 제공하는 직업교육의 혜택을 온전히 누리지 못한다. 자연스레 학습의 부담은 개개인, 정부에게 지워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스티글리츠는 이렇게 주장한다.
창조적 학습사회에서 필요한 것은 신념
그가 강조하는 창조적 학습사회를 위한 다른 세 요소를 분석해 보자. 사회안전망은 개천에서 용이 나는 시스템을, 법적 제도는 파산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와 기회를 주는 것을, 혁신 시스템은 기초연구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말한다. 기초연구 지원으로 과학 기술 진보를 위한 인센티브를 부여하고 사회 전체에 지식을 전파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스티글리츠는 누구든지 세상을 더욱 살기 좋게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를 위해서는 학습자가 사고의 혁신자, 식견 있는 낙관주의자, 통찰력과 너그러움을 지닌 유연한 인간이 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독창력과 창의성이 있어도 4차 산업혁명의 시대정신인 남과 어울려 협업하고 서로의 사고를 잘 연결하는 융합능력을 향유해야 성공한다는 주장과도 일맥상통한다. 스티글리츠의 말을 들어 보자.
“나는 시장경제에서 경쟁이 효율적이며 탐욕의 추구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인해 사회 후생으로 이어진다는 전통경제학의 관점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롭게 경제정책을 학습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난 사반세기 동안 경제개발 정책을 지배해온 워싱턴 컨센서스에 나는 반기를 들어왔습니다. 탈규제와 무역·금융·투자의 자유화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여전히 견지합니다. 우리는, 그리고 세계는 무엇보다 혁신경제를 구축하고 학습을 촉진하게 하는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창조적 학습사회에서 요구하는 학습자의 태도는 어떠해야 할까. 인생을 살면서 어떤 사람은 실패하고, 또 다른 사람은 성공한다. 무엇이 그들을 가를까. 핵심은 성공한 자는 성공하지 못한 동료보다 ‘성공 동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올림픽 정신과 같은 필승의 비전과 사명감, 목표의식을 가지고 자기가 처한 위치에서 후회 없는 노력을 다해야 한다. 인류사회에 공헌하고 국가 번영과 자기의 행복을 위해 치밀한 계획과 전략을 세워 땀과 눈물의 값진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조셉 스티글리츠는 “신념이라는 인식은 행동이라는 선택에 영향을 준다”고 강조한다. 무기력하고, 비생산적이며, 불공정하게 대우를 받는다는 인식은 사람들의 행동에 잘못된 영향을 준다. 국가는 국민이 이런 잘못된 인식을 가지지 않도록 정책을 만들어 나가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 ‘보이는 손’에 대한 그의 강한 믿음이다. 창조적 학습사회에서 인류의 미래는 인간에게 달려 있고, 인간의 미래는 전인 교육에 달려 있다고 본다.
S·T·U·D·Y로 풀어본 창조적 학습
조원경 - 연세대(경제학과)와 미국 미시간주립대(파이낸스 석사)를 졸업했다. 행시(재경직) 34회 출신으로 재무부·재정경제원·재정경제부·기획재정부에서 관세, 물가, 복지, 소비자, 국제금융, 통상, 대외경제 분야에서 일했다. 미주개발은행 이사실에서 한국 대표로 근무했다. 현재 기획재정부 국제금융심의관으로 근무하고 있다. 저서로는 [명작의 경제] [법정에 선 경제학자들] [식탁 위의 경제학자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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