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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을 기억하는 스무 가지 방식(15) 권력구조] 의원내각제였다면 외환위기 막았을까

[1997년을 기억하는 스무 가지 방식(15) 권력구조] 의원내각제였다면 외환위기 막았을까

YS 정부, 집권 말기에 식물상태 … 의원내각제와 더불어 더 나은 대통령제 고민도 필요
강경식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은 1997년 10월 22일 과천정부종합청사 대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기아자동차와 아시아자동차에 대해 법정관리를 신청한 후 기아자동차의 공기업화와 아시아자동차의 제3자 매각을 내용으로 하는 기아 정상화 방안을 발표했다.
“끝으로 정치개혁과 관련된 문제다. 퇴임 후 ‘어떻게 했더라면 우리나라가 외환위기를 겪지 않고 갈 수 있었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생각하는 과정에서 ‘만일 의원내각제였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가상을 해보게 되었다. 그랬더라면 1997년 초, 한보 부도로 정부에 대한 지지가 급락했을 때, 총선거를 치르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1997년 3월이나 4월에는 새 정권이 들어서서 집권 초기의 열정을 가지고 구조개혁을 본격적으로 추진했을 것이다. 만약 그랬더라면 환란을 겪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강경식 전 경제부총리는 책 [강경식의 환란일기]에서 이런 ‘역사의 가정’을 던졌다. 당시 정치 상황은 누적된 문제를 해결하기에 여러모로 최악이었다. 김영삼 대통령의 지지율은 집권 말기인 1997년 들어 급락했다. 그 해 1월 한보그룹이 부도를 냈다. 한보그룹의 로비를 받아 금융권이 한보에 특혜 대출을 해주게 했다는 혐의로 당시 정부의 실세를 포함해 다수의 정치인들이 검찰 수사를 받았다. 김영삼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가 한보 특혜융자의 배후로 지목되며 구속됐다. 대통령의 최측근이던 홍인길 의원도 구속됐다. 김영삼 대통령은 ‘한보 게이트’를 거치며 ‘식물 대통령’이라는 말을 들었다. 김영삼 정부는 레임덕 단계를 지나 ‘식물 정권’으로 전락했다. 권력의 무게중심은 유력 대선주자 이회창 신한국당 총재 쪽으로 이동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11월에 신한국당을 탈당했다.
 외환위기 직전 대선주자들 포퓰리즘적 태도
한보그룹 부도 및 특혜금융 의혹사건과 관련, 검찰의 조사를 받던 정태수 한보그룹 총회장이 1997년 1월 31일 밤 구속수감되고 있다.
정권 말기이자 대통령 선거가 치러지는 해였다. 각계의 요구가 분출하는 시기였다. 기아자동차 노조는 경영진과 연대해 구체제 수호에 나섰다. 금융감독기구 통합 등이 주요 내용인 금융개혁법에는 한국은행이 반발했다. 기아차 구조조정과 금융개혁법 처리는 해외에서 한국 정부가 문제해결 능력이 있는지 판단할 가늠자였다.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킨 이들 문제를 풀어낸다면 외화 유동성 부족은 어렵지 않게 해소될 수 있었다. 당시 외화 유동성 감소의 큰 요인은 한국 경제에 대한 대외신인도의 저하였기 때문이다.

식물 정권이었지만 정부의 정책 책임자들은 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여당은 물론 야당도 책임 있는 자세를 보이지 않았다. 대선주자들과 정치권은 한국 경제보다 대선에서 행사될 표를 더 의식해 포퓰리즘적인 태도를 취했다. 기아차 법정관리는 100일이나 지연됐고 금융개혁법은 국회 통과가 무산됐다. 기아차 처리 지연에는 언론도 한몫했다. 일부 언론인과 언론매체는 ‘기아차는 국민기업’이라는 기아차 노조와 경영진의 논리에 부화뇌동하며 법정관리를 가로막았다.

강 전 부총리는 ‘만일 의원내각제였다면’이라는 역사의 가정을 했다. 그랬다면 그가 추정한 대로 1997년 봄에 새 정권이 들어서서 구조개혁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을까? 외환위기와 파국을 피할 수 있었을까? 가능했으리라고 본다. 새로 출범한 정부는 식물 정권이 아니라 투표를 통해 국민의 지지를 받은 정권으로 과제를 추진해나갔을 것이다. 의원내각제였다면 1997년 한국에서처럼 국회가 행정부의 노력을 방관하는 ‘직무유기’는 벌어지지 않았을 듯하다. 의원내각제에서는 입법부와 행정부가 긴밀하게 공조하기 때문이다. 이 공조는 권력구조에서 비롯된다. 의원내각제에서는 선거를 통해 다수 의석을 확보한 정당이 수상을 비롯한 내각 구성권을 가지고 행정부를 주도한다.

강 전 부총리는 책에서 “그동안에는 대통령제가 되어야 임기 동안 안정적으로 국정을 충실하게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해왔다”며 “그런데 대통령제의 문제는, 헌법에서 아무리 임기를 보장해도 국민의 신임을 잃으면 국정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게 된다는 데 있다”고 지적했다.
 사회 변화와 현재 대통령제의 한계
지금까지의 논의를 요약하면, 대통령제는 국내외의 변화에 신속하게 대응하는 데 적합하지 않다는 취약점이 외환위기를 통해 극명하게 드러났다. 국내외 변화는 정권에 대한 지지율 붕괴나 대내외적 요인이 복합된 난제의 대두 등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럴 경우 의원내각제에서는 총리가 내각과 함께 물러나거나 의회를 해산하고 총선을 통해 내각이 다시 구성되도록 한다. 따라서 국정 수행력이 상실된 후에도 임기를 지키는 대통령제와 달리 의원내각제는 책임정치를 신속하게 구현하는 것이다. 나아가 의원내각제는 급변하는 국내외 환경에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다.

외환위기 사례를 통해 대통령제를 기반으로 하는 한국의 국가지배구조의 한계로 논의를 확장할 수 있다. 한국의 단임 대통령제는 예외 없이, 잘잘못에 관계 없이, 정권 말기에는 레임덕에 빠진다. 또 행정부와 의회 사이의 갈등·대립이나 따로 노는 상황이 해소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대통령제를 시간의 흐름에 따른 한국 권력지형의 변화에서 살펴볼 수도 있다. 1987년 헌법 개정 이후 민주화의 진전으로 과거에 비해 ‘국가의 정책 추진’ 기능과 ‘법질서의 엄격하고 공정한 적용’ 기능이 크게 약해졌다. 국회에 전보다 더 권력이 집중됐지만 국회는 권능에 걸맞은 의사결정을 할 준비를 덜 갖춘 상태다. 노동단체가 정치권에 대해 행사하는 권력이 강해졌다. 시민단체의 목소리가 더 반영됐지만, 그들 또한 문제 인식과 참여를 성숙시키기보다는 과거의 성향이나 목표를 답습해 관철하는 데 주력한다. 또 의식 수준이 높아진 국민은 전보다 국가와 정부의 기능에 대해 덜 신뢰하는 경향이 있다.

조윤제 카이스트 금융전문대학원 초빙 교수는 “한국의 국가권력은 지난 20년 간 대통령과 행정부에서 국회·검찰·법원 등으로 크게 분산된 반면, 재벌·노조·시민단체 등의 사적 권력은 오히려 집중되고 강화됐다”고 분석했다.

2009년 써낸 책 [한국의 권력구조와 경제정책]에서다. 노무현 정부 때 대통령비서실 경제보좌관과 주영대사로 활동한 조 교수는 “분산된 국가 권력이 이러한 사적 권력에 포획되어 국가 기능 자체가 위약해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1997년의 외환위기는 국내외 경제 환경이 급속히 변하고 있었는데도 이에 대해 적시에 정책적·제도적 대응을 할 수 있는 국가의 기능이 얼마나 취약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고 주장했다.
 한국에서 의원내각제는 분열·혼란의 제도로 각인
이처럼 한계에 봉착한 한국 대통령제의 대안은 무엇인가. 지난 대통령 선거 때 대안으로 의원내각제가 논의되면서 많은 관심을 받았다. 대통령제에 비해 변화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다는 점 외에 의원내각제의 여러 가지 장점이 거론됐다. 의원내각제에서는 대통령제에서보다 정권 교체시 훨씬 더 준비된 정부가 들어선다. 새 정부는 야당 시절에 예비 내각을 구성해 장차 집권했을 때 국정을 운영해나갈 인물을 제시하고, 예비 내각은 각 행정 분야에 대해 집권 내각과 계속 토론과 논쟁을 계속함으로써 정책 역량을 비축한다.

의원내각제는 행정부와 국회의 관계에서 정책 입안과 추진의 효율성이 대통령제보다 훨씬 높다. 의원내각제에서는 정당의 주요 멤버가 각 부처의 요직과 행정을 장악하고 정책 방향을 정한다. 새로운 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국회 동의 과정이 더 원활한 것이, 다수당이 내각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대통령제가 여소야대 정국이 되면 교착상태가 되는 데 비해, 의원내각제에 서는 여소야대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다. 여야 간 의석 차이가 일정 정도 이상이 되면 집권 여당은 모든 개혁안을 신속하게 처리할 수 있다. 그래서 다수당의 당수인 총리는 오히려 대통령보다 훨씬 더 막강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

그러나 의원내각제는 한국에서 태생적인 한계에 발목이 잡혀 있다. 우선 4·19 혁명에 따른 개헌으로 도입된 의원내각제가 실패하고 만 것이다. 이 실패는 한국 정치에 의원내각제를 분열과 갈등·혼란의 제도로 깊게 각인하게 했다. 정당 기반이 없고 양당정치가 자리잡지 않은 한국의 정치환경을 고려할 때 아직도 의원내각제가 제대로 시행될지 의문이라고 보는 사람이 많다. 또 그동안 의원내각제는 국가 시스템 개혁이라기보다는 권력을 나눠 갖는다는 정략적인 측면에서 주로 논의됐다. 그래서 의원내각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부 백안시되고, 그 결과 온전히 전달되지 않는다.
 문제를 해결하는 권력구조를 논의해야
현재 대통령제를 유지하면서 대통령제의 한계를 보완하는 방법이 있다. 첫째로 5년 단임제를 예컨대 4년 중임제로 바꾸는 대안이 있다. 5년 단임제로는 장기적 관점에서 정책을 계획하고 추진하기 어렵다. 정책을 입안하고 실제 추진되기까지 시간이 대개 3년 가까이 걸린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렇게 판단할 수 있다. 둘째, 대통령 임기를 4년 중임제로 하고 대선을 국회의원 선거 주기와 맞추는 방안이 있다. 최근 주미대사로 내정된 조윤제 교수는 “이 경우 대통령과 여당이 함께 국정 운영이 심판을 받는다는 측면에서 정국의 안정에 기여하고 국정의 효율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대통령이 교체되든지 재임에 성공하든지 여당이 다수당이 될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조 교수는 이 밖에 단점이 드러난 인사청문회 제도 개선을 통한 대통령의 인사 자율권 강화, 국회의원들을 정부의 장관이나 차관에 다수 기용함으로써 정당과 대통령, 행정부의 협력·연계 강화, 일정한 범위의 정책은 국회를 통과하지 않고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쳐 대통령령으로 시행할 수 있도록 입법에 관한 원칙과 절차의 재검토 등을 제안했다.

현재 국회 개헌특위는 내년 6월을 목표로 권력구조 개편에 초점을 맞춘 헌법 개정을 논의하고 있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의 당론은 4년 중임 대통령제다. 김종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이와 달리 ‘일원적 분권형 대통령제’를 거쳐 의원내각제로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원적 분권형 대통령제는 총리를 국회가 추천하고 임기 2년인 총리가 국무위원을 제청함으로써 책임 총리로 직무를 수행하는 방식이다. 반면 이상돈 국민의당 의원은 권력구조에 대한 문제 인식과는 별개로 개헌을 하기에는 아직 여러 여건들이 무르익지 않았다는 의견이다. 그는 또 “87년 헌법이 시대적 요구를 모두 받아냈다”고 주장한다. 그는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가 헌법에 의해 해소됐다는 근거를 댄다.

정치권의 개헌을 통한 권력구조 개편 논의는 권력구조만 논의한다는 한계가 보인다. 권력구조 논의는 문제를 해결하는 정치를 목적으로 두고 이뤄져야 한다. 이런 점에서 강경식 전 부총리의 다음 생각은 뒤늦게나마 널리 공유해야 한다. “레임덕 없는 정치 만들기가 정치개혁의 제1 과제가 되어야 한다. 일하는 정치, 문제를 해결하는 정치, 즉 국회가 제 역할을 할 수 있게 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가 정치개혁의 핵심 과제가 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박스기사] 감사원 정책감사가 창의적 행정 저해 - 전문성 없고 정치에 휘둘려 … 헌법에 규정돼 있지도 않은 권한
일하는 국가 시스템을 만들기 위한 권력구조 개편과 권한 조정의 대상 중 하나가 감사원이다. 감사원이 정책감사에서 손을 떼고 본연의 업무인 회계검사와 감찰만 하도록 해야 한다. 이 주장의 근거는 감사원의 권한과 역량 및 정치적 경향, 그리고 정책감사의 부작용으로 나뉜다.

헌법은 감사원에 정책감사의 권한을 부여하지 않았다. 헌법 제97조는 감사원에 ‘국가의 세입·세출의 결산, 국가 및 법률이 정한 단체의 회계검사와 행정기관 및 공무원의 직무에 관한 감찰’ 권한만 주었다. 김민호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지난 4월 ‘감사원의 정책감사 유감’이란 제목의 언론매체 기고에서 “헌법과 법률 어디에도 감사원에 정책의 타당성과 적절성을 판단하라고 권한을 부여한 적이 없다”고 설명했다. 또 감사원은 정책을 판단할 전문성이 없다. 더구나 대통령의 권력에 따라 정치감사를 할 위험이 있다. 특히 정책 감사는 공무원이 창의적이고 적극적인 행정에 나서지 않고 타성에 안주하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외환위기에 대한 감사원의 특별감사도 그런 사례다. 전문성이 없이 마녀사냥과 희생양 만들기라는 정치 바람에 동원된 특별감사였고, 공직사회를 경직되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감사원이 1998년 4월에 발표한 외환위기 특별감사 결과에 대해 “환란(換亂)에 대한 감사원의 특별감사가 ‘감사’를 받아야 할 판”이라고 시작하는 기사로 비판한 바 있다.

전문성이 없는 감사원이 성과를 올리려다 과거 지적을 번복하는 웃지 못할 사례도 발생한다. 다음은 한 기관의 감사에서 벌어진 해프닝이다. 특정업무분야에 대한 2년 전 감사에서 감사원은 A정책수단을 활용한 것에 대해 향후에는 B정책수단을 사용하라고 지적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B정책수단보다 A정책수단이 더 효율적임에도 B를 사용했음을 지적하겠다고 감사관이 말했다. 지적 사항은 결국 철회되었지만, 해당 업무 책임자는 “그 무렵부터는 감사원 정책감사의 정당성을 별로 인정하지 않게 됐다”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감사원의 정책감사에 대한 문제의식이 별로 없는 듯하다. 문 대통령의 공약은 감사원의 회계검사 기능과 직무감찰 기능을 분리해 회계검사 기능을 국회로 보내겠다는 것이었다. 정책감사에 대해서는 거론하지 않았다. 회계검사 기능 국회 이관 공약도 미뤄졌다. 지난 7월 국정기획자문위원회가 발표한 ‘100대 국정과제’ 중 감사원 관련 내용은 독립성과 투명성 강화만 거론됐고 기능분리 공약은 빠졌다. 감사원 관련 국정 과제의 가장 중점 사항은 독립성 강화를 위해 대통령에 대한 수시보고를 개선하고 감사위원회의 의결내용을 공개해 투명성을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이 밖에 성과감사 매년 20%씩 확대 실시, 공직사회 적극행정 지원 강화 시스템 구축, 공공부문 불공정거래 감사 강화 시스템 구축 등이 과제로 꼽혔다.

문재인 대통령은 오히려 감사원의 정책감사 기능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지난 6월 4대강 사업에 대한 정책감사를 감사원에 지시했다. 4대강 사업에 대해 감사원이 이전 정부에서 내놓은 정책감사 결과들과 이번 정책감사의 결과가 어떻게 다를지 주목된다.

감사원은 헌법상 본연의 업무인 회계검사에 집중해야 한다. 김민호 교수가 주장한 대로, 감사원의 어설픈 정책감사 때문에 행정부처와 공공기관이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는 후진적 구습이 하루빨리 청산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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