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태의 보스와 참모의 관계학(26) 그림자 참모 ‘상선(尙膳)’] 때론 왕까지 흔든 ‘문고리 권력’
[김준태의 보스와 참모의 관계학(26) 그림자 참모 ‘상선(尙膳)’] 때론 왕까지 흔든 ‘문고리 권력’
상선의 이름 드러난 시대는 불행 … 정변에 개입하거나 간언하다 목숨 잃기도
촉한의 황제 유비는 자신의 수석참모인 제갈량을 두고 “나에게 공명(孔明)이 있음은 물고기에게 물이 있는 것과 같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수어지교(水魚之交)라는 고사성어를 유래한 이 말은 보스와 참모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물고기는 물이 없으면 살지 못하고, 물은 물고기 없이는 의미를 실현할 수 없듯이, 보스와 참모는 진정한 한 팀이 될 때 비로소 빛을 발한다. 이 연재에선 한 팀을 이루는 바로 그 과정에 주목한다. 어떻게 보스를 선택하고 참모를 선택하는지,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으며 서로에게 도움이 되었는지 역사 속의 사례로 살펴본다. 환관(宦官)이라 불린 사람들이 있다. 거세된 남자로 궁궐에서 살았던 이들은 수라간을 감독하고 각 전각을 경비하며 청소 등 궁궐의 시설 유지·보수를 담당했다. 흔히 같은 의미로 ‘내시(內侍)’라는 호칭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엄밀히 말하면 이 둘은 다르다. ‘내시’란 측근에서 모시면서 왕이 아무런 불편 없이 생활하고 정무에 집중할 수 있도록 수발을 드는 관원이다. 이 내시를 주로 환관이 맡았기 때문에 동일시된 것이다. 조선시대의 경우에는 왕조 내내 환관이 내시를 전담한 바 있다.
이처럼 환관이 내시가 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무엇보다 궐에서 살 수 있는 ‘남자’는 임금과 세자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왕자라 해도 혼인한 후에는 궁궐 밖으로 나가야 했다) 궁궐에는 왕비·후궁·상궁·궁녀 등 수많은 여인이 살고 있는데, 따라서 성적인 잡음을 예방하면서 이를 관리하기 위해서는 다름 아닌 환관이 적임자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 환관들은 거세를 당한 데다 출신 성분도 미천했기 때문에 다른 신하들로부터 천시를 받았다. 조선조에 환관들이 소속된 기관인 내시부(內侍府)는 그 장관인 내시부사, 즉 ‘상선(尙膳)’이 종2품이었다. 초기에는 ‘판내시부사’로 정2품으로 정3품 대사간이 장관으로 있는 사간원보다 격이 높았다. 하지만 내시부의 관직은 정직(正職, 양반 선비만 맡을 수 있는 문무 관직)이 아니라며 잡직으로 분류되었고, 품계에 따른 대우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여기에는 환관을 견제하는 의도도 깔려 있었는데, 중국과 우리나라를 막론하고 환관들의 전횡으로 나라가 혼란에 빠진 경험이 많았기 때문이다. 진시황의 유언을 조작해 황위 계승자를 바꿔치기한 조고, 후한(後漢)을 쇠락의 길로 이끈 십상시(十常侍), 비밀정보기관을 장악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명나라의 위충현, 고려 의종 때의 환관으로 부정부패의 대명사였던 백선연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러한 상황이 재발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의도적으로 환관을 격하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귀족이나 사대부도 아니고, 거세까지 한 환관이 어떻게 권력을 갖게 되고 전횡을 일삼았다는 말일까. 궁궐의 자질구레한 일을 담당할 뿐인 환관이 어떻게 국정을 농단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요즘에도 자주 등장하는 말처럼 환관이 ‘문고리 권력’을 행사하기에 좋은 위치였기 때문이다. 이른바 ‘문고리 권력’이란 최고 권력자와 연결되는 통로에 자리 잡고 정보와 면담기회 등을 통제하며 실세로 자리 잡은 사람을 말한다. 비서실과 같이 보스와 거리가 가깝고 대면을 자주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왕조시대에는 매일, 밤낮으로, 곁에서 임금을 모신다는 점에서 환관이 여기에 해당했던 것이다. 환관 중에서도 특히 임금에 대한 시중과 보좌를 총괄하는 내시부의 장인 ‘상선’은 임금과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다. 단순히 물리적인 거리를 떠나서 여러 임금을 모시며 축적한 경험과 연륜, 오랜 시간 임금과 함께 하며 쌓은 정과 신뢰는 그를 임금에게 없어서는 안 될 참모로 만든다. 궐 안의 환관들을 지휘하며 궁중의 내밀한 정보를 장악한 힘도 그 자체로 큰 영향력이 된다. 상선의 힘과 역할은 결코 가볍지 않은 것으로, 그가 만약 마음을 나쁘게 먹는다면 조정을 어지럽히기에 충분한 것이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이 ‘상선(尙膳)’은 내시부사의 임무를 맡는 1명과 수라간의 책임자 1명, 총 2명인데, 종2품 고위직임에도 그 직책을 맡았던 사람들의 이름은 거의 전해오지 않는다. 원래 자신을 드러내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기도 했지만, 실록의 편찬자들이 거론할 가치가 없다고 여긴 것이다. 간혹 실록에 이름이 등장한다고 해도 그것은 탄핵이나 징계를 당하는 등 좋지 못한 일로 인해서였다. 특히 명종 때는 외척과 결탁한 환관이 방종한 일이 잦았던 것 같다. ‘상선 박간이 신분에 넘치는 옷을 입고서도 조금도 꺼려하는 바가 없었다’(명종 8년 3월 21일)거나 ‘상선 남세경이 매우 불경스럽다’(명종15년 6월 19일)와 같은 식이다.
상선 중에서 실록에 여러 차례 이름이 등장하는 사람으로는 오로지 세 명만이 발견되는데, 우선 같은 시기에 활동한 환관 전균과 엄자치가 있다. 세종부터 성종까지 모두 여섯 임금을 섬긴 전균은 두 번이나 공신에 봉해졌으며, 종1품 숭록대부에 하음군(河陰君)이라는 군호까지 받았다. 이는 수양대군의 즉위 과정에 공이 컸기 때문으로, 상선으로서 문종과 단종을 모시면서 임금의 동향과 궐 안의 움직임 등 각종 정보를 수양대군에게 전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전균보다 직위가 높았던 엄자치도 수양대군이 김종서를 제거한 계유정난 때 세운 공을 인정받아 2등 공신에 봉해졌다(단종1년 11월 4일).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수양대군에 대항한 금성대군에게 협조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관노로 전락했고, 이내 목숨을 잃었다(단종3년 3월 27일).
이 밖에 연산군 때의 상선 김처선은 극간을 한 충신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연산군의 폐정과 음란함이 도를 지나치자 그는 “늙은 이 놈이 네 분의 임금을 섬겼고 경서와 사서를 대강 읽었습니다만, 고금에 전하와 같이 행동한 군주는 없었습니다”라며 면전에서 임금의 잘못을 강하게 비판했다고 한다. 그러자 진노한 연산군이 활을 쏘아서 맞혔는데도(연산군이 직접 그의 팔다리를 잘라내었다는 실록 기록도 있다) 김처선은 “늙은 내시가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겠습니까. 다만 전하께서 오래도록 보위에 계시지 못할 것 같아 한스러울 뿐입니다”라며 간언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 김처선은 죽음을 맞았는데, 연산군은 감히 임금을 꾸짖었다며 그의 재산을 몰수하고 그의 집을 연못으로 만들어버렸다(연산군11년 4월 1일). 이 뿐만이 아니다. 부모의 무덤을 뭉개어버렸으며(4월 2일) ‘내시가 감히 임금을 범했으니 부끄러워 원통하고 분하여 바닷물에 씻어도 이 한이 남을 것이다’라는 시를 지었고(4월 3일), 김처선과 이름이 같은 사람은 모두 개명하게 하였으며(6월 16일) 모든 문서에 김처선의 ‘처(處)’자를 쓰지 못하게 하였다(7월 19일). 심지어 24절기 중 하나인 ‘처서(處暑)’도 ‘조서(徂暑)’로 바꿔버렸을 정도다(7월 14일). 광기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반응이긴 하지만 아무튼 김처선에 대한 연산군의 분노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준다. 그런데 상선이 내시로서 본분을 지켰는지 아닌지의 여부를 떠나서, 위의 사례들이 보여주는 공통점은 상선이 역사에 이름을 드러내는 시대는 불행했다는 점이다. 그림자처럼 묵묵히 임금을 시종해야 할 상선이 불경스럽다는 비판을 받고, 정변에 개입해 공신의 작위를 받고, 임금에게 간언하다 목숨을 잃고 하는 것은 그 시대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는 바로 오늘날에 적용되는 교훈이기도 하다. 보좌·수행·일정·서무를 담당하는 비서가 권한을 넘어서고, 전횡을 휘두르는 조짐이 보인다면 이는 그 사람의 잘못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조직이 건강하게 운영되지 않고 있다는 뜻이고, 보스의 리더십에 문제가 있다는 뜻임을 명심해야 한다.
※ 김준태 -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와 동양철학문화연구소를 거치며 한국의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사상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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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한의 황제 유비는 자신의 수석참모인 제갈량을 두고 “나에게 공명(孔明)이 있음은 물고기에게 물이 있는 것과 같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수어지교(水魚之交)라는 고사성어를 유래한 이 말은 보스와 참모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물고기는 물이 없으면 살지 못하고, 물은 물고기 없이는 의미를 실현할 수 없듯이, 보스와 참모는 진정한 한 팀이 될 때 비로소 빛을 발한다. 이 연재에선 한 팀을 이루는 바로 그 과정에 주목한다. 어떻게 보스를 선택하고 참모를 선택하는지,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으며 서로에게 도움이 되었는지 역사 속의 사례로 살펴본다. 환관(宦官)이라 불린 사람들이 있다. 거세된 남자로 궁궐에서 살았던 이들은 수라간을 감독하고 각 전각을 경비하며 청소 등 궁궐의 시설 유지·보수를 담당했다. 흔히 같은 의미로 ‘내시(內侍)’라는 호칭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엄밀히 말하면 이 둘은 다르다. ‘내시’란 측근에서 모시면서 왕이 아무런 불편 없이 생활하고 정무에 집중할 수 있도록 수발을 드는 관원이다. 이 내시를 주로 환관이 맡았기 때문에 동일시된 것이다. 조선시대의 경우에는 왕조 내내 환관이 내시를 전담한 바 있다.
이처럼 환관이 내시가 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무엇보다 궐에서 살 수 있는 ‘남자’는 임금과 세자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왕자라 해도 혼인한 후에는 궁궐 밖으로 나가야 했다) 궁궐에는 왕비·후궁·상궁·궁녀 등 수많은 여인이 살고 있는데, 따라서 성적인 잡음을 예방하면서 이를 관리하기 위해서는 다름 아닌 환관이 적임자였던 것이다.
환관의 전횡으로 나라가 혼란에 빠진 경험 많아
여기에는 환관을 견제하는 의도도 깔려 있었는데, 중국과 우리나라를 막론하고 환관들의 전횡으로 나라가 혼란에 빠진 경험이 많았기 때문이다. 진시황의 유언을 조작해 황위 계승자를 바꿔치기한 조고, 후한(後漢)을 쇠락의 길로 이끈 십상시(十常侍), 비밀정보기관을 장악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명나라의 위충현, 고려 의종 때의 환관으로 부정부패의 대명사였던 백선연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러한 상황이 재발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의도적으로 환관을 격하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귀족이나 사대부도 아니고, 거세까지 한 환관이 어떻게 권력을 갖게 되고 전횡을 일삼았다는 말일까. 궁궐의 자질구레한 일을 담당할 뿐인 환관이 어떻게 국정을 농단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요즘에도 자주 등장하는 말처럼 환관이 ‘문고리 권력’을 행사하기에 좋은 위치였기 때문이다. 이른바 ‘문고리 권력’이란 최고 권력자와 연결되는 통로에 자리 잡고 정보와 면담기회 등을 통제하며 실세로 자리 잡은 사람을 말한다. 비서실과 같이 보스와 거리가 가깝고 대면을 자주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왕조시대에는 매일, 밤낮으로, 곁에서 임금을 모신다는 점에서 환관이 여기에 해당했던 것이다. 환관 중에서도 특히 임금에 대한 시중과 보좌를 총괄하는 내시부의 장인 ‘상선’은 임금과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다. 단순히 물리적인 거리를 떠나서 여러 임금을 모시며 축적한 경험과 연륜, 오랜 시간 임금과 함께 하며 쌓은 정과 신뢰는 그를 임금에게 없어서는 안 될 참모로 만든다. 궐 안의 환관들을 지휘하며 궁중의 내밀한 정보를 장악한 힘도 그 자체로 큰 영향력이 된다. 상선의 힘과 역할은 결코 가볍지 않은 것으로, 그가 만약 마음을 나쁘게 먹는다면 조정을 어지럽히기에 충분한 것이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이 ‘상선(尙膳)’은 내시부사의 임무를 맡는 1명과 수라간의 책임자 1명, 총 2명인데, 종2품 고위직임에도 그 직책을 맡았던 사람들의 이름은 거의 전해오지 않는다. 원래 자신을 드러내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기도 했지만, 실록의 편찬자들이 거론할 가치가 없다고 여긴 것이다. 간혹 실록에 이름이 등장한다고 해도 그것은 탄핵이나 징계를 당하는 등 좋지 못한 일로 인해서였다. 특히 명종 때는 외척과 결탁한 환관이 방종한 일이 잦았던 것 같다. ‘상선 박간이 신분에 넘치는 옷을 입고서도 조금도 꺼려하는 바가 없었다’(명종 8년 3월 21일)거나 ‘상선 남세경이 매우 불경스럽다’(명종15년 6월 19일)와 같은 식이다.
상선 중에서 실록에 여러 차례 이름이 등장하는 사람으로는 오로지 세 명만이 발견되는데, 우선 같은 시기에 활동한 환관 전균과 엄자치가 있다. 세종부터 성종까지 모두 여섯 임금을 섬긴 전균은 두 번이나 공신에 봉해졌으며, 종1품 숭록대부에 하음군(河陰君)이라는 군호까지 받았다. 이는 수양대군의 즉위 과정에 공이 컸기 때문으로, 상선으로서 문종과 단종을 모시면서 임금의 동향과 궐 안의 움직임 등 각종 정보를 수양대군에게 전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전균보다 직위가 높았던 엄자치도 수양대군이 김종서를 제거한 계유정난 때 세운 공을 인정받아 2등 공신에 봉해졌다(단종1년 11월 4일).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수양대군에 대항한 금성대군에게 협조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관노로 전락했고, 이내 목숨을 잃었다(단종3년 3월 27일).
이 밖에 연산군 때의 상선 김처선은 극간을 한 충신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연산군의 폐정과 음란함이 도를 지나치자 그는 “늙은 이 놈이 네 분의 임금을 섬겼고 경서와 사서를 대강 읽었습니다만, 고금에 전하와 같이 행동한 군주는 없었습니다”라며 면전에서 임금의 잘못을 강하게 비판했다고 한다. 그러자 진노한 연산군이 활을 쏘아서 맞혔는데도(연산군이 직접 그의 팔다리를 잘라내었다는 실록 기록도 있다) 김처선은 “늙은 내시가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겠습니까. 다만 전하께서 오래도록 보위에 계시지 못할 것 같아 한스러울 뿐입니다”라며 간언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 김처선은 죽음을 맞았는데, 연산군은 감히 임금을 꾸짖었다며 그의 재산을 몰수하고 그의 집을 연못으로 만들어버렸다(연산군11년 4월 1일). 이 뿐만이 아니다. 부모의 무덤을 뭉개어버렸으며(4월 2일) ‘내시가 감히 임금을 범했으니 부끄러워 원통하고 분하여 바닷물에 씻어도 이 한이 남을 것이다’라는 시를 지었고(4월 3일), 김처선과 이름이 같은 사람은 모두 개명하게 하였으며(6월 16일) 모든 문서에 김처선의 ‘처(處)’자를 쓰지 못하게 하였다(7월 19일). 심지어 24절기 중 하나인 ‘처서(處暑)’도 ‘조서(徂暑)’로 바꿔버렸을 정도다(7월 14일). 광기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반응이긴 하지만 아무튼 김처선에 대한 연산군의 분노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준다.
연산군의 폐정에 극간한 충신 김처선
※ 김준태 -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와 동양철학문화연구소를 거치며 한국의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사상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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